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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회


제 2 장

5


하루일을 끝내고 직장밖에 나선 은하는 합숙에 가서 새로 지은 달린옷을 입고올가 하고 잠시 멎어섰다. 김기룡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19시는 어두울 때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문화회관으로 떠났다.

구내도로에는 분주하게 달리던 화물자동차도, 딸딸딸 굴러다니며 자재를 나르던 지게차도 보이지 않고 직장들의 기대들도 멎어 공장구내에는 잠시 고요가 깃들었다. 차들이 뛰지 않는 시간에 출동한 물뿌림차가 먼지오른 도로를 씻어내며 지나가고있었다. 장난꾸러기운전사가 경적을 울리지 않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처녀들의 뒤를 바싹 따라가며 물을 뿌려서 처녀들이 아우성치며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물뿌림차는 저녁해빛을 받아 공간에 무지개를 선명히 그려놓고있었다.

은하가 큰길에 나서자 노래를 잘 불러 그러는지, 놀랄만큼 몸매가 날씬해서 그러는지 숱한 청년들이 돌아다보며 지나갔다.

요즈음 처녀들속에서는 무릎에 닿을가말가 하는 치마가 류행이지만 은하는 그 류행에 역행해서 아래폭이 넓고 긴 바둑무늬가 은근한 치마를 입고있었다. 언젠가 친한 동무가 왜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다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녀자는 시대에 뒤떨어진게 아니라 머지않아 긴 치마가 류행이 될테니 오히려 시대에 선행한 차림이라고, 류행을 따르는것은 주견이 없는 표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화회관에 간 은하는 한시간가량 《아, 아-》, 《어, 어-》하며 발성훈련을 하는것처럼 하다가 19시가 가까와오자 슬그머니 회관을 빠져나왔다. 관통연습이 20시부터 시작된다니까 그사이면 기룡이를 만날수 있을것이였다.

기룡이와 약속한 대동강유보도 외등아래에는 낚시군 몇이 쪼그리고앉아있을뿐 한산하였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고통스럽게 앉아있을가?)

조용히 흐르는 대동강물우에 흔들흔들 떠있던 달이 산산이 부서지고 미풍에 버들잎이 뱅글뱅글 돌며 떨어지고있었다.

은하는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분전 19시이다. 19시에 오겠다던 김기룡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응당 먼저 와있을줄 알았는데…

시계를 잘못 보지 않았는가 해서 외등아래로 바투 다가서서 다시 보았다. 9분전이다. 시계를 귀에 대보니 열성스럽게 가고있었다. 공연히 일찍 와서 기다리고있다고 후회하였다.

영진이가 쪽지편지를 들고와서 기룡이가 휴계실의 전화기앞에서 기다린다고 빨리 전화를 하라고 했었다. 전에 없었던 일이였다.

《중요한 일인가봐요.》하고 영진이는 자기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것을 보이려는듯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교대장동지는 연구사업때문에 짬이 없어요. 빨리 전화걸라요.》

은하는 자기 직장사무실에서 전화를 걸기 싫어 동무가 일하는 공구창고에 가서 송수화기를 들었다. 김기룡은 만날 시간이 없겠는가고 물었다. 그때 은하는 회관에 가서 관통연습을 해야 한다고 난색을 보였다. 이런 때 헐한 대답을 하지 않는것이 처녀가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럼 연습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소.》

기룡이는 이쪽에서 말소리를 정확히 듣지 못한줄 알고 다시금 강조하였다.

《기다리겠단 말이요.》

《몇시에 끝날줄 알구 기다려요?》

《하여간 오늘중으로야 끝날게 아니요?》

그래서 은하는 19시에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장소는 기룡이가 정하였는데 분명 유보도의 두번째와 세번째 외등사이라고 했다.

《19시요!》

김기룡은 흥분해서 다시한번 강조했다. 은하는 그 목소리에서 자기가 바란다면 그는 래일 새벽까지라도 이 대동강의 한산한 강가에서 기다리리라는 심정을 읽었다.

(무엇때문에 불렀을가?)

은하는 공장쪽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였다. 락엽 굴러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기다리기에 지쳐버린 그 녀자는 무거운 다리를 천천히 옮겨놓았다.

강물에 뜬 달이 흔들거리며 따라왔다.

무료히 걷던 은하는 불현듯 그럴듯 한 생각이 떠올라 유보도와 잔디밭사이 경계석우에 올라서서 교예사처럼 걷기 시작하였다. 저 끝까지 가기 전에 떨어지지 않으면 기룡이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며 긴장해서 한걸음한걸음 옮겨놓았다. 끝까지 용케 떨어지지 않았지만 기룡은 나타나지 않았다.

19시 5분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김기룡을 꾸짖고 그를 경멸해야 하겠는데 그런 생각은커녕 오히려 그가 기다려지고 그리워지는것이였다.

어째서 만나자고 했을가? 영진이를 구슬려 물어본데 의하면 그 무슨 기능공양성이 어쩌구 하는데 그런 문제같으면 직장에 찾아와서도 이야기할수 있을것이다. 은하의 예감은 사람의 한생에서 단 한번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를 할것만 같았다.

아마도 다른 일을 그렇게 기다렸으면 지쳐서 단념해버린지 오랬을것이다. 속을 태우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리면서도 바로 그속에 하루의 값있는 생활이 있는것 같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속에 새로운 의의가 첨가되여 삶의 긍지를 느끼게 하는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속인가?

(그러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가?)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심장의 박동이 세차게 울려왔다. 아니, 그것은 심장이 뛰는 소리가 아니라 달음박질소리였다. 분명 김기룡이 달려오는 소리였다.

눈물이 나도록 얄미웠다. 왜 이제야 오는가?

은하는 제가 먼저 와서 약속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는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은 일이여서 저편 그늘에 갔다가 다시 외등쪽으로 걸었다.

《은하동무 아니요?》

기룡이 소리쳐 물었지만 그 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하-》

이번에는 자신없는 목소리였다. 한참후에 은하를 확인한 기룡이는 기뻐서 달려오며 소리쳤다.

《온지 오랬소?》

《아니, 지금 오는 길이예요.》

은하는 랭담하려고 애쓰며 돌란간에 기대였다.

《그 말썽많은 로의 개조문제때문에 야금실에 갔다가 늦었다니까.》

김기룡은 가쁜숨을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새달에 들어와서도 우리 주강직장이 여전히 소재를 선행시켜주지 못해서 그냥 계획을 미달하고있단 말이요. 우리 동무들은 모두 전기로를 개조하면 쇠물량을 훨씬 높일수 있을거라고 같은 의견들인데 글쎄 야금실장동무는 위험천만한 일이라구 떨고있잖소.》

《…》

한참 떠들며 불밝은 외등아래에까지 온 김기룡은 은하의 안색이 달라서 이야기를 그치였다. 은하는 그 전기론지 뭔지 하는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라고 하는듯이 나무가지에서 잎사귀를 뜯어서 강물에 던지였다. 그리고 그 잎사귀가 떠내려가는것을 보느라고 한걸음한걸음 그한테서 멀어져갔다.

김기룡은 그제야 이 장소에서 하등의 의의도 없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늘어놓은것을 후회하였다.

물에 뜬 잎사귀는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있었다. 잎사귀가 그리는 곡선을 바라보며 이마에 흩어진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올리고있는 은하의 자태는 황홀하게 아름다왔고 그의 움직임은 세련된 무용수의 동작처럼 부드럽고 우아하였다. 그는 이런 매력때문에 이 처녀를 사랑하게 되였는지, 이 처녀를 사랑하기때문에 처녀의 자태가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것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주위는 어두워도 처녀는 마치 달빛을 독차지해서 반사하듯이 모든것이 빛나고있었다. 장난기가 숨어있는듯 한 반짝이는 눈이며 봉선화꽃잎처럼 얘리얘리하면서도 도톰한 입술이며 어깨에 소복이 드리운 머리칼이며 아무리 보아야 애티를 벗지 못한 처녀인데 이 처녀곁에 오면 어째서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주접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용기를 내여 말했다.

《전화를 걸어달라구 무례한 요구를 해서 안됐소.》

은하는 그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사죄하자 이 이상 더 성난체 하고싶지 않아서 그를 쳐다보았다. 외등빛에 그늘이 져 그렇게 보이는지, 일에 몰리운 피로때문인지 요 얼마동안에 얼굴이 퍽 상해보이여 은하는 따뜻한 말을 해주고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그런데 딱하게도 이런 경우에 적합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미소를 지어보이는것으로 그것을 대신하였다.

《영진이한테서 대강 알았어요. 기능공양성사업에 앞장서보라는 말이겠지요? 난 성미가 급해서 남을 가르치는 일을 잘 못해요. 그러지 않아도 신입생들에게 차근차근 가르쳐주지 않고 짜증만 낸다고 비판을 받는걸요.》

《그럼 무엇으로 증산전투에 힘을 보탤 작정이요?》

《호호, 일감이 없을라구요?》

《기대공들의 기능전습은 인차 생산에서 효과를 나타내기에 권하는거요.》

《생각해보겠어요.》

그들은 한참 말없이 걸었다. 둘이서 함께 걷는 길에서는 말없는 속에서도 이야기를 주고받을수 있어서 침묵을 지루하게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얼마나 걸었는지, 은하는 느닷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극장문제와 같은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선희기사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 기회를 놓쳐서 분해죽겠어요. 배우선발사업이 앞으로도 계속된다구 하지만 그 앞으로라는게 언제가 되겠는지 누가 알아요?》

《기다려야지 별수 없잖소.》

《아니요. 내가 직접 가보겠어요.》

《평양에?》

《네.》

김기룡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가본다구 안될 일이 될가?》

《국장동지한테서 직접 회답이 없는것으로 보아 아직 절망적이 아닌것으로 생각해요.》

《선발사업이 끝났다면서?》

《독틈에도 용수가 있다던데요 뭐.》

《계통도 다른데 국장동지에게 무슨 수가 있겠소?》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김기룡은 속이 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찾아가서 애들처럼 조를 생각이군.》

《그럼 못쓰나요 뭐?》

《난 동무의 자존심이 그런 눅거리인줄 몰랐댔군.》

《국장동지한테 부탁하는데 거기에 무슨 자존심이 상관있어요?》

김기룡의 말이 불의에 가슴을 찔러서 은하는 방패를 둘러댔는데 그 방패란 고삭아 구멍이 숭숭한것이였다. 그래서 은하는 분해서 신발코로 길가의 잔돌을 툭툭 건드렸다.

강물우에 물고기가 주둥이를 내밀어 여러개의 원을 그려놓았고 집중화물역쪽에서 목이 쉰 기적소리가 꿈결에서처럼 들려왔다.

그의 동의를 얻지 못한 은하는 갑자기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이 들었고 멋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맞은편 하늘에 북극성이 고요히 빛나고있었다.

때아니게 은하는 전날 영화구경을 갔다오다가 김기룡이가 하늘에 무수히 널려있는 별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왜 하필 저별에게만 유독 북극성이란 이름이 붙어있는지 아는가고 묻던 일이 생각났다. 만약에 저 별이 북극에 자리잡고있지 않고, 그래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별이라면 저 별도 역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불리우지 못하고 작은 곰자리의 알파(α)성이라는 귀에 선 학명밖에 가지지 못했을것이라고 했다.

그때 김기룡은 극장에 가려는 자기를 빗대고 그런 말을 한것만 같았다.

은하는 길가에서 버드나무아지를 주어들고 잎사귀를 하나씩 뜯어내며 말했다.

《기룡동문 내가 예술을 하겠다는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세요?》

김기룡은 성냥을 켜느라고 그 소리를 못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난 인간이 설자리는 숙명적인것이 아니기에 전취해야 한다구 생각해요.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삶에 그 무슨 환희가 있겠어요?》

은하는 잎사귀를 다 뜯어낸 버드나무아지로 반달모양을 만들더니 그 회초리를 가볍게 휘둘렀다.

김기룡은 그 회초리의 아츠러운 소리가 멎기를 인내성있게 기다렸다가 물었다.

《동문 예술을 하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있소?》

《없어요.》

은하는 엇서는듯 한 어조로 대답하였지만 사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렬등감으로 하여 인격적인 중압을 느끼였다.

《나는 지난해 회관에 가서 매일밤 동무의 초상을 소묘하군 했을 때 로동자들이 동무의 노래를 듣고 박수를 보내는것을 여러번 목격하였소. 그들은 인사치레로 손벽을 치는것이 아니라 기쁨에 넘치여 손벽을 치군 했소. 부럽더군. 언제 가면 내 그림도 사람들이 저렇게 보아줄가 하구 말이요. 그런데 만약에 동무가 극장무대에 나가서 그러한 박수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극장무대에 나선 의의가 없게 되지 않겠소.》

《내 기량이 념려된다는 말이겠지요?》

《아무렇게나 해석하오. 내가 바라는건 예술을 하는 목적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거요.》

강기슭으로 잔파도가 밀려와 석축란간을 찰싹찰싹 때리였다, 서학산옆으로 떠오른 달이 강물에서 무수히 쪼개져서 반사광을 뿌리고있었다.

《정말 휴가신청을 냈소?》

《그건 왜 따져물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름지기 동무는 우리 공장사람으로서 2천대증산전투가 시작된 후 휴가신청을 낸 첫 사람으로 되였을거요.》

은하는 《첫 사람》이라는 말에 놀라 생각해보았다. 직장에서 요새 휴가를 받은 동무들이 있는가 하고 더듬어보았으나 떠오르는것은 휴가를 받은 동무가 아니라 아직 휴가날자가 남아있는데도 먼저 출근하기 시작한 동무의 얼굴이였다.

은하는 어째선지 갑자기 맥이 진해서 거리로 통하는 둔덕길을 힘겹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앞이 터지더니 불야경을 이룬 거리며 공장이 한눈에 안겨왔다.

불빛찬란한 공장의 야경을 이윽토록 바라보고있는 은하의 눈에는 그 불빛이 극장천정에 매달린 찬란한 무리등빛으로 변해보였다.

《월초부터 공장이 증산계획을 미달하고있다는걸 알기나 하오?》

《알고있어요.》

《후회하지 않게 행동하길 바라오.》

《난 내 행동을 후회해본적이 없어요.》

김기룡이와 헤여진 은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얼마쯤 걷던 은하는 혹시 그가 헤여진 자리에 그냥 서있는지 자기뒤를 따라오는지 가늠해보려고 제 걸음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발자욱소리는 가까와지는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져갔다. 마침내 은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얄궂은 어둠이 어느새 그의 뒤모습을 가리워버리고말았다.

처녀는 자존심은 지켜냈지만 그대신 심장은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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