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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회


제 3 장

3


다음날 저녁.

리진오는 김기룡의 도면에 대한 현장협의회시간을 기다리며 팔굽을 엇바꾸어 그러안고 방금 수채화로 그려놓은듯 한 연한 감빛저녁하늘을 내다보고있었다. 오늘도 하루종일 부에서 있었던 회의광경이 무시로 눈앞에 떠오르군 하여 머리를 산란하게 휘저어놓았고 마음을 괴롭히였다. 그러나 리진오는 이를 사려물고 흔연히 아침참모회의에서 사업을 포치하였고 종합지령실에서, 현장에서 생산을 지휘하였다.

오히려 여느날과 달라진것은 기사장을 대하는 주위사람들의 태도였다. 여느날에는 결재를 받거나 사업을 토론하기 위해서 온 하루 그에게 사람들이 감겨돌군 하였는데 오늘은 그런 사람들이 적었고 또 불가피하게 그를 만나야 했던 사람들은 모두 송구한 태도를 짓고 용건들을 이야기하였다.

박철산당비서가 작업복바람으로 현장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창밖에 내다보였다. 그러려니 해서 그런지 활기가 없고 침울한 얼굴이였다.

리진오는 아침에 만난 당비서였는데 오래동안 보지 못한듯 한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 길로 현관에 내려가 기다리다가 가슴깊이에 고인 이야기를 하고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허지만 생산을 추켜세우기 위한 이렇다할 대책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그는 비판받은 하소연이나 하려고 찾아가는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여서 단념해버렸다.

하루일을 끝낸 로동자들이 정문이 메게 흘러나간다. 아침에 어덴가 다른 군에 후방물자를 접수하러 갔다던 화물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정문으로 들어서자 리진오는 로동일이 끝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에서 3일이란 말미를 준 《최후통첩》기일에서 귀중한 하루가 다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나의 로동일이 끝나자면 아직 멀었지. 그리고 게다가 이틀이 더 남아있고… 이틀, 그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할수 있는 시간과 분들이 있는가.)

리진오는 기룡의 로개조설계가 돌파구를 열어주리라는 기대를 걸며 도면을 둘둘 말고 협의회에 갈 차비를 했다.

전화종소리가 울리여 송수화기를 든 그는 다른 손으로 책상을 거두었다.

《여보세요.… 계셨군요.》

안해한테서 온 전화였다.

《왜 그러우?》

보통일로는 남편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지 않던 선희였기에 그렇게 물었다.

《오늘도 늦겠어요?》

전화를 걸만 한 일이 아닌 너무나 평범한 물음이였지만 리진오는 그 평범한 말속에서 평범치 않은 안해의 심정을 느끼였다. 어제밤에 집에 돌아가 부에서 월사업총화가 있었다고 말했을뿐이니까 그렇게 알고 출근한 안해는 공장에서 돌아가는 소문을 듣고 놀라서 전화를 하였을것이였다.

리진오는 안해가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고 평범하게 묻는것이 고마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일찍 들어가겠소. 저녁도 집에 가서 먹겠소.》

그가 주강직장의 전기로현장에 갔을 때 설비부직장장이 협의회 모임장소인 1호로 휴계실에서 급히 달려나왔다.

《다들 모였습니까?》

리진오가 물었다.

《허참, 신랑쟁이가 있어야 잔치를 하지요.》

좀전까지 있던 김기룡이가 보이지 않는다는것이다.

《원, 쓸개빠진 사람같으니. 야 영진아, 이리 와. 너 교대장 못 봤니?》

《못 봤는데요.》

이렇게 흔연히 대답한 영진이는 부직장장이 급히 저쪽으로 달려가자 삼촌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체, 어디 가서 찾겠다구.》

전기로공들의 흰 작업복을 입은데다가 오랜 전기로공들의 동작을 닮느라고 한쪽 허리에 손을 짚은 영진이는 제법 어른티가 난다.

《넌 어데 갔는지 아는 모양이구나.》

《내가 왜 몰라요.》

영진이는 삼촌에게 《모르는체 해야 해요.》하고 재삼 다짐을 받고 실토했다.

《사랑문제때문에 갔어요.》

하기는 《사랑문제》라고 할만 하였다.

김기룡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와서 일이 벌어졌다. 아들이 제대되여 공장에 배치되자부터 빨리 장가를 들라고 성화를 시키던 그의 어머니는 강봉학직장장을 찾아와서 며느리를 맞게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기쁜 소식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는 마을에서 마음에 드는 혼처가 나서자 아들을 데리고가서 선을 보이자고 어제그제 합숙에 찾아왔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입에서 어떻게 윤색되여 소문이 퍼졌는지 은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되였다는것이다.

《그런 소리 듣고 우리 교대장동지가 어떻게 가만있을수 있겠어요?》

리진오는 심각한 얼굴로 동의를 구하는 조카의 표정이 우스워 오늘 처음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김기룡을 찾아헤매던 부직장장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왔다.

《자, 이거 어떡허면 좋습니까. 방금 있던 사람인데 홍길동이같이 사라졌구만요.》

본인이 없는데서 기사들의 의견을 듣는것도 나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든 리진오는 모임장소인 휴계실로 갔다.

협의회는 처음부터 긴장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다. 젊은 두 기사가 김기룡의 도면을 지지해서 토론한 후 방안에는 침묵이 계속되였다.

주태섭부기사장은 눈동자가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초점없이 내다보며 기계적으로 안경알을 닦고있었다. 어찌보면 론의되고있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있는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나를 왜 여기다 데려다놓고 괴롭히는가고 항의하는것 같기도 했다. 증산전투의 방도문제를 가지고 리진오와 론쟁을 한 후부터 모든 일에 자기 견해를 말하기 꺼려하거나 말하는 경우도 모호한 말을 하기가 일쑤인 부기사장이였다.

리진오는 속에서 불이 나서 부기사장동지 생각은 어떤가고 물으려고 한것인데 그 말대신에 《기술과장동무!》하는 말이 튀여나갔다.

《과장동무 보기엔 어떨것 같습니까?》

몸이 비대한 기술과장은 공연히 자리를 고쳐앉으며 그 몸에 어울리지 않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퍽 전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지만 제 보기에는 아직도 도입시험을 하기에는 이른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을 도입하면 로의 수명이 연장되고 자재를 절약하며 쇠물생산을 늘이는데 기여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방법에 대해서 전혀 파악이 없습니다. 만약에 천정에서 랭각수가 새나온다든가 혹은 모종의 원인에 의해서 랭각수의 공급이 중단되는 경우에는 로속에서 무서운 폭발이 일어날수 있으며 또한…》

기술과장은 그 위험성을 한참 늘어놓고나서 김기룡의 설계에는 이런 위험성을 방지할수 있는 담보가 약하다는것을 론거를 들어가며 이야기하였다.

기술과장이 앉은 후 기사장의 눈길독촉을 받고 야금실장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저도 과장동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한 약점만 극복하면 능히 생산에 도입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대답이였다.

리진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장의 랭담한 얼굴을 멍히 쳐다보다가 그가 의자에 앉으려고 허리를 구부리자 《그게 다요?》하고 물었다.

《예.》

《어데를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전혀 없단 말이요?》

《이렇다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김기룡이 이런 랭담한 압력에 지지눌리여 연구사업을 빨리 진척시킬수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 리진오는 눈에서 불이 났다. 김기룡이 은하때문에 이 자리에 없는것이 아니라 필경 랭담한 이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견딜수 없어서 피했는지도 모른다.

《실장동무, 동문 도대체 우리 공장 사람이요 설계심사소 심의원이요? 동무 심장은 어떻게 되여 그렇게 차겁소?》

리진오는 그이상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후 한두 기사들이 발언하였으나 창조자에게 방조가 될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미궁에 몰아넣는듯 한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든 그는 회의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하고 행여나 해서 펼쳐놓았으나 종내 아무것도 적지 못한 수첩을 덮어버리고 회의를 결속하였다.

《야금실동무들은 이 시각부터 주강직장에 얼씬도 하지 마시오. 잘못 어슬렁거리다가는 김기룡동무를 돕고있는 전기로공들에게 경을 치겠소. 부직장장동무, 동무네는 빨리 시험생산을 진행할 준비를 갖추어야겠소. 수표는 내가 하겠소. 김기룡동무가 나타나면 나에게 보내시오. 도면에 대한 의견을 개별적으로 주겠소.》

그가 밖에 나가려고 할 때 모임도중에는 한마디도 없던 주태섭부기사장이 따라 일어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쁜가요?》

《아니요.》

《그럼 여기서 좀…》

쇠남비를 나르는 기중기가 땡땡 경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담배를 꺼낸 주태섭부기사장은 그것을 피울 대신 담배가치에 그 무슨 의의가 있는것처럼 한참 내려다보다가 《당비서동지가 상급당조직의 전화를 받은 이야기를 들었습니까?》하고 이야기를 건네였다.

《상급당에서요?》

리진오는 놀라 나직이 부르짖었다.

주태섭부기사장은 주무르던 담배가치를 도로 담배갑안에 넣고 안경을 벗었다. 례의 그 낡은 비로도를 꺼낸 부기사장은 안경알을 닦기 시작하였는데 로기사의 손이 고르롭지 못하게 운동하고있었다.

리진오는 참지 못하고 다우쳐물었다.

《무슨 전화가 왔습니까?》

《지난달계획을 미달한데 대한 책임추궁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언제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주태섭부기사장은 까맣게 된 기사장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 외면하고 성냥을 켰다.

《그래서 당비서동지는 사람들을 계획수행에로 불러일으키지 못한데 대해서 자기비판을 하였다고 하더구만요.》

《왜 당비서동지한테 책임을 묻는단 말이요? 나에게 묻지 않구서.》

리진오는 혼자소리같이 중얼거렸다.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어떻게라니요?》

부기사장은 흐릿한 눈에 의혹을 담고 기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낮에 평양에서 내려온 국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사장이 더는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을거라고 믿었던것이다.

《왜 말씀이 없습니까?》하고 리진오는 짜증을 내며 물었다.

《부기사장동진 어떻게 하면 좋을것 같습니까?》

《기사장동무, 고집하지 마시오. 생활이란 때때로 수학의 공리까지도 부정합니다. 유클리드기하학이 비유클리드기하학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격파된지 벌써 언제입니까. 그러나 유클리드기하학은 실용적가치가 있기때문에 지금 우리 중학교들에서는 유클리드가 〈기하학원본〉에 쓴 공리와 정리들을 그대로 배워주고있습니다.》

리진오는 그의 진부한 《생활률조론》이 듣기 싫어서 《당비서동진 아무말도 없었습니까?》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언제 말입니까?》

《부의 통보를 받은 후 말입니다.》

《당비서동지가 무슨 말을 한단 말입니까?》하고 주태섭부기사장이 반문했다.

《생산정상화문제도 당에서 요구하는것인데 어떻게 당비서동지가 그것을 하라 말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당비서동지는 부의 통보를 받은 후 참모부일군들에게 생산을 추세울 대책을 세우라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할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결심은 오직 기사장동무만이 내릴수 있습니다.》

《부기사장동진 정말 당비서동지가 돌격작업을 조직하라는 부의 요구에 동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찮으면 왜 우리에게 특별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요구를 제기하였겠습니까?》

리진오는 갑자기 오한이 나는듯이 가슴이 떨리였다. 그의 말이 사실일수도 있는것이다.

(절대 그럴수 없어.) 하고 리진오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럴수 없다니까!)

그는 자기의 당황하고있는 몰골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다가 말했다.

《속단하지 마십시오! 그릴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건 당비서동지에 대한 모욕입니다.》

《내 속단으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주태섭부기사장은 안경을 코허리에 걸고 손을 깍지껴서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당비서동지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다른 동무들의 의견을 들어보십시오.》

리진오는 불현듯 어제 판매과에서 뜨락또르를 접수하러 온 사람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알아보나마나 영웅주의라고 하겠지요. 공명주의자라구 하는 사람도 있을거구.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나는 이미 각오하고있었습니다.》

《모두는 아닙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나는 내 결심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부기사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웨침은 신념에서 나오는 선언이였는지 반발에서 나오는 몸부림인지 그자신도 분간할수 없었다.

휴계실에서 나온 리진오는 당위원회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후 그는 만약에 당비서가 부기사장이 말하던 그 립장에 서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걸음이 떠지고말았다.

(아니, 그럴수 없어. 당비서동지만은 그릴수 없다니까!)

그는 이미 당위원회로가 아니라 어딘가 발 나가는대로 걸으며 속으로 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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