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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화가 정종여가 조선화발전을 위해 남긴 또 하나의 공로는 시대에 민감한 적극적인 인물주제화창작으로 조선화를 새로운 높이에 올려세우는데 이바지한것이다.

전후 우리 조국의 력사는 말그대로 기적의 세월이였다. 미제가 백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장담하던 페허우에서 날에날마다 세기를 주름잡는 자랑찬 창조물들이 용을 쓰며 솟구쳐올랐다. 사람들의 심장도 커지고 안목도 넓어졌다. 세인들은 경이적인 변혁이 펼쳐지는 이 땅을 가리켜 《천리마조선》이라고 놀라움에 넘쳐 부르고있었다.

허나 조선화계에서는 비약하는 현실에 미처 따라서지 못하고있었다. 많은 조선화화가들이 종래의 관념대로 여전히 화조화나 풍경화에만 집착하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투쟁모습을 담은 인물화에는 관심을 덜 돌리고있었고 설사 인물화를 취급하는 경우에도 기껏해서 풍속화나 미인도를 그리는것이 고작이였다. 아직도 미술부문에서는 조선화가 묘사기법의 보수성과 재료상 제약성으로 하여 인물주제작품창작에서 서양화만 못하다는 그릇된 견해가 지배하고있었다.

문제는 화가들의 뒤떨어진 창작자세에 있었다. 시대는 줄기차게 전진하는데 화가들은 의연히 진부한 창작관념을 털어버리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로부터 정종여 역시 한때는 어지간히 진통을 겪기도 하였었다.

1955년에 그는 《까치의 습격》이라는 조선화를 발표한적이 있었다. 큰 화폭에 가지들이 얼크러져 뻗어나간 거목 한대가 서있었는데 구렝이 한마리가 까치둥지를 터는 바람에 급해난 까치들이 가로세로 떼를 지어 구렝이한테로 날아들며 요동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였다.

구도와 필치에서 화가의 기량이 느껴지는 그림이였으나 대중의 호평을 받지 못하였고 평론계에서는 미학적안목이 바로서지 못하여 자연에 있는것을 맹목적으로 옮겨놓았다고 작품을 비판하였다.

당시 정종여는 미술대학 조선화강좌장이였는데 강좌에는 조선화과를 2기로 졸업한 리률선이라는 신인교원이 있었다. 전쟁시기 한다리를 잃은 영예군인으로서 후날 40여년간이나 조선화학부장으로 사업한 리률선은 학생시절부터 정종여를 비롯한 여러 스승들의 남다른 관심을 받아온 제자였다.

어느날 그가 강좌장실에 들어가니 정종여가 퇴근시간이 퍽 지났는데도 번뇌에 잠긴 모습으로 방에 앉아있더라는것이다. 리률선이 왜 퇴근하지 않는가고 하자 스승은 불쑥 그에게 자기가 앞으로도 꽤 그림을 그려낼것 같은가고 묻는것이였다. 아마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은 그림때문에 고민이 컸던것 같았다. 젊은 영예군인은 의기소침해있는 스승에게 힘을 내라고, 한번 실패했다고 주저앉으면 되겠는가고 고무해주었다고 한다.

사실 그때 정종여의 심중은 여간만 무거운것이 아니였다. 단지 작품을 부정당해서만이 아니였다. 자기가 시대의 진군에 발걸음을 맞추지 못하고있다는 뼈아픈 자책감때문이였다. 락오자의 모습으로는 결코 제자들앞에 나설수 없다는 량심의 준렬한 꾸짖음때문이였다.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는 예술은 대중의 버림을 받기마련이다.

정종여는 벅찬 현실속에 뛰여들어 인민들의 투쟁과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것을 화폭에 진실하게 담을 때 인민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수 있고 그들의 투쟁을 고무할수 있다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의 정당성을 자신의 교훈을 통해 페부로 절감하였다. 그는 새로운 각오를 품고 들끓는 시대의 맥박에 심장의 박동을 맞추어나갔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수천척 지하막장에서 로력적위훈을 창조하고있는 성흥광산 로동계급을 형상한 조선화 《굴진》(1955년)을 창작하였다.

옆으로 전개된 화면에는 착암기를 잡고 굴진을 다그치고있는 광산로동계급의 불꽃튀는 투쟁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형상되여있다. 긴장된 로동활동은 사선으로 놓여진 로동자들의 전진적인 자세와 힘있는 필치에서 강조되고있으며 조화로운 인물배치와 매개 인물들의 능숙한 작업동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주인공들의 락천적인 성격과 흥겨운 일솜씨를 진실하게 전달하고있다.

조선화 《굴진》은 그 시기에 창작된 사회주의현실주제의 인물화들중에서 손꼽히는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국가미술전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정종여가 창작한 인물주제화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작품을 꼽으라면 두말할것없이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를 말해야 할것이다.

1958년에 발표된 이 그림은 현대조선화의 성과작중 하나로 내외에 널리 알려져있다.

작품은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선을 도와나선 고성인민들의 투쟁모습을 전형화된 매 인물들의 깊이있는 형상을 통하여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

옆으로 길게 전개된 화폭에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이겨내며 온정령을 넘어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을 운반해가는 늙은이들과 녀인들의 군상이 펼쳐져있다.

한손으로 지팽이를 짚고 다른 한손으로는 탄약상자를 지운 황소의 고삐를 틀어쥔채 화폭의 중심에서 힘있게 걸어가는 로인의 형상은 이 작품의 주제사상을 해명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세찬 눈보라를 맞받아 침착하고 확신성있게 걸음을 옮기는 로인의 얼굴과 거동에서 우리는 굴할줄 모르는 의지와 확고부동성을 뚜렷이 느끼게 된다.

로인의 앞뒤로 탄약상자며 밥함지를 이고 지고 비탈길을 톺아오르는 녀인들과 로인들, 중년들의 행렬이 눈보라속에 우련히 드러나보인다. 대렬의 전진방향과 반대로 돌아서서 폭음에 놀라 머리를 높이 쳐든 말의 고삐를 잡아채는 인민군전사의 다급한 행동은 전선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것을 인상깊게 보여주는 세부처리이다. 눈보라속으로 앞서 사라지는 녀인들의 드바쁜 움직임과 허리부러진 나무들, 거품을 내뿜으며 씩씩거리는 황소 등도 작품의 긴박한 극적정황과 잘 어울린다.

대오의 긴 행렬을 화면종심깊이에까지 끌어간 여운있는 구도형식이며 겨울날의 차거운 공기를 담고있는 은회색의 공간처리, 강약과 률동이 살아있는 기백있는 붓질, 대상의 성격에 맞게 씌여진 박력있는 선은 주인공들의 강한 운동감과 긴장된 심리상태를 선명하게 전달하고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전해져온다. 룡을 그리고난 후에 마지막으로 눈알을 그려넣었더니 그 룡이 진짜 룡이 되여 홀연히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성구로서 점 하나가 진짜 룡과 가짜 룡을 구별지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림에서 안깐힘을 쓰는 소의 부릅뜬 눈알을 붓으로 한번 꾹 찍어 정확하게 그려낸 필치는 조선화가 아니고서는 해결할수 없는 형상의 묘기이며 예술은 점 하나로 결정된다는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특히 작품에서 구성의 핵으로 되는 중심대상들을 강조하고 거기서 환경과 정황을 암시하면서 배경처리를 생략한것은 조선화의 집약적형상수법을 최대한으로 높이 살려낸 결과에 이루어진 귀중한 창작성과이다. 이 그림에서 여백을 살려 형상의 선명성과 간결성을 보장한 좋은 경험은 그후 조선화창작에서 널리 일반화되였다.

당시의 한 문예잡지는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고있다.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는 구상의 크기와 깊이로 하여 뛰여난 작품이다. 여기서 옛 전통을 잘 살려서 6폭의 병풍형식을 취하였다. 대상의 사실주의적인 성격을 띤 이 그림은 조선화의 전통적인 특성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여있지마는 투쟁에 궐기한 인민의 굳은 단결은 화폭에서 붓을 아주 아껴가면서 간결하게 전개시켰다. 그 형상수단의 간결성, 이야기전개의 엄준성, 견고한 형상력은 놀랄만 하다.》

준엄한 서사시적화폭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형상으로 펼쳐보이기까지에는 화가의 고심어린 노력이 깃들어있다.

초기의 그림초안에서는 화가자신이 그림속으로 뛰여들지 못하고 그림밖에 서있었기때문에 단순히 정황과 지형을 설명하는데 머무르고있었다. 그후 주변의 산들을 제외하고 원호행렬만을 따로 떼여보았지만 여전히 내용을 설명하는데 불과하였다. 문제는 전선원호에 나선 인민들가운데서 전형을 포착하는것이였다.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성격과 내면세계를 연구하는 과정에 화가는 자신이 직접 소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며 고삐를 잡아당기는 로인이 되고 밥함지를 인 녀인이 되기도 하며 그림속으로 뛰여들었다. 구도가 변경되고 화폭에 긴박감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물들을 사생하는데서도 애로가 많았다. 그림의 내용은 눈보라치는 겨울인데 창작하던 시기는 한여름철이였던지라 눈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감정표현들이 더위에 녹아버릴 위구가 있었다. 모델들에게 겨울옷을 입히기도 어려웠고 솜옷이 나타내는 선을 파악하는데서도 난관이 있었다. 더우기 탄약을 지운 소를 사생할 때에는 모델을 사용하기 곤난했기때문에 점토로 소를 빚어 모델을 대신하였다.

폭음에 놀란 말을 형상하기 위해 습작한것만도 50여장이나 되였다. 보통의 환경에서는 그러한 동작을 잘 볼수가 없어 우마차사업소에 찾아가 우정 말을 때리기도 해보고 아이들을 시켜 고삐를 높이 치켜들게도 해보면서 사생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초안을 완성하고 기본그림에 달라붙기에 앞서 화가가 제일 고심한것은 조선화의 다양한 화법들을 대상의 특성에 맞게 어떻게 활용할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화가는 장승업의 매화도병풍에서 볼수 있는 기백과 필치, 김홍도의 신선도병풍에서 풍겨오는 구도와 선묘의 세련됨, 김명국의 《박쥐를 날리며》에서 느껴지는 묵색과 붓놀림의 묘미 등 옛 조선화화가들의 형상기법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인물주제의 대작을 전통적인 조선화수법으로 형상하려는 첫 시도였던만큼 창작과정은 쉽지 않았다. 붓을 많이 대면 필치가 시들고 색도 혼탁하여지기때문에 화면의 어느 부분이건 붓을 두번이상 댈수가 없었다. 완성과정에서 어려운 고비들을 수없이 겪었지만 화가는 지칠줄 모르는 노력을 기울여 끝끝내 조선화분야에서 시대를 반영한 인물주제화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야말았다.

조선화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는 인물화에서 조선화가 서양화를 따르지 못한다는 허무주의적관념을 타파하고 조선화의 무궁무진한 형상적위력을 높이 시위한 의의있는 작품으로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1등으로 당선되였으며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에서 열린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여 금메달을 받았다.

작품은 조선화 《5월의 농촌》과 함께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도 정종여의 유가족들은 화가를 곁에 세우시고 환히 웃으시며 조선화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를 보아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그날의 영상이 모셔진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있다.

화가는 그후에도 천리마시대의 주인공들을 형상한 조선화 《용해공들》(1965년), 《풍어》(1966년)와 같은 우수한 주제화들을 내놓음으로써 조선화가 주제를 다양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현실을 소극적으로 반영하던 지난 시기의 결함들을 극복하고 시대와 인민에게 참답게 복무하는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민족회화로 발전되도록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인민들의 정서에 맞게 조선화에 채색을 전면적으로 도입한것이라든가 화조화를 전문하던 화가로서 인물주제화창작에 솔선 달라붙은것을 보면 정종여는 확실히 대담한 미술가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는 조선화의 여러가지 형상수법들을 살려쓰고 발전시키는데서도 대담하였다.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에 적용된 시원스러운 여백처리와 인물들을 묘사한 확고하고 탄력있는 붓질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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