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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회

17. 물고기부신


《도해첩을 끝내 찾아냈소이다!》

팔동은 손에 받쳐들고있던 보를 정중히 벗겼다. 마지막 한꺼풀이 벗겨지자 도해첩은 드디여 밝은 해빛아래 자태를 드러내놓았다.

《흐흐, 이게 그 도해첩이란것이냐?!》

팔동이가 내미는 도해첩을 받아든 우후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해첩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그래, 이걸 어떻게 찾았느냐? 그 계집년이 이걸 가지고있더냐?》

그 소리에 팔동은 명치끝이 알알해와 잠간 낯빛을 찡그리였다.

《아니오이다. 도해첩은 다른데 있었소이다. 배무이장에서 일하고있는 등개와 관포만호 송이첨의 아들 송원서가 힘껏 도와준 덕에 찾을수 있었소이다.》

《관포만호 송이첨의 아들?!》

우후는 놀라는 눈빛이였다.

《그렇소이다. 일전에 곡진장주의 손녀를 왜적의 배에서 구원해낸 바로 그 사람인줄로 아뢰오이다.》

팔동의 말에 우후는 수염을 썩 내리쓸었다.

《과시 량반가문의 후손이 다를지고. 그를 불러다가 큰 상을 내리도록 해야겠다!》

《이미 밖에 대령시켜놓았소이다.》

《그래? 그럼 어서 불러들여라!》

급창(말을 전달하는 일을 맡은 남자종)의 부름소리에 좌수영의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헌데 환히 트인 공간으로는 관포만호 송이첨의 아들만이 아니라 두사람이 더 들어왔다.

대청마루에서 그들을 넌지시 내려다보고있던 우후는 대뜸 눈살을 찌프리였다.

《저놈이야 일전에 군률을 문란시켰던 그 군교놈이 아니냐!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여놓느냐?!》

우후의 노성에 팔동이 제꺽 여쭈었다.

《그때 군률을 문란시킨 죄로 배무이장에 갔던 전 교련관 등개가 옳소이다. 헌데 도해첩을 끝내 찾아낸게 바로 저사람이오이다. 그가 아니였다면 도해첩은 찾지 못했을것이오이다.》

팔동의 설명에 우후는 못마땅한 기색을 지으며 눈길을 옮겼다.

《어허, 게다가 저 괘씸한 계집년까지?》

우후는 완전히 기분을 잡쳐버린 인상이였다.

팔동은 도해첩의 략도를 삼보녀가 찾아냈다고 얘기를 하려다가 말문이 막혀버렸다.

《너는 어째서 저런것들을 한가득 끌구 왔느냐?》

우후의 노여움은 고스란히 팔동에게로 쏟아져내렸다.

《저, 도해첩을 찾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고 또 우후나으리께 도해첩을 바치는것을 직접 보고싶다고 하기에 제가…》

《공을 세웠다구? 그럼 나더러 저놈들 궁둥이라도 두드려주란 말이더냐! 이런 망할것들…》

우후는 쩝쩝 입을 다시였다. 그러다가 문뜩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낯빛에 화기를 띠웠다.

《어- 가만, 그러니 상을 주어야 한다 그 말이지? 아무렴, 그래야 하구말구.》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우후는 세사람을 가까이 오게 하라고 손짓을 보냈다.

《옳다, 너희들이 도해첩을 찾느라고 수고를 하였다. 큰일을 했으니 응당 상을 내려야지. 암… 헌데 어떤 상이 좋겠는지 제마끔 말해보거라.》

그러나 세사람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응당 할 일을 한것뿐이오이다.》

등개의 말이 상당히 우후의 기분에 거슬렸음은 더 말할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우후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응당 할 일이라… 그래, 응당 할 일이였지. 그럼 내가 알아서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 전 교련관 등개를 이 시각부터 다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으로 받아들인다. 군기를 심히 문란하게 하였던 지난날의 과오는 컸지만 도해첩을 찾아온 그 공 또한 작지 않으니 어찌 모른다 하겠는가. 듣거라, 등개는 급수군이 되여 나라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도록 하라!》

순간 팔동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급수군이라니? 그럼 물을 긷는 군사가 되라는 말인가? 그게 상이야?!)

팔동은 분을 참지 못하는 등개가 또다시 무슨 일을 칠지 걱정되였다.

허나 등개의 입에서는 《황송하오이다.》 하는 단마디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안달아난 팔동은 등개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곡진장주의 손녀 삼보녀는 이제부터 역적으로 의심받고있는 곡진과 완전히 의절을 하고 생업에만 착실히 종사하도록 하라-》

등개에 이어 삼보녀에게로 떨어지는 우후의 상이란 결국 할아버지와의 의절이였다. 삼보녀는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우후는 《다음은 관포만호 송이첨의 아들 송원서…》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고?》

우후의 물음에 송원서는 고개를 쳐들다말고 등개와 삼보녀를 피뜩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무슨 결심을 한듯 《나으리께 조용히 아뢰고싶소이다만…》 하고 말꼬리를 흐리였다.

우후는 쾌히 그것을 수락하고 후원으로 데려가라고 눈짓을 하였다.

군사 두엇이 송원서를 데리고 후원쪽으로 가고 등개와 삼보녀는 그만 나가보라는 우후의 손짓에 밀려 수영 담장밖으로 쫓기다싶이 나오고말았다.

뒤따라나온 팔동이 씩씩거렸다.

《뭐, 급수군? 자네 제정신인가? 왜 급수군이 되겠다고 했어?》

등개의 낯빛은 례사롭지 않았다.

《난 급수군이 되겠다고 한적이 없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방금 〈황송하오이다.〉 하구 말한건 누군데?》

팔동이는 도대체 등개의 속을 알수가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그랬지만 급수군이 되란 소리에 한 말이 아니였네. 다시 군사가 되여 나라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라는 말이 고마워 그랬지. 나라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라는거야 좋은 소리가 아닌가.》

《제길… 자네한텐 약이 없다니, 에에…》

등개는 그러는 팔동의 가슴을 툭 쳤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팔동이 등개를 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됐네, 됐어… 참, 우후가 송원서에 대해서는 좀 특별하던데… 자넨 그걸 느끼지 못했나?》

팔동의 물음에 등개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그러나 팔동은 뭔가 단단히 속에 맺힌 사람처럼 진정하지 못하였다.

《보아하니 우후가 량반과 상놈을 갈라보는 눈치더란 말일세.》

《그럴수도 있지 뭘 그러나.》

등개의 대답은 더욱 팔동이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럴수도 있다니, 어쩌면 자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수가 있나?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제일먼저 달아뺀 놈들이 어느 놈들인데… 량반? 흥, 개나 물어가라지. 죽어 백골이 된 다음에야 귀하구 천한 뼈다귀가 어디 있어? 같은 족속들이라고 싸고도는 꼴이란 참 눈이 시려서…》

팔동은 주먹을 내흔들었다.

《그러게 이놈의 세상은 량반놈 세상이라 하지 않던가.》

《세상은 량반놈 세상이여도 백성도 싸안고있는게 나라일세. 제길할, 내가 또 공연한 입씨름을… 가세, 기분두 쓸쓸한데 막걸리나 한사발 걸치세그려.》

그러나 이번에도 등개는 팔동의 청을 거절했다.

《혼자 가라구. 난 좀 봐야 할 일이 있네.》

그제서야 팔동은 등개의 뒤에 서있는 삼보녀를 언뜻 쳐다보았다.

《그럼 그렇게 하라구. 외기러기신세인 이놈은 할수가 없군.》

팔동은 손을 한번 쳐들어보이고는 엊저녁에 삼보녀가 부르던 《강강수월래》를 코소리로 내불면서 마을쪽으로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팔동이 가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등개는 삼보녀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삼보녀는 어떻게 하련? 돌산도로 건너가야지?》

《혼자서는 싫어. 함께 건너가. 정말 급수군이 되여 여기 떨어지려구 그러는건 아닐테지?》

등개는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볼일이 좀 있어. 그러니 먼저 돌아가. 가서 우리 고모님을 좀 돌봐줘.》

《거기는 안 와?》

《내가 안 가면 삼보녀가 춤을 출 때 불은 누가 지펴주겠니. 제꺽 볼일만 보구선 돌아가겠어.》

등개의 말에 삼보녀는 고개를 까딱까딱하였다.

《나도 나왔던김에 대상군어머니 상처에 좋다는 약재를 좀 얻어가지고 가겠어. 의원어른이 몇가지 알려는 주었는데 구할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그 말에 등개는 좀 안심이 되는듯싶었다.

《그럼 약재를 얻어가지고 인츰 섬으로 건너가. 나도 인차 뒤따라가겠어.》

삼보녀는 눈을 내리깔고 등개의 발치만 바라보고 서있다가 등개가 《어서 가.》 하고 재촉해서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채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기였다.

삼보녀까지 보내고난 등개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였다.

이제는 우후가 송원서를 데리고 간 후원쪽 담장안쪽을 살피는 일만이 남았다.

(지금쯤 송원서가 어떻게 하고있을가? 놓치면 안될텐데…)

살금살금 후원쪽 담장을 에돌아간 등개는 옆에 서있는 나무의 아지를 잡고 낑낑거리며 담장우로 올라갔다. 누구도 없는것을 확인한 그는 올라올 때와는 반대로 가볍게 후원 안뜰로 날아내렸다.

락엽이 발밑에서 밟히며 바삭바삭 소리를 내였다. 등개는 소리를 죽여가며 후원에 붙은 안채쪽으로 바투 다가섰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귀를 강구며 있노라니 안에서 우후와 송원서가 나누는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등개는 손끝에 침을 발라 문창호지에 조금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우후와 송원서가 마주앉아있었다.

헌데 우후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우후의 앞에 놓인 널직한 상우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어떤 물건이 하나 놓여있었다.

가만 보니 우후가 그것을 보고 몹시 놀란것 같았다.

《령주님이 보내는 인사를 가지고 왔소이다. 이걸 보이면 아실거라 하셨소이다.》

송원서의 말이였다.

우후는 눈을 크게 뜨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듯 했다.

송원서가 《으흠!》 하며 량눈섭을 세우자 우후는 화뜰 놀라고는 곧 뒤에 있는 궤를 여는것이였다.

등개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우후의 두손은 와들와들 떨리고있었다. 그가 궤속에서 꺼낸것도 역시 크기와 생김새가 책상우에 놓인것과 비슷하였다.

우후는 그것을 상우에 먼저 놓여있던것에 가져다가 마주 대놓았다. 딱 들어맞았다.

(부신이로구나!)

등개는 저 물고기처럼 생긴 부신(둘로 쪼개여 한쪽은 상대방에게 주고 다른 한쪽은 보관하였다가 뒤에 증거로 삼게 만든 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일가 생각하며 귀를 강구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후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있었다.

《아까 제 소개를 안했던가요. 령주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그렇게 떨지 마오. 지체에 어울리지 않소그려.》

송원서의 말투에는 어딘가 야유가 섞여보였다.

《바라는게 뭐요?》

우후는 독사라도 마주하고 앉은듯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당신한테 아주 소용없는 그런 물건짝이요. 우린 당신 목숨값으로 큰걸 요구하지 않겠소. 도해첩만 주면 조용히 물러가지.》

《욕심이 지내 과하구만. 곡진장주를 붙들어갔으면 됐지 이젠 도해첩까지 가져가겠다?》

《건 당신이 상관할바가 못되오. 어서 도해첩이나 꺼내놓구려.》

우후는 완전히 송원서의 손아귀에 쥐여진듯 하였다.

우후는 허리를 꾸부정해가지고 뒤로 돌아앉아 다시 궤를 열더니 도해첩을 꺼내드는것이였다.

《옛소. 도해첩이요.》

우후가 건네주는 도해첩을 받아 송원서는 앞에 놓인 상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귀중한 보물이라도 만난듯이 책표지를 정히 손바닥으로 쓸어보는것이였다.

그때 우후가 소매속에 감춰두었던 단검을 몰래 꺼내드는것이 등개의 눈에 보였다.

(앗!)

우후는 어느새 칼을 들어 힘껏 송원서를 향해 내리찍었다.

그러나 미리 짐작하고있었던듯 송원서는 날래게 몸을 피하고 우후의 칼은 상우에 푹 박히고말았다.

성이 독같이 난 송원서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대뜸 그 칼을 뽑아들고 우후의 목에 가져다대였다.

《이거 왜 이러시오, 우후나으리! 그래 내가 여기 혼자 왔을상싶소? 내가 죽으면 옥포앞바다에서 포로가 되였던 당신이 펄펄 끓는 기름가마앞에서 종내 우리에게 변절하고야만 그 과거가 영영 흑막속에 묻힐것 같은가. 천만에! 나를 보호해주어도 모자랄판에 어리석게 칼을 빼들 생각을 하다니. 난 아직도 당신이 자기가 변절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같이 잡혔던 군사들의 목을 직접 베여버린 사실을 잊지 않구있소.》

한순간에 송원서에게 제압당한 우후는 밸을 부리듯 그를 왈칵 두손으로 떠밀었다. 그리고는 송원서가 칼을 들이댔던 목부위를 슬슬 쓸어보았다.

창호지에 뚫은 구멍으로 그 광경을 낱낱이 본 등개는 속으로 울컥 밸이 치밀었다.

(우후, 네가 그런 놈이였구나! 역적놈!)

등개는 막 달려들어가 두놈의 목을 당장에 따버리고싶었다. 그러나 등개에게는 살아있는 송원서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송원서가 왜적의 간자임을 알면서도 꾹 참아왔던것이다.

송원서가 왜적의 간자라는것을 등개는 이미전부터 알고있었다. 처음 송원서에게 의심을 가진것은 고모와 이야기를 나누던 과정에서였다. 그때 고모는 다만 자기가 삼보녀네 집 울바자앞에서 칼에 맞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었을뿐이였다. 그러나 등개의 머리속에 송원서가 거짓말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것이였다.

고모는 그때 분명 《도해첩이 어디 있어?》 하고 물어보는 어떤 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었다. 그 목소리의 임자는 다름아닌 돌산도기습을 직접 이끈 놈의 목소리였을것이다. 헌데 송원서는 놈들이 곡진장주와 삼보녀를 끌고 배에 올라서는 생뚱같이 통역을 부탁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송원서는 거짓말을 하고있었다. 곡진과 삼보녀를 붙잡은 왜적들에게는 통역따위가 필요없었다. 삼보녀네 집을 쳤을 때도 송원서가 참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그것은 등개 혼자만의 생각뿐이였다. 아무것도 증명된것은 없었다.

등개는 송원서를 좀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헌데 그 찰나에 돌장승이 넘어지고 서낭당이 파헤쳐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든 의심은 절름발이 회남에게로 쏠리고있었다. 그 주위에서 발견된 지팽이자욱이 단서였던것이다.

팔동은 회남이 그랬다고 아예 확정적으로 말하고있었다. 지어 참지 못하고 간자라고까지 했다. 사실 등개도 조금 동요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까지 등개는 회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있기때문이였다.

등개는 회남이 나쁜 사람이라는것이 믿어지지 않아 돌장승곁에 났다는 그 지팽이자욱을 찾아가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오른발쪽이 깊이 눌려있고 바로 곁에 지팽이끝으로 땅을 짚은 자욱이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회남이 걸을 때 바로 그렇게 걷는것 같기도 하였다. 알쏭달쏭해진 등개는 그 이후부터 회남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면서 그의 걸음걸이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등개는 어딘가 돌장승곁에서 보았던 그 발자욱과 회남의 발자욱이 비슷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난다는걸 포착하게 되였다. 회남이가 남긴 오른발자국은 절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회남이는 오른발을 앞끝밖에 짚지 않았다. 분명 돌장승곁에 난 오른발자국은 발뒤축까지 동그랗게 나있었는데…

지나가는 말로 왜 그렇게 걷는가고 물어보았더니 회남이 하는 말이 절룩거리는 발쪽의 신발창만 지내 닳아서 그렇게 걷는다는것이였다. 오른발을 절룩거리면 오른쪽 짚신바닥만 닳아먹어 신발이 짝짝이가 된다면서.

아무때 보아도 회남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른발 뒤축자리가 나있지 않았다.

등개는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나쁜 놈인가? 둘이 다 나쁜 놈인가?)

헌데 이번에는 무덤도굴사건까지 터지였다.

무덤도굴사건이 있은 그날 즉 회남이 사라지던 그밤 팔동이와 헤여진 등개는 돌장승부근에서 뜻밖에도 그를 만나게 되였다.

등개는 그를 보자마자 대뜸 몽둥이를 추켜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회남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마지막타격이 좌절되고 회남에게 제압당한 그 순간 등개의 머리속으로는 피뜩 (이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닌것 같애.)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회남은 죽기내기로 달려드는 등개의 타격을 피하기만 할뿐 치명적인 공격은 가하지 않았던것이다. 목을 감았던 팔까지 스르르 풀어주지 않았던가!

등개는 영문을 알수가 없었다. 회남의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등개는 회남이가 누구이며 지금 돌산도에서 벌어지고있는 사건들이 어떻게 얽혀돌아가고있는지를 짐작할수 있게 되였다.

회남은 그날 등개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송원서에 대한 이야기였다. 회남의 말로는 관포만호 송이첨의 아들 송원서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 사람은 분명 도해첩을 노리고 돌산도에 기여든 왜적의 간자가 분명하다는것이였다. 이것은 등개의 예감과 일치하였다. 등개는 송원서의 뒤를 밟아왔다는 회남의 말을 전적으로 확신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정말로 그는 믿을만 한 사람이였다.

등개는 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진 다음부터는 로역장의 으슥한 곳에서 자주 그와 만나 급한 문제들을 의논하였다.

등개가 지금 실행하고있는 이 계획의 구상도 실은 그들의 지혜를 한데 모아 세워진것이였다. 자칭 《강강수월래》라는 그 계획은 지금 가장 중요한 대목에 이르고있었다.

등개는 자기가 구상한 계획에 대해 신심을 가지고있었다. 그것을 꼭 성공하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것을 위해 등개는 모든것을 참을 각오를 하였다. 설사 눈앞에 아버지를 죽인 원쑤가 얼른거리고 고모의 옆구리에 칼을 박았던 왜적의 간자가 말을 걸어온대도 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해주리라고 생각했다.

등개는 정신을 가다듬고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우후와 송원서가 아직도 밀담을 계속하고있었다.

《흥, 같지않은 칼따위로 누굴 위협할 생각은 하지도 마오. 내 목숨을 가지고 희롱해야 당신에게 리로울건 하나도 없을게요. 도해첩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가고싶거들랑 태도를 공손히 가지오.》

우후는 상우에 놓인 도해첩우에 한손을 올려놓고 무뚝뚝한 얼굴로 송원서를 노려보았다.

《하하, 탄복하게 되누만. 칼날앞에서도 끄떡하지 않는다? 매우 흥미가 있소. 역시 당신은 타고난 벼슬아치요. 괜찮소, 괜찮아!》

송원서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속에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난 당신처럼 배짱이 있는 사람들과 섭쓸리기 좋아하오.

당신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그때 벌써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었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단호하게 자기 부하들의 모가지를 베여버린 당신같은 사람은 사실 쉽지 않은 인물이니까. … 난 당신이 현실적으로 사고할줄 안다고 생각하오. 어떻소, 내 말이 틀리오?》

송원서의 물음에 우후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렇소. 난 어떤 구렁텅이에 빠져서도 헤여나올수 있소. 또 남들이 구렁텅이에 빠지면 어떻게 그곳에서 탈출해야 하는지 알려줄수도 있거던. 당신도 내 도움이 없이는 이 도해첩을 무사히 빼내가지 못할것이요.》

우후는 말을 마치고나서 몇오리 안되는 턱수염을 내리쓸었다.

송원서는 슬며시 칼을 거두었다.

《우후나으리, 그 소린 이 도해첩을 고스란히 내가 가져갈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놓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송원서는 우후의 손바닥아래에 놓여있는 도해첩을 힐끔 곁눈질하였다.

우후도 송원서가 도해첩을 쳐다보는것을 눈치채였다.

《그렇게 탐이 나면 가져가시오. 그러되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조를 먼저 해줘야 하겠소. 그 약조만 지킨다면 난 당신이 이 도해첩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도와주겠소.》

우후는 도해첩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것을 본 송원서의 입귀에 실웃음이 어렸다.

《어련하겠소. 얼마동안은 아마 나를 보구싶어두 볼수가 없을게요. 좀 바쁠테니까. 허지만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고는 장담하기도 힘들것 같소. 어쨌든 우린 서로 이웃이니까.》

(이웃? 퉤, 범이나 콱 물어갈것이지…)

우후는 낯을 찡그리였다.

《구구히 말할것 없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으시오. 우선 오늘 저녁에 한산도쪽으로 가는 배편이 있소. 그 배에는 네명의 군졸들이 타게 되는데 그들의 임무는 이 도해첩을 한산도에 나가있는 통제사대감에게 속히 전달하는것이요. 당신이 그 배를 탄다면 한산도수역까지는 무사통과일거요. 난 그들에게 관포만호 송이첨의 〈아들〉인 당신을 집이 있는 관포마을까지 데려다주라고 할테요. 마침 관포가 거제도 동쪽해안에 붙어있으니 거기서 부산까지는 혼자서도 가낼수 있을것이요. 어떻소, 내 말에 동의하오?》

낯색이 밝아진 송원서가 머리를 끄덕이였다.

《모든것이 내 마음에 드오. 당신은 이런 시골구석에만 처박혀있기는 아까운 사람이로구만.》

송원서의 침발린 말에 우후의 낯빛이 변했다.

《허튼수작일랑 걷어치우고 이젠 이 도해첩을 가지고 내 눈앞에서 썩 사라지시오. 다신 당신의 얼굴을 보구싶지 않으니까.》

우후는 상우에 놓인 도해첩을 송원서쪽으로 쑥 밀어주었다.

원서는 도해첩과 함께 그옆에 놓여있던 물고기부신의 반토막까지 집어들었다.

《우후나으리, 너무 그러지 마시오.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지. 그때도 오늘처럼 우리 일을 잘 도와주기 바라오. 그리고 이 물고기부신은 잘 건사해두는게 좋을듯 하오. 앞으로 꼭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을테니까. 여기 있는 우리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해주고 가겠소. 만일 당신이 딴마음만 먹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생명은 담보받을수 있소. 부디 명심하시오.》

여기까지 말하고 송원서는 몸을 일으키였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좋은 인상을 안고 가게 해주어 정말 고맙소.》

송원서는 감사하다는듯 제법 고개까지 까딱해보였다.

우후는 입만 허- 벌린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송원서는 도해첩을 품속에 쓸어넣은 다음 바람을 일구며 돌아서 나갔다. 문밖을 채 벗어나기 전 송원서는 피끗 몸을 돌려 우후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마의 땀을 좀 닦소. 추운 날에 무슨 땀을 그리 흘리시오?》 하고 제법 핀잔조로 한마디 뇌까리더니 쓰겁게 웃으며 나가버렸다.

방안에 홀로 남은 우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넓은 팔소매로 질벅하게 흐르는 이마의 땀을 훔쳐내였다.

(이 천하에 너절하고 비렬한 원쑤놈들!)

등개는 너무도 격분스러워 이를 박박 갈았다. 그러다가 송원서를 놓쳐버릴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시 후원의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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