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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회

제 1 장

1907년 봄

5


우찌다가 물러가자 이등박문은 또다시 벽장으로 다가가 술잔에 남아있는 브란디를 한모금 들이켰다.

독하면서도 달콤한 브란디의 기운이 식도를 태우며 흘러내리자 오전내껏 쌓였던 긴장의 덩어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이등은 술잔을 든채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와 안락의자에 몸을 실었다. 온몸이 느른해왔다. 봄날의 노곤한 해살이 창문으로 비쳐들고있었다.

《흠…》

불현듯 이등이 코웃음을 흘렸다. 통감의 우유부단함에 불만을 토하던 우찌다의 말이 다시금 상기되였던것이다.

(아무리 제노라는 우찌다도 능한 독수리는 발톱을 감춘다는걸 알려면 아직 멀었거던.)

이등은 허옇게 드리운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헤그밀사문제를 놓고서도 그렇게 말할수 있었다.

이등은 헤그회의가 열린다는 통보를 받은 순간부터 고종이 그 회의에 밀사를 파견할수 있다는것을 예견하고있었다. 아니나다르랴 이등의 예상이 옳았음을 확인하는 정보들이 여기저기에서 날아들었고 마음만 먹으면 고종의 밀사파견을 얼마든지 저지할수도 있었다.

허나 이등은 고종의 그런 움직임을 모르는체 하기로 하였다.

주권을 빼앗긴 가련한 황제를 동정해서가 아니였다.

사실 이등에게 있어서 겉으로는 어리숙한척 하면서도 돌아앉아서는 내흉스러운짓을 곧잘 꾸미는 고종은 눈에 든 가시나 다름없었다.

틈만 생기면 외국에 일본을 욕하는 밀서를 보내는가 하면 배일세력과 련계를 맺어보려고 지꿎게 준동하는 고종때문에 통감자리를 차지하고나서도 늘쌍 오강뚜껑으로 물을 떠먹는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께름해있는 이등이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고종에게서 명색뿐인 황제감투마저 벗겨버리고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열두번은 더 치받쳐오르군 하였다.

하건만 이등은 심사숙고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과 같이 장구한 기간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유지되여온 곳에서 비록 망국의 군주라 할지라도 고종이 미치는 영향은 가볍게 대할것이 아니였다. 오랜 세월 조선인들에게 왕은 곧 나라였고 일본에 항거하여 총을 든 대다수의 조선의병들도 임금을 도와 외적을 쳐물리친다는 근왕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있었다.

때문에 치밀한 타산없이 오이꼭지 따듯 황제를 제거하려 들다가는 되려 뜻밖의 역풍을 맞을수도 있었다.

땅벼락같이 벼르며 때를 노리던 이등은 헤그회의를 맞춤한 기회로 삼게 되였다.

고종이 헤그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물의가 생기면 그 책임을 물어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킬뿐아니라 그것을 기화로 조선의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합병》을 촉진시키자는것이였다.

하여 이등은 고종의 거동에 일부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한편 헤그회의에 참가하는 일본대표단에 이미 사전통지를 보내고 각국 대표들이 조선밀사들과의 접촉을 거절하도록 선손을 쓰게 하면서 물샐틈없는 그물을 치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우찌다와 하세가와가 통감의 그런 속심도 모르고 덤벼치다가 풀대를 쳐서 뱀을 놀래운 꼴이 되였으니 이등으로서는 화를 낼만도 한 일이였다.

(허, 그러면서도 비스마르크를 거론해?)

사람들은 흔히 비스마르크를 입에 올릴 때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철혈정책에 대해 즐겨 떠들어댄다.

하지만 그러한 강경정책을 로련한 수완으로 안받침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비스마르크가 도이췰란드통일의 대업을 달성할수 있었으랴.

이등박문은 가소롭다고 생각하며 술잔을 마저 비웠다.

갑자기 밖에서 《꽝!》 하는 포소리가 터졌다.

이등은 화뜰 놀라 창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세가와의 사령부가 있는 필동쪽에서 연기가 풀썩이는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오포를 쏘았다는것을 깨달은 이등은 오전에 하세가와에게서 받은 모욕이 되살아나 저도 모르게 씹어뱉았다.

《빌어먹을!…》

몇달전부터 정오를 알려 매일 저렇게 오포를 울리는 바람에 수백년을 내려오며 울리던 종로의 보신각종은 아예 벙어리가 돼버리고말았다.

하기는 가끔가다 저 소리에 가슴이 덜컹 하긴 해도 일본군사령부가 직접 쏘아대는 저 대포소리가 날마다 일본의 서슬푸른 위엄을 상기시키며 조선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테지 하고 생각하며 이등은 애써 짜증을 눌렀다.

그럴 때 비서관이 들어오더니 점심시간이 되였다고 알려주었다. 취기가 시장기를 밀어내서인지 점심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등이 시들해서 머리를 흔들자 비서관이 귀띔한다.

《통감각하, 오늘 점심에는 조선대신들과의 오찬이 예정되여있습니다.》

《오찬?…》

뒤늦게야 통감부의 시정에 대한 조선각료들의 의견을 청취할겸 오늘 오찬을 가지기로 했던것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통감정치가 조선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시행되고있는듯이 광고하기 위한 겉치레놀음에 불과한것이였다.

도대체 통감의 말에 언제나 군말없이 동의하여야만 하는 조선대신들에게서 무슨 의견을 청취한단 말인가.

이등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쌀쌀하게 뇌까렸다.

《난 그만두겠네. 날 대신해서 총무장관이 오찬을 주관하도록 하게.》

그러자 비서관은 알만 하다는듯 목을 꺾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통감각하, 다야마 사다꼬상이 오셨습니다.》

《사다꼬가?…》

다야마 사다꼬란 이등의 양딸 배정자의 일본식이름이다.

이등의 얼굴이 대뜸 시퍼래졌다. 비서관이 주밋거리며 뒤를 달았다.

《각하께 급히 알려드릴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등은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채 퉁명스레 머리를 끄덕였다.

비서관이 나가고 뒤미처 양장을 한 배정자가 향수내를 풍기며 방에 들어섰다.

덧옷이며 모자를 대기실에 벗어버린 배정자는 감빛브라우스에 검은색주름치마를 받쳐입고있었다. 마흔이 가까울수록 더욱 풍염해지는 정자의 육체가 오늘따라 이등의 부아를 까닭모르게 돋구었다.

《아이참, 아버진 또 점심을 건느시려는가보지요?》

창문곁의 의자에 익숙한 태도로 앉던 배정자가 책상우에 놓인 빈 술잔을 알아보고 호들갑을 피우는 소리였다.

아침부터 때없이 술을 꺼내여 쫄금쫄금 마시다보니 종일 가야 밥 한공기도 변변히 축내기 힘들어하는 이등의 버릇을 잘 아는 정자였다.

배정자는 큰일난듯 눈꼬리가 까부장해서 응석기어린 지청구를 쏟아놓았다.

《그렇게 술만 계속하시니 노상 위장병에 시달리시지요. 의사가 말한걸 잊으셨어요? 위병을 고치려면 술을 꼭 끊으셔야 한다질 않았어요. …》

《듣기 싫다!》

이등이 벌컥 신경질을 부렸다. 앙칼진 가시눈으로 배정자를 노려보며 이등은 물어뜯듯 따져물었다.

《위병이구 뭐구 대관절 넌 뭘 하느라 돌아치느냐? 지난밤에 한성 한복판에서 일본장교가 살해된걸 아느냐? 일진회것들이 경운궁에서 무슨 일을 벌려놓았는지 알기나 하느냐 말이다!…》

때아닌 때 나타난 배정자를 보니 이등은 그런 일을 사전에 눈치채지 못한 그에 대해 불만이 터져나오는것을 누를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경운궁과 련계가 깊은 배정자에게 궁중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움직임도 놓쳐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해오지 않았던가.

이등은 하세가와며 우찌다에게서 모욕을 당한것이 전적으로 배정자탓이기나 한듯이 기광이 나서 호통쳤다.

《그래 네가 매수한 상궁이니, 내시니 하는따위들은 뭘 하고있었다더냐?! 대체 그것들이 네 말을 듣긴 듣는게냐? 흥, 그러니 떠도는 말이 헛소린 아닌게구나. 듣자니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꾼것두 너때문이라면서?》

배정자의 입술이 새침하니 비틀렸다.

아닌게 아니라 통감부가 설치된 뒤 경운궁의 대문현판이 별안간 《대안문》(大安門)에서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였는데 세간에 파다하게 떠도는 소문인즉 배정자가 양장에 모자를 쓰고 궁안을 들락거리는것을 밉게 본 사람들이 갓 쓴 녀자가 대궐을 드나들면 나라가 망한다고 임금에게 상주하여 갓 쓴 녀인의 모양인 《안》(安)자를 사나이를 뜻하는 《한》(漢)자로 바꾸었다는것이다.

무릎우에 두손을 맞잡고 앉아 꼼짝 못하고 이등의 분풀이를 당하던 정자가 토라진 어조로 한마디 하는것이였다.

《저도 오늘 아침에 우찌다상에게서 간밤의 일을 들었어요.》

《우찌다한테서?!…》

가늘게 쪼프린 이등의 눈에서 파란 불길이 일었다.

우찌다가 정자한테까지 손을 뻗쳤는가? 그러고보니 둘의 나이도 크게 벌어지지 않는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홀연 배속에서 질투의 뱀이 똬리를 틀고 몸부림쳤다. 이등은 입새로 랭랭하게 내뱉았다.

《너 그제 밤에두 우찌다를 만났댔냐?》

그제 밤에 정자를 통감관저에 불렀건만 오지 않은 일을 념두에 둔 소리였다.

배정자의 얼굴가에 능갈친 빛이 어른거렸다.

그 녀자는 감정의 찰나를 놓치지 않는 기민한 눈길로 이등을 바라보다가 요사스레 반문했다.

《전 우찌다상을 만나면 안되는가요? 뭇녀인들이 호걸남아를 사모하는거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요. 아버지도 얼마나 많은 녀인들의 사모를 받아오셨어요. 죠오꼬, 쯔야꼬, 다께꼬, 기미꼬…》

이등이 속옷 갈아입듯 바꾸어댄 기생들의 이름을 알뜰히 꼽는 배정자의 입꼬리에 달콤해하는 미소가 매달려있었다.

그러는 정자를 이등은 죽일듯이 쏘아보고있었다. 하면서도 계집의 요염한 모습앞에 음심이 바짝 동하는것만은 어쩔수 없었다.

솔직한 내심으로 이등에게는 절대순종형의 일본녀자들보다 예쁘면서도 되바라진 배정자의 이런 성미가 더 마음에 들었다.

딴은 배정자의 말이 틀린것은 아니였다.

젊어서부터 도꾜 신바시의 화류계를 좁다하며 휩쓸고다닌 이등박문은 녀자를 권력의 전리품쯤으로 여기면서 일흔을 눈앞에 둔 이날까지도 화려한 호색행각을 멈추지 않고있었다. 통감으로 부임할 때 급사라고 시치미를 떼며 데려온 신바시기생 죠오꼬만 보더라도 몸값이 무려 1만원이였다니 이등의 녀성탐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만 한 일이다.

정자가 욕사발을 뒤집어쓴 앙갚음으로 자기를 놀리고있다는것을 알아차린 이등은 약이 받쳤지만 요망한 년의 입에서 또 무슨 소리가 튀여나올지 알수 없어 별수없이 말머리를 돌리고말았다.

《그래 급히 알릴 일이라는게 뭐냐?》

그제서야 배정자는 새초롬하던 기색을 가시더니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잠시후 정자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황제의 비밀옥새를 가로챈 조선군 참위가 오늘 저녁에 한강을 건느기 위해 노들나루에 나온답니다.》

이등의 눈에 흰자위가 번뜩였다.

《그게 정말이냐?》

칼날처럼 날이 선 그 물음에 배정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잽싸게 소곤거렸다.

《좀전에 일진회원이 알려준 정보예요. 원래는 참위가 옥새를 경운궁에 다시 들여보내려댔는데 궁성경비가 하도 삼엄해서 하는수없이 한강을 건느려 한다더군요. 아마 옥새를 가지고 삼남일대에 횡행하는 폭도들한테 가려는가봐요.》

이등박문은 눈을 감은채 타산을 굴려보았다.

예상밖에 굴러온 기회였다.

이 기회에 옥새를 제 손에 걷어넣으면 의뭉하기 짝이 없는 조선황제도 골탕 먹이고 안하무인격으로 날치는 하세가와나 우찌다의 코도 납작해지게 할수 있으니 배 먹고 이닦기가 아닌가.

허나 그리되면 헤그회의를 조선황제의 함정으로 만들고 새우로 잉어를 낚으려던 당초의 계획이 글러질수도 있었다. 이를 어찌한다?…

두손에 떡을 쥔 이등은 어느쪽이 더 큰 떡인가 가늠해보며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뜩 무슨 생각이 뇌리를 찔렀는지 눈을 뜨며 배정자에게 묻는것이였다.

《헌데 이상하구나. 어떻게 일진회원이 그런 정보를 너한테 알려줬느냐? 일진회원이라면 필경 우찌다나 송병준이한테 알려줬음직한데 말이다.》

이등이 머리를 기웃거리자 정자가 곱게 눈을 할기죽거렸다.

《참 아버지두, 참말 이 사다꼬를 숙맥으로 보시는게 아니예요.》

교태가 찰찰 넘치는 그 모습에 이등은 그만 낄낄 웃고말았다.

요물은 요물이였다. 방금전에 욕을 퍼붓긴 했어도 빼여난 미색과 간교한 솜씨로 하여 세간에 《흑치마》로 소문난 배정자가 일본과 이등을 위해 한 일은 결코 허술한것이 아니였다.

고종의 계비인 엄비의 줄을 잡고 황제의 눈에 든 뒤로 정자는 대궐을 제 집 드나들듯 하면서 적지 않은 값진 정보들을 일본에 제공하고 이 나라 조정에서 친로세력을 몰아내는데 한몫 단단히 하였다.

하기에 《을사5조약》을 꾸며내기 위해 조선에 건너온 이등이 손탁호텔에 려장을 풀자마자 제일먼저 만난 인물도 다름아닌 배정자가 아니였던가.

통감정치가 시작된 후에도 정자는 《을사5조약》이 《조인》된 중명전에서 밤마다 연회를 열며 이등의 눈과 귀가 되여 정국의 동향을 살피고 친일여론을 만들어내고있었다.

게다가 늙은 호색가의 가슴에 욕정의 불을 지를줄 아는 미모의 탕녀이기도 하였으니 이등으로서는 배정자를 양딸로 키워온 품이 조금도 아까울것이 없었다.

《아무튼 네 수고가 많다.》

다소 마음이 풀어진 이등이 이렇게 말하며 지친듯 어깨를 움죽거린다.

눈치빠른 정자가 얼른 일어나더니 이등의 등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점심무렵의 통감부청사는 쥐 죽은듯 조용했다.

물 오르는 남산기슭에서 이름모를 새들이 재깔대는 소리가 호젓하니 들려오고있었다.

빈속에 술을 마신지라 취기가 사지에 알딸딸하게 퍼져있는데 정자의 살가운 손길이 젊은 녀자의 야릇한 살내와 어울려 이등의 몸과 마음을 기분좋게 위안하고있었다. 이등이 정자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황제의 동향은 어떠냐? 뭐 전번에도 우릴 두구 〈섬오랑캐 이등과 장곡천(하세가와)〉이라고 욕질했다면서?》

그러자 배정자가 랭소를 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일본에 모든걸 빼앗긴 황제이니 앙심이 클수밖에요. 비밀옥새를 잃어버린 뒤로는 줄곧 한숨만 쉬면서 불안해하고있다더군요. 참 어리석기란, 인제야 다 깨진 사발인데 헤그에 밀사나 보내선 대체 뭘 한담. …》

배정자의 비웃음에 이등도 코방귀가 나갔다.

《흥, 만국공법이 불여대포일방이라 했거늘.》

아무리 요란한 국제법이라 해도 대포 한방만 못하다는 이 말은 당시 일본인들이 흔히 외우던 소리였다.

이등박문은 쓰겁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명치《천황》과 조선황제는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천양지차인가.

명치《천황》이 일본을 렬강의 반렬에 올려세우고 도요또미 히데요시도 못 이룬 꿈을 달성하여 조선을 타고앉은 반면에 조선황제는 500여년 사직을 말아먹고 나라를 송두리채 뺏기우지 않았는가.

사실 지난날 서양렬강에 유린당하고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하기는 일본도 조선과 다를바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나라의 치욕을 씻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이를 갈며 아득바득했고 조선을 삼키기 위해 피를 물고 악을 써왔다. 임오군인폭동때 청국에 선손을 떼운 뒤 10여년을 준비하여 일청전쟁으로 그를 밀어냈고 《3국간섭》으로 로씨야에 밀리게 되자 또다시 10년을 와신상담하여 일로전쟁으로 로씨야를 물리쳤다.

그런데 일본이 그렇게 죽기내기로 달려오는 동안 조선의 황제나 고관들은 한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국력을 키워 대세를 극복하려 할 대신 밤낮 어느 렬강에 붙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것인가에만 골몰해오지 않았던가. 결국 친일과 친로, 친미와 친청을 넘나드는 번다한 외교를 펼쳤지만 이 땅은 어느덧 렬강들의 각축장으로 화하였고 종당에는 망국의 고배를 마시지 않으면 안되게 된것이다.

지금도 벌려놓고있는짓이란게 마루아래 강아지가 다 웃을지경이다. 강대국들에 호소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꿈꾸며 헤그회의를 천재일우의 기회처럼 여기고있는 고종에게 다른 렬강들은 제쳐놓고라도 《조선인들을 위해 일본에 간섭할수는 없다.》고 잘라맨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의 본심만 귀띔해줘도 좀 정신을 차릴는지.

강자앞에서 약자는 언제나 죄인이라는 국제무대의 랭혹한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한 고종이 딱해보이기까지 하였다.

하긴 조선인들모두가 그렇게 암둔하여 헛되이 남만 쳐다보며 살아간다면 일본의 통치가 오히려 수월하겠건만…

《아버지, 무슨 근심이 있으세요?》

등뒤에서 배정자가 어깨를 주무르며 묻는 소리에 이등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그러더니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불쑥 던졌다.

《사다꼬, 넌 내가 밉지 않느냐?》

《예?…》

배정자가 얼떠름해서 되묻자 이등은 멋적은 웃음을 흘렸다.

《어떻든 너도 근본이야 조선인이 아니냐. 그러니 자기 조국을 욕보인다고 여느 조선인들이나 마찬가지로 날 욕할 때가 있을테지?》

《호호호…》

정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할근거리며 간드러지게 웃던 그 녀자는 이윽고서야 여전히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례사로이 대답하는것이였다.

《난 곳은 조선이지만 절 이렇게 키워준건 아버지이고 일본이예요. 조국이라는것도 선택할수 있는게 아니겠어요. 아버지, 전 가난하고 무력한 이 땅을 조국이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제겐 아버지면 그만이예요.》

《허허…》

이등박문은 흠흠해하며 턱수염을 쓸어만졌다.

배정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는 정자에게 있어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준데다 강하기까지 한 일본을 조국으로 받아들이는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인들이 다 배정자 같은것은 아니였다.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경향각지에 창궐한 의병들을 진압하라고 매일같이 목대를 세우면서 이등은 지심깊이 끓어번지는 암장과도 같은 조선민족의 저력에 날이 갈수록 등골이 서늘해져갔으며 썩은 생선마냥 부패하고 무능한 이 나라 지배층을 휘여잡는것으로 모든것이 끝나지 않으리라는것을 몸서리치게 예감하고있었다.

그가 《합병》문제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주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었던것이다.

실눈을 짓고있는 이등의 눈거죽속에서 회색눈알이 불안스레 반짝거렸다.

우찌다의 말마따나 이 땅을 영원히 타고앉자면 조선인들을 배정자나 송병준이 모양으로 동화시켜야 하고 그러자면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일본에 대한 사대심을 불어넣어야 한다. 방도는 그것밖에 없다.

배정자나 송병준이 왜서 그리도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것인가. 제 나라와 민족은 보잘것없으니 일본에 기대여야 부귀영화를 보장받을수 있다고 굳게 믿고있기때문이 아닌가.

그들처럼 모든 조선인들이 자기 민족의 렬등함을 자인하고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으로 환골탈태하는것만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확신하게 하여야 한다. 바로 배정자를 길들였듯이…

이등은 자기의 어깨를 주무르고있는 정자의 손에 제 손을 얹으며 감회로운듯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널 양딸로 삼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

《벌써 스무해가 되는군요. …》

배정자의 목소리도 제법 축축해진다.

이등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선에서 도망쳐온 애어린 밀양기생 배분남(배정자의 본명)을 처음 만나던 때를 돌이켜보았다.

어딘가 새침하면서도 이따금 상글거릴 때면 눈초리가 먼저 웃군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계집이였다. 대번에 계집이 마음에 들었다.

더우기 대원군과 련관되여있던 그의 아버지가 명성황후세력에 의해 처형되였다는 사실과 어려서부터 기생노릇을 하였다는 점이 각별한 흥미를 끌었다.

자기 조국에 대해 원한을 품고있고 일찌기 정조가 무너진 계집이 일본의 조선병탄에 유용하게 쓰일수 있다는것을 이등은 어렵지 않게 포착하였다. …

이등이 정자의 손을 잡아 넌지시 제곁으로 이끈다.

정자가 가벼이 한숨을 내쉬며 이등이 앉아있는 안락의자의 팔걸이우에 스스럼없이 걸터앉았다.

온몸의 피가 서서히 달아오르는것을 느끼며 이등은 도자기의 겉면처럼 희고 매끈한 정자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촉촉히 젖어오른 녀자의 손가락들이 이등의 손안에서 맥없이 놀리는대로 놀았다.

《마음뿐이였지 그간 네게 제대로 못해준것 같다.》

미안한듯 외우는 이등의 소리에 배정자가 감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별말씀… 아버진 절 극진히 돌봐주셨어요.》

이등의 얼굴에 능청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배분남의 쓸모를 알아본 이등은 계집이 제 집에서 일하며 거처하도록 해주었고 사다꼬(정자)라는 일본이름을 달아주었다. 남편의 엉큼한 속을 읽은 이등의 안해가 정자를 양딸로 들이자고 제안했다.

이등은 배정자를 경찰학교에 입학시켜 전문적인 밀정교육을 받게 하는 한편 그의 넋속에 남아있는 조선적인것을 깡그리 제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두말할것없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정자의 호함진 육체를 마음껏 즐기며 장차 일본이 거머삼키려 하는 조선반도를 그려보군 하였다. 조선녀인 배분남은 그렇게 일본녀인 다야마 사다꼬로 동화되였다. …

《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

흥클한 이등의 손이 배정자의 손에서 슬그머니 녀자의 허벅지로 옮겨갔다.

정자의 눈꼬리가 풀어졌다. 복숭아꽃처럼 발기우리해진 두뺨, 브라우스가 터질듯 들떠오른 흐벅진 젖가슴…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중년녀자의 육체가 이등의 눈앞에 있었다.

이등이 물었다.

《사다꼬, 나를 존경하느냐?》

정자의 입에서 외마디소리가 새여나왔다.

《예.》

이등의 두다리사이가 뜨거워났다. 그는 화끈해진 정자의 허벅지를 움켜잡고 갈린 소리로 뇌까렸다.

《존경한다면 순종해야 하느니라.》

정자가 억눌린 신음소리를 질렀다. 주름치마에 감싸져 나른해진 그 녀자의 다리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린다.

이등의 눈이 흉포하게 충혈되였다. 이런 순간이 그에게는 제일로 좋았다.

사나이의 무상의 희열은 정복의 순간에 있거늘 안에서는 녀자들을 정복하고 밖에 나가서는 천하를 정복하는 즐거움이 없이야 무슨 살맛이 있을고.

그 순간 이등은 오늘 저녁 한강을 건느려 한다는 조선군관에게서 옥새를 뺏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지 않아도 고종의 골치아픈 그 비밀옥새때문에 늘 찜찜해있던 이등으로서는 모처럼 입안에 굴러든 먹이를 마다하고싶지 않았다.

설사 옥새를 뺏기웠다 해도 렬강들을 구세주처럼 쳐다보는 조선황제이니 지랄을 쳐서라도 헤그회의와 같은 호기를 놓치려 하지 않을것이다. 그때 가서 미리 짜둔 각본대로 얼음에 박 밀듯 만사를 밀어제끼면 자기를 헐뜯던 야마가따나 하세가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는지 꽤 궁금한걸. …

이등박문은 손을 뻗쳐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경무총장을 대라!》

어느 틈에 벌써 이등의 다른 손이 배정자의 가슴으로 엉금엉금 기여오르고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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