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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회

3. 이제 남은 단 한가지


주변바다 야간순찰을 마치고 귀항한 등개는 팔동이에게 뒤일을 부탁하고는 곧 뛰여내려 수영쪽을 향하여 잰걸음을 놓았다.

(내가 너무 서두르는게 아닐가? 벌써 나왔을리 만무할텐데…)

등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통제사 리순신이 왜적의 길목을 막느라고 한산도에 나가있으니 전라좌수영의 일은 우후(수군통제사의 보좌관, 정3품의 벼슬) 리봉태가 좌지우지하고있었다. 헌데 우후는 통제사와는 사뭇 달라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법이 없었고 저녁에 늦게까지 일을 보는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번을 마친 군교들은 순찰보고를 위해 장시간을 대청아래서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우후의 게으른 습성을 잘 알고있는 어떤 군교들은 번을 서고는 제창 보고를 위해 수영으로 가는것이 아니라 주막 같은데 들려 막걸리를 한잔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른 다음에야 흐느적흐느적 수영으로 가군 하였다. 그렇더래도 착실하게 얼마동안을 기다릴게 뻔했다.

등개도 몇차례 그런 일을 당해보아 공연히 빨리 간다는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설사 또 헛걸음을 걷는다고 하여도 마음이 찔려서 다른 군교들처럼 주막집 같은 곳으로는 갈수가 없었다.

허나 웬걸, 수영의 대문은 이른아침부터 활짝 열려져있었다.

(오늘 아침은 해가 서쪽에서 떠올랐는가? 어떻게 된 일이야? 아하, 벼룩이에게라도 물려 새벽잠을 설치신게로군.)

이런 생각을 하며 수영안에 들어서니 정말 우후가 벼룩이에게 궁둥이를 물린 사람처럼 잔뜩 오만상을 찌프리고 대청마루에 나와 앉아있었다.

《교련관 등개 번을 마치고 돌아왔음을 아뢰오.》

등개는 섬돌앞에 다가가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사뢰였다.

《무어 다른 일은 없었느냐?》

처음부터 곱지 않은 눈으로 등개를 바라보고있던 우후가 뜨직뜨직하는 말이였다.

《별다른 징후는 없었소이다.》

《없었다? 없었단…말이지.》

우후는 등개의 보고에 뭔가 석연치 않아하는 태도를 나타내였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느냐?》

등개는 갑자기 물어보는 우후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왜 이래?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분명 다른게 없었는데…)

《소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이다.》

그러나 우후의 질문은 계속되였다.

《어제 밤엔 바다감시를 누가 했느냐?》

《팔동이와 제가 나갔었는데 둘이 번갈아 가며 번을 섰소이다.》

《그놈은 어째 아니 왔느냐?》

《지금 배를 지키고있소이다.》

그 말에 우후는 벌컥 화를 내였다.

《배를 지켜? 배나 지키라고 숱한 화포들을 실어서 바다에 내보낸줄로 생각하느냐? 도대체 네놈들은 번을 제대로 서기나 했어?》

(갑자기 웬 트집이야?!)

우후의 이 말은 좀 억울한 질책이였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을 들은 등개는 가슴 한구석이 섬찍해왔다.

《네놈들이 눈을 감구 졸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왜적들의 배가 수영앞에까지 버젓이 활개를 치며 들어온단 말이냐? 이래도 번을 제대로 섰다고 우길셈이냐?!》

《수영앞에 왜적배가 들어오다니… 그건 무슨 소리오니까?》

등개는 깜짝 놀라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걸 내게 물어? 이 괘씸한 놈같으니라구… 네놈이 밤새 자빠져 코고는새에 왜적들이 돌산도를 기습하였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할것이냐?》

우후는 발까지 탕탕 구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등개는 박달나무몽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골속에서 윙윙- 소리가 나는 바람에 우후의 말을 더이상 알아들을수 없었다. 오직 돌산도가 간밤에 왜적의 급습을 받았다는 그 말만이 귀속에서 뱅뱅 돌았다.

(돌산도가 급습을 당하다니?! 돌산도가… 아니, 그럴수 없다!)

등개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수영을 나와 포구까지 와닿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장작개비처럼 뒤잔등에 떨어지던 우후의 노성이 띄염띄염 머리속에 떠오를뿐이였다.

《이 끓는 기름가마에 빠뜨려 죽일놈들같으니라구… 썩 나가서 자초지종을 알아오지 못해?!》


《자네 무슨 일인가? 얼굴에 시커먼 구름장이 떠도네그려.》

배다리에 걸터앉아 등개가 돌아오길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있던 팔동이 정신나간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다가오는 등개를 띄여보고 다짜고짜 이렇게 물어보았다.

《큰일났네. 돌산도가 간밤에 급습을 받았대.》

《뭐라구, 돌산도가?! 누가 그랬단 말인가?》

《왜구들이래.》

《임자 무슨 소릴 하나, 왜구들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단 말인가?》

《글쎄, 나두 뭐가 뭔지 통 모르겠어. 좌우지간 섬에 빨리 건너가 자초지종을 알아오라는 우후의 령이네.》

《큰일났군.》

팔동은 등개와 함께 다시 배에 올랐다.

삐걱삐걱 노를 젓는 소리만이 배전에 가득찼다.

배는 인츰 돌산도의 해안에 접근하였다.

등개는 배를 세우지 말고 해안을 따라 계속 노를 젓게 하였다. 왜적들이 돌산도를 덮쳤다면 분명 해안에서 멀지 않은 마을일텐데 200리가 훨씬 넘는 해안선을 발로 모조리 걸어본다는것은 우둔한 생각이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띠염띠염 마을들이 널려있어 급습당한 마을을 면바로 찾아내기가 조련치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해안을 훑으며 배를 몰아가느라면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아낼것 같았다.

배전밖으로는 거무스레한 돌산도의 풍경이 흘러가고있었다. 말이 없는 돌산도는 묵묵히 바다우에 얼굴을 드러내놓고 번을 선다면서도 왜적의 침입 하나 막아내지 못한 등개를 날카롭게 쏘아보고있는듯싶었다.

(등개, 네가 그러고도 조선수군의 군교냐!)

등개는 차마 돌산도의 사람들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말 돌산도가 왜적의 기습을 받았을가?)

흔들거리는 배우에서 등개는 가능한 모든 가설들을 다 따져보았다.

계사년(1593년)에 진행된 그 유명한 진주성싸움이후로 싸움의 일시중단을 제기한 왜적들은 서생포- 거제로 압축된 남해안의 좁은 구역안에 들어박혀 좀처럼 나올념을 못하고있었다. 륙지에서도 바다에서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이따금 산속에 숨어지내던 패잔병부대들이 굶주림을 참다못해 마을들에 내려와 략탈을 했지만 그것도 싸움의 일시중단 초시기에 일어난 일들이였고 몇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모든것이 안정되여있었다.

멋모르고 밝은 세상에 용감하게 나왔다가 날아드는 신바닥에 대가리를 깰번 하고 깜짝 놀라 어두운 돌짬안에 몸을 숨긴채 숨만 할딱거리는 새앙쥐의 꼴이 된 왜적들은 괴수들의 엄명에 의해 좁은 지역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있었다.

특히 왜적의 수군은 거제도 서쪽지경으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고있었다.

부산포에서 남해로 통하는 왜적들의 해상통로는 한산도에 나가있는 리순신장군에 의해 이미 든든히 차단되여있었다.

그러니 본거지가 있는 부산포에서부터 여기 돌산도까지, 그것도 한산도를 거쳐야만 하는 어려운 배길을 타고 왜적들의 기습이 단행되였다는것은 과히 믿기가 어려운 일이였다. 게다가 어제 밤엔 등개자신이 직접 그 배길에 나가 감시를 진행하지 않았던가!

(왜적이 거기로 기여들었다면 내 눈에 안 띄였을리가 없을텐데…)

등개는 종내 의문을 풀수 없었다.

물론 이 넓디넓은 바다에 배길이 하나밖에 없을수는 없다. 그러나 한산도의 주변은 이미 철통같이 봉쇄되여있다는것을 왜적들도 잘 알고있다. 그러니 돌산도를 기습한게 정말로 왜적들이 한짓이라면 기필코 한산도만은 에돌아왔을것이다. 남쪽으로 쑥 내려갔다가 먼바다를 돌아서 다시 북서쪽으로 배길을 잡으면 얼마든지 돌산도로 들어올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리유가 있었던걸가? 그곳은 파도가 너무 세차고 물결이 거칠어서 오래된 배군들도 가기 저어하는 곳이 아닌가. 그것만이 아니다. 요행 큰 파도를 만나지 않고 천신만고를 해가며 돌산도근처까지 왔다손치더라도 바로 돌산도의 코앞에는 전라좌수영의 싸움배들이 기치를 펄럭이며 항상 대기상태를 갖추고있지 않는가. 이런 조건에서 돌산도에 선뜻 배를 댄다는것이 가당한 일이겠는가. 섬오랑캐들로서는 죽음의 구뎅이에 스스로 발을 들이미는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거리일것이다. 간특하고 교활무쌍한 왜구들이 스스로 저 죽을 구뎅이에 제발로 기여들어왔다는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무엇때문에 왜적들이 돌산도를 노렸는가. …

모든 가설들을 정리해보면 이제 남는것은 단 한가지, 돌산도를 들이친 왜적들에게 죽음마저도 불사해야 할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는것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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