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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18. 가이샤꾸


우후에게 엄포를 놓고 기분이 들뜬 송원서는 수영을 나와 주막집을 찾아들어갔다. 만나보러 간다던 《우리 사람들》이란 순전히 우후를 겁먹게 하려는 수작이였고 실은 이 려수땅에 아무도 자기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앉은자리에서 지어낸 거짓말에 위협을 느끼고 부들부들 떠는 우후를 본 송원서는 자기의 림기응변에 만족을 느끼였다.

《막걸리 한사발 주소.》

송원서는 제일 구석진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주모에게 술 한사발을 청하였다.

《예, 이제 나갑니다. 잠간만 기다리소-》

송원서는 어쩐지 마음이 흥그러워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싶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주막집엔 벙거지를 뒤집어쓴 군사들이 별로 많아보였다.

《자, 밥알이 동동 뜨는 막걸리요-》

불룩한 젖통때문에 저고리가 당장 터져나갈것만 같은 주모가 치마바람을 일구며 술사발을 날라왔다.

송원서는 허리춤에서 둥그런 엽전을 두세개 끄집어내여 보동보동한 주모의 손바닥에 던져주었다.

생각보다 많은 술값을 받은 주모는 영문을 몰라 얼떠름해 서있다가 송원서의 손이 제 궁둥이를 툭 쳐서야 기겁하며 저쪽으로 달아났다.

송원서는 벙그레 웃음을 짓다가 막걸리사발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한모금 넘기니 시큼하고 달큼한 막걸리의 진맛에 온몸이 짜르르해졌다. 송원서는 한모금을 더 마시고 술사발을 내려놓았다. 사발안에 남아있는 젖빛액체가 송원서의 목젖을 자극하였다.

(에라, 모르겠다!)

송원서는 사발을 들어올려 그릇에 남은 막걸리를 전부 목구멍안으로 쏟아넣었다.

《카-》

사발을 내려놓는것과 동시에 주모에게 막걸리를 한사발 더 청하였다.

《예, 갑니다-》

주모는 길게 말꼬리를 뽑으며 송원서의 앞으로 막걸리사발을 날라왔다. 그리고는 무례하고 돈이 많아보이는 이 주정뱅이가 또 제 궁둥이를 만지자고 덤빌가봐 겁이 나는듯 사발을 내려놓기 바쁘게 돌따서더니 뛰여나가는것이였다.

송원서는 사발을 들념을 않고 무심결에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웬 텁석부리 두엇이 소달구지에서 죽은 돼지 한놈을 부리우고있었다. 아마 주모가 돼지가 왔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도 급하게 달려나간 모양이였다.

가마니짝우에 부리운 돼지를 내려다보던 주모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대가리며 발쪽까지 속속들이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만족한듯 허리를 펴고 창고인듯 보이는쪽에 손짓을 하는것이였다.

그러자 달구지를 몰고 왔던 그 텁석부리들이 가마니채로 맞들어 날라들여갔다.

주모가 그들을 안으로 잡아끄는것이 보였다. 송원서가 보기에 그들은 사양하는듯 했다. 그러나 주모는 막무가내였다.

정 안 들어오겠다고 그들이 뻗치자 주모는 잠간만 기다리라는 시늉을 하고는 주막안으로 달려들어와 막걸리 두사발을 퍼가지고 나갔다.

마당에서 달구지를 돌려세우고있던 두 텁석부리는 주모가 날라온 젖빛물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수염들을 뻑뻑 쓰다듬었다.

주모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달구지가 문밖으로 나가자 얼른 돌아서 안으로 들어왔다.

주모는 찬데 나가서있다가 몸이 얼어들었는지 몸을 자꾸 으쓱으쓱거렸다.

갑자기 송원서는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매우 익숙했지만 오래전에 맡아본 그런 냄새였다.

피비린내!

야수의 후각을 자극하는 그 냄새는 바로 주모가 있는데서부터 풍겨나고있었다. 아마 아까 손으로 돼지의 이곳저곳을 만져보더니 주모의 손에 돼지피가 묻은 모양이였다. 송원서는 피비린내에 너무도 민감하였다. 코안을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에 그는 눈살을 찌프리고 주먹을 움켜쥐였다.

(앗!)

송원서는 량쪽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렇게나 해가지고는 제 머리속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거대한 메아리를 막아낼수 없었다. 그것은 잊고싶었지만 종내 잊을수가 없었던 과거라는 공간에서 기억의 틈을 비집고 조금씩 새여나오는 절규의 목소리였다.

《어서 내리쳐라, 내리쳐!》

《악!》

몸뚱아리에서 튕겨나 땅바닥에서 뒹굴던 커다란 머리와 잘리운 모가지에서 펑펑 뿜어져나오던 붉은 피, 피자박이 된채 중심을 잃고 스르르 넘어지던 시꺼먼 몸통- 바로 그것은 송원서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였다.

송원서, 그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였다. 그의 본명은 가끼누마 쥬스께이다. 바로 임진왜란 초시기에 침략함대를 끌고 조선남해에 기여들었던 왜적수군장수의 한놈인 가끼누마 쇼오다이의 둘째아들이였다.

가끼누마 쥬스께의 형 가끼누마 마사가께는 사천해전당시 날아드는 화살에 가슴이 꿰뚫려 잔악한 운명을 마감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불행이고 재앙이였으나 도발자들에게도 결코 즐거움만을 선사해준것은 아니였다. 왜관에서 사기와 협잡속에 날과 달을 보내던 가끼누마 쥬스께도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으로 하여 하나밖에 없던 형을 잃었으며 나중에는 아버지까지 잃게 되였다.

아버지 가끼누마 쇼오다이를 죽인 사람은 바로 가끼누마 쥬스께 본인이였다.

리순신장군의 령활무쌍한 전법과 전설의 전함인 거북선에 쫓겨 바다를 내주고 대마도로 도망친 왜적수군의 우두머리들은 다리부러진 노루처럼 한데 몽켜들어 패전의 죄과를 묻는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패전에 조금이라도 관여된자라면 절대로 죽음을 피할수 없는 자리였다.

숱한 왜장들의 모가지가 뎅겅뎅겅 떨어져나갔다. 패장들의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당연한것이였다.

그러나 가끼누마 쥬스께만은 그것을 심상히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바로 이제 죽을 차례가 된 패장이 다름아닌 자기의 아버지 가끼누마 쇼오다이였던것이다. 쥬스께가 보기에도 자기 아버지는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있었다.

쥬스께의 생각에는 조선의 리순신장군과 거북선에 저들의 대함대가 여지없이 패한것이 부끄러워해야 할 그런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순신장군과 그의 귀선에 패한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마땅하고 응당한 필연적결과였다.

원래 가끼누마가문은 칼부림을 전업으로 하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대대로 배무이를 하는 집안이였다. 몇대를 두고 내려오며 해적선들을 무어낸 까닭에 가끼누마가문은 일본땅에서 손꼽히는 가문에 속하고있었다. 그러던것이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전쟁을 준비하면서 숱한 싸움배들을 주문하는통에 하루아침에 벼락부자로까지 되여버렸다. 호경기를 맞이한 가끼누마 쇼오다이는 불과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에 백여척의 싸움배들을 건조하여 바다에 띄웠다.

실로 장관이였다. 바다를 뒤덮은 3층다락배들은 고삐에 매인 맹수들처럼 닻줄을 툭툭 튕기며 어서 싸움마당에 뛰여들겠다고 몸을 뒤척이는듯싶었다.

가끼누마 쇼오다이는 일개 배를 뭇는 사람으로부터 사무라이들을 거느린 장수가 되여버렸다. 그의 아들들인 가끼누마 마사가께와 가끼누마 쥬스께까지도 갑옷들을 떨쳐입고 바다를 건너갔다.

이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상대가 더는 없을것 같았다.

개전초기에 가끼누마 쇼오다이나 그의 아들들은 저희 가문에서 만들어낸 아다께부네와 세끼부네를 주력으로 한 일본의 거대함대가 조선수군과 맞붙어 패전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끼누마가문이 만들어낸 싸움배들은 해적질에 이골이 난 섬오랑캐무리들에게 너무나도 손에 익은 《자랑》할만 한 전함들이기때문이였다.

사무라이식바다싸움전법은 《등선육박전술》이였다. 해적의 피를 물려받은 그들에게 있어서 남의 배에 뛰여올라 칼부림을 하는것은 바다싸움에서 선조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물려받아 너무나도 손에 익힌 전술이였다. 때문에 그쪽이라면 어지간히 자신이 있어하였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절대로 저들의 《등선육박전술》에 말려들지 않았다. 아니, 조선수군을 상대로는 그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는게 더 정확할것이였다.

처음부터 조선수군은 저들의 배들을 접근시키지 않았다. 공격대형을 일단 짓기만 하면 조선수군은 벼락치는듯 한 소리들을 내는 화포들을 일시에 발사하군 하였다. 저쪽 포아구리에서 불빛이 펑끗하고 이어 희읍스름한 연기가 뭉텅 쏟아져나올 때면 이쪽 배전에는 골조가 깨지고 돛대가 꺾어지며 루대가 박살나고 불이 확 당기군 하였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르며 련이어 날아드는 불덩이며 불화살들은 아예 저들의 싸움배들을 장작패듯 하였다. 화포를 전혀 싣지 못하는 저들의 싸움배를 가지고서는 앉아 당하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가끼누마 쇼오다이나 그의 아들들은 저들이 만들어낸 싸움배들이 그렇게 쉽게 깨여져나가는데 기겁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단 다 죽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 조선수군의 싸움배에 가까이 접근해야 하였다. 가까이 접근해서 배전을 맞대여놓고 거기로 기여올라 칼로써 끝장을 보는것뿐이였다.

허나 그것도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판옥선이라고 불리우는 조선수군의 싸움배들은 그 고가 어찌나 높은지 도저히 거기로는 기여오를수가 없었다.

원래 조선수군의 싸움배들중에는 판옥선이 없었다. 력대적으로 조선수군은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이라고 하는 맹선계렬의 배들로 바다를 지키고있었다. 헌데 삼포왜란과 사량왜변, 을묘왜변 같은 왜구들과의 싸움을 직접 겪으면서 맹선계렬의 싸움배들의 취약성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였다. 맹선계렬의 싸움배들은 《등선육박전술》이 뼈속까지 물든 왜적의 맹공격을 격퇴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선체에 갑판을 깔고 그우에 군사들과 노군들을 함께 배치한 평선이였던 그 배들은 싸움마당에 들어가면 노를 젓는 격군과 활을 쏘는 궁수들이 한데 어울려돌아가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게다가 그들은 고가 낮은 배전을 제외하고는 몸을 가리울만 한 아무런 보호수단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배를 가지고서는 앞으로 겪게 될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쥘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수군에 소속되여 싸움배들을 무어내던 장공들은 선조들의 배무이술에 토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싸움배를 무어낼 결심을 하게 되였다.

우선 그들이 고민한것은 격군과 궁수의 분리였다. 그들을 싸움마당에서 분리시켜놓으면 싸움에 상당히 유리할수 있었다. 노를 젓는 격군은 아래에, 활을 쏘는 궁수는 그보다 우에 배치하기 위한 고심어린 탐구가 계속되였다. 다음으로 이제 건조할 배에는 싸움때마다 상대의 배에 뛰여오르군 하는 왜적들의 습성을 타산하여 적들의 배보다 훨씬 고가 높은 배전을 설치해야 하였다. 놈들이 배전에 달라붙지 못하면 효과적인 명중사격을 위주로 하는 조선수군이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할수 있었다.

그 모든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켜줄수 있는 방도는 단 한가지뿐이였다.

장공들은 맹선의 선체우에 하나의 갑판을 더 올려놓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면 노를 젓는 격군들과 활을 쏘는 궁수들을 분리시킬수가 있었다. 또한 노를 젓는 격군들은 갑판아래에 들어박혀있게 되므로 적들의 창끝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될수 있었다. 웃갑판에서 활을 쏘는 군사들은 높이 세운 참나무방패판자에 몸을 숨김으로써 안전하고도 효과적인 사격을 진행할수 있었다. 그 모든것을 갑판중심에 세운 2층루각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며 지휘하게 하였다. 판옥선이라는 이름도 이 2층루각에서 유래되였다.

그렇게 건조된 판옥선은 당시로서는 가장 발전된 싸움배중의 하나로 손꼽히였다.

궁수와 격군이 분리된 두개의 갑판과 그우에 설치된 위력한 화포들, 거대한 몸체를 든든히 떠받드는 통나무골격들은 왜적들이 장기로 가지고있는 《등선육박전술》을 무력화시키기에는 그저그만이였다.

실지로 임진왜란 초시기에 판옥선과 맞다든 섬오랑캐놈들은 패전의 쓰라린 고통속에서 전통적인 저들의 싸움방식인 《등선육박전술》에 환멸을 느끼게 되였다.

성벽이라도 타고넘듯 사다리에 매여달리면 하늘에서 뾰족한 갈구리가 쑥 내려와 등허리를 쿡 찍어서는 더러운것이라도 털어내듯 바다물에 떨궈버리지, 요행 갈구리를 피해 꼭대기까지 올라왔다싶으면 턱밑이 창끝에 꿰여진채로 자유락하를 경험해야지, 또 두껍고 고가 높은 배전때문에 조총도 위력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더 무시무시한것은 조선수군의 육박전술이였다.

화포일제사격에 뒤이어 조선수군은 하나같이 노를 저어 돌격해들어왔는데 덩지가 큰 조선수군의 싸움배와 부딪치고나면 저들의 싸움배는 바위에 떨어진 새알처럼 여기저기가 깨여져나갔다. 가볍고 향내가 나는 삼나무를 켜서 만든 저들의 싸움배들은 소나무로 만들어졌고 통나무골조를 가지고있는 조선수군의 판옥선앞에 너무나도 허약스러웠다. 조선수군은 배를 몰고 달려와 지끈지끈 소리가 나게 들이받아놓고는 박살이 난 배우에서 아비규환이 되여버린 저들의 머리우로 화살과 총통을 마구 쏘아대였다.

가끼누마 쇼오다이와 그의 아들들은 질겁하였다. 사방에서 패전보고가 날아들 때면 그 배를 만들어낸 저들에 대한 힐난과 질책 그리고 무서운 노성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따라다니였다.

하루아침에 모든것을 잃게 생겼다. 조선수군을 끝내 꺼꾸러뜨리지 못한다면 패전의 모든 죄과의 화살은 고스란히 저들의 머리우에 쏟아질것이였다.

(어떻게 하나 조선수군을 격파해야 할텐데… 헌데 어떻게, 무슨 수로…)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저들과 맞서있는 조선수군은 전설의 검은 룡같은 귀선까지 보유하고있었다. 말그대로 귀신같은 그 배야말로 왜적수군 우두머리들의 최대의 골치거리였다. 온몸을 철갑으로 빈틈없이 무장한 괴물같은 귀선은 항상 뽀얀 안개속에서 나타나군 하였다. 시누런 연기를 입으로 토해내며 사방으로 불덩이를 내쏘는가 하면 어느새 달려와 와지끈 배전을 들이받아놓고는 밑창이 깨여져 가라앉는 저들의 싸움배들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짓는것이였다.

아다께부네나 세끼부네 같은 싸움배들은 더이상 가끼누마가문의 자랑거리가 아니였다.

쥬스께는 정말로 조선수군이 보유한 그 귀선이 증오스러웠다. 아니, 증오라기보다 강렬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것 같았다.

어쨌거나 패전의 모든 죄과는 고스란히 가끼누마 쇼오다이에게로 돌아왔다.

가끼누마 쥬스께는 자기 아버지에게 패전의 죄를 전가하여 죽음을 강요하고있는 이마가 번들번들한 저 늙다리왜장의 처사가 심히 못마땅하게 느껴지였다.

《마지막소원이 있는가?》

늙다리왜장이 죽음의 판결을 받은 가끼누마 쇼오다이에게 최후의 물음을 던졌다.

가끼누마 쇼오다이는 고개를 들었다.

쥬스께가 본 아버지의 얼굴에는 비겁성이란 조금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오히려 비장함 같은것이 흐르는듯 했다.

쥬스께는 이제 아버지가 하게 될 대답을 이미 짐작하고있었다. 비록 그는 사무라이가 아니였지만 앞서 자결한 사무라이들과 똑같은 대답을 할것이였다. 《바라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로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부끄럽지 않게 생을 마무리할게 뻔했다.

그러나 쇼오다이의 입에서는 예상밖의 대답이 튀여나왔다.

《한가지 청이 있소이다.》

둘러섰던 사무라이들이 놀라운 눈으로 쇼오다이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그렇게 도고하던 가끼누마가문의 가장이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서 삶에 대한 그 어떤 미련이 생긴것인가?

《말해보라.》

《저의 아들이 이 자리에 와있소이다.》

《그래서? 아들이 보는데선 죽기가 겁나는가?》

쥬스께는 깜짝 놀랐다.

늙다리왜장은 쥬스께에게 물러나라고 손짓을 하였다.

쥬스께는 어찌할바를 몰라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게 아니오라…》

쇼오다이의 말에 왜장은 멈칫하였다.

《죽기가 싫은가?》

대단히 시끄러워하는 왜장의 말투였다.

《저의 아들 가끼누마 쥬스께를 저의 가이샤꾸(일본봉건시기에 할복자의 목을 치는 사람)로 삼았으면 하오이다.》

가끼누마 쇼오다이의 청을 들은 왜장은 물끄러미 쇼오다이와 쥬스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오오?! 요시, 요시… 좋도록 하라!》 하고 뇌까리였다. 아무래도 죽을 놈이니 마지막소원을 들어주는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여긴 모양이였다.

왜장의 승낙을 받은 쇼오다이는 어서 가까이로 오라고 아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쥬스께는 반정신을 잃은듯 어정어정 아버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가 늙어 힘이 진했으니 네가 내 마지막길을 도와야겠다.》

무릎을 꿇고 앉은 쇼오다이는 앞에 놓인 짧은 칼을 들고 흰 수건으로 칼날을 닦았다.

쥬스께는 옆구리에 차고있던 긴칼을 쑥 뽑아 손에 들었다. 늘 쥐던 검이였지만 오늘만은 별스레 차겁고 무거워보였다. 손은 저도 모르게 떨리고있었다.

《못하겠소이다. 전 못하겠어요!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목을… 아니, 칠수 없어요!》

쥬스께는 손에 들었던 검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이놈!》

갑자기 쇼오다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쥬스께의 따귀를 불이 번쩍나게 갈겼다.

볼을 쥐고 나자빠진 쥬스께는 일어설념도 못하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빠가야로! 검을 내팽개쳐? 어서 검을 들지 못해!》

쇼오다이의 눈에서는 불이 황황 타번지는듯싶었다.

더럭 겁이 난 쥬스께는 엉금엉금 기여가서 내버렸던 검을 다시 손에 쥐였다.

《이젠 똑바루 서!》

엉거주춤 일어선 쥬스께의 뺨을 쇼오다이가 다시한번 후려갈겼다.

쥬스께는 또다시 땅바닥에 나딩굴었다.

《너 같은게 내 아들로 태여나다니, 수치스럽고 창피하다! 네 형 마사가께는 조선수군과의 싸움에서 용전분투하다 가끼누마가문의 아들답게 기꺼이 죽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다! 아마 네 형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검을 집어버린 너의 그 손모가질 잘라버렸을게다. 쥬스께, 잘 들어라. 모진줄 알면서도 널더러 내 가이샤꾸가 되라는것은 나처럼 죽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 가문에서 만들어낸 싸움배가 조선수군과의 싸움에서 깨여져 숱한 군사들이 죽었으니 응당 내가 죽어야 하는게 마땅하다. 가문의 수치를 모두 이 아비 혼자 걸머지고 가마. 대신 너는 이 아비의 복수를 꼭 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선수군을 격파할 싸움배를 무어내여 가끼누마가문의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해! 오늘의 이 치욕을 씻지 못한다면 이 아비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것이다. 아비의 원통한 죽음을 제눈으로 목격하고서도 또다시 내 전철을 밟게 된다면 그땐 내가 무덤에서 일어나 네 목을 칠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쇼오다이는 우악스럽게 생긴 손으로 아들의 턱을 쥐여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알게… 알겠소이다.》

《자식, 대답이 작다! 알아들었어?!》

쇼오다이는 다시 쥬스께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하잇!》

휘친휘친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은 쥬스께는 제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하잇! 하잇! 하잇!》

《그래, 장해! 그래야 하구말구. 과시 내 아들답다.》

쇼오다이는 입술짬으로 피가 흘러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있는 아들이 미더운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러구나서 쇼오다이는 《죽음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작하라!》

다시 쇼오다이는 흰 수건을 정히 들어올려 번쩍번쩍하는 칼날을 닦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쥬스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칼자루를 두손으로 틀어쥐고서 머리우로 높게 쳐들어올렸다.

칼을 다 닦은 쇼오다이는 칼날을 수건으로 감아쥐더니 그 끝을 자기쪽으로 돌려눕혔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웃도리를 헤치고 배를 드러내는것이였다.

《윽, 아악!》

어느새 칼날은 쇼오다이의 배에 푹 꽂혀 그의 살갗을 찢고있었다.

쇼오다이의 얼굴은 험상궂게 이지러졌다.

《윽… 어서 내리쳐라, 내리쳐! 악!》

좀처럼 죽어지지 않아 모지름을 쓰는 소리가 쥬스께를 자극했다.

《야앗!-》

쥬스께는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휙- 하고 칼날을 그어버렸다. 칼날 중간으로부터 뭔가에 부딪치는듯 한 충격이 쥬스께의 손으로 전달되였다. 툭-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눈을 떠보니 몸뚱이에서 떨어져나온 아버지의 커다란 머리가 바닥에 뒹굴고있었다. 모가지가 떨어진 몸뚱이에서는 검붉은 피가 콸콸 뿜어져나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쇼오다이의 몸뚱아리가 맥없이 옆으로 털썩 자빠졌다. 내리드리운 쥬스께의 칼끝에서는 선지피가 뚝뚝 떨어지고있었다. …

그때 쥬스께는 마음속으로 이런 결심을 굳히였다.

(나만은 아버지처럼 패장이 되지 말자! 이 가끼누마 쥬스께는 조선수군을 반드시 격멸하고 아버지의 원쑤를 갚을테다!)

그 이후부터 가끼누마 쥬스께는 오직 조선수군의 귀선에만 집착하게 되였다. 가끼누마 쥬스께에게 필요한건 오직 귀선뿐이였다. 그것을 자기 손에 넣어야 강력한 조선수군을 격파할수 있었다. 일본군과 쥬스께에게 있어서 귀선은 말그대로 바다의 지배자였다.

가끼누마 쥬스께는 조선수군의 귀선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데 환장을 하고있었다.

마침 부산포에 건너왔던 가끼누마 쥬스께에게 관포만호 송이첨의 아들 송원서가 걸려들었다. 그때 송원서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고 칼을 들고 들어왔다가 섬오랑캐놈들에게 발각이 되여 붙들려있는 상태였다.

가끼누마 쥬스께는 그에게서 필요한 모든것을 알아낸 후에는 무참히 그를 살해하였다. 진짜 송원서는 그에게 필요없었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가끼누마 쥬스께는 송원서로 둔갑하였다. 변장은 아주 비슷했다. 오래동안 왜관에서 살다나니 또렷치는 못했지만 조선말도 제법이였고 생김새와 나이도 비슷했던 까닭에 쥬스께는 갈데 없는 송원서의 복사판이 되였다.

그로부터 몇년세월 송원서로 변장을 한 가끼누마 쥬스께는 조선남해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귀선의 비밀을 탐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좀처럼 밝혀내기 어려웠다. 누구도 그 배를 무어내는 곳을 알고있지 못하였다.

몇년동안 헛고생을 하고 부산포에 돌아온 쥬스께를 희소식이 기다리고있었다.

전에 옥포바다싸움때에 포로가 되였다가 서약서를 쓰고 살아돌아간 전라좌수영의 우후 리봉태에게 밀정을 들여보냈더랬는데 글쎄 그자로부터 그 귀선을 만드는 위치와 장공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왔다는것이였다.

쥬스께는 환성을 질렀다.

(그러니 전라좌수영의 아래에 있는 돌산도 장공마을앞바다에서 그 배를 무어내고있단 말이지. 곡진장주라… 그놈에게 도해첩이 있다. …)

그달음으로 대마도로 건너간 쥬스께는 배무이에서 섬나라의 일인자라고 하는 다이라를 직접 만났다. 다이라는 쥬스께의 삼촌벌이 되는 사람이였다.

귀선과 도해첩에 대한 희한한 이야기를 들은 다이라는 쥬스께의 요구를 대번에 수락하였다.

도해첩만 가져오면 귀선을 틀림없이 만들어주겠다는 약조를 받은 쥬스께는 그 돌산도라는 곳을 직접 편답하였다. 몇차례 섬을 돌아보며 곡진의 집도 눈여겨 살펴두고 침입로와 퇴각로까지도 상세하게 봐둔 그는 대마도의 해적들을 한배 가득 싣고 돌산도로 건너와 은밀하게 곡진장주의 집을 기습하였다.

애초의 계획은 곡진장주를 위협하여 도해첩을 앗아내고 조용히 빠지는것이였다.

그러나 상상밖에 강씨가 출현하고 개들이 짖어대여 마을사람들이 깨여나자 본래의 계획을 포기하고 곡진장주와 그의 손녀를 랍치해갔다.

배를 타고 내빼던 쥬스께의 머리에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저 곡진장주라는게 보아하니 호락호락 굽어들것 같진 않은데… 저러다 도해첩을 내놓지 않고 훌 죽어버리면 어떻게 한다? 다른 방도가 있어야겠어.)

그리하여 쥬스께는 돌산도에 다시 침투할 결심을 내렸다. 쥬스께에게 필요한건 곡진장주나 그의 손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해첩이였다. 하긴 곡진이 리순신장군의 특별한 보호밑에 귀선을 만들어낸 담책이라고 하니 《살아있는 도해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지만 그는 순순히 말을 듣게 생겨먹지 않았다. 그러니 곡진이나 붙잡아가지고서는 귀선을 만들어낼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쌍선을 놓아야 하였다. 곡진도 잡아가고 도해첩도 찾아가고… 그러니 남는것은 곡진의 손녀뿐이였다. 물론 그 손녀는 곡진이 도해첩을 감춘 장소를 모를수도 있지만 할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손녀를 충동질한다면 도해첩은 분명 찾을수 있을것이였다.

그리하여 송원서로 가장한 쥬스께는 제놈의 졸개들에게 유린당하는 삼보녀를 《구원》하기 위해 《용감》하게 나섰으며 그와 함께 배에서 뛰여내려 돌산도에까지 들어서게 되였다.

하지만 쥬스께에게는 자꾸 자기의 뒤를 밟는 절름발이 회남이 무척 성가신 존재였다. 곡진이 돌장승과 서낭당이 있는 곳에 자주 가군 했었다는 삼보녀와 팔동이의 말을 엿듣고 밤중에 그곳을 들쑤시고 돌아가던 쥬스께는 자기를 감시하는듯 한 절름발이의 시선을 감촉하게 되였다. 그때부터 회남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삼보녀로부터 전 장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나서는 분명 거기에 도해첩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밤새도록 무덤들을 들추다가 끝내 도해첩을 찾지 못하게 되자 차라리 이 기회를 리용하여 시끄러운 회남을 제거해버리리라 작정하고 절름발이가 그런것처럼 지팽이자욱과 발자욱을 여러개 찍어놓고 사라졌다. 이것으로 하여 쥬스께는 눈에 든 가시같던 회남을 무덤도굴의 《진범》으로, 부산포에서 파견되여온 《왜적의 간자》로 몰아붙여 자기의 시야밖으로 쫓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다음부터 쥬스께는 마음놓고 도해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삼보녀의 집에서 도해첩략도가 발견되고 거북바위아래서 도해첩을 끝내 찾아내게 되였던것이다.

원래 쥬스께는 그날 밤 도해첩을 등개가 삼보녀의 집에 보관하였을 때 거기서 훔쳐가지고 달아뺄 궁리도 해보았다. 그러나 절름발이 회남이 섬에 다시 나타나고 캄캄한 밤중에 혼자서 배를 몰아 섬을 탈출한다는게 여간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요행 섬을 탈출한다치더라도 혼자 노를 저어가지고는 전라좌수영의 추격선에 붙들릴 념려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산포에서 대마도로 갈 때 받아두었던 물고기부신을 써먹기로 하였다.

우후는 본래 겁이 많은 량반이였다. 말을 들으니 그는 끓는 기름가마앞에 세워놓고 빠뜨려죽이겠다고 위협했더니 주먹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순순히 서약서를 써바쳤고 자기 부하들의 목도 서슴없이 베였다는것이였다.

쥬스께의 타산은 빗나가지 않았다. 쥬스께는 우후를 통해 품 하나 안 들이고 도해첩을 손에 넣었을뿐아니라 한산도로 가는 배편까지 얻을수 있었다. 우후가 내준 배이니 한산도앞바다는 무사통과일것이고 관포까지 가면 몇 안되는 군사들을 죽여버린 뒤 부산포쪽으로 곧추 빠지면 그만인것이다. 부산포에서 대마도까지는 걱정이 없었다. …

(어느새 날이 저물었는가?)

쥬스께는 상우에 놓았던 술사발의 그늘이 손바닥만큼이나 더 커진것을 보고는 그만 일어나 포구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날씨는 제법 쌀쌀하였다. 저녁때가 되니 파도가 조금 높아진듯 했다.

해변가에 달려들어 바위를 움켜쥐였다가는 스르르 물러나는 파도를 보니 당장 도해첩을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등개와 삼보녀의 손들같이 생각되였다.

(어림두 없다. 이젠 이 가끼누마 쥬스께님의 소유물이야!)

쥬스께는 품안 깊숙한 곳에 건사한 도해첩을 손바닥으로 두어번 두들겨보고는 활개를 치며 포구를 향해 걸음을 다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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