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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회

제 2 장

1926년 여름

1


《다야마상, 이렇게 뜻밖에 뵈오니 참말로 반갑기 이를데없소이다.》

오석구의 윤기도는 뺨이 기쁨으로 떨렸다.

왜 그렇지 않으랴. 《합병》과 함께 경찰제복을 입은 자기가 오늘처럼 배를 퉁기며 권세개나 누릴수 있게 된데는 바로 이 배정자의 입김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던것이다.

그 나날 석구는 정자의 끈을 놓칠세라 단단히 부여잡고 고등계와 보안계를 넘나들며 경부보로, 경부로, 경시로 승진하여 이렇게 조선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도경찰부 보안과장의 경찰요직에까지 올라앉게 되지 않았는가.

배정자도 여윈 강아지마냥 볼품없던 상판에 제법 볼살이 늘어지고 군턱이 진 오석구의 잔등을 다독이며 반색을 보였다.

《호호, 나도 오석구씨를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석구씨가 경찰일선에서 제국을 위해 용전분투하고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오석구는 배정자의 말이 마치 총독이나 경무국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치사이기라도 한듯 황공함을 금치 못해하였다.

딴은 그런 소리를 들을법도 하였다.

경찰이 된 첫날부터 일본상전들의 확고한 신뢰를 얻기 위해 동족사냥에 안달발광해온 석구였다. 설사 자기의 친족벌이라도 일본에 반항하는 《불령선인》이라면 가차없이 잡아들이고 소작쟁의나 로동쟁의는 물론 묘지분쟁에까지 이마빼기를 들이밀면서 극성스레 날치는 석구의 기광에 일본인경찰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배정자앞에 선 오석구는 목구멍으로 조심스레 웃음소리를 짜내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헤헤, 다야마상께서 돌봐주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저의 오늘을 생각이나 할수 있겠습니까.》

하긴 이 총독부청사에 들어서면 누군지 모를 얼굴들에도 무턱대고 허리를 굽신거리는것이 그의 체질화된 습성이기도 하였다.

20여년간 일본사람들을 섬겨오는 과정에 출세의 곧은길을 달리자면 친일성에 못지 않게 상전의 헌데라도 주저없이 빠는 천부적인 아첨이 중요하다는것을 뼈에 새긴 석구로서는 늘쌍 그렇게 저자세로 처신하는것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잠시 회포를 나누고난 두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양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차를 가져다놓고 사라졌다.

한여름의 뙤약볕이 창유리에서 바글대고있었다.

배정자가 석구에게 차를 권하더니 자기도 차잔을 들어 발름발름 향내를 맡아본다. 오석구는 얼굴에 살이 올라 더욱 작아보이는 쥐눈을 반들거리며 차를 들념도 못한채 배정자를 지켜보았다.

그 녀자는 옷자락과 팔소매에 화려한 매화꽃을 수놓은 기모노를 입고있었다. 쉰고개를 훨씬 넘어선 나이는 숨길수 없어 눈꼬리며 입모서리에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했어도 아직 요염한 때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였다.

자기의 유력한 보호자였던 이등박문이 안중근에 의해 저승객이 된 이후에도 배정자의 암약은 그치지 않았다.

《합병》후 일본헌병대의 촉탁이 되여 총독부의 무단통치를 뒤바라지하느라 독기를 뿜던 배정자는 씨비리로 출병하는 일본군을 따라가 일본에 대한 충성과 고급밀정으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그후에도 일본외무성 촉탁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임명되여 봉천(심양)과 상해, 남경 등지를 동분서주하며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을 잡아내고 친일밀정단체를 만들어내는데서 특출한 솜씨를 보인 배정자, 비록 몇해전에 일선에서 은퇴하였지만 여전히 촉탁이란 명목으로 총독부의 급료를 받는 한편 땅투기로 막대한 재산을 긁어모으고있는 이 녀인의 무시할수 없는 영향력을 오석구는 잘 알고있었다.

그러한 배정자가 다른 곳도 아닌 여기 총독부 경무국의 밀실로 자기를 불렀으니 석구로서는 반가우면서도 은근히 긴장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오석구의 불안한 심리를 넘겨짚었던지 차 한잔을 머금고 얼마간 동안을 두던 배정자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전에 미쯔야경무국장각하를 만났어요.》

《경무국장각하를요?!》

저도 모르게 밭은기침이 나갔다. 오석구는 뒤목을 꼿꼿이 세우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배정자가 말을 이었다.

《경무국장각하의 말씀이 며칠전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창덕궁에서 내관으로 있던 사람의 집에 뛰여들어 고종의 옥새를 내놓으라고 했다는거예요.》

《옥새라니요?…》

오석구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배정자는 차잔을 내려놓더니 따지는듯 한 눈길을 석구에게 박으며 묻는것이였다.

《오석구씨, 황제어새가 생각나세요?》

《?…》

어릿어릿 돌아가던 오석구의 눈알이 갑자기 굳어져버렸다.

근 스무해세월의 두터운 안개발을 헤치며 그날의 서느러운 광경이 섬뜩하니 되살아났던것이다.

아찔한 철교밑으로 흘러가던 검푸른 한강, 옥새함을 그러안고 뛰여내리던 피투성이의 사나이… 멸시에 찬 눈빛으로 자기를 노려보며 개 욕하듯 꾸짖던 김상건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후려칠듯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오석구가 숨이 막힌듯 선뜻 대답을 못하는데 배정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괴한들이 내놓으라고 한 옥새인즉 다름아닌 황제어새라는군요. 흥미있는건 황제어새를 찾는자들이 비단 그자들만이 아니라는거예요.》

점점 아리숭한 말만 늘어놓는 녀인앞에서 오석구는 어리뻥뻥해지고말았다. 석구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중얼거렸다.

《모를 일입니다. 황제어새야 그때 그자와 함께 한강에…》

흘게빠진 소리를 하는 석구의 그런 꼴을 배정자의 비웃는듯 한 눈초리가 잽싸게 훑고 지나갔다.

정자는 단호히 잘라말했다.

《그러니 답은 명백해요. 조선군대 참위와 함께 한강물속에 사라졌다는 그 옥새함에는 옥새가 없었다는거지요.》

《예?!… 그럼 그때 김상건이 빈 옥새함을?!…》

오석구가 아연해하자 배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우리가 그자의 고육지계에 넘어간셈이지요. 옥새가 한강에 처박혔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돼서 헤그밀사들이 황제어새가 찍힌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갈수 있었는지 인제야 석연히 리해되요. 실은 나부터도 그때 고종의 신임장이 황제어새를 경운궁에서 빼내오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거겠거니 하고 무심히 넘겨버렸었지만 말이예요.》

배정자의 목소리는 랭담하게 울렸다.

오석구는 얼친 물고기모양 입을 헤벌린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럼 김상건이 고종의 비밀옥새를 쫓는 일본인들의 이목을 허튼데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함정에 뛰여들었단 말인가.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서운 놈, 일본사람들한테 굽신거리기 싫다고 목숨마저 아끼지 않다니.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다고 일본사람들의 개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살아야 락을 보지 죽어 한강의 물고기밥이 된 다음에야 국권회복이라는건 어따 쓰고 나라니, 동족이니 하는건 뭐 말라비틀어진건가. 그런다고 망한 나라가 되살아나고 삶은 닭이 꼬끼요할텐가. 미친놈 같으니. …

김상건이 죽어서도 자기를 조소하고있다고 생각하니 오석구의 심장이 독거미인양 꿈틀거렸다.

그러면서도 한가닥의 의문만은 여전히 풀리지 않아 석구는 배정자에게 물었다.

《헌데 리해되지 않습니다. 인제 와서 죽은 고종의 옥새가 무슨 소용에 닿기에 괴한들이 그걸 찾는걸가요?》

그러자 그 녀자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배정자는 거느시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담배 한가치를 꼬나물었다.

오석구가 약빠르게 일어나 성냥을 그어주고 재털이까지 받쳐다 놓는다. 잠시후 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태껏 경무국에서도 고종의 옥새문제에 대해 그런 식으로 치부하면서 별로 주목해오지 않은건 사실이예요. 허지만 알고보니 그렇게 보잘것없게만 여길 문제가 아니더군요. …》

파르스름한 담배연기사이로 비쳐오는 그 녀자의 눈빛이 밀정다운 흥분으로 반짝이고있었다.

배정자는 표정과 억양을 미묘하게 분칠하며 꿍져두었던 보따리를 조금씩 내보이기 시작했다.

《조사해본바에 의하면 고종은 상해에 있는 덕화은행(당시 도이췰란드계은행)에 거액의 내탕금(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을 예금해두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돈을 찾자면 청구서에 반드시 고종의 비밀옥새인 황제어새를 찍어야만 한다질 않나요.》

《아…》

그제야 어렴풋이 깨도가 된다는듯 오석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헌즉 고종의 내탕금을 손에 넣으려고?…

납쪼각같이 뿌예있던 석구의 빼대대한 눈에 금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자 배정자의 어조도 한층 달아올랐다.

《황제어새에 눈독을 들이는자들이 노리는게 바로 그거예요. 상해에서 입수한 정보를 들으니 달포전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던 웬 사기한들이 가짜황제어새를 찍은 청구서를 가지고 덕화은행에서 돈을 뽑으려다가 허탕을 치고말았다더군요, 흠. … 현재 총독부에서도 상해에 있는 고종의 내탕금을 빼내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직 황제어새를 손에 넣지 못한 조건에서 쉽게 락관할 일은 못돼요. 총독부가 제일 우려하는건 고종의 비밀자금이 국내나 해외의 독립운동단체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거예요. 하긴 근래에 와서 불령선인들의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빠져든것만은 분명해요. 만주의 독립군들도 군사활동은 거의나 없이 관할구역에 틀고앉아 군자금이나 거두러 돌아다니는 형편이고 상해에 요란스레 〈림시정부〉간판을 내건 정객들도 청원외교나 벌리면서 감투싸움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어요. 그런가 하면 작년에 생겨난 조선공산당 역시 내부의 파쟁으로 조용한 날이 없구요. 그러나 마음을 놓을수는 없어요. 석구씨도 잘 아다싶이 〈합병〉이 된지도 15년이 넘었지만 조선민중의 반일감정은 여전히 총독부의 가장 큰 두통거리로 되고있어요. 얼마전에 리왕(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소요만 놓고봐도 그렇지 않은가요. …》

배정자가 절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비벼끄며 독기어린 한숨을 쏟았다. 내외의 신문들이 《6.10만세사건》이라고 떠드는 그날의 광경이 떠올라 오석구의 얼굴도 대뜸 우거지상이 돼버리고말았다.

《합병》후 일본에 의해 《천황》의 손아래신하격인 《창덕궁 리왕》으로 격하되여 조선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줄로만 알았던 순종이 아닌가. 그러한 순종의 죽음이 기미년의 만세함성뒤 또다시 그렇듯 조선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리는 기폭약이 될줄이야.

리왕의 상여가 지나가는 종로거리에 새하얗게 뿌려지던 격문들, 열두어살안팎의 보통학교 학생들까지도 소리를 합쳐 터치던 《독립 만세!》의 함성, 대포까지 끌어내여 위협하는 일본군경들한테 맨주먹으로 달려들던 시위군중들…

오석구는 피가 머리우로 올리뻗치는것을 견딜수 없어 친일선배의 앞이라는것도 잊고 목구멍밑에 눌러두고있던 비린청을 뽑았다.

《하 참, 반디불로 남산을 태우겠다구 덤벼드는 그런 우매한것들을 보면 가소롭기 짝이 없다니깐요. 물수 없으면 짖지도 말랬다구 제깟것들이 만세나 부른다구 대일본제국이 꼼짝이나 하겠습니까, 흥. 다른게 없다고 봅니다. 아직까지도 〈합병〉을 거역하는 후떼이 센징(불령선인)들은 아주 그냥 이잡듯 사정없이 박멸해버려야 합지요!》

증오에 차 욕지거리를 퍼붓는 오석구의 쥐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튀여나왔다.

그의 언동은 결코 가식이 아니였다. 일본인들의 덕분에 권세와 재부를 차지한 석구에게 있어서 일본제국은 곧 하내비였고 일본인들이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것은 상상조차도 하기 싫었다.

하기에 그는 일본제국의 원쑤를 자기의 원쑤로 여겼고 독립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눈에 칼을 세우군 하였던것이다.

배정자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경찰로서의 촉각과 자질이 좀 모자라긴 해도 일본제국에 대한 충성도만은 나무랄데 없는 오석구였다.

총독부가 요구하는 조선인들이 바로 이런자들이였다.

바늘로 이마빡을 찔러서 일본인의 피가 나올만큼 동화된 조선인들, 대일본제국이 먹여주고 지켜주지 않으면 한시도 살아갈수 없다고 믿는 조선인들이야말로 총독부가 그려보는 멀지 않은 앞날의 조선인상이 아닌가.

배정자 역시 현명한 조선인들이 갈길은 그 길밖에 없다고 믿어의심치 않기에 오석구의 분노에 공감을 표시했다.

《옳은 말이예요. 오늘 석구씨를 만나자고 한것도 그때문이예요. 이전에 이등통감께서 〈황실개혁〉의 명분으로 조선황실재산의 대부분을 통감부가 장악하도록 하신 까닭이 뭐겠어요. 통감정치를 위한 자금확보문제도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황실의 재산이 독립운동자금으로 류용되는것을 차단하기 위해서가 아니였겠어요. 친로파관리였던 리용익이 제일은행에 예금했던 수십만원의 거금을 통감부가 세인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탈취한것도 그때문이였지요. 우리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고종의 내탕금이 불온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해요. 뿐더러 고종의 비밀자금에 눈독을 들이는 국내와 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을 황제어새를 미끼로 해서 일망타진해야 하고요. 난 오석구씨에게 이 일을 맡기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거라고 경무국장각하께 제안했어요.》

《예? 제가 말입니까?!…》

오석구가 제 귀를 의심하며 엉거주춤 궁둥이를 쳐들었다.

그러는 석구를 저울에 달아보듯 찬찬히 눈여겨보던 배정자는 눈웃음을 치며 말을 계속했다.

《물론 일의 성격으로 봐선 고등계의 소관이지만 석구씨도 한때 고등계형사였고 더우기는 이미전에 황제어새사건에 관여한적이 있는지라 적임자라고 생각한거예요. 경무국장각하께서도 쾌히 동의하셨고요.》

오석구의 심장이 물을 차고 뛰여오르는 망둥이처럼 푸닥거렸다.

자기가 총독부 경무국장의 안중에 든것이다.

출세의 기회를 붙잡기 위해 노상 권력주변에 똥파리처럼 달라붙는 오석구부류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가 아닐수 없었다.

이 기회에 공을 세우면 떡함지에 엎어질테지만 그러지 못하면 경무국장은 더 말할것도 없고 배정자까지도 자기를 칠푼짜리 돼지꼬리만치 여길거라고 생각하니 석구의 속은 벌써부터 달아오른 가마속의 개미마냥 급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지만 황제어새라는 행처불명의 물건을 미끼로 불온세력을 일망타진한다는게 어디 떡 먹듯 쉬운 일인가.

오석구는 배정자의 권유를 한입에 닁큼 삼키고싶었지만 선뜻 방책이 떠오르지 않아 우는것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황송합니다. 저를 관심해주시는 다야마상의 그 은총에 무슨 말루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헌데… 경무국장각하의 뜻을 받들자면 속히 황제어새부터 장악하는게 급선무인데 아직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명치 않으니…》

배정자의 내리깐 눈길이 깔보는것처럼 보였다. 얼마쯤 침묵이 흘렀다. 불현듯 그 녀자의 입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짚이는데가 있긴 한데…》

순간 오석구의 눈이 까뒤집혔다. 석구는 온몸이 귀가 되여 석달가뭄끝에 비구름 쳐다보듯 배정자를 바라보았다.

정자가 얄궂은 미소를 흘리며 속생각을 내비쳤다.

《황제어새를 노리는자들의 눈초리가 하나같이 창덕궁에 집중되는걸 봐서 고종의 비밀옥새는 십중팔구 거기에 있는가봐요.》

《창덕궁에요?…》

오석구의 미간이 쪼프려졌다.

창덕궁에서 고종의 옥새를 맡을만 한 인물이 대체 누구인가? 아들인 순종은 이미 저세상사람이 돼버렸고 현재 궁실에서 제일 큰어른은 순종의 안해인 윤대비가 아닌가. 그럼 윤대비가?!…

두사람의 눈길이 음험하게 맞부딪쳤다. 묻는듯 한 석구의 눈빛에 배정자가 틀림없을거라는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석구는 숨을 끊고 벽우의 한점을 독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윤대비가 옥새를 깊숙이 감추었을텐데 어떻게 뺏어낸다?… 골동포에나 가져가야 제격일 망한 나라의 옥새이건만 시아버지가 죽는 순간까지 한사코 부둥키고있었을 왕조의 마지막옥새를 호락호락 내놓을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오석구가 떡 본 도깨비마냥 허발을 치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달아하는데 배정자가 넌지시 묻는것이였다.

《석구씨도 풍문을 들었을테지요. 요새 윤대비의 부친인 윤택영후작이 빚군들 성화에 쩔쩔맨다면서요?…》

난데없이 윤대비의 부친소리가 튀여나오는통에 오석구는 얼떠름해졌다.

아닌게 아니라 순종의 장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요즘 신문들에서는 윤택영의 빚추문에 대해 겨끔내기로 떠들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수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돌려 남양원님 굴회 마시듯 꿀꺽하고는 빚독촉을 피해 6년전 베이징으로 도주했던 윤택영이니 아무리 국상을 치르기 위해 귀국한 순종의 장인이라 할지언정 빚군들이 가만있겠는가.

국장이 끝나기 바쁘게 채권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소송을 제기한다, 법원의 호출에 눈코뜰새가 없다 하며 신문들이 법석대는걸 보면 윤택영이 당하는 빚단련도 어지간한 모양이다.

듣자하니 윤택영은 빚군들의 닥달질이 두려워 창덕궁 내전에 들어박힌채 빚을 갚도록 도와달라고 딸에게 때없이 애걸하고있다는지. …

하건만 총독부의 허가없이는 단돈 한푼 쓸수 없는데야 효심이 깊다는 윤대비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으랴.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였다. 한때는 부원군이니, 후작이니 하며 서슬푸른 위세를 떵떵거리던 윤택영이 오늘에 와서 빚군들한테 쫓기는 들개신세가 될줄이야.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오석구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음순간이였다. 홀연 그의 뇌리에 배정자가 던진 물음이 되살아났다.

번개처럼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석구의 미간이 서서히 열리더니 쾌심의 미소가 안개처럼 피여났다.

역시 밀정으로 잔뼈가 굵은 배정자가 달랐다.

오석구의 입에서 탄성비슷한 소리가 새여나왔다.

《아, 알만 합니다.》

두사람의 득의어린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얼마후 배정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일본제국의 운명이자 우리의 운명이예요. 우린 제국에 저항하는 사소한 싹도 절대로 방임해둘수 없어요. 〈천황〉페하의 홍대하옵신 성지를 받들어 반도를 내지의 영원한 일부분으로 만들어야 한단 말이예요. 그렇게 하는것이 이등각하와 같으신 은사들의 혼백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길이기도 해요.》

배정자가 뒤말을 흐리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꼬리를 찍었다.

이등박문이 안중근의 총에 사살되였다는 급보를 듣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여 여러달째 일어나지 못하다가 《한일합병》소식에 접하자 병석에 누워있으면서도 만세를 불렀다는 배정자이다.

그 녀자의 골수에 박힌 투철한 친일정신앞에 새삼스레 탄복하며 오석구도 슬픈양 코구멍을 벌룩거렸다. 그러는데 배정자가 이내 얼굴에 웃음의 분칠을 해보이며 석구를 격려했다.

《이번 기회에 한번 솜씨를 보이세요. 석구씨도 언제까지고 보안과장자리에만 머물러있을순 없지 않아요. 참, 듣자니 아들도 우리 일을 한다면서요?》

사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르는 정자의 능갈친 솜씨앞에 오석구는 불판우에 놓인 엿가락처럼 금시 녹아들었다.

《예, 오주엽이라고 규슈제대 법과를 졸업하구 현재 고등계에서 근무하고있소이다. 헤헤, 그놈이 벌써 그리된걸 보니 나도 인젠 고달픈 이노릇을 그만두구 자그마한 기업이나 하나 차려볼가 하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마는…》

배정자가 어이없다는듯 앙천대소를 했다. 

《호호호… 오석구씨답지 않군요. 이왕 제복을 벗을바엔 따분하게 주산알이나 주무르고있겠어요. 당당하게 행정관료로 진출해서 군수가 되고 도참여관도 되여야지요.》

《흐흐…》

오석구가 너무 좋아 괴이쩍은 웃음소리를 킬킬 흘리였다.

경찰계에서 어느 정도 승진한 이후 일본사람들의 눈에 들어 행정관료로 옮겨앉아 군수와 도참여관을 거쳐 도지사의 자리에까지 바라오른 행운아들을 석구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실은 그의 욕심을 면바로 찌른 정자의 말이였지만 오석구는 아닌보살하며 딴전을 부렸다.

《제가 거기까지야 어찌 감히…》

그러거나말거나 배정자는 속생각이 다 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만 잘되면 그 문제는 내게 맡기세요.》

오석구는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그는 너무도 감지덕지하여 퉁탕대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며 배정자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다야마상!》

그 순간 오석구는 얼마전에 관할지역의 한 지주가 뢰물로 섬겨바친 옛 서화진품을 오늘중으로 당장 배정자에게 건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내친김에 아들놈도 소개할겸 주엽이가 직접 들고 가게 하면 꿩먹구 알먹기렷다.)

석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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