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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제 1 장

2


부장이 무엇때문에 부르는가?

리진오는 어수선한 길차비의 혼잡속에서 이런 생각을 오래 하고있을 겨를이 없었다. 떠나기 전에 벌려놓은 일들도 일단락 아퀴를 지어야 하였고 부에 보고할 문건들도 준비하여야 했다.

저녁녘에야 그는 안해에게 출장간다는걸 알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나서 공무실을 찾으려고 송수화기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전화를 받으면 하던 일을 뒤로 밀어놓고 집으로 달려갈 안해의 모습이 떠올라 송수화기를 도로 놓았다. 안해에게 남편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고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뒤소리를 듣게 하고싶지 않았고 또 안해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싶은 그였다. 출장준비래야 집에 있는 가방에다가 갈아입을 속내의와 세면도구를 넣으면 그만인것이다.

벌려놓은 일들을 대강 마무리한 그는 계획과장에게 부에 제출할 래년도계획초안의 타자를 독촉하고 당비서(당시)방에 갔다.

《이젠 떠나겠습니다.》

그는 걸상들이며 물건들이 질서정연하게 제자리에 놓여있는것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소?》

박철산당비서는 보던 문건을 밀어놓으며 눈을 비볐다. 젊음을 보존하려고 안경을 쓰지 않지만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가부다.

리진오는 흘러가는 세월에 공연히 항거하고있다고 생각하며 권고했다.

《이젠 안경을 껴야겠습니다.》

박철산은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여 서툴게 만져보며 대답했다

《집사람이 사온지 오래다우.》

그는 속으로 당비서의 나이를 꼽아보았다. 자기보다 열다섯 우니까 래년이면 쉰이다.

박철산은 갑자기 생각난듯 피곤이 매달렸던 눈에 유난히 밝은 광채를 띄며 말했다.

《참, 부에 올라가면 한정빈동무를 만나게 될거요. 얼마전부터 관리국 국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구 전화가 왔더라니까.》

한정빈이란 전선에서 박철산과 함께 싸웠고 공장에 돌아와서도 어려운 복구건설시기에 함께 일하던 친구였다.

《그래요?!》

리진오 역시 당비서 못지 않게 반가와서 소리쳤다.

《동무가 기사장사업을 한다구 대단히 기뻐하더군. 이제 만나면 이래저래 곱절 반가와할거요.》

그는 당비서의 《이래저래》라는 말이 련상작용을 불러일으켜 그들과 함께 전선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자기의 큰형이 생각나서 잠시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형이 전선으로 떠나던 그날처럼 하늘에는 노을이 발갛게 불타고있었다.

석양빛이 물든 길건너 아빠트창문들은 눈부시게 반짝이고 정문쪽에서는 2교대자들의 출근을 환영하는 경쾌한 음악이 강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박철산 역시 벗에 대한 추억에 잠겼다가 이윽고 손을 깍지껴서 책상우에 놓으며 말했다.

《글쎄 은하란 애가 정빈동무한테 극장에 넣어달라고 편지를 한것 같소. 그 친구가 걱정을 하더구만.》

박철산과 한정빈이 전쟁시기 같은 중대에서 싸울 때 특무장(당시)으로 있던 전우의 딸이 은하였다.

《은하동무가 노래를 잘 부르기는 하지만 그 수준 가지고 극장에 들어갈수 있을가요?》

《그러기나 말이요.》

박철산은 철없는 딸의 성화를 받는 부모처럼 그 얼굴에 걱정이 비꼈다.

전쟁이 끝난지 벌서 25년세월이 흘렀지만 박철산은 아직도 여전히 특무장을 대신해서 은하남매의 충실한 《아버지》로 남아있었다. 은하의 오빠에게 약혼을 성립시켜주고 결혼상을 차려준것도 박철산이였고 은하의 희망대로 중학교를 졸업한 그를 이 공장에 데려다가 소문난 선반공으로 키운것도 박철산이였던것이다.

박철산은 비스듬히 돌아앉으며 혼자소리같이 외웠다.

《언제나 철이 들겠는지. 원, 시집을 보내야겠는데 그런건 꿈도 꾸지 않구 뚱딴지같은 소리만 한다니까.》

리진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참, 당비서동지두. 자식을 제일 잘 아는것도 부모구 제일 모르는것도 부모라더니 정말 어둡구만요.》

《아니, 그럼 짝이 있단 말이요?》

《은하동무 나이가 벌써 스물다섯이 아닙니까?》

《대체 그게 누구요?》

박철산은 의자를 뜨르륵 끌고나앉으며 물었다.

《저 1호전기로의 교대장을 아시지요?》

《김기룡동무 말이요?》

《그렇습니다. 은하동무가 우리 집사람한테 자주 놀러오는데 눈치가 다릅니다.》

《그래?! … 약속은 했답디까?》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 하여간 괜찮은 동무지요.》

박철산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피여났다.

《암. 괜찮다마다. 그게 덜렁덜렁한것 같아두 청맹관은 아니로군그래. 그러면서도 물어보면 아닌보살하구있었구만. 허참!》

그들은 그 사랑이 열매를 맺기를 바라며 즐겁게 웃었다.

잠시후 리진오가 자기 방에 돌아왔을 때 주태섭부기사장이 뒤묻어 들어섰다.

《왜 아직 이러구있습니까?》

늙은 부기사장은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말했다.

《벌써 18신데 어서 댁에 가서 차비하고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곧 떠나겠습니다. 부탁하실건 없겠습니까?》

리진오는 늙은 부기사장의 도수경너머에 있는 흐릿한 눈이며 탄력이 없는 얼굴이며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저 머리에 서리가 허옇게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아버지의 밥을 들고 공장에 드나들던 소년시절에 리진오가 누구보다도 존경해서 우러러보던 설계기사 주태섭은 건장한 젊은이였었다.

주태섭부기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통일로는 부르지 않았겠는데 …》

《무슨 소식 들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고서야 월말이 가까와오는데 생산을 지휘하는 기사장을 부르겠습니까? 혹시 급한 과제가 떨어진게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법도 한 일이였다.

늙은 부기사장은 현관에까지 따라나와 배웅하며 만약에 그런 경우에는 주저하지 말고 부장에게 걸린 문제들을 이야기해서 도움을 받는것이 좋겠다고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조언을 주었다.

부기사장과 헤여진 리진오는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밖에는 석양빛이 짙어가는 하늘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있는 먼산의 륜곽이 펼쳐지였다.

저녁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는 방금전에 근심어린 얼굴로 바래주던 주태섭부기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엇무엇을 해결받아야 한다고 했더라?)

그는 저도모르게 손가락을 꼽아가며 부기사장이 당부한것을 더듬고있었다. 하기는 주태섭부기사장의 도움을 받아 한다하는 기사로 자라났고 그래서 그의 충고를 듣는데 습관된 리진오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그가 점결제를 쓰지 않는 주조법에 대하여 연구하겠다고 하였을 때 적지 않은 기술자들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때 주태섭부기사장이 앞장에 서서 강한 타격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후 연구사업이 실패할적마다 날아오는 비판의 화살을 부기사장이 방패가 되여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올봄에 완성하여 주강직장에 도입한 그의 새 주조법은 세상에 태여나지 못했을것이다.

(고마운 사람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늘 신세만 지고있어.)

리진오의 집은 아빠트 3층에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인철이는 문까지 열어놓고 어딘가에 놀러 나가고 책상에는 그림책이며 크레용이 무질서하게 널렸다. 숙제는 하지 않고 또 그림만 그린 모양이다.

급히 출장준비를 끝낸 리진오는 송수화기를 들고 그의 안해 선희가 일하는 공무실을 찾았다.

《아니, 지금 떠난다구요? 차빈 어떻게 하구요?》

선희의 목소리에서 지금 막 출장준비를 해주려고 달려올것만 같은 심정을 읽은 그는 서둘러 세면도구며 양말이며 수건 등 가방안에 넣은 명세를 내리꼽았다.

《그러니까 이젠 내 손이 필요없군요.》

선희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지만 그 어조에서는 어딘가 서운해하는 마음이 풍기였다.

《면도솔은 넣었어요?》

《아참, 잊었군. 글쎄 당신이 없으면 언제나 빈구석이 생긴다니까.》

그는 서운해하는 안해를 위안해주고싶어서 부탁할건 없느냐고 물었다.

《깜빡 잊을번 했군요.》

좀전과는 다른 명랑한 목소리였다.

《극장에 당신의 소꿉동무가 있다구 했지요? 공훈배우라는 …》

《있지. 왜 그러우?》

《글쎄 은하가 요새 극장에서 배우들을 뽑는다고 몸이 달아 야단아니예요. 꼭 좀 들려서 알아봐주어요.》

《허허 참, 들린다구 안될 일이 되겠소? 기량만 높으면 어련히 뽑아가지 않으리.》

《은하가 어째서요? 배우들의 목소리도 별것 아니더군요. 게다가 인물도 환하구.》

《하여간 가보긴 하겠소만 …》

《가보기만 하면 뭘해요. 꼭 붙도록 해야지요.》

《그런데 여보, 대관절 은하가 기룡동무와 보통사이가 아닌것 같다면서 왜 평양에 보내자구 나서는거요?》

수화기에서 처녀시절처럼 깔깔 웃어대는 선희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마음껏 웃는걸 보니 공무실에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뭐 그렇다고 제 희망도 버려야 하나요?》

《그럼 견우와 직녀처럼 평양과 공장에 갈라져 살아야겠군.》

《왜 떨어져 살아요? 기룡동무가 평양에 갈수도 있잖아요? 녀잔 뭐 뜨락또르에 따라다니는 도레란가요?》

그는 긴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서 웃어버리고말았다.

《자, 그럼 갔다오겠소.》

《아니, 가만. 저, 인철이 스케트를 하나 사와요.》

《거리 백화점에 없습디까?》

《원참, 나나 당신같이 가정교육에 관심이 없는 집 아이에게 그것이 차례진대요?》

작은 스케트는 이미 다 팔리고 큰것들만 남아있더라는것이다.

《그럼 사와야지. 이젠 부탁 다했소?》

《다예요.》

또다시 수화기에서 안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저 〈전기로통론〉이라고 했던가? 당신이 사지 못해서 애쓰던 책 말이요?》

《그래요. 〈전기로통론〉. 잊지 않고있군요.》

그렇게 말하는 안해의 눈은 깊은 늪의 표면처럼 그윽히 빛날것이다.

그는 길을 떠나기에 앞서 신혼시절에 주고받군 하던 다정한 말을 안해에게 남기고싶었는데 옆집에서 놀던 인철이녀석이 홀랑 나타나는 바람에 《자, 이젠 떠나겠소.》 하는 평범한 말로 그것을 대신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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