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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회

제 1 장

1907년 봄

6


(그놈이구나!)

오석구는 쥐눈이 찢어지도록 그쪽을 노려보았다.

나무상자를 걸머멘 사내 하나가 방뚝에서 내려와 나루배가 있는쪽으로 가고있었다. 삿갓을 깊숙이 눌러써서 얼굴은 가려볼수 없어도 헌헌한 기골에 씨엉씨엉 걷는 걸음새가 틀림없는 김상건이였다.

저쯤에서 어슬렁대는 행상군에게 황겁히 눈짓을 보낸 오석구는 삿갓을 쓴 사나이를 향해 소래기를 질렀다.

《게 섰거라!》

거의 때를 같이하여 행상군이 나루터 주막집에서 쏟아져나온 한무리의 사내들과 함께 삿갓을 쓴 사나이를 에워쌌다. 그들의 손에는 벌써 권총이 쥐여져있었다.

바지가랭이에서 비파소리가 나게 달려간 오석구가 못박힌듯 굳어져버린 사나이의 삿갓을 떨리는 손으로 벗겼다.

다음순간 오석구의 얼굴이 락태한 고양이상이 돼버리고말았다.

말총같이 덮인 구레나룻, 쑥 들어간 우멍눈… 붙들린 사나이는 김상건이 아니였던것이다.

《그자가 틀림없는가?》

행상군으로 변장한 왜헌병이 다가서며 잡아비틀듯 따져묻는다. 오석구가 목구멍에서 웃음소리를 짜내며 변명했다.

《헤헤… 곤도중위님, 제가 잘못 본것 같소이다.》

대바람에 곤도의 목덜미가 노기로 부풀어올랐다.

곤도는 믿을수 없다는듯 붙들린 사나이에게서 나무상자를 뺏아 와락 열어제꼈다. 상자안에서 녀자들의 화장품이며 바느실이며 패물따위들이 쏟아져나왔다.

보아하니 방물장사같았다.

《빠가야로(바보자식)!》

독이 오른 곤도가 씨벌이는 소리였다.

오석구가 독수리앞의 메추라기모양 울상이 되여 쩔쩔매는데 따귀라도 갈길듯 석구를 노려보던 곤도는 침을 내뱉더니 부하들과 함께 제 위치로 돌아가버렸다.

오석구도 이를 다그어물며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후미진 강기슭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난밤의 봉변때 모자를 잃어버린지라 뒤통수를 빡 밀어 얼마 남지 않은 석구의 머리칼이 강바람에 개버들처럼 아양을 부렸다.

(김상건 이놈, 오늘 내 손에 걸려들기만 해봐라.)

오석구는 독살스레 마음을 공그르며 불꽃이 방끗방끗 튀는 눈으로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저녁무렵이 되자 나루터를 나드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독이며 시루를 키가 넘게 지게에 동여진 장정도 있었고 괴춤에 장죽 하나를 지르고 슬렁슬렁 걸어가는 갓쓴 늙은이도 있었으며 젖먹이를 업은채 다 팔지 못한 광주리들을 포개여 머리에 인 아낙네도 있었다.

까칠한 검둥개 한마리가 나루막앞에서 기슭에 매놓은 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꼬리를 흔드는데 허리굽은 사공은 이물에 걸터앉아 사람들이 다 타기를 기다리며 곰방대에 담배를 우겨넣고있었다.

적막이 깃들기 시작하는 저녁대기를 찢어발기며 기적소리가 울려온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철교우로 시커먼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지나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한강에 철교가 놓이기 전보다는 퍽 한적해졌지만 아직도 이 노들나루는 여러 나루들과 함께 한강을 건느는 중요한 길목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있었다.

초조히 《히로》표 일본담배 한대를 붙여문 오석구는 치미는 조바심을 쓰거운 담배연기와 함께 꿀떡 삼켰다.

(분명 김상건이가 오늘 저녁에 노들나루로 나온다고 했는데… 혹시 칠성이란 놈이 날 속인건 아닐가?…)

칠성이란 오석구와 한고향마을에서 산 손아래사람이였는데 시위대에서 병정노릇을 하고있었다.

한고향사람이라고는 하나 향리집안인 석구의 집은 농군집안인 칠성이의 집과 어울린적이 없었고 그런것으로 하여 오석구는 한성에서 칠성이와 몇번 마주쳤어도 별로 아는체 하지 않았었다.

그러한 곽칠성이 오늘 아침에 급작스레 자기를 찾아왔을 때 오석구는 저으기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더구나 석구를 놀라게 한것은 곽칠성이 가져온 쪽지였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함께 의병이 되자면서 결심이 서면 저녁에 노들나루로 나오라는 김상건의 글이 적혀있는것이 아닌가.

곽칠성의 말이 어뜩새벽에 병영파수를 서러 나갔더니 지나가던 거지애가 자기한테 전해주더라는것이였다.

《…제가 평소에 김참위럴 많이 따랐지라오. 그래서 저한테 그런 쪽지럴 보내온가봐요. 쪽질 보구나니까니 등골에서 살얼음이 서걱거리는것 같더랑께요. 글쎄, 아무리 김참위럴 따른다 해도 어떻게 릉지처참당할게 뻔한 그런 일에까지 머릴 들이밀수 있겠습니껴. 게다가 간밤에 김참위럴 잡겠다구 일본헌병대까지 들이닥쳤던걸 봐선 필시 뭔가 심상치 않더랑께요. 그래 골머릴 앓다가 이렇게 형님얼 찾아왔어라오. 어쨌건간에 이런 일얼 상론할데라구야 이 한성안에서 석구형님밖에 더 있능기라오. …》

듣고보니 한성에 인연이라군 꼬물도 없는 칠성이같은 촌무지렁이로서는 십분 그럼직도 한 일이였다.

여하튼 오석구에게는 아닌밤중에 차시루떡이 아닐수 없었다.

간밤에 일본장교를 따라 대한문에 갔다가 혼자 살아남은탓에 밤새껏 일본헌병대에서 지독하게 닥달질을 당한 그였던것이다.

이 정보를 헌병대에 알려 김상건을 붙잡게 하고 그가 가로채갔다는 황제의 비밀옥새를 일본인들이 다시 손에 넣게 한다면 오석구는 일거에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고 잃어버렸던 신임을 되찾을수 있었다.

비단 그뿐이랴. 운이 트이면 출세의 기회까지 톡톡히 잡을는지도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을사5조약》이 날조된 뒤 많은 일진회원들이 일본의 비호밑에 벼슬길에 오르고있었는데 그중에는 군수는 물론 도의 장관격인 관찰사에까지 오른자들도 있었다.

자기라고 그것들보다 뭐가 모자라서 그냥 통변노릇이나 하고있으랴.

석구의 가슴속에서 야심의 검붉은 피가 울컥 솟구쳐올랐다.

본래 오석구의 고향은 전북 익산이였다.

고을관가의 호방아전이였던 그의 아버지는 《오갈퀴》라고 불리울만치 온갖 부정협잡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흡혈귀였다. 그의 붓놀림 한번에 숱한 집들이 얼토당토않게 들씌워지는 가렴잡세로 껍데기를 벗기웠고 그렇게 후려낸 재물로 시골아전의 집은 재상집 못지 않게 흥청거렸다.

그러던 갑오년의 어느 겨울날 격노한 농민들이 밀려와 탐욕무도한 《오갈퀴》를 처단하고 그의 집을 불살라버렸다.

오석구는 졸지에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남은 식구들은 외가로 가고 맏이였던 그는 아버지의 지기가 있는 군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일본인미곡상의 집에 아이를 돌보는 하인으로 들어가게 되였고 그 과정에 일본말을 익히면서 일본의 문물을 동경하게 되였다. 그리고 몇해후에는 주인의 신임을 얻어 서사노릇까지 하게 되였다.

본바탕이 상전에게 붙어사는 아전의 자식이여서 그랬던지 오석구는 일본인들에게 붙어사는 요령을 어렵지 않게 터득하였고 그들의 턱찌끼를 얻어먹는 쏠쏠한 재미에 일본인들의 천지로 화해가는 세상의 변천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종노릇을 할바치고는 큰집 종노릇을 하는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일찌감치 생활신조로 굳어졌기에 오석구는 선참으로 일진회원이 될수 있었고 일본과 로씨야사이에 싸움이 터지자 주저없이 일본군의 통변으로 자원해나설수 있었던것이다.

(뭐니뭐니해도 부귀와 권세를 누리자면 일본사람들의 눈에 들고봐야 해. 필경 이 정보를 가져가면 그 사람들도 날 달리 보게 되렷다.)

오석구의 눈에 달이 떴다. 허나 당장 헌병대에 달려가려고 뒤 마려운 강아지마냥 덤벼치던 그는 미심쩍은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어 다시한번 저울질해보았다.

정말로 이런 값비싼 정보를 일본헌병대에 가져가는게 땅수일가?

암만 생각해봐도 조폭하고 우직스럽기 짝이 없는 하세가와의 패거리들이 그 값을 제대로 쳐줄상싶지 않았다.

그럼 송병준이한테 가져가봐?

그건 더욱 아니다. 민충이 쑥대에 올라간것처럼 건방을 떨어도 송병준은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말구종에 불과한자였다.

어느 길이 출세의 지름길인가?

긴가민가 바재이던 석구의 생각은 어쩔수없이 통감인 이등에게로 기울어졌다.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일진회의 적지 않은 축들이 일본군과의 관계보다 통감부와의 관계에 더 신경을 쓰면서 약삭바르게 움직이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천황》의 특별한 신임을 받는 이등통감이야말로 이 땅의 모든 권한을 거머쥔 최고권력자가 아닌가.

옳거니! 우둔한 놈이 곰 잡는다고 출세의 지름길을 타려면 아예 이등통감의 줄을 잡아야 한다. 헌데 무슨 수로?…

밤송이같은 턱수염을 매만지던 오석구의 머리에 불쑥 이등의 양딸 배정자가 떠올랐다.

통감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등대고 각계의 요인들을 치마자락에 휘감아 주무르는 흑막속의 녀인, 그 녀자의 눈에 든 사내들은 한해도 못되여 벼락출세를 한다는 소문이 항간에까지 자자하게 퍼져있었다.

오석구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배정자를 찾아가자. 그 녀자가 이등의 애첩이고 밀정이라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 황제의 비밀옥새와 관련한 중대한 정보가 있다는것을 귀띔하기만 하면야 제가 만나지 않고 견딜라구.

마침 처켠으로 친척되는 사람이 배정자의 집에서 청지기로 일하기에 오석구는 지체없이 련락을 띄웠다.

아니나다를가 련락을 받은 배정자는 즉시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오석구는 배정자가 일러준대로 통감부 문관들이 주로 드나드는 화월이라는 료정의 어느 뒤골방에서 그 녀자와 조용히 마주앉았다.

그가 김상건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자 배정자의 얼굴에 희색이 넘쳐났다.

배정자는 오석구의 수고를 거듭 치하하면서 일본제국은 석구와 같이 앞을 내다볼줄 아는 반도청년들에게 결코 무관심하지 않을거라고 달콤한 소리를 아낌없이 늘어놓았다.

오석구는 입이 헤벌어졌다. 그 녀자의 말이자 다름아닌 이등통감의 말로 들려왔던것이다.

마침내 출세의 탄탄대로가 열리는가.

의미심장하게 상글거리는 배정자의 앞에서 그는 너무너무 감지덕지하여 일본을 위해 분골쇄신할 자기의 결심을 몇번이고 곱씹어 외웠다.

그 다음의 일은 예상한대로였다.

이등통감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통감부 경무부와 일본헌병대가 발칵 뒤집혔고 간밤의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인 오석구도 일본인들이 그물을 친 여기 노들나루로 나오게 되였다.

물론 곤도를 비롯한 일본헌병들은 이런 소동을 일으키게 한 정보의 제공자가 바로 오석구라는것을 알리 만무했다. …

갑자기 손가락이 따거워나는 바람에 석구는 후닥닥 놀랐다. 담배가 다 타드는것도 모르고 상념에 빠져있었던것이다.

그는 짜증스레 꽁초를 획 뿌려던지고나서 나루터로 오는 사람들을 서캐 훑듯 뜯어보았다. 하건만 그처럼 눈알을 곤두세우고 찾는 김상건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줄 몰랐다.

(이러다 종시 김상건이 걸려들지 않으면?…)

겁이 더럭 났다. 그리되면 배정자를, 그보다는 황송무지하옵게도 이등통감을 속인것으로 되지 않는가.

모처럼 맞닥뜨린 행운의 기회를 억울하게 놓쳐버리는것은 물론 진노한 통감의 미움을 사 쫄딱 신세를 망칠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석구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하루새 몰라보게 여윈 그의 뺨에서 쥐가 뛰놀았다. 오석구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발스레 부여잡았다.

(아무튼 오늘은 그자와 결판을 봐야 할텐데. …)

벌써 두번째로 김상건에게 걸려 된경을 치른 오석구였다. 그가 김상건에게 처음으로 혼난것은 두해전이였다.

을사년이 저물어가던 그날 오석구가 스즈끼라는 일본순사와 함께 동대문일대의 배오개장거리를 지나고있을 때였다.

불시에 어디선가 왜말이 섞인 서투른 조선말소리가 화난듯이 들려왔다.

《빠가! 가라!》

눈길을 돌리니 청메뚜기같이 생긴 왜인약장사가 약광고하는것을 구경하던 대여섯살쯤 된 계집애를 쫓고있었다.

목이 터지게 약광고를 해도 사가는 사람이 없으니 애꿎은 어린애한테 화풀이를 하는 모양이였다.

《가라, 가라!》

왜장사군이 오도카니 앉아있는 계집애의 정갱이를 구두발로 몰강스레 걷어찼다. 그바람에 어린애가 나동그라지면서 숨 넘어갈듯 자지러지게 우는데 왜장사군이 시끄럽다며 또다시 아이를 걷어차려들었다.

그때 상투바람의 웬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와 왜인의 등덜미를 나꾸어챘다.

《이놈아! 아이는 왜 때리느냐?!》

보매 아이의 아버지인것 같았다.

왜장사군이 눈깔을 까뒤집더니 대뜸 사내한테 달려들어 따귀를 갈기며 소리지르는것이였다.

《나니(뭐라구)? 죽기나싶소까?》

사내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이놈의 새끼!》

사내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왜장사군의 멱살을 움켜잡고 귀통을 드세게 쥐여박았다. 그러자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와르르 모여들어 왜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을사5조약》이 공포된지 얼마 안되는 때여서 조선사람들의 반일감정이 여느때없이 날카로워있던 시기였다.

그런데다가 권력을 등에 업은 왜인장사군들의 횡포에 늘 기를 못 펴고있던 조선장사군들은 때를 만난듯 쌓였던 울분을 터뜨렸던것이다.

사람같지 않은 쪽발이라고, 당장 아이한테 잘못을 빌라고,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벌집 터진듯 떠들썩하는 성난 사람들의 틈사리에 끼여 왜장사군은 허둥거리며 갈팡질팡했다.

뜻밖의 광경앞에 오석구가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옆에 있던 스즈끼순사가 《고노야로》를 씹어뱉으며 뛰여갔다.

스즈끼는 왜장사군을 몰아대는 흰옷입은 사람들에게 쌍욕을 해대며 마구 밀어제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오석구도 황급히 그리로 달려가 듣기 싫은 비린청으로 게목을 질러댔다.

《썩 그만두지들 못해요! 일본순사가 온걸 못 보나 말이예요! 다들 잽혀가야 정신들 차리겠어요?!…》

칼을 찬 일본순사가 들이닥치는통에 사람들이 물러났다. 엉겁결에 입을 다문 그들의 모양을 보니 오석구는 서슬이 딩딩해났다.

그런 멋에 일본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그였다.

지금껏 《해라》를 하던 량반들까지도 일본사람들에게 붙어다니는 자기를 알아보고는 하루아침에 《하소》로 말투를 고치는 꼴을 보면서 석구는 정승집 개는 정승대접을 받고 백정집 개는 백정대접을 받기마련이라는 자기딴의 세상리치를 날마다 신바람나게 체험하고있었다.

오석구는 스즈끼가 들으라고 더욱 목에 피대를 돋구어 고아댔다.

《일본사람들 노엽히면 어찌되는지 알지요! 장사구 뭐구 싹 다 말아먹구 아주 그냥 신셀 망치구만단 말이예요!…》

그러는데 방금전까지만도 도적개 몰리듯 하던 왜장사군이 악의에 차서 스즈끼에게 조선놈들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아부재기를 치는것이였다.

스즈끼는 우악스레 눈망울을 굴려 조선사람들을 휘둘러보다가 좀전의 그 아이아버지를 가리키며 왜장사군에게 뇌까렸다.

《오이, 저놈을 묶어라!》

순사가 넘겨주는 포승을 받아쥐고 왜장사군이 호기등등해서 아이아버지에게로 다가가자 둘러섰던 사람들속에서 다시금 격분한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저 약장사놈이 애꿎은 아이헌테 먼저 발길질을 했소!》

《왜 죄없는 사람을 잡아가는거요?!》

《도둑이 매를 든다더니 허 참…》

스즈끼는 칼자루를 눌러쥐며 험상궂게 눈을 지릅떴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가서 조사해보면 안다! 그냥 그렇게 떠들면 모조리 다 잡아가고말테다!》

스즈끼가 왜말로 이렇게 으르딱딱거리자 오석구도 순사를 본따 눈을 지릅뜨며 조선말로 옮겼다.

(이런 미련한 백성들이라구야, 일본사람들한테 엇섰댔자 하루강아지 범한테 덤벼드는 격이라는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다니.)

일본의 위세이자 자기의 위세라고 생각하는 석구였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는 제가 마치 순사이기나 한듯이 달려가 억이 질린 아이아버지를 잡아묶는 왜장사군을 거들어주었다. 사방에서 륙실헐 놈이라느니, 망둥이같은 놈이라느니 하는 귀따가운 욕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스즈끼의 두눈에 흡족해하는 빛이 떠도는것을 보니 석구에게는 그깐 소리들이 개짖는 소리만치도 여겨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멈춰라!》 하는 고함소리가 터지더니 기골이 름름한 조선군대 참위가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며 나서는것이였다. 여러명의 병정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있었다.

스즈끼도 오석구도 혼맹이가 빠져 어리벙해있는데 참위는 단박에 병정들을 시켜 묶이운 사람의 포승부터 풀어주었다.

그러고나서 불이 펄펄 타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스즈끼를 찍어보며 말했다.

《난 시위대 참위 김상건이다. 순사라면 응당 만사를 공정하게 대해야 할게 아닌가. 그런데 해를 끼친자는 그대로 놔두고 되려 해를 입은 사람을 붙잡아가는건 웬 까닭인가? 당신네 일본경찰들 눈엔 조선사람들은 리유불문하고 다 죄인으로 보이는가?!》

이를데없는 그 소리에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소리들이 장작불 튀듯 튀여나왔다. 오석구가 굳어진 혀를 가까스로 놀리며 김참위의 말을 통변하자 스즈끼의 상통에 검푸른 피가 솟구쳐 퍼졌다.

스즈끼는 악에 받쳐 코구멍을 벌름거리며 호통을 뽑았다.

《건방지게, 일본경찰이 하는 일에 조선군대가 무슨 상관인가? 너희들도 일본사람들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걸 잊었는가?!》

오석구가 스즈끼의 말을 잽싸게 옮겨 외웠다.

김참위의 솔잎같은 눈섭이 부르르 떨렸다. 고통과 치욕, 분노가 뒤엉킨 눈길로 스즈끼를 후려갈길듯 노려보던 참위가 불을 토하듯 입을 열었다.

《황궁과 도성의 안녕을 지키는것은 시위대의 임무다. 일단 우리 관할지역에서 일어난 사태인것만큼 그대로 지나칠수 없다!》

이렇게 쏘아붙인 김참위는 병정들을 돌아보며 당장 왜장사군을 포박하라고 벼락령을 떨구었다.

순식간에 병정들이 달려들어 죄없는 조선사람을 결박했던 포승으로 왜장사군을 꽁꽁 묶어놓았다.

왜장사군이 스즈끼를 바라보며 급해맞은 소리를 지르는데 지켜보던 사람들이 잘한다느니,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느니 하며 저마다 속시원해하는것이였다.

《칙쇼!》

스즈끼가 이를 사려물며 칼을 뽑으려들었다. 김참위는 그러는 왜순사를 헌신짝보듯 하며 병정들을 향해 추상같이 호령했다.

《듣거라! 누구든 군무를 방해하는자가 있거든 용서치 말라! 다들 알았는가?》

김참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세가 오른 병정들의 입에서 우렁찬 소리가 터져나왔다.

《옛!》

쇠도끼처럼 시퍼런 조선군인들의 그 기상과 점점 모여드는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웅성거림에 기가 질렸던지 스즈끼는 끝내 칼을 뽑지 못하였다.

《요-씨(좋다).》

스즈끼는 입새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다급히 꽁무니를 사렸다.

일이 그쯤되자 바빠맞은것은 오석구였다. 홀연 끈 떨어진 뒤웅박이 돼버린 그가 스즈끼를 따라 비실비실 뺑소니치려는데 김참위의 입에서 거듭하여 된벼락이 떨어졌다.

《저자에게도 포승을 지워라!》

이리하여 오석구 역시 포승에 묶인 신세가 되고말았다.

《이보시오 김참위, 나야 통변밖에 한게 없는데 어째서 애매한 사람까지 욕보이는거요?》

비굴과 허세는 쌍둥이라더니 왜순사앞에서는 그렇듯 기고만장해서 지랄치다가 막상 주인잃은 개신세가 되자 죽을상이 되여 빌붙는 루추한 그 몰골에 낯을 찡그리며 김참위는 경멸조로 내뱉았다.

《죄를 따진다면 왜인들한테 알랑거리느라 불쌍한 자기 동포를 구박하고 민심을 소란케 한 당신의 죄가 저 왜장사군보다 더하다는걸 아직도 모르겠는가?!》

둘러선 사람들도 오석구를 손가락질하며 저마끔 된욕을 퍼부었다.

《에잇, 더럽다!》

《가서 왜놈 보발이짓이나 해라!》

보발이란 걸어다니면서 급한 소식이나 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였는데 당시 조선에 파견되여오던 왜놈관리들중에는 제 첩을 보발의 지게에 얹어서 부임지로 날라가는자들도 있었다.

결국 《왜놈 보발이짓이나 하라.》는건 왜놈의 첩년들이나 지게에 얹어서 나르라는 소리로서 너절한 왜놈의 앞잡이들에게 배앝는 욕설이였던것이다.

김참위의 처분에 따라 그날 포승을 진 왜장사군과 오석구는 왜순사가 묶어가려던 아이아버지에게 끌려 사람들의 조소속에 배오개장거리를 한바퀴 돌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오석구는 김참위를 앙갚음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등에 업고 피눈이 되여 날치였고 결과 김상건은 조선군부가 관할하는 륙군감옥서에 갇히게 되였다.

허나 군부와 사회계의 배일세력들이 여러모로 힘쓴 덕에 김상건은 몇달후 감옥에서 놓여나올수 있었다. …

오석구는 부글대는 부아통을 삭이느라 또다시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금방 피가 거꾸로 솟는데 원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간밤에 또 김상건과 맞다들려 졸경을 치를줄이야.

가슴속에서 돌같은 앙심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하나 그자에게 두번씩이나 혼뜨검을 당한 값을 곱으로 되돌려주리라 윽벼르며 오석구는 피발이 선 눈으로 락조가 비낀 나루터를 훑고 또 훑었다.

여전히 방뚝에서는 나루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띄염띄염 그치지 않고 내려오고있었다.

엿판을 멘 코흘리개며 쭈그렁밤송이같은 농군들, 두엄내 나는 촌색시들… 그런가 하면 등짐을 진 구종들을 거느리고 양복차림에 개화장을 짚으며 여봐란듯이 걸어오는 개화군의 모습도 보인다.

바위같은 잔등에 등짐을 걸머지고 고개를 수굿한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구종들의 모습이 오석구의 눈뿌리를 이상하게 잡아끌었다.

(혹 김상건이 하인으로 변장한건 아닐가?)

오석구는 두눈을 도사려 구종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주인의 왼쪽에서 따르는 구종은 버쩍 마른 몸에 지게걸음을 하는 모양이 김상건은 아니였다. 그럼 오른쪽에서 따르는 구종은?…

《담배불 얻읍시다.》

옆으로 지나가던 행인이 건늬는 소리였다. 오석구는 구종들한테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귀찮은 파리 쫓듯 담배불을 넘겨주었다.

가만, 주인의 오른쪽에서 따르는 녀석은 왜 저리도 낯판을 잔뜩 수그렸는가? 혹시?…

다음순간 오석구의 심장이 갈비뼈밑에서 흠칠했다.

등골이 죄여들었다. 담배불을 청하던 행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귀에 익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뇌리를 때렸던것이다.

짜릿한 전률에 사지가 뻣뻣해오는것을 느끼며 석구는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과연 김상건이 눈앞에 서있었다.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동인 흰옷차림에 괴나리보짐을 지고 담배불을 붙이는 그의 태도는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오석구의 울대뼈가 꿀꺽 울렸다.

김상건의 그 모습을 대하니 금시까지 앙앙불락하던 기세는 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가슴이 벌벌 떨려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김상건이 지난밤처럼 자기의 이마빡에 시꺼먼 총구를 들이댈것만 같았다.

싸워보기도 전에 주눅이 든 개마냥 오석구가 겁에 질려 쩔쩔매는데 김상건이 담배불을 돌려주며 흔연스레 묻는다.

《날 기다리던 모양이지?》

혐오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석구의 면상을 뚫을듯이 강렬하다.

오석구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리기는 했지만 가드라든 혀를 좀처럼 놀릴수가 없었다.

김상건은 석구의 그런 꼴을 지켜보다가 쓰겁게 씩 웃더니 돌아서서 나루배가 있는 곳으로 씨엉씨엉 걸어가는것이였다.

오석구가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곤도를 향해 벙어리시늉을 했다.

곤도가 김상건에게로 마주 왔다. 그자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이였다.

별안간 김상건이 비호같이 내달아 곤도의 동가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곤도가 헉!- 하며 나가넘어지자 주막집에서 왜놈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김상건은 눈을 부릅뜨며 우뢰치듯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들!-》

그러더니 권총을 뽑아들고 연방 갈겨대며 왜놈들을 맞받아 달려나갔다.

어찌나 그 기세가 무서웠던지 달려들던 왜놈들중 더러는 비명을 지르며 너부러지고 더러는 얼혼이 나가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주막앞에 왜놈들이 끌고 왔는지 말 한필이 매여있었다. 내처 그리로 달려가 고삐를 푼 상건은 번개같이 말우에 올라타더니 세차게 투레질하는 말을 휘여잡아 냅다 몰기 시작했다.

나루터의 여기저기서 매복했던 놈들이 쓸어나오며 마구 총질을 해댔다. 총알이 가로세로 휙휙 날아왔다.

(네까짓 놈들이 날 잡아보겠다구?)

병정시절 기마술을 익힐 기회가 있었던 김상건은 말이라면 꽤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달리는 말잔등에 바싹 엎드린채 연신 말배때기를 걷어찼다.

귀뿌리에서 바람이 아우성치고 강가의 밭뙈기들이 씽씽 맞받아 날아왔다. 머리우로, 귀전으로 총알이 아츠럽게 스쳐간다.

갑자기 말이 거세게 울부짖으며 곤두박이를 쳤다. 그 서슬에 김상건도 허궁 내동댕이쳐져 밭뙈기에 나딩굴었다.

쑤시는 아픔속에 머리를 쳐들고보니 말은 총탄에 맞아 한켠에서 버둥거리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왜놈들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대며 따라오고있었다.

김상건은 등에 진 괴나리보짐을 더욱 단단히 비끄러맸다. 그리고는 권총을 틀어쥔채 벌떡 일어나 홑몸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리니 한강철교가 나졌다. 김상건은 방뚝으로 달려올라갔다.

그가 방뚝에 올라섰을 때 돌연 《다레까(누구얏)?》 하는 기겁한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터졌다.

순간 뜨거운 쇠몽둥이가 왼쪽어깨죽지를 후려치는듯 한 호된 충격과 함께 상건은 앞을 막아나선 누르스름한 형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나자빠지는 몸뚱이를 보니 철교를 지키던 왜놈병졸이였다.

김상건은 비칠거리며 철교에 들어섰다.

호흡이 가빠왔다. 숯불을 삼킨것처럼 목이 타들었다. 그는 쓰러질듯 휘청대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간간이 놓여있는 침목들을 디디고 나갔다.

시커먼 강물이 천길심연인양 발밑에서 꿈틀거리고있었다. 무정하게 뻗어나간 철길이 어지러이 좌우로 흔들거린다.

하건만 상건은 토막숨을 헉헉 내뿜으며 얼기설기한 트라스의 철골들이 감옥의 철창인양 둘러싸고있는 철길우를 강잉히 걸어나갔다.

조선사람들의 피와 땀이, 한숨과 목숨이 배여있는 철길이였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왜놈감독들의 채찍을 맞아가며 하나하나의 침목을 놓았고 얼마나 많은 농부들이 이 철길때문에 하루아침에 땅을 빼앗기고 류랑의 길을 헤매고있는가.

그렇게 놓은 철길로 왜놈들은 조선을 집어삼킬 저들의 군대를 실어왔고 이 땅의 기름진 옥백미와 금은보화를 쉬임없이 실어가고있었다. 오죽하면 아이들까지도 《양귀는 화륜선을 타고 오고 왜귀는 철차 타고 몰려든다》는 동요까지 지어부르고있으랴.

그러한 철길로 지금 이 나라의 한 사나이가 원한품고 걸어가고있는것이다.

추격하던 왜놈들도 철교에 들어섰다. 야멸차게 고아대는 소리가 등덜미를 물어제낄것처럼 따라오는데 위협하듯 쏘아대는 총알들이 철골에 부딪치고 레루에 튕겨나며 채찍마냥 윙윙거렸다.

상건도 놈들을 향해 권총을 쏘며 필사의 힘을 다해 걸음을 다우쳤다. 그러던 그가 철교의 중간어름에 거의 다달았을 때였다.

또다시 날아온 총알이 다리를 꿰뚫는 바람에 상건은 오금을 꺾으며 주저앉고말았다.

고통스러운 경련의 파문이 그의 얼굴에 번져갔다. 어깨며 다리에서 그칠새없이 피가 흘러나오고있었다.

김상건은 깜빡깜빡 흐트러지는 의식을 가다듬으며 달려오는 왜놈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빈 격철 떨어지는 소리가 맥없이 울렸다. 총알이 떨어진것이였다.

드디여 자기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은 상건은 권총을 내던지더니 점점 가까이 오는 왜놈들을 지그시 쏘아보며 괴나리보짐을 풀었다.

둘둘 뭉그린 군복속에서 붉은 비단보에 싼 네모진 물건이 나타났다.

다름아닌 간밤에 그가 빼내온 황제의 옥새함이였다.

조심스레 옥새함을 쓸어보고난 김상건은 아프도록 그것을 옆구리에 꽉 끼며 안깐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세웠다.

온통 피자박이 된 흰옷바람에 붉은 보꾸레미를 낀채 가슴을 떡 벌리고 버티여선 상건의 모습이 석양볕에 반사되여 불덩이처럼 황황 타번졌다. 달려오던 왜놈들도 그 기개에 아연해져 주춤 굳어져버렸다.

상건은 총에 맞은 다리를 끌며 철교의 가녁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번쩍거리는 철골에 몸을 의지했다.

저녁해가 진홍색불길을 토하며 벌판 저 너머로 힘겨웁게 넘어가고있었다. 멀리 하늘가에 쇠기러기소리가 아득한데 락조가 비낀 강물우로 돛배 하나가 마포쪽을 향해 떠가는 모습이 보였다.

불현듯 상건의 눈앞에 대동강의 모습이 겹쳐왔다. 대동강을 허리에 휘감은 모란봉이며 그곁에 형제처럼 나란히 떠있는 릉라도의 봄을 다시 보고싶었다.

고향이 그리웠다. 어머니가 그리웠고 안해가 보고싶었다.

작년 가을 고향에 가서 성례를 치르고 온 뒤 안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태 찾아가보지 못한 상건이였다.

그래도 태여날 자식의 이름만은 미리 지어보냈다. 현무라고.

어릴적에 동네아이들과 같이 올라가 놀군 하던 모란봉의 현무문을 떠올리며 강토를 지켜 용맹하였던 고구려조상들처럼 후세에 자랑스러운 남아가 되기를 바래서 지은 이름이였다.

헌데 바라던 아들대신 딸이 생기면 어쩐다?…

김상건의 찢어진 입귀에 한줄기 미소가 비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인츰 사라져버리고말았다.

악의에 번뜩이는 눈자위들이 다가오고있었다. 살기띤 호흡소리들마저 이제는 똑똑히 들려오고있었다.

무섭게 노려보는 상건의 피빛안광에서 몸서리치게 하는 섬찟한 의미를 읽었던지 왜놈장교가 졸병들을 멈춰세우고 누군가를 앞에 내세웠다.

김상건은 생쥐같은 오석구의 상통을 알아보았다.

어떻게나 숨이 턱에 닿게 쫓아왔던지 그자의 입아귀에 게거품이 덕지덕지 말라있었다. 왜놈들을 등대고 나선 오석구는 제법 득의양양해서 가늘고 새된 비린청으로 떠벌였다.

《김참위, 대세를 따르기 바라오. 일본이 솟는 해라면 조선은 지는해요. 뭣때메 다 망한 나라를 위해 헛된 피를 흘리는거요. 일본사람들도 김참위의 무사다운 충절과 용맹이 부질없이 썩는걸 가석하게 생각하고있소. 인제라도 마음을 돌려먹구 옥새를 바치시오. 그러면 일본사람들은 당신을 용서하고 부귀영달의 길을 열어주겠다고 하오. 목숨이 아깝지 않소?…》

김상건은 뾰족한 턱을 들까불며 간살을 부리는 석구의 몰골을 역겹게 바라보았다.

대체 저놈한테 나라란 어떤걸가?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어던지는 핫바지같은걸가? 혹은 길을 가다가 하루밤 묵고나서면 그만인 주막집같은건지도 모르지.

피를 바쳐 지켜야 할 나라도 모르고 겨레붙이도 모르는 저런 놈이 짐승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상건은 비루먹은 개를 보듯 멸시에 찬 비웃음을 던지며 가증스러운 매국노를 준렬히 꾸짖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구? 아깝구말구. 나라고 왜 제 목숨이 귀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너처럼 왜놈의 개노릇을 하면서 살고싶진 않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사람답게 목숨을 버릴지언정 왜놈 사타귀나 핥으면서 백년천년을 살고싶진 않단 말이다! 사람이면 사람값을 해라, 이 더러운 놈!》

그러고난 김상건은 옆구리에 끼였던 옥새함을 와락 두손으로 그러안으며 왜놈들을 향해 벽력같이 노성을 터뜨렸다.

《이놈들아! 옥새를 바치라구?! 감히 어디다 대구 이 나라의 신성한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겠다는거냐! 조선사람들이 다 죽은줄 아느냐! 네놈들이 날 열백번 죽인다 해도 옥새는 절대로 못 다친다!》

원한과 분노, 증오로 짓타는 불길이 상건의 부리부리한 두눈에서 이글거리고있었다.

문뜩 그의 눈앞에 량기탁이며 리준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는 입속으로 절절히 부르짖었다.

《부탁합니다!…》

왜놈들이 달려들었다.

순간 김상건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철골을 떠박지르며 옥새함을 그러안은채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무심히 느물대며 흘러가는 검푸른 한강이 사나이를 강심깊이 삼켜버렸다. …

그날 밤 량기탁은 집으로 찾아온 시위대의 고수머리병정을 통해 김상건의 최후를 알게 되였다.

병정의 이름은 곽칠성이였다.

그때 거기서는 량기탁과 리준 그리고 기별을 받고 대궐에서 은밀히 빠져나온 박상궁이 모여앉아 옥새를 경운궁에 들여보낼 방도를 의논하고있던중이였다.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앞에 억이 막혀 꺼멓게 질려있는 그들에게 칠성은 왜서 김상건이 스스로 그런 길을 택했는지를, 어이하여 자기가 형처럼 믿고 따르던 그를 왜놈의 개에게 일러바치지 않으면 안되였는가를 눈물을 삼키며 들려주었다.

《…상건형은 헤여지면서 저더러 꼭 운강선생님얼 찾아가 사연을 전해달라구 당부했지라오. 그래서 이렇게…》

떨리며 흐트러지던 칠성의 목소리가 흐느낌에 잠겨 끊어져버렸다. 비통하게 이그러진 그의 얼굴에 눈물이 어지러이 번져 흘러내리고있었다.

량기탁은 우두커니 천정만 쳐다보다가 바람에 부러지는 수수목처럼 철썩 고개를 떨구고말았다. 그러는 그의 우묵한 눈구석에서도 눈물이 번쩍거렸다.

량기탁은 그제서야 비로소 모든것을 깨달을수 있었다. 헌걸스레 웃으며 작별하던 김상건의 마지막모습이 못견디게 눈앞에 밟혀와 가슴벽을 뻐근하게 하였다.

장한 사나이였다.

태를 묻은 이 땅과 겨레들의 존엄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 의로운 사나이였다. 저 하나의 안위만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비루한 무리들이야 어찌 불같은 그 뜻과 기개를 헤아릴수 있으랴.

량기탁은 숨을 헐떡거리며 터져나오는 오열을 목구멍으로 힘겹게 삼켰다.

박상궁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는데 리준이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려치며 끝내 격정을 터뜨리고야말았다.

《통분하다, 통분해!》

분노와 슬픔에 충혈된 그의 두눈으로 금시 온몸의 피가 뿜어져나오는것 같았다.

리준은 저세상사람이 된 김상건을 향해 목메여 부르짖었다.

《김참위!- 부디 안심하고 눈을 감으시오! 우리 기어이 그대가 바친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을테요!-》

비분에 떨리는 리준의 목소리가 통절한 여운을 남기며 모두의 가슴을 밑바닥까지 흔들어놓았다. …

그후 리준을 비롯한 밀사들은 비밀옥새가 찍힌 고종의 신임장을 받아안고 헤그로 출발하였다.

허나 그들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버리고말았다.

헤그의 렬강들에게 있어서 국권을 빼앗긴 망국의 군주가 쥐여보낸 조선밀사들의 신임장은 뒤간의 휴지장보다도 못한것이였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에 약자의 목소리는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냘픈것이였던것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국권회복의 서광대신 헤그로부터 날아온 리준의 비보를 전해듣던 날 량기탁도 곽칠성도 약소민족의 서러운 숙명을 통탄하며 피눈물을 뿌리고 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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