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정종여는 비단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조선화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1954년부터 1964년까지의 10년기간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강좌장으로 있으면서 주체미술의 주역들로 될 수많은 후비들을 육성하였다.

전후의 초기만 해도 조선화계에서는 복고주의가 우심했던지라 적지 않은 기성화가들이 옛것만 고집하면서 젊은 화가들의 진취적태도에 제동을 걸고있었다. 하지만 정종여는 제자들의 혈기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시도들을 적극 지지해주군 하였다. 정영만, 정창모, 리률선, 리창 등 후날의 유명한 중진들이 그의 고무를 받으며 대학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열가지를 그리자면 한가지에라도 정확히 정통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 현지에 나가 묘사대상을 구체적으로 사생하여야 한다고 늘쌍 강조하군 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뜬금으로 그리거나 사진을 보고 그리는것을 질색하였으며 철저히 현실에 의거하여 창작하는 사실주의화가였다. 그가 그린 조선화 《5월의 농촌》을 보아도 복숭아나무의 가지며 꽃들도 그렇고 닭들도 깃털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여있다.

미술교육에서 실기교육이 가지는 중요성을 잘 알고있던 그는 강의만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활동으로 학생들을 이끌어나갔다. 그가 남긴 력작들의 대부분이 대학교편을 잡고있던 나날에 창작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화가로서뿐아니라 교육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하기에 정종여는 제자들에게 성의를 다한 인간적인 스승이였다고 후배들은 말하고있다.

조선화 《락동강할아버지》를 창작하여 우리 미술사에 자욱을 남긴 인민예술가 리창은 대학시절 정종여의 신세를 많이 진 제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시인 리용악이다. 정종여와 리용악은 남녘에 있을 때부터 친분을 맺어온 사이였다.

당시 미술대학은 전쟁때 소개되여있던 평안북도 룡천군에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산두리에는 큰 기와집들이 많았는데 그 집들을 교사로 리용하고 학생들은 농가들에 분숙하고있었다.

그때 정종여는 어느 농가의 웃방에 화실을 꾸려놓고있었는데 친지의 아들인 리창을 그곳에 기숙하게 하면서 개별지도도 주고 교원의 창작과정도 지켜보게 하였다고 한다.

정종여는 학자풍이라기보다 농민풍에 가까왔고 농가에서 나서자라서인지 자연과 농촌생활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있었다.

산두리시절 누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자체로 심어먹으면 되지 않느냐며 실천에 옮기군 하였고 어딜 가서나 밤도 줏고 도토리도 줏고 약초도 즐겨 캐군 하였다. 길을 가다가도 눈길을 끄는 풀을 발견하면 맨손으로 캐서 흙을 툭툭 털고는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씹어보기도 하는것이 그의 례사로운 모습이였다.

산두리에서 10리가량 가면 백마강이 있는데 한번은 정종여가 리창을 데리고 뱀장어를 잡으러 강에 나갔던적이 있었다. 부인은 큰일이나 칠듯이 떠나는 그들에게 삶은 감자를 점심삼아 싸주었다. 감자는 가던 도중에 들판에 퍼더앉아 다 먹어치우고 백마강에 당도한 그들은 종일토록 송사리 한마리 건지지 못한채 헛물만 켜고말았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무안해서 오는 도중에 뱀장어를 사들고 와서는 부인에게 자기가 잡아왔다고 능청을 부리던 스승의 모습을 리창은 웃으며 회상하였다.

사람들은 정종여에 대해 박식하고 생활을 사랑하는 다감한 예술가였다고 한결같이 회억하고있다.

해박한 상식가였던 그는 특히 의학과 음식분야에 남다른 조예를 가지고있었다. 어렸을 때 약국과 개인병원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언제나 의학서적들을 즐겨 읽었고 건강상식이 풍부했으며 반의사로 불리울만큼 의술에도 능했다.

그는 음식과 관련하여서도 아는것이 무척 많아 여럿이 모여앉아 함께 식사할 때마다 하나하나의 음식들을 가리키면서 이건 뭐가 좋고 저건 어디에 좋다는 식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었는가 하면 때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잉어회를 치기도 하고 추어탕을 끓이기도 하였다는것이다. 그 덕에 리률선도 스승에게서 추어탕만드는 방법을 배웠고 부인 역시 남편에게서 여러가지 음식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오락회가 벌어지면 닭소리를 신통하게 내여 모두를 웃기군 하였다는 그, 휘파람으로 노래를 멋지게 형상하군 하였다는 로화가의 유쾌하던 모습은 오늘도 사람들의 추억속에 인상깊게 새겨져있다.

흔히 화가들속에서 나도는 말이 유화가들은 큼직큼직하고 승벽심이 강한데 비해 조선화가들은 대체로 성정이 착하다고들 한다. 비슷한 말인지 정종여도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이였다.

그는 사람들앞에서 틀을 차리는 성미가 아니였고 소탈하고 붙임새가 좋아 처음 만나는 사람도 구면지기처럼 터놓고 대하군 하였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인간적으로 따랐고 스승의 풍모에서 많은것을 배웠다.

정종여는 많은 후비들을 키워냈을뿐아니라 조선화의 우월한 화법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하기 위한 연구사업도 적극 벌려 《채색화에 대하여》, 《묵화에 대하여》, 《채묵화에 대하여》, 《조선화재료에 대한 사용법》 등 일련의 교수요강들을 작성하였으며 조선화실기기초를 완성하고 조선화교육을 과학화하기 위한 사업에서 중요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와 함께 《혁명적인 채색화를 힘차게 발전시키자》, 《조선화분야에서 채색화발전을 위한 몇가지 의견》 등 조선화발전과 관련한 여러 론문들도 활발히 집필하였다.

1964년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화분과위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우리의 민족회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에 모든 힘을 다 바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밑에 미술계에서 혁명적전환이 이룩되던 나날에 정종여는 조선화부문의 책임일군으로서 조선화를 기본으로 우리 미술을 발전시켜나갈데 대한 주체적문예사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그는 조선화화가의 대렬을 결정적으로 늘이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중앙과 지방에서 진행된 조선화실기강습을 여러차례 조직집행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할 미술작품들을 전부 조선화로 창작하도록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미술가동맹에서 사업하는 나날에도 그는 조선화 《만경대설경》(1970년), 《청봉의 아침》(1973년, 리병호와 합작), 《양어장의 봄》(1977년), 《모란꽃과 병아리》(1977년), 《쏘가리》(1978년) 등 우수한 작품들을 내놓았으며 1978년 이후에는 만수대창작사 조선화단에 있으면서 조선화 《비파와 밀화부리》(1979년), 《모란꽃》(1979년), 《무궁화》(1981년)를 비롯한 많은 성과작들을 내놓았다.

정종여는 몰골기법을 비롯한 다양한 기법의 능수였다.

그는 현실을 깊이 연구하고 묘사대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 힘썼으며 그것을 자기의것으로 소화하기 전에는 절대로 붓을 들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가나 늘 속사첩을 들고 다녔다. 이른아침 이슬을 헤치며 모란꽃을 해부학적으로 파고들어 탐구하였고 해종일 양어장에서 잉어의 움직임을 관찰하였는가 하면 닭과 제비를 잡아놓고 털들을 세여보며 그 생태의 밑바닥까지 놓침없이 살피고 습작하는것은 그가 창작에 앞서 반드시 진행한 어길수 없는 공정이였다. 때문에 그의 붓은 대상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 기초우에서 대담하고 정확하였다.

언젠가 꽃을 그리려는 아들을 데리고 대동강가에 나갔었는데 꽃이 피여나는 모습을 직접 보아야 한다면서 밤을 새워가며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을 다 관찰하게 하고서야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는 일화는 그의 진지한 창작태도를 잘 말해주고있다.

정종여는 그림을 그릴 때 사색을 많이 하면서 그리는 화가였다. 큰 화조화를 하루동안에 일필휘지하여 완성하는 화가도 있었지만 그의 경우에는 얼마간 그리다가는 붓을 놓고 구도며 색상을 두고 사색해보다가 다시금 붓을 들고 하는 식으로 여러날이 걸려서야 완성을 하는 류형이였다.

그는 수많은 몰골작품들을 창작하였는바 그중 꽃으로는 모란꽃을, 동물로는 닭을 제일 많이 그렸다.

미술후비육성사업에서 세운 공로로 그는 1961년에 부교수의 학직을 수여받았으며 미술창작에서 이룩한 공로로 1974년에 공훈예술가, 1982년에는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정종여는 1951년부터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이였으며 1953년부터는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집행위원으로, 1961년이후에는 문예총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한생에 걸쳐 1 900여점의 조선화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은 조선미술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들에 국보작품으로 소장되고 이딸리아, 프랑스 등 서유럽나라들에도 널리 소개되였다.

정종여는 1984년 12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과 관련하여 신문 《민주조선》과 《평양신문》에 부고가 실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사망한지 이태후인 1986년 12월에 정관철, 정종여 2인전람회를 열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하여 전쟁시기부터 1981년사이에 창작한 그의 작품들가운데서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60여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였으며 수많은 관람자들이 찾아와 로화가를 추억하였다.

화가는 오래전에 우리곁을 떠났으나 민족문화를 중시하는 조선로동당의 정책에 의하여 조선화의 기법은 오늘도 꿋꿋이 이어지고있다. 정종여의 가정만 놓고보아도 아버지에게서 붓쥐는 법을 익히던 그의 맏아들 정희진이 어느덧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실장으로, 공훈예술가로 재능을 떨치고있는데 이어 오늘은 그의 손자가 평양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있다.

민족의 은혜로운 어버이품에 안겨 민족회화의 전성시대를 직접 체험하면서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한 정종여의 한생은 우리로 하여금 시대와 예술에 대해 다시금 깊이 음미해보게 한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1)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2)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3)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1) 항쟁의 거리에서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2) 그가 안긴 품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3)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1)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2)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3)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4)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1)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2)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3) 그의 삶은 영원하다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1)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2) 인생의 가치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3)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1) 《해변》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2) 《5월의 농촌》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3)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4)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1) 족쇄를 찬 희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2) 환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3) 웃음의 철학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