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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회

20. 《바다의 제왕》


부산포에 들려 큰 배를 갈아탄 등개와 쥬스께는 지체없이 대마도로 향했다.

어둑침침하고 괴괴한 구릉들이 모여 밋밋한 비탈을 이룬 대마도가 다가들었다.

(끝내 오고야말았구나!)

등개는 입술을 앙다물며 배전을 꽉 움켜쥐였다.

《무슨 생각을 하나?》

쥬스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쥬스께가 자기를 주시하는 음흉한 눈길로 바라보며 서있었다.

《아무 생각도 안하네.》

《거짓말…》

쥬스께는 등개와 나란히 배전에 기대여섰다.

《약혼녀생각을 좀 했지. 하긴 이제사 괜한 생각일테지만…》

《자네의 심정이 리해가 되네. 헌데 말이야…》 하고 쥬스께가 말을 이었다.

《가령 곡진장주를 놓아준다면 그가 제발로 돌산도로 돌아갈수 있을가? 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드네.》

《그건 무슨 소린가?》

《생각해보라구. 우린 곡진장주를 돌려세우려고 그에게 허튼소릴 많이 했다네. 곡진장주는 지금 돌산도에서 모두 자기를 역적으로 치부하고있다고 생각하고있어. 게다가 곡진장주가 우리 섬에 도착하자마자 〈바다의 제왕〉이라고 불리우는 철갑배무이가 시작되였다고 소문도 흘렸으니 지금 그의 립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였네. 내 생각인데 아마 곡진장주는 가라고 놓아줘도 못 갈 처지일걸세.》

《〈바다의 제왕〉이라구? 이름이 요란하구만. 그러니 인츰 내 소문도 파다해지겠는걸.》

등개의 물음에 쥬스께는 대답은 않고 웃기만 하였다.

《어쨌거나 상관이 없어. 그가 가든말든 개의치 않네. 장주어른이 내 눈앞에서 배에 올라 떠나가는걸 보는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네. 내 할바는 거기까지니까. 그를 보내는 순간 나는 이제껏 짊어지고있던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고 나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갈걸세. 지금까진 그렇게 못살았지만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사람답게 살려네. 사람이 살아야 기껏 몇날을 살겠나. 난 가질수 있는껏 가지고 누릴수 있는껏 누리다가 죽으려네. 나에겐 능히 그렇게 할만 한 재간과 능력이 있어.》

쥬스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래그래. 벌써 몇번을 말하지만 귀선만 만들어내면 앞날은 걱정하지 말라구. 이 가끼누마 쥬스께가 약속할수 있어. 난 약속을 결코 허술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거던.》

쥬스께는 주먹을 들어 제 가슴을 두드려보였다.

《좋네. 자네를 믿어봅세. … 이런, 다 왔구만.》

쥬스께는 돛을 내리우라고 소리쳤다.

돛을 내리운 배는 후미진 포구안쪽으로 들어섰다.

순간 등개는 놀랐다. 좁지 않은 포구안에 새로 만들어진 싸움배들이 꽉 들어차있었는데 수풀처럼 일어선 돛대들이 하늘을 찌르고있었다.

(그럴테지. 놈들이 《강화담판》이니 뭐니 하면서 뒤에서는 이렇게 재침을 준비하고있었구나.)

등개는 이발을 꽉 깨물고 눈앞의 왜적선들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배다리가 가까워지자 배는 점차 속도를 죽였다.

선창에 박아놓은 말뚝들에 바줄까지 매여지자 배는 멈춰섰다.

《자, 대마도에 온걸 환영하네. 어서 내리자구.》

쥬스께는 도해첩을 손에 들고 제 먼저 배에서 내렸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대마도의 2인자로 자처하는 다이라의 집이였다.

《계신가?》

쥬스께의 물음에 문앞에서 보초를 서던 왜놈상투쟁이가 《하잇!》 하고 허리를 갑삭 숙였다.

《삼촌에게 내가 왔단다고 이르게.》

《하잇!》

졸개놈이 문안으로 사라지자 쥬스께는 등개를 돌아보며 한눈을 끔뻑여보였다.

오래지 않아 졸개놈이 다시 뛰여나오며 《어서 들어오시랍니다. 어르신께선 지금 침소에 계시오이다.》 하고 귀간지러운 소리로 쑹얼거렸다.

등개는 쥬스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와는 달리 담장안쪽은 대단히 아늑해보였다.

《예서 좀 기다리라구.》

제법 아늑해보이는 집앞에 다달은 쥬스께가 뒤따르던 등개에게 조용히 하는 말이였다.

《내 잠간 들어갔다 나오지.》

쥬스께는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맞추어놓더니 미닫이문을 살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널바닥이 찌국거리는 소리가 저쪽켠으로 사라졌다.

조금 있더니 다시 그쪽에서 찌국찌국 나무바닥 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나오는가?)

등개는 미닫이문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오는것은 쥬스께가 아니라 새둥지처럼 머리를 틀어올린 왜년이였다. 새하얗게 분칠을 한 왜년의 낯판대기를 보니 등개는 속이 메슥메슥해났다.

(퉤, 더러운 왜년.)

등개는 돌아서서 침을 탁 뱉았다.

계집때문에 기분을 잡쳐버린 등개는 공연히 오락가락하면서 발부리에 걸채는 가랑잎만 걷어찼다.

한참 걸려서야 쥬스께가 문안에서 나왔다.

그러나 쥬스께의 얼굴빛은 썩 씨원치 못하였다.

등개를 바라보던 쥬스께는 《가자구.》 하고 한마디 내뱉고는 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이라의 집을 빠져나올 동안 쥬스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숲속을 꿰질러 배가 빤히 바라보이는 곳에 거의 이르러서야 쥬스께는 걸음을 멈추었다.

《개자식!》

쥬스께의 입에서는 대뜸 욕설이 튀여나왔다.

《개자식! 주제에 감히 이 가끼누마 쥬스께를 업수이여겨? 이거야 분통이 터져서 견딜수가 있나!》

쥬스께는 흡사 함정에 빠진 승냥이마냥 다이라의 집쪽에 대고 으르렁댔다.

《진정하라구. 자네 왜 그러나?》

그러나 쥬스께가 이번에는 얼굴을 싸쥐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꺼억꺼억 울음을 터뜨리는것이였다.

《미쳤어? 이거 왜 이래?》

등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쥬스께를 쳐다보았다.

《그 개자식이 글쎄 내 도해첩을 빼앗았다네. 두눈을 펀히 뜨고 도해첩을 떼웠어!》

《뭐라구?!》

등개는 와락 달려들어 쥬스께의 멱살을 거머쥐였다.

《무슨 개수작이야, 도해첩을 떼우다니?!》

쥬스께는 숨이 막혀 버드럭거리였다.

가까스로 등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쥬스께는 말려올라간 옷깃을 대수강 바로잡으며 무어라고 혼자서 두덜거렸다.

《바로 말해! 도해첩을 떼우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등개의 물음에 쥬스께는 한숨만 푸- 내쉬더니 아까 다이라의 방에 들어가서 있었던 일들을 떠듬떠듬 말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다이라는 아주 기분이 좋은듯 하였다. 금방 계집년의 속살맛을 보고난 뒤여서 그런지 쥬스께를 맞이하는 다이라의 표정은 밝았다. 게다가 쥬스께가 내미는 도해첩까지 받아들자 다이라의 두눈은 금시 숯불처럼 이글거렸다. 여기까지는 모든것이 순조로왔다. 그런데 쥬스께의 입에서 등개와 곡진의 이야기가 나오자 태도가 싹 돌변했다는것이다.

《삼촌은 자네를 그닥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더군. 그런 재간은 숙련이 없이는 절대로 습득할수 없는거라나. 저도 배뭇는 물계를 좀 안다는거지. 다이라 그 자식 아버지와 마사가께형님이 살아있을적에는 대가리도 쳐들지 못하던게 이젠 내가 외토리가 되였다고 감히 깔보고있는게야. 이거야 어디 분해서 견딜수가 있나!》

쥬스께는 옆구리에 찬 칼을 절커덕거리였다.

《그래서 도해첩을 그냥 떼웠나?》

쥬스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니 우리사이 약속은 물건너간셈이구만.》

그 말에 쥬스께는 눈을 번쩍 뜨고 등개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 가끼누마 쥬스께는 그런 사람이 아닐세. 조금만 기다려주게. 내 부산포에 달려가서 부하들을 데려다가 이 섬을 아예 요정내고말테네!》

《되지도 않을 소린 하지도 말라구.》

등개는 손을 획 내저었다.

쥬스께는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알지 못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쿨쩍거렸다.

《이거 제발 그치지 못하겠어!》

등개가 왈칵 성을 내자 쥬스께는 울음을 뚝 그쳤다.

《운다고 도해첩이 다시 생겨? 자넨 도해첩을 찾아와야 해. 난 자네를 위해서 거북선을 만들지 다른 놈팽이를 위해선 절대로 만들지 않을거네.》

등개의 말에 쥬스께는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그래, 맞았어. 우리 도해첩을 찾아가지고 본토로 건너가세. 꼭 여기서만 귀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거던. 본토로 건너가면 좀더 훌륭한 조건에서 무어낼수 있을거야. 귀선만 손에 넣는다면 막대한 땅과 재부가 우리한테 차례지게 될걸세. 그러니 그 개자식이 귀선을 독차지하도록 내버려둘수는 없어. 귀선은 내것이야!》

《이제야 자네답구만.》

등개는 쥬스께의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자네 결심을 지지하네. 내가 자넬 돕지. 함께 모험을 해보자구.》

등개의 그 말에 쥬스께는 큰 힘을 얻은듯싶었다.

《그럼 이렇게 하세.》

등개와 쥬스께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다음 행동계획을 토론하였다.

《먼저 다이라, 그 개자식에게서 도해첩을 빼앗자구.》

《저렇게 둔한 배로 어떻게 빠진다고 그래? 얼마 못 가서 자네 삼촌의 졸개들에게 붙들리고말걸세.》

《그럼 어떡하면 좋은가?》

쥬스께의 물음에 등개는 한동안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을 굴리는듯 하다가 눈을 번쩍 뜨더니 《옳지!》 하며 제 무릎을 철썩 갈기는것이였다.

《좋은 수가 떠올랐어.》

쥬스께는 귀가 솔깃하여 가까이 다가앉았다.

《자네 아까 그 삼촌이란 사람이 여기서 만들었다는 〈바다의 제왕〉이 어쩌구저쩌구했지?》

등개의 물음에 쥬스께는 눈만 껌뻑껌뻑거리였다.

《아까 곡진장주의 소리를 하다가 그 소릴 했잖아!》

그제서야 쥬스께는 《그렇지, 그 소릴 했었네.》 하는것이였다.

《자네 삼촌이 그 배를 정말 만들었나?》

등개의 물음에 쥬스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내 알건대는 곡진장주가 귀선의 비밀을 끝까지 불지 않자 화가 동한 삼촌이 제멋대로 그런 배를 만들기 시작한것 같네. 만들기는 다 만들었는데 아직 시험항행중이라 하데.》

그러자 등개가 반색을 지었다.

《그럼 그 배를 우리가 시험해보자구. 명색이 〈바다의 제왕〉이라니 그 배를 우리가 뺏아타면 자네 삼촌의 졸개들이 아무리 쫓아와도 끄떡없을게 아닌가!》

《정말!…》

쥬스께는 흥분하여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그래. 좋아, 골탕을 먹일바엔 단단히 먹이세. 다이라가 준비한 〈바다의 제왕〉을 우리가 빼앗읍세.》

쥬스께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가만, 너무 흥분해서 그러지 말라구. 그러자면 우리한테 방조자가 필요해. 둘이서 도해첩과 배를 동시에 훔쳐낸다는건 불가능한 일일세. 믿음직하고 배를 잘 아는 그런 방조자가 꼭 있어야 하네.》

등개의 말을 듣고 쥬스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자네가 말하는 방조자란 혹시 곡진장주를 념두에 둔게 아닌가?》

《말이 통하누만. 옳네, 곡진장주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네.》

쥬스께는 등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구보니 그럴듯한 생각일세. 그는 귀선 만드는데선 따를이가 없을것이니 삼촌이 만든 〈바다의 제왕〉을 얼마든지 다룰수 있을걸세. 헌데 그가 우리 일을 돕겠다고 할가?》

《그건 내게 맡기라구. 돌산도로 보내주겠다면 그는 반대하지 않을걸세.》

《좋아!》

등개와 쥬스께는 두손을 꽉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들은 먼저 곡진장주가 갇혀있는 곳으로 갔다.

곡진장주가 등개를 보고 깜짝 놀란것은 두말할나위도 없었다.

《아니, 임자가 어떻게 여기에?!…》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곡진장주가 등개를 붙잡고 묻는 말이였다.

《장주어른,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이까? 장주어른을 모셔가려고 이렇게 왔소이다. 그러니 더 묻지 마시고 내 말대로 움직여주사이다.》

등개는 곡진장주에게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

다음날 다이라의 귀에는 돌산도에서 잡아온 곡진장주가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다이라는 정작 도해첩이 자기 손에 들어오니 곡진장주도 마음을 돌려먹었다고 기뻐하면서 어서 곡진장주를 데려오라고 졸개들을 몰아댔다.

《장주어른이 생각을 달리하셨다는게 사실이요?》

곡진장주를 만난 다이라가 하는 말이였다.

《왜, 별로 달갑지 않은 모양이구려. 그렇다면 생각을 고쳐하리다.》

《아아, 이거 왜 이러시오. 장주어른은 성미가 불같소그려.》

《나 곡진이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요.》

곡진장주는 무뚝뚝하게 다이라의 말을 받아넘기였다.

《장주어른의 성미가 그러하니 당신의 말을 믿겠소. 요새 어떤 놈들은 겉으로는 충의를 부르짖다가도 정작 때가 오면 손바닥 뒤집듯 하고 달아난단 말이요. 대개 그런 놈들을 보면 성질머리가 간사하고 교활하기 이를데없으며 항상 좋은 낯빛을 띠고있던자들이요. 그래서 난 낯빛에 웃음을 담고있는자들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소. 오히려 당신처럼 직통배기가 훨씬 마음에 든단 말이요. 당신 같은 사람은 남을 속일 포재가 못되니까.》

다이라는 이렇게 말하며 곡진장주를 향해 의미있는 눈짓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곡진장주는 대번에 웃음을 터뜨리였다.

《그 말이 참 일리가 있소. 헌데 말이요, 진실된 마음을 볼줄 모르고 제 기분이나 생각을 남에게 먹이려는 인간은 자가당착에 빠지기가 일쑤요. 그러니 나의 속을 당신에게 헤쳐보이기는 정말로 싫소. 부담스럽소.》

곡진의 역습에 다이라는 귀밑이 시뻘개졌다.

《장주어른은 직통배기요. 마음에 드오. 참으로 조선인들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예지가 있거던. … 이젠 장주어른에 대한 믿음이 생기오. 자, 나와 함께 우리 〈바다의 제왕〉을 보러 나갑시다. 장주어른이 손을 싸매고있는 동안 내 식대로 한번 만들어보았는데 우선 잘 보고 평가해주기 바라오.》

다이라는 그길로 곡진장주와 함께 포구로 향했다.

다이라가 직접 도해를 그리고 고심하여 무어냈다는 그 철갑함선은 크기가 자못 어마어마하였다. 울긋불긋 색칠까지 해놓으니 그럴듯해보였다.

곡진이 보기에도 조선수군의 거북선을 흉내내느라고 애쓴것이 훤히 알렸다.

《참 잘 만드셨소.》

다이라의 안내를 받아 《바다의 제왕》안에 발을 들이밀며 곡진이 하는 말이였다.

《놀라운 수준이요. 이만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겠소.》

곡진의 칭찬에 다이라의 입은 헤벌쭉하니 벌어졌다.

곡진은 여기저기를 두들겨보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배의 내부를 샅샅이 돌아보았다.

마지막에는 알지 못할 괴물의 대가리를 형상한 배의 이물에까지 이르렀다.

《허허, 생각밖이요. 당신네도 싸움배를 괜찮게 만들구있구만. 역시 모방에서는 기질이 있소.》

《곡진장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 알았소. 한생 배를 만들어온 내가 보기에도 이 배는 정말로 훌륭한 싸움배란 말이요. 당신 말대로 모방이기는 하지만 말이요. 창제란 원래 골치거리요. 단순한걸 좋아하는 일본인은 모방을 생명으로 여기오. … 그래, 당신네 귀선과 대비하면 어떨것 같소?》

다이라의 그 말에 곡진은 《글쎄…》 하며 다시 배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만하면 꽤 견뎌낼듯 하오. 허나 이 배에는 몇가지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구만.》

곡진은 배밑창의 어두운 구석을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배안에 쥐가 없는것도 큰 문제요. 옛사람이 이르기를 쥐가 없는 배는 타지 말라구 했거던. 허허.》 하고 웃어제끼는것이였다.

다이라는 곡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이고 쥐는 또 무엇인가?

곡진은 다이라의 얼굴표정에는 관심이 없는듯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결함들을 시급히 퇴치하지 않는다면 이 〈바다의 제왕〉은 조선수군의 거북선앞에 가라앉고말거요. 그러면 〈제왕〉이 될수가 없지.》

곡진의 마지막 이 말을 다이라는 심중하게 여겨들었다.

《역시 곡진장주의 눈은 속일수가 없소그려. 옳소, 당신이 이 배를 진짜 〈바다의 제왕〉으로 만들어주면 당신의 소원을 뭐나 다 들어주겠소.》

곡진과 다이라는 밖으로 나왔다.

이때 문뜩 배다리밑쪽에서 누구들인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다보니 등개와 쥬스께였다. 헌데 그들은 보초를 서고있는 왜놈상투쟁이들과 다툼질을 하고있는것 같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거냐?!》

다이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초에게 호통을 쳤다.

갑자기 쥬스께가 보초놈의 따귀를 후려쳤다.

《쥬스께!》

성이 난 다이라가 쥬스께를 불렀다.

《뉘앞에서 손찌검이냐?! 감히 내 부하에게 손을 대?》

다이라는 발을 탕 굴렀다.

《어떻게 된 일이냐?》

다이라의 물음에 뺨따구니를 얻어맞은 보초가 주춤거리며 사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쥬스께와 등개는 난처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사실 다이라와 곡진이 《바다의 제왕》속으로 들어가는것을 본 쥬스께는 다이라가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도해첩을 훔쳐내올 결심을 하였었다. 그런데 등개가 그따위 도해첩은 내쳐두고 빨리 저들을 따라들어가서 철갑함선을 타고앉자고 하는것이였다.

《글쎄 도해첩따윈 고민하지 말게. 자네 삼촌을 인질로 붙잡고있으면 어련히 도해첩을 갖다 바치지 않으리! 자네 삼촌이 호위병도 안 데리고 배안으로 들어갔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다시없을걸세. 어서 결심하라구.》

등개의 말을 들은 쥬스께는 등개를 주시하며 실눈을 지었다.

마침내 쥬스께는 종래의 계획을 변경시키는데 동의하였다.

그들은 제잡담하고 《바다의 제왕》을 향하여 종종걸음을 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종시 그 배에 오를수 없었다. 배다리밑에 몰켜서있던 한무리의 졸개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아나섰던것이다.

바로 그때 다이라와 곡진이 배다리로 나왔던것이다.

《네놈까지 이 쥬스께를 업신여겨? 죽여버리고말테다!》

쥬스께는 허리춤에 찬 칼을 쑥 뽑아들었다.

등개가 아니였다면 보초놈의 몸뚱이가 두동강나버렸을지도 몰랐다.

그 광경을 보고 사방에서 시꺼먼 옷을 입은 놈팽이들이 꾸역꾸역 몰켜들었다.

《어쩌자구 그러나, 저것들을 못 봐?》

등개의 말에 쥬스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험상궂게 생긴자들이 살기띤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있었다.

쥬스께는 맥이 풀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넣었다.

《저놈들을 당장 쫓아내라!》

다이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그들을 빙 둘러싸고있던 졸개들이 우- 하고 몰려들었다.

《삼촌!》

쥬스께가 당황해진 눈길로 배쪽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가만!》

다이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쥬스께가 데려온 저놈은 올려보내라!》

등개는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할수 없었다. 그러나 다이라와 눈이 마주친 곡진장주가 고개를 끄덕이는것을 보고는 순간 절호의 기회가 단 한번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배다리에 올라 다이라의 옆을 스쳐지나던 등개는 와락 달려들어 빼빼 마른 그놈의 목을 뒤에서부터 그러안았다.

《움쩍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이놈을 죽이겠다!》

등개는 발밑에 몰켜있는 왜놈상투쟁이들에게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섬오랑캐놈들은 두눈만 휘둥그래 뜬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떠름해있었다.

《쥬스께, 뭘 해? 빨리 올라오라!》

등개의 말에 쥬스께가 정신을 차렸다.

《길을 내라, 이놈들!》

날쌔게 칼을 뽑아든 쥬스께가 아까부터 말째게 굴던 보초놈을 단칼에 베여던지고 배다리우로 뛰여올라왔다.

《바줄을 풀라고 말하라구!》

등개가 쥬스께에게 하는 말이였다.

《이 쥐새끼들아! 어서 바줄을 풀어라!》

쥬스께가 삼촌의 목에 칼을 들이대였다.

《어서 풀라고 말해!》

어떻게나 다이라의 목에 칼날을 눌러붙였는지 피가 흘러 여윈 가슴팍을 가리웠던 옷의 앞섶을 적셔놓았다.

《바줄들을 풀어라!》

다이라가 졸개들에게 령을 내렸다.

졸개들은 다이라의 령에 어쩔수 없는듯 《제왕》을 묶어놓은 바줄들을 칼로 내리쳐 잘라던졌다.

《들어가세!》

등개는 다이라를 끌고 곡진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배안으로 몸을 숨기였다. 뒤따라 쥬스께가 달려들어와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빨리 저놈들에게 소리치라구, 한발자국이라도 가까이 오는 놈이 있다면 다이라의 목을 베여던지겠단다구.》

등개의 말을 들은 쥬스께는 밖에다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쥬스께가 어떻게나 엄포를 놓았는지 배다리밑에 몰켜선 사무라이들은 까딱도 못하고 떨기만 하였다.

《다이라를 묶으라구!》

등개가 소리치자 쥬스께가 달려들어 다이라를 기둥에다 꽁꽁 비끄러매였다.

《그러구두 삼촌이라구? 퉤, 개자식같으니… 이렇게 될줄 그래 몰랐어? 감히 이 가끼누마 쥬스께를 하대하다니… 이제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쥬스께는 다이라의 복부에 련속 주먹세례를 안기였다.

《내 도해첩을 어디다 두었니? 대지 않으면 때려죽이고말테다!》

쥬스께는 삼촌이라고 인정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쥬스께의 주먹에 얻어맞은 다이라의 입에서는 부글부글 거품이 괴여나왔다.

《퉤! 콱 뒈지기나 할것!》

쥬스께는 다이라의 몸뚱아리가 축 늘어지자 그의 상판에 가래를 돋구어 뱉아버렸다.

그사이 등개와 곡진은 돛대를 세워놓고 돛줄을 풀어 바람을 잡았다.

《바다의 제왕》은 천천히 자기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배가 움씰하자 쥬스께는 등개에게로 달려왔다.

《등개, 도해첩은 안 가지고 가나?》

《그건 해서 뭘 해?》

쥬스께의 물음에 등개가 퉁명스레 대답하였다.

《뭘 하다니? 도해첩이 없이는 귀선을 만들수 없다며?》

《내겐 도해첩보다 더 좋은게 있으니까.》

쥬스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 좋은것이라니, 그게 뭔가?!》

《정 알구싶나?》

쥬스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럼 따라오게나.》

등개는 쥬스께를 데리고 배의 이물끝으로 갔다.

《저기 아랠 보라구.》

등개는 괴물대가리의 아가리로 나가 아래쪽을 손짓해보였다.

호기심이 가득 동한 쥬스께는 《어딜?》 하면서 목을 쑥 빼들고 등개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두 안 보이는데…》

그러자 등개는 《그래? 그럴수가 없는데… 차라리 내려가서 보라구.》 하고는 쥬스께의 궁둥이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아이쿠!》

쥬스께는 허양 바다물에 나떨어졌다.

그제서야 쥬스께는 자기가 속았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허우적거리며 기슭을 바라보니 칼을 빼든 무리들이 악악거리며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질렀다.

《아, 속았구나!》

차거운 바다물에 떨어진 쥬스께는 급기야 온몸이 꽁꽁 얼어들었다. 자꾸만 아래서 누가 자기를 끌어당기는것만 같았다.

물에 빠져죽은 형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멍텅구리같은 자식! 천하에 밥통같은 자식아!)

형이 자기를 바라보며 욕을 하는것 같았다.

(아, 이 미련한 놈!)

쥬스께는 울분에 태질을 해댔다.

쥬스께는 마지막몸부림으로써 수면우로 몸을 솟구쳤다.

허나 《바다의 제왕》은 쥬스께를 외면한채 물갈기를 일구며 한옆으로 지나가고있었다.

쥬스께는 절망의 눈길로 《바다의 제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뜩 배뒤켠에 늘어진 바줄이 물면우에 끌리며 자기쪽으로 다가오고있는것을 알아보았다.

(아, 저걸 잡으면 배에 오를수 있겠구나!)

쥬스께는 살수 있는 마지막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오라, 오라. 가까이만 오라!)

마침내 쥬스께의 손에 바줄의 끄트머리가 걸려들었다. 쥬스께는 그것을 명줄인양 억척같이 틀어쥐였다.

(내 이제 네놈들을 요정내고야말테다!)

쥬스께는 악을 품고 있는 힘을 다해 바줄을 타고 기여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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