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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 1 장

5


소재부문 직장들의 설비보수정비사업을 담당한 선희기사는 퇴근시간이 되자 부지런히 공무실로 돌아가고있었다. 빨리 부서에 가서 하루일을 총화짓고 남편을 마중하러 정거장에 나갈 작정이였다. 남편이 출장을 떠난지 오랜 날자가 지난것도 아니지만 마치 처녀시절에 그와 만날것을 약속하고 그 시각을 기다리던 때처럼 공연히 가슴이 설레였다. 선희는 오늘아침 전기로의 작업과정을 살피다가 문득 고철압착기를 개조하면 용해시간을 단축할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쇠물때문에 골을 앓는 남편에게 기쁨을 줄수 있게 된것이다.

쇠물을 녹일 때 전기로에 여러번 먹이던 고철을 단번에 먹일수 있도록 고철압착기를 고쳐볼 생각이였다.

《대관절 어떻게 그런 희한한 생각을 해낼수 있었는가 말이요!》

아마도 남편은 자기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서 이렇게 소리칠것이다.

그것은 선희자신도 딱히 알수 없는 일이였다. 모르면 몰라도 남편이 늘 소재걱정을 하였기에 그러한 기술적구상이 떠오를수 있었을것이다. 그래서 그 녀자는 더욱 기뻤고 그래서 남편이 더더욱 기다려지는것이였다.

《기사동지!》

선희가 갈래길에 다달았을 때 2공무직장에서 일을 끝내고 나오던 은하가 달려왔다.

목이 쑥 빠진데다가 여느 처녀들과는 다르게 머리를 짧게 단장하였고 게다가 살결까지 맑아서 시원해보이는 모습이다.

《오늘 좋은 일 있나부지?》

선희는 자기의 기쁨을 감추고싶지 않아 싱긋 웃었다.

《왜 자꾸 쳐다보니?》

《그저…》

길다란 속눈섭으로 채양을 친듯 한 속에서 그 무엇을 찾는듯이 리지적으로 빛나는 눈이며 방금 다정한 말이 굴러나올듯 한 입매며 지어 왼쪽입귀에 붙어있는 작은 기미까지… 은하는 녀기사의 얼굴이 오늘따라 황홀해보였던것이다.

《아마 기사장동진 기사동지한테 첫눈에 매혹되였을거야.》

선희는 오가는 사람들이 듣지 않았는가 해서 주위에 눈을 주며 나무랐다.

《새빠지게 별소릴 다하는구나.》

《그렇지요?》

《호 …애두.》

《첫눈에 반했지요?》

그 녀자는 자기의 예측이 옳으리라고 믿고 쳐다보는 은하를 재미있게 바라보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회관에 가는 길이니?》

《응.》

은하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요샌 회관에서 뭘하니?》

《내내 그거지요 뭐.》 하고 은하는 시들한 대답을 했다.

《제대군인들과 중학교졸업생들을 환영하는 공연을 준비한다나.》

《넌 또 독창에 출연하겠지? … 새 종목 준비했니?》

《그저 하던거지요 뭐.》

《같은값이면 새 노래를 형상하려무나.》

《그럴 재미가 있어야지요.》

마음이 떠있는 대답이였다.

(극장문제가 꼭 되여야겠는데 …) 하고 선희는 생각했다.

《참, 기사장동지가 오늘 오시지요?》

아마도 은하는 이것을 알아보려고 달려왔을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니?》

《그 얼굴에 씌여있는걸 뭐.》

선희는 처녀시절처럼 소리내여 웃고 시계를 보았다. 부서에 빨리 가야겠는데 은하는 팔에 손을 끼며 늦장을 부린다.

《부럽군요.》

《무엇이 부러와?》

《기사장동지네 부부가.》

《요 새침데기.》 하고 선희는 처녀의 옆구리를 팔로 건드렸다.

《제가 춤추고싶으니까 맏동서보고 춤추란다더니 너와 기룡동문 어떻구?》

《참, 기사동지두.》

잘 웃고 잘 떠들던 은하가 서글프게 대답하였다.

선희는 불현듯 남편이 출장떠날 때 은하가 평양의 극장으로 가버리면 그들은 견우와 직녀처럼 쳐다보기만 하며 살겠는가고 하던 말이 생각나서 물었다.

《너 기룡동무하구 평양가겠다는걸 토론해봤니?》

《아니요.》

《정말?》

《내가 왜 그 동무에게 그런걸 토론해요.》

《애두 참, 그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선 무슨 얘길 하니?》

《사랑이요?》

은하는 쓸쓸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기사동지두 다 아는걸 왜 내가 모르고있을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이자 만나서 무슨 이야길 하는가고 물었지요?》 하고 은하는 가는 한숨을 짓고 말을 이었다.

《그 동문 오래지 않아 우주공간에 제강소를 차려놓고 특수합금강을 생산하게 될것이라느니, 삐까쏘란 사람의 그림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뿐이예요.》

《넌 참, 왜 그 이야기뒤에 숨어있는 심장의 고동소리는 듣지 못하니?》

선희는 마음이 놓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깊은 못은 표면이 조용하단다.》

《깊으면서도 설레이는 못이 더 풍치가 있을거예요.》

선희는 은하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저런 랑만이 있어 처녀시절은 아름다운것이 아닐가.

《은하동지, 빨리 가자요.》 하고 후문쪽에서 어린 처녀들이 합창으로 은하를 불렀다.

《어서 가보렴.》

《까짓거. 늦으면 늦었지 뭐래요.》

(정말 좋은 소식이 와야겠는데…) 하고 선희는 또다시 생각했다.

《그럼 래일 기사동지한테 가겠어요.》

《네가 올새가 있겠니? 내가 가지.》

은하는 방금전에 시름겹게 이야기하던 처녀같지 않게 멜가방을 들고 그네를 띄우며 사라졌다.

저렇게 개방적인 쳐녀와 전기로공으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성격이 조용한 기룡이가 어떻게 그런 사이로 될수 있었는지 선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였다.

(깜찍한것! 내가 아는걸 왜 자기가 모르느냐구?)

그렇게 말하던 은하의 눈에는 서글픔이 비껴있었고 그 어조에는 자존심이 손상당한 처녀의 어설픈 애수가 깃들어있었다.

(좋은 때지!)

삶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될 뜨거운 사랑의 호소를 속을 태우며 기다리면서도 한편 그 말을 하면 어떡허나 하고 두려워지기도 하는 처녀시절, 꿈많은 그 시절은 언제 흘러가버렸던가.

공장구내길 량옆에서 코스모스가 고요히 설레이고 그우 공중에 빨간 점박이잠자리가 조는듯 한자리에 떠있다.

선희는 단조직장에서 들려오는 공기마치의 률동음에 맞추어 빠른 걸음을 옮기면서도 보라빛코스모스를 가볍게 건드리였다.

(첫눈에 매혹되였을거라구?)

선희는 아까 은하가 하던 말을 회상하며 혼자 웃었다.

선희가 리진오를 알게 된것은 《매혹》이라는 말과는 인연이 없던 시절, 저 코스모스에 내려앉은 잠자리를 잡으려고 애쓰다가 학교에 늦어지던 동요시절이였다. 그것은 봉선화에 백반을 짓쪼아 싸매고 잠결에 그것이 뽑아질가봐 어머니의 큰 장갑을 끼고자던 그 시절, 소학교에 입학한 해 가을이였다.

어느날 선희는 학교에서 돌아와 실컷 놀다가 숙제를 하려고 필갑을 꺼냈다. 그런데 그 필갑은 뚜껑이 열리고 그속에 있던 새 《꿀벌》연필이 없어졌다. 꽁다리를 쥐고 글을 쓰면서도 새것이라고 아까와 한번도 쓰지 않은 연필이였다.

(이 일을 어쩌나?)

한참 생각을 더듬던 선희는 공부가 끝난 후 가방을 멘채로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렸던 일이 떠올랐다. 모름지기 연필이 그때 모래판에 떨어졌을것이다.

선희는 그달음으로 학교에 달려갔다. 텅 빈 운동장에는 짙은 그늘이 들어앉아있었다.

철봉대아래에는 연필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모래를 파헤치느라고 그의 머리칼에는 먼지가 뽀얗게 올랐다. 그렇지만 연필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애가 가지고갔을가?)

선희는 속이 상해서 발을 구르고싶었다.

(눈에 띄우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겠어!)

선희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모래를 파헤치고있을 때였다. 서학산에서 아래주머니가 불룩하게 밤을 주어가지고 오던 소년이 앞에 나타났다.

《너 뭘하고있니? 》

사내애는 생밤을 오그극오그극 깨물며 물었다.

선희는 남의 일에 무슨 참견이냐고 대꾸하지 않고 돌아서버렸다.

《대체 뭘 찾게 두더지같이 모랠 파?》

사내애는 선희의 머리에 먼지가 앉은것을 바라보며 웃어대다가 물었다.

《연필 찾아.》

선희는 머리를 털며 대답했다.

《연필?》

《응, 새로 깎은거야.》

《지우개 달린거?》

《응, 네가 가졌니? 가졌으면 줘!》

선희는 손을 내밀었으나 사내애는 모른다고 잡아떼며 밤알만 깨문다. 선희는 약이 올라서 위협했다.

《빨리 줘. 안주면 도적놈이라구 소리칠테야.》

《뭐, 도적놈?》

소년은 얼굴이 험악해지며 당장 쥐여박을것처럼 손을 들었다.

선희는 그 기상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였다.

《때리지도 않았는데 울긴 왜 울어? 겁쟁이같이. 래일 아침 주번선생님한테 가봐, 내가 그런 연필 얻어서 선생님께 드렸어.》

그러나 선희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정직한 애를 공연히 의심한것이 부끄러워 울음을 그칠수 없었던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밤을 한줌 꺼내서 주었다.

《자, 울지 말구 이거나 까먹어.》

《싫어!》

《싫긴 왜 싫어? 자, 어서 받아.》

사내애손이 어찌나 큰지 한손으로 주는 밤을 두손으로 받아서 가슴에 안아야 했다.

《너두 이담에 남의것 주으면 선생님께 갖다드려야 해.》

사내애는 자기 나이가 몇살 우라는 자격으로 훈시를 하더니 선희의 왼쪽입귀에 붙어있는 기미를 살짝 건드려보고 노래를 부르며 제 갈데로 가버렸다.

그것은 어린시절에 있을수 있는 생활의 한쪼각으로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망각속에 묻혀버릴수 있는 일이였다. 즐거움과 기쁨, 기쁨과 미래로 엮어진 동요시절에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추억의 문이 열릴 때면 기억의 수풀속에서 먼저 떠오르는것은 반짝거리던 밤알이였고 그 밤알을 주며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고 그 소년이 한 말이였다.

소학교 몇학년때인가 작문시간에 선생님이 제가 쓰고싶은 제목으로 작문을 지으라고 했을 때 선희는 그때일이 떠올라 《정직》이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지었었다. 중학교시절에도, 그후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리진오가 한 말은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경종처럼 귀전에 울려와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자기 생활을 돌이켜보게 하였다. 그때는 그의 귀에 들려온 경종이 《정직》이란 범주를 넘어 《량심》의 경종으로 들리군 하였다.

꿈많던 처녀시절 선희는 책상에 턱을 고이고앉아 눈내리는 밖을 내다보며 저 순결한 눈과 《정직》사이에는 그 어떤 신비한 관계가 있지 않을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더듬기도 하였고 2교대 퇴근길에서 공장 보이라굴뚝우에 올라앉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량심이란 누가 보든말든 열심히 길손들의 앞길을 비쳐주는 저 달같은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때면 의례히 진오의 얼굴을 더듬어보려고 애썼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오랜만에 한번씩 길가에서 만나군 하는 의젓한 청년으로 변한 진오의 얼굴이 아니라 반짝거리는 밤알을 한웅큼 집어주던 소년단시절의 그의 얼굴이 보이군 하였다.

선희가 단발머리로 공장에 들어간 해 진오는 먼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평양의 대학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선반공이였던 그 녀자에게 있어서 리진오는 생활의 발자욱을 떼는데 도움을 준 아름다운 추억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렇게 추억속에 간직하고있던 리진오를 다시 본것은 참으로 뜻밖의 환경에서였다. 그것은 어느 봄날 이른아침의 일이였다.

밤교대에서 일한 선희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부직장장네 집에 들리여 무엇인가 전달하라는 작업반장의 지시를 받고 교대시간전에 공장을 나섰다. 부직장장이란 지금 기관직장에서 직장장사업을 하고있는 리진오의 작은형이였다. 리진오는 평양에 가버리고 없었지만 그가 살던 집에 처음으로 가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이상하게 설레였다.

진달래가 철쭉으로 바뀐 서학산에는 엷은 안개가 감기고 길거리에는 연두빛버들잎이 그네를 뛰고있었다.

부직장장네 집 대문앞에 간 선희는 인차 말이 나가지 않아 한참 주저주저 서있다가 얼마후 용기를 내여 주인을 찾았다. 뜨락에서 부직장장의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예, 어서 들어오시오.》

뜨락에 들어선 선희는 부직장장이 수도가의 세면장에서 머리에 비누거품을 허옇게 만들고있어서 머리를 다 감은 다음에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하려고 기다리고있었다.

부직장장은 눈에 비누물이 들어갔는지 눈을 뜨지 못하고 손을 뒤로 뻗치며 소리쳤다.

《영진아, 수건 빨리 …》

선희는 부엌으로 가서 부직장장의 부인에게서 수건을 받아가지고 수도가에 달려갔다. 그런데 수건을 기다리다 못해 얼굴을 들고 쓰린 눈을 가까스로 뜨며 돌아보는것은 부직장장이 아니라 천만뜻밖에 리진오였다.

《어마나!》

어쩌면 그렇게도 목소리가 신통히 같을가? 선희가 얼굴이 빨갛게 되여 돌아서자 부직장장의 부인은 허리를 그러안고 웃어댔다.

리진오는 대학졸업론문을 쓰기 위한 실습을 하려고 어제 밤차에 공장에 내려온것이다.

선희는 잠시후에야 인사를 했는데 진오는 눈이 쓰리여 그랬는지 어망결에 사람을 가려보지 못했는지 돌아서버렸다.

《아이구 참 적은이두, 남이 인사하는데 받지 않구 돌아서버리는 법이 어디 있수.》

형수의 책망소리에 진오는 다시 얼굴을 들며 열적게 웃었다.

《참 아주머니도, 이 꼴로 어떻게 처녀앞에 나서라구 그래요.》


선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실장은 송수화기를 놓으며 기사동무를 찾던중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주간사업총화를 지읍시다.》

선희는 할수없이 눌러앉았다. 실동무들모두가 회의에 참가할 자세를 하고있는데 정거장에 가겠다는 말을 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실장이 주간사업을 총화하는 사이에 그 녀자는 시계를 보며 모임이 몇분안으로만 끝났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차가 도착하기 전에 정거장에 가닿을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주간총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긴급한 도면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시계의 초침은 몇바퀴가 아니라 몇십바퀴 돌아 밖은 아주 어두워져버렸다.

모임이 끝난 후 이제는 서두를 필요도 없고 해서 선희는 천천히 현관에 나섰다.

공장구내에는 교대시간에 잠시 찾아오군 하는 고요가 지나가고 자동차와 지게차가 분주히 오가고있었다. 봄날같이 훈훈한 저녁이였다. 누런 풀잎들이 구내가로등의 푸릿한 빛을 받아 연두빛으로 보였다.

갑자기 뒤에서 지게차가 쫓아와 전조등빛에 자기의 그림자가 선회하는 바람에 다급히 길섶으로 물러섰다. 차는 선희의 옆에 와 멎어섰다.

《동서 아니야?》

운전대를 잡은 동서가 마치 오랜만에 만난것처럼 반갑게 소리쳤다.

《형님은 왜 아직 안들어가셨어요?》

《좀 바쁜 일이 있었어.》

동서는 흰 머리수건을 털며 대답했다.

선희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배치되였을 때도 동서는 지게차를 몰고있었는데 아직도 여전히 저 차를 타고 공장구내를 여기저기 분주히 다닌다. 그때처럼 명랑한 동서는 근심이나 걱정이 전혀 없는것 같이 늘 웃는 빛이다. 그때와 다를것이 있다면 선희가 단발머리선반공이였을 때는 빨간 머리수건을 쓰고있었는데 그것이 인철이를 낳을즈음해서는 파란것으로 변했다가 언제부터인가 흰 수건으로 달라진것이다.

《아까 공무실에 가니까 회의를 하더구만. 저녁짓지 말구 집에 오라구, 나도 이것만 부리고 인차 집에 들어가겠어.》

《왜요? 무슨 일이 있어요?》

그 녀자는 혹시 며느리로서 응당 잊지 말아야 할것을 잊고있지 않는가 하여 긴장해서 물었다.

《큰애가 래일부터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다니까.》

선희는 중학교를 졸업한 조카가 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있었지만 그것과 저녁밥 짓지 말고 큰집에 오라는것사이에 어떤 련관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참, 동서는 아직 잘 모르겠구만. 우리 집에서는 로동을 시작하는 날을 시집, 장가가는 날만큼이나 중히 여긴다우.》

《그래요?!》

선희는 이 리씨문중의 문턱을 넘어선지 여러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로동가정의 가풍도 모르고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인철이 아버지는 밤에 오겠다구 했어.》

《만났어요?》

《전화로 잠간 만났어. 평양에서 막 돌아오는 길인데 곧 회의를 소집해야겠다는걸 보니 급한 일이 제기된것 같더구만.》

동서는 긴 이야기할새가 없다는듯 《꼭 와요.》하는 말을 남기고 급히 창고쪽으로 지게차를 몰았다.

선희는 동서의 머리에서 나붓기는 수건을 한참 바라보다가 집으로 향했다.

달이 떠오르느라고 먼산들의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보였다.

(무슨 과업을 받고 왔을가?)

집에는 남편이 들고갔던 려행가방이 방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자기가 부탁한 스케트도 책도 없는 훌쭉한 가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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