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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회

13. 잠들수 없는 밤


강씨는 요즘 들어 상처가 많이 나았다.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해도 조금 부축해주면 퇴마루를 내려서 울바자가 있는 곳까지는 제발로 걸을수 있었다. 바다일로 단련된 몸이라서 그런지 하루하루 나아가는게 눈에 뜨일 정도였다.

등개는 배무이장에서 힘든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선 고모가 있는 큰방에 들려 문안인사부터 여쭈군 하였다.

오늘도 팔동이와 문앞에서 헤여진 등개는 큰방으로 들어가는 퇴마루에 올라서서 《고모님!》 하고 우정 밝은 목소리로 찾았다.

《왔구나. 어서 들어오너라.》

강씨의 나직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등개는 조심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추운데 힘들었지?》

강씨는 이불밖으로 손을 내밀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아니예요, 바람이 그렇게 차겁지는 않아요. 그런데 고모님은 좀 어때요?》

등개는 고모의 곁에 주저앉아 이불밖으로 나온 거칠거칠한 그의 손을 꼭 감싸쥐였다.

《이젠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말아.》

조카를 대견스레 바라보던 강씨는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바람이랑 들지 않게 조심하세요. 의원어른이 그러는데 바람을 맞아 덧나면 안된대요. 참, 의원어른은 벌써 다녀갔어요?》

등개는 초약을 달인 냄새가 나는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 그 사람이랑 같이… 거 그때 삼보녀를 구원해주었다던 그 총각 있잖니, 이름이…》

《송원서 말이예요?》

《그래, 그 송씨란 총각. 의원님하구 같이 왔댔다. 총각이 아예 의원님댁에 눌러앉은 모양이더라. 왜적들에게 부모를 다 잃어 외토리라면서?》

《예, 그래요.》

그 말을 들은 강씨는 《에그, 저걸 어쩌노.》 하면서 수건으로 눈굽을 찍어내였다. 대상군답지 않게 눈물이 헤픈 강씨였다.

《너무 걱정을 말아요. 란시인데 어쩌겠나요.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등개는 가뜩이나 깊은 상처를 입고 고생하고있는 고모가 병이 더할가봐 위안을 하였다.

그러나 강씨는 《그래, 탈이지. 모두 그렇게 가족들을 잃고나서 가슴들이 쓰려서 어찌한다더냐?》 하면서 또다시 머리맡의 수건을 들어 눈굽에 가져가는것이였다.

《참, 고모님두…》

등개는 고모의 따스한 손을 정차게 어루쓸었다.

《오, 너 시장하겠구나. 어서 밥먹어라.》

강씨는 하루종일 힘들게 일을 하다 들어온 조카앞에서 괜한 사설질을 늘어놓았다는 생각에 부엌쪽으로 등개를 떠밀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먹지요 뭐. 고모님도 식사전이겠는데…》

《아까 의원님이 왔다가신 후에 삼보녀랑 같이 한술 들었다. 삼보녀가 말은 안해도 네 걱정을 수태 하는 눈치더라. 보면 볼수록 참 정이 가더구나.》

《말도 안하는데 내 걱정을 하는지 안하는지 고모님이 어떻게 아셔요?》

《내가 대상군 몇년짼데 그것도 모를가. 눈빛만 보아도 알지. 그애가 널 얼마나 극진히 생각하는지 아니?》

강씨는 괜히 조카의 손등을 찰싹 쳤다.

《에이구, 이 란리가 빨리 끝나야 너희들 혼례도 치를수 있을텐데.》

《고모님도 참… 삼보녀가 고모님 눈에 들었다면 저도 기뻐요.》

강씨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여났다.

《이런 싱거운 녀석, 너도 빨리 삼보녀에게 장가들고싶은게다? 호호!》

강씨의 말에 량볼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등개는 《아니, 나야 뭐… 란리가 빨리 끝났으면 했지 장가가고싶은 생각은 아직 없어요.》 하고 말하더니 후닥닥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는것이였다.

그러는 조카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강씨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한껏 어렸다.

(저녀석 장가가는 날을 오라버님이 보셨다면…)

강씨는 갑자기 먼저 간 오라버니가 생각났다.

(오라버니가 제 아들이 저렇게 자란것을 보셨으면 얼마나 대견해할고…)

부질없는 생각에 넘어난 눈물이 베개잇을 적시는통에 강씨는 또다시 수건으로 눈굽을 찍었다.

어느 틈에 밥을 다 먹었는지 문이 벌컥 열리며 등개가 들어왔다.

《고모, 왜 그러세요? 몹시 아파요?》

등개는 고모의 손에 쥐여진 수건을 뽑아들고 고모의 눈물자욱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됐다. 이젠 가서 자거라. 원, 녀석두…》

강씨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지어보이며 머리를 끄덕해보였다.

그러나 등개는 갈 잡도리가 아니였다.

《오늘두 여기서 자겠어요. 고모와 같이 자는게 마음이 편해요.》

등개는 장농우에 얹어놓았던 이부자리를 내려다가 강씨옆에 펴놓고 누웠다.

정찬 눈길로 조카를 바라보던 강씨는 《네 좋을대로 하려무나.》 하고 말하며 조용히 두눈에 물기어린 웃음을 담았다.

장공마을의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있었다. 이따금 어느 집 개가 컹컹하고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러고나선 다시 고즈넉한 정적만이 집주위를 맴돌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별들이 까박까박 조으는 소리가 들릴것만 같았다.

《불을 끌가요?》

《놔둬라. 이따 내가 끄마.》

등개는 머리를 돌려 고모쪽을 피뜩 바라보았다.

《안 주무세요?》

그 말에 강씨는 입귀에 웃음을 그리더니 《어쩐지 잠이 안오는구나.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나도 이젠 늙었는가보다.》 하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러는 고모를 바라보고있던 등개는 아주 그쪽으로 돌아눕고말았다.

《나도 잠이 안 오는군요.》

《불을 끄라니?》

《아니, 그런게 아니예요.》

《그럼,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강씨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등개는 《후유-》 하고 한숨을 내불었다.

강씨가 나무랐다.

《사내자식이 무슨 한숨이니? 방바닥이 다 꺼지겠구나.》

그래도 등개는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도대체 왜 그러니?》

《저… 고모. 난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등개는 뭔가 머리속이 복잡한 사람처럼 낯빛이 컴컴해가지고 천천히 말을 뱉기 시작하였다.

《만일 도해첩이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장주어른과 삼보녀는 어떻게 될가요?》

그 말에 강씨는 갑자르면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분명 장주어른은 역적의 루명을 쓰게 될거고 역적가문이라고 삼보녀도 관기로 처박히게 되겠지요?》

등개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피뜩 강씨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강씨는 우정 엄한 목소리를 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너 혹시 삼보녀와 약혼한것을 후회하는게 아니냐?》

《아니, 그런건 아니예요.》

등개는 서둘러 고모의 말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강씨는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조용했어도 저력이 있었다.

《그런것 같지 않구나. 너는 지금 만약 도해첩이 나타나지 않아서 장주어른이 역적의 루명을 쓰게 되고 삼보녀가 역적의 자손으로 굴러떨어지게 되는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그 걱정을 하고있지?》

《아니란데두요.》

등개는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를 내고는 고모의 눈길을 피해 얼굴을 돌리였다. 허나 강씨의 눈길은 조카의 피부를 찌르는듯 했다. 또 그가 하는 말 한마디한마디는 심장을 쿡쿡 쑤시는것 같았다.

《등개야, 내 눈을 똑바로 봐라.》

고모의 말에서는 무시할수 없는 그 어떤 위압감 같은것이 느껴졌다.

등개는 눈길을 돌려 고모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속마음까지 낱낱이 들여다보는듯 한, 그래서 마음이 순결하지 않고서는 감히 마주 바라보기조차 벅차보이는 고모의 두눈은 지금 자기의 불안스런 표정뒤에 감추어진 진짜얼굴을 찾아내기라도 하려는듯 시선이 고정되여있었다.

하지만 등개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강씨는 맑고 흐트러지지 않은 조카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지금껏 아껴왔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등개야, 내 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나는 너를 낳아 젖먹여준 친어미도 아니고 또 네게 가슴아픈 말을 탕탕 해도 될 정도로 그렇게 사랑을 기울인 사람도 못돼. 허지만 오늘은 하나밖에 없는 네 고모로서, 너의 성장을 늘 옆에서 지켜보며 먼저 간 네 어미를 대신하여 너를 감싸주고싶어 나름 애써왔던 너의 유일한 피붙이로서 한마디 해야겠다.

등개야, 한번 정을 준 사람을 놓고 저울질을 하면 못쓴다. 지금 그애옆에 남은게 누가 있니. 할아버지 한분만을 믿구살던 그애가 왜적들에게 그분마저 빼앗기고 혼자가 돼버렸구나. 이제 너마저 그를 배척해버리면 정녕 그애가 갈 곳이 어디란 말이냐? 뭐, 도해첩을 찾지 못하면 그애 할아버지가 역적이 된다구? 도해첩을 찾든 못 찾든 곡진어른은 절대로 역적이 아니야. 그건 이 고모가 장담할수 있어. 삼보녀도 그렇다. 삼보녀와 네가 약혼을 한 이상 너희들의 운명은 이미 한바줄에 꽁꽁 묶여있는거나 같애. 등개야, 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맘속에 품고 사는 이 고모를 실망시키지 말아. 자신을 믿듯 그들을 믿어라. 우선 믿고 그 다음 도해첩을 찾아낼 궁리를 해야지 않겠냐.

난 네가 크면서 아버지를 꼭 닮는게 두려운적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네 아버지처럼 정의롭고 대가 바르신분은 쉽지 않단다. 그런 아버지를 빼닮으며 성장하는 너를 보는게 이젠 내 기쁨이다. 너는 꼭 네 아버지처럼 굳센 사람이 되여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니?》

강씨의 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용하게 시작해서 조용하게 끝났다. 그러나 등개의 가슴속에 일으킨 파문은 잔잔하지 않았다.

등개는 고모를 새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친 바다일에 험해진 얼굴과 주름진 이마와 세괃아진 손등, 어릴 땐 몰랐었는데 퍽 수척해지고 허약해진 몸이 눈에 아프게 밟혀들었다. 하지만 등개는 고모가 바로 자기의 눈앞에 큰 산과 같은 존재로 버티고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왔다.

《예, 알았어요. 내 꼭 도해첩도 찾고 삼보녀도 지켜내겠어요.》

등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넙죽 절을 하였다.

그러자 강씨는 《재밤중에 무슨 절이냐. 고단하겠는데 어서 쉬여라.》 하고 말하는것이였다.

《알겠어요, 고모님도 어서 주무세요.》

등개는 이불을 끌어올려 강씨의 드러난 어깨를 가리워주었다.

《원, 녀석두…》

강씨는 조카를 바라보며 정답게 웃었다.

《참, 등개야.》

《예.》

강씨의 부름에 등개는 잠자리에 들다말고 돌아보았다.

《회남이란 사람을 잘 아느냐?》

《갑자기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의아해진 등개는 고모를 향해 바로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글쎄… 난 어쩐지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심장이 후두둑 뛰군 한단다.》

《예? 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강씨는 벌써 심장이 쿵쿵 뛰는듯 눈을 감고 한동안 아무말도 없었다.

(호- 내가 지금 등개에게 괜한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이젠 눈이 어두워서 잘못 봤을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강씨는 아무리 눈은 잘못 본다치더라도 쿵쿵거리는 심장만은 속일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씨는 저녁쯤에 병을 보아주느라고 집에 들렸던 의원어른을 배웅할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등개에게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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