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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철학

 

간단한 풍자극 《보충병》의 주인공역을 맡아 수행한것으로부터 희극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세영은 그후 《안해의 일터》, 《사과딸 때》, 《공중무대》, 《재단사》, 《두 선장》, 《안녕하십니까》, 《북은 내가 치겠소》 등 여러편의 경희극적인 영화들에서 주요역을 맡아 수행하면서 희극배우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더 원만히 갖추어나갔다. 이 과정에 그는 세상에 지금까지 이름을 남긴 희극배우들이 가지고있는 웃음의 바탕과는 대비도 안되는 숭고한 철학, 웃음의 철학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내내 그 철학에 충실하였다.

그러면 그가 생활을 통하여 터득한 웃음의 철학은 무엇이였는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희극은 웃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교양하는 사색적인 예술이라고 하시면서 희극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한바탕 웃고나서 그 웃음속에 깔린 사회적문제성을 두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여야 한다고, 단순히 웃음으로만 그치는 희극은 본래의 의미에서 예술이 아니라고 명철하게 가르쳐주시였다.

희극이 웃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교양하는 사색적인 예술이라면 희극배우는 마땅히 자기의 연기형상을 통하여 사람들이 그 형상속에 체현된 깊은 뜻을 음미해보도록 웃음을 창조하여야 한다.

이것이 희극배우연기의 핵인데 김세영은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서야 그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체질화하게 되였다.

억눌리고 짓밟혔던 과거에 대한 쓰라린 체험과 원쑤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 모든 행복과 영광을 안겨준 고마운 제도에 대한 매혹과 옹호는 바로 그 웃음의 원천을 낳았다.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일화가 그것을 잘 말하여주고있다.

김세영은 전쟁시기 어쩔수없이 갈라진 안해가 낳은 제 딸의 얼굴을 모르는채 예순을 넘기였다.

1985년 고향방문단성원으로 남반부에 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중년기에 들어선 딸 민희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인재가 되여줄것을 바라며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민희라고 지으라고 감옥에 찾아온 안해에게 당부했던 바로 그 자식이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주선 녀인이 자기의 딸이라는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내 딸이 분명한가?)

민희의 목걸이에 걸린 브로치에는 김세영이 온넋을 기울여 그리도 사랑하였던 안해 복경이의 사진이 박혀있었다.

결혼식도 못하고 부모들의 축복도 받지 못한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 구차한 생활의 첫걸음을 떼였던 그들이 아니였던가.

안해의 그리운 모습이 세영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안해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딸에 대한 어성버성한 감정이 서로 얽혀도는데 민희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북에 가서 아마 큰사람이 됐을거라구, 아버지가 예술을 무척도 사랑했기때문에 꼭 성공했을거라구 하셨어요. 그리고 후날 아버지를 만나거든 처녀, 총각시절에 만나군 하던 그 세번째 전주대를 상기시키라 하셨습니다.》

김세영은 세번째 전주대란 말에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그것은 안해 복경이와 자기만이 알고있는 비밀이였다.

(네가 내 딸이구나. 네가 이렇게 중년이 되여서야 만나게 되다니…)

뭐라고 형언할수 없는 애모쁜 감정이 김세영의 가슴을 모질게 비틀었다.

딸의 말에 의하면 안해는 전후에 심화병으로 앓으며 매일 남편을 보고싶다고 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는것이였다.

미제침략자들이, 민족의 원쑤들이 강요한 분렬로 인하여 김세영은 본의아니게 안해 복경에게 죄를 진셈이였다.

분렬이 저주로웠고 안해가 불쌍했으며 딸 보기가 죄스러웠다.

《민희야, 이렇게 헤여져 살아서는 안될 우리 집안이 아니냐. 미국놈들이 원쑤다!》

김세영의 목소리는 비분에 떨리였다.

그의 눈앞에는 안해와 처음 만나던 그날로부터 대전감옥으로 가던 길에 도망을 치다가 처남과 헤여지던 광경이 어제일처럼 떠올랐다.

이 순간 그는 비록 자신이 안해와 헤여지고 지금은 딸과도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그때 어버이수령님 계시는 북으로의 길을 선택한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옳았는가를 다시금 절감하였다.

만약 그때 북행길을 하지 않았더라면 원쑤들 손에 잡혀 살아나지도 못했을것이고 만약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조국과 인민앞에, 가깝게는 저세상으로 간 안해와 딸앞에 오늘처럼 떳떳하지 못했을것이다.

얼마나 큰 사랑, 얼마나 큰 믿음을 받아안고 내가 지금 살고있는가 하는 자부가 지난날의 아픔을 매질하며 가슴속에서 솟구쳤다.

이처럼 딸과의 반갑고도 가슴아픈 상봉과 리별이 있은 후 김세영은 불타는 념원을 안고 희극양상의 작품에서 관중들에게 보다 더 유쾌하고 즐거운 웃음을 주었다.

그의 가슴속에 박힌 커다란 아픔이 어떻게 그런 웃음을 불러내는지 아마 사람들은 다는 모를것이다.

김세영이 간직한 웃음의 철학이 어떤것인가를 말해주는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도 있다.

김세영에게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본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김세영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희극배우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배우생활을 하고있는 다른 아버지들은 혁명영화나 정극적인 무게있는 영화의 주인공, 주요배우가 되여 존경을 받으며 사는데 아버지에게는 《자전거반장》과 같은 천박한 별명이 붙어있었던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도 김세영의 자식들을 보고는 웃어대군 하여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엄한 가풍을 세운 무뚝뚝한 아버지여서 세영의 자식들은 어려워 한마디의 불만도 표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김세영의 가정에서는 뜻하지 않게 불상사가 생기였다. 김세영의 둘째아들이 그만 잘못되였던것이다.

그날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세영은 그만 심장이 멎어버리는것 같았다.

그는 터지는듯 한 가슴을 부여안고 온밤 잠들지 못하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껴울었다. 하지만 날이 밝자 그는 밥 한술 입에 대지도 않고 아들의 시신을 그대로 둔채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당시 주요과제로 제기되였던 예술영화의 속편들에 대한 촬영을 잠시도 중단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자각이 그를 일으켜세웠던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많은 군중과 기재들이 동원되여 집중적으로 촬영하게 되여있었으므로 주역을 맡은 자기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김세영은 안해와 자식들이 매달려 사정했으나 여느때와 같이 촬영장에 나타나 아주 태연자약한 자세로 연기를 하면서 그날 촬영을 성과적으로 끝내였다.

촬영이 끝나자 창작가들과 배우들은 김세영에게 정말 주인공역을 저절로 웃음도 나고 생각도 깊어지게 아주 잘했다고 인사를 하려다가 한쪽구석에 주저앉아 울고있는 그를 보게 되였다.

사연을 알게 되자 그들은 모두 놀랐다.

(아, 그런 슬픔을 안고도 촬영기앞에서 어쩌면 그리도 밝게 웃을수 있단 말인가!)

그의 정신세계는 창작집단을 감동시켰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김세영은 자식들에게 낮으나 심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 마음을 다는 모른다. 난 1950년에 벌써 지옥속에 던져졌던 사람이다. 어버이수령님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몸이고 또 요행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있을게다.

어버이수령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시고 위대한 장군님은 내 운명의 보호자이시다. 덕을 입었으면 조금이라도 보답하는게 인간의 의리가 아니냐.

제 가정일때문에 나라일을 뒤전으로 밀어놓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구실을 할수 있겠니?

그래서는 안되겠기에 둘째를 그냥 놔둔채로 촬영장으로 나갔으니 너희들이 나의 이 진심을 알아주기 바란다.》

가족들앞에서 한 김세영의 이 말의 밑바탕에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생체험이 깔려있었다.

남쪽땅에서 정치범으로 체포되여 1년내내 손목에 족쇄를 차고있다나니 그의 손목에는 그때 생긴 상처가 깊은 허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몸소 김세영을 만나주시고 그의 지난 과거사도 다 들어주시고나서 그 족쇄자리를 여러번 어루만져보시다가 그 허물진 손목에 몸소 금시계를 채워주시였다.

그리고 그후에는 어버이수령님존함이 모셔진 고급손목시계를 또다시 수여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족쇄와 금시계!

한사람의 손목에 얽힌 이 대조적인 사연은 구태여 설명없이도 너무나 커다란 의미를 깨닫게 하고있으며 김세영이 창조한 형상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김세영이 가슴에 안고 산 웃음의 철학, 그것은 어버이수령님위대한 장군님께서 펼쳐주신 우리 식 사회주의의 생활의 본색을 꾸밈없는 연기로 긍정하면서 부정적인 요소들을 타매하고 불살라버려야 한다는것이였다.

하기에 그는 언제인가 바다에서 배가 조난당하여 북반부에 들어와 치료도 받고 커다란 은덕을 입게 된 남조선어민들에게 자기의 체험을 들려주면서 두손을 높이 들고 《남조선은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지만 북조선은 이 손목에 금시계를 채워주었습니다. 나처럼 이런 위인들께 삶을 맡겨야 남조선인민들도 사람답게 살수 있습니다!》라고 뜨겁게 웨치였다.

김세영은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의 품속에서 1972년 4월 12일에는 공훈배우칭호를, 1975년에는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게 되였다.

사람들에게 그리도 밝고 깨끗한, 교훈적인 웃음으로 기쁨을 주던 인민배우 김세영은 1989년 10월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몹시 가슴아파하시면서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고 신문 《민주조선》과 《평양신문》 그리고 평양방송으로 김세영의 사망을 알리는 부고도 내게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정말 아까운 동무, 재능있는 배우를 잃었다고 거듭거듭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91년 4월에 인민배우 김세영의 공적을 다시금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돌이켜보면 사실상 김세영은 인생을 두세번 고쳐산 사람이였다.

감옥에서 빠져나와 어버이수령님품에 안기여 재생하였고 1985년에는 뜻밖의 사고로 사경에 처했다가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직승기로 어느 중앙병원에 후송되여 구급처치를 받고 보람찬 삶을 누리다가 웃음속에 생을 마쳤으니 그만큼 행복을 누린 사람은 이 세상에 많지 못할것이다.

오늘도 《자전거반장》, 《우편국장》으로 불리우며 영화화면과 더불어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인민배우 김세영!

그의 삶의 종착점은 우리모두에게 운명의 선택을 잘해야 옳은 삶, 참된 삶을 누릴수 있다는 귀중한 진리를 깊이 새겨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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