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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제 1 장

1907년 봄

3


남대문근처의 상동교회 지하실에서는 벌써 몇시간째 두 사나이가 누군가를 초조히 기다리고있었다.

둘중 년장자로 보이는 한 사나이는 양복을 입고있었는데 두드러진 넓은 이마아래 불덩이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연신 방안을 왔다갔다하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강파르고 길쑴한 얼굴의 다른 사나이는 두루마기를 입고있었는데 두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돌부처인양 움쩍않고있었다.

《뗑, 뗑…》

벽시계가 자정을 알리며 열두점을 친다. 그 종소리는 조바심과 위구심에 매삼치는 두 사나이의 신경을 아츠럽게 두드렸다.

양복을 입은 사나이가 못 견디겠던지 주먹으로 이마를 문다지며 골을 냈다.

《원 이런 답답한 송사라구야. 혹시 일이 잘못되기라도…》

사나이는 말끝을 여물구지 못했다. 두루마기를 입은 사나이의 눈시울이 들리우더니 우묵한 눈확에서 범상치 않은 눈빛이 번뜩이였던것이다.

허나 그것은 잠시뿐, 두루마기는 다시 눈을 내리감으며 태연히 이르는것이였다.

《좀더 기다려봅시다, 청하형.》

그러는 모양을 어이없이 바라보며 양복입은 사나이는 쓴입만 다셨다.

《참, 운강선생은 태평도 하시구려.》

청하란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가게 되여있는 리준의 호였고 운강은 《대한매일신보》 총무인 량기탁의 호였다.

그무렵 상동교회의 지하실은 애국지사들의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였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뜻있는 사람들이 수시로 이곳에 비밀리에 모여 시국을 론했고 지방에서 온 지사들이 제일먼저 찾는 곳도 이곳이였다.

그런 곳에서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선두에 서있던 리준과 량기탁이 자정이 넘도록 자리를 못 뜨고있는것은 대체 무엇때문이던가.

바로 그날 낮에 있은 일이였다.

저동에 있는 청화정이란 료리집에 송병준을 위시한 일진회의 두목들이 몰려들어 한바탕 먹자판을 벌려놓았다.

송병준의 왜첩이 운영하는 청화정은 일진회의 소굴로서 주지육림에 빠져 헤여나기 어렵다 해서 흔히 침몰정이라 불리우는 곳이였다.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술잔들이 어지러이 오가고 취흥에 질벅하여 혀꼬부라진 소리로 왜노래를 질러대던 일진회패거리들은 술자리에서 뜻밖의 극비를 흘리고말았다.

일진회의 끄나불인 대궐의 어느 내시가 밤중으로 임금의 비밀옥새를 빼내오기로 되여있는데 일본헌병대에서 이미 전갈을 받고 대한문으로 급히 헌병을 보냈다는것이 아닌가.

일진회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박아넣은 청화정의 한 사환애가 그 소리를 엿듣고 다급히 량기탁에게로 달려왔다.

량기탁은 금시 혈관의 피가 얼어버리는것만 같았다.

헤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결사의 각오로 준비해온 그들이였다. 꿈을 꾸어도 국권회복의 꿈을 꾸며 회의가 열리기만을 고대해온 그들이 아니였던가.

바야흐로 밀사들이 떠날 시각은 박두해와 황제의 신임장이 떨어지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있는 이때 옥새를 빼내다니?!…

헤그회의에 기대를 걸고 지금껏 들여온 그 모든 고심겨운 노력이 한순간에 허사로 돼버릴 판국이였다.

화급해난 량기탁은 헤그에 가야 할 당사자인 리준을 총총히 만났다. 사태가 하도 중대하고 긴박한지라 여러 사람과 론의할 성격이 아니였던것이다.

최선의 방도는 왜놈들과 일진회의 음모를 한시바삐 황제에게 알리는것이였다. 하건만 일본경찰들이 겹겹이 봉쇄하고있는 궁안에 무슨 수로 당장 급보를 들여보낸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리저리 재며 망설이고있을 시간도 없었다.

량기탁은 리준과 방책을 의논하던 끝에 은밀히 한 사나이를 불렀다.

시위대 참위(소위) 김상건이였다. 그 시기 조선군대는 황궁과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인 시위대와 지방군인 진위대로 나뉘여있었다.

김상건에게 정황을 설명하고난 량기탁은 그의 손을 꽉 붙잡고 절절히 당부했다.

《김참위, 국운이 걸린 일이오. 이 나라의 마지막옥새를 왜놈들에게 빼앗겨선 절대로 안되오.》

김상건은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량기탁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렇게 떠나간 김참위가 아직까지도 종무소식인것이다.

어찌된걸가? 일진회것들이 헛소리를 줴친걸가? 아니면 왜놈들의 손에서 옥새를 빼앗아내던중 잘못되기라도 한건 아닌지?…

두부장 끓듯 속을 끓이며 방안을 오가던 리준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눅잦혀보려는지 주머니에서 담배곽과 성냥을 꺼내들었다. 담배를 물고 성냥을 그어대는 그의 손끝에 결기가 묻어났다.

그러던 리준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슬며시 뽑고말았다.

온 삼천리에 료원의 불길마냥 타번지고있는 국채보상운동의 앞장에서 침식을 잊고 뛰여다니는 량기탁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본에 진 막대한 빚을 갚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며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의연금을 내고있었다.

남자들은 《단연회》를 뭇고 담배를 끊어 돈을 바쳤고 녀자들은 《감선회》를 뭇고 식찬을 줄여 남은 돈을 바치고있었다. 례장으로 받은 가락지와 비녀를 내놓는 부녀들이 있는가 하면 혼수감을 바치는 처녀들도 있었고 서슴없이 거액의 자금을 기부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부자집의 상노들과 침모들도, 저자의 나물장사며 짚신장사들도 땀에 절은 푼전들을 아낌없이 내놓았고 지어 철부지아이들까지도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바다가에 가서 조개를 캐여 판 돈을 나라빚을 갚는데 보태달라고 바치고있었다.

오죽했으면 황제마저 백성들이 이렇게 나라걱정을 하고있는데 무슨 낯으로 가만히 앉아있을수 있겠느냐며 대궐안에 단연령을 내렸겠는가.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진보적인 신문들이 이 운동의 고무자로, 주최자로 나서고있었고 며칠전 국채보상련합회의소의 회장으로 선출된 량기탁은 이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워낙 위병이 있어 헐끔해보이는 량기탁의 모습은 근래에 와서 더욱 수척해보인다.

리준은 담배곽을 도로 주머니에 밀어넣으며 모두숨을 길게 내쉬였다.

이름없는 아녀자들도 제 나라를 구하려고 그렇듯 눈물겨운 지성을 바치고있는데 동족의 탈을 쓴 저 일진회무리들은 왜적앞에 공을 세우기 위해 나라의 옥새에까지 더러운 손을 대고있으니 이 아니 통탄할 일인가.

하기야 일진회의 우두머리행세를 하는 송병준자체가 조선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노다 헤이지로라는 왜놈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하고 늘쌍 왜옷차림에 장한듯이 《도도이쯔》나 질러대며 싸다니는 반쪽발이이니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으랴.

그런 추물들이 눈앞에서 날쳐대는 꼴을 보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울분에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랭수를 들이키군 하는 리준이였다.

하루빨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통절함에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씹는것만 같은 리준이였다.

《운강선생, 김참위란 그 젊은이가 꽤 해낼것 같소?…》

울보채는 심정을 누를길 없어 한숨을 치쉬고 내리쉬던 리준이 불안스러운 어조로 량기탁에게 묻는 소리였다.

량기탁은 여전히 눈을 꾹 감은채 대답이 없었다. 벌써 세번째로 리준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는 그였다.

김참위가 해낼수 있는가고?…

그자신도 장담할수가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정황속에서 다른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던것이다.

어찌하여 그 순간 김참위가 제일먼저 생각났을가?…

량기탁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린다.

그가 김상건을 처음 알게 된것은 3년전 평양의 강동에서였다.

그때 로일전쟁을 일으키고 저들의 방대한 침략무력을 들이민 일본이 그것을 배경으로 조선봉건정부에 《황무지개간위탁계약서》라는것을 강요했다.

일본의 속심인즉 조선의 많은 토지들을 《황무지》라는 터무니 없는 구실밑에 저들의 소유로 만들겠다는것이였다.

이에 격분한 지사들은 보안회를 조직하여 왜적들의 강도적인 책동에 항거해나섰고 일본과 무능한 봉건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자 보안회를 협동회로 고쳐 투쟁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협동회에서 지방부장의 책임을 맡았던 량기탁도 왜놈들의 《황무지개간》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로 사람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직접 고향인 평양으로 갔었다.

유지들과 관리들을 만나기도 하고 집회에 참가하여 연설도 하면서 평양일대를 돌던 량기탁이 어느날 강동에서 열리는 연설대회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리로 가고있을 때였다.

그의 일행이 강동의 한 야산기슭을 지나는데 별안간 요란한 총소리가 터지는것이 아닌가.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풀을 베던 농군 하나가 풀썩 물앉아버리는것이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농군의 상투는 산산이 풀려 흐트러지고 그 자리에 희끄스름한 연기가 피여오르고있었다.

량기탁과 일행은 저으기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산중턱에서 너털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바라보니 몇명의 양인과 관리행색의 조선인 한명이 있었는데 그중 량옆의 전이 올라간 카우보이모자(미국 서부지방의 기마목동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보총을 든 양인 하나가 눈에 걸렸다.

얼이 나간듯 멍해있는 농군을 내려다보며 허리를 부여잡고 웃어대는 그자의 꼴을 보고서야 량기탁은 양놈이 심심풀이로 농군의 상투에 대고 총질을 했다는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화들랑거렸다. 나라가 변변치 못하니 양놈들이 이 나라 백성알기를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분함에 량기탁은 추상같이 고함을 질렀다.

《이 무슨 무도한짓이냐!》

산중턱에 서있던것들이 흠칠하며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이였다.

어데선가 난데없는 총성이 또다시 터지더니 너털거리던 양놈의 카우보이모자가 훌렁 벗겨져 날아가는것이였다. 그 서슬에 놀라 이번에는 양놈이 불머리바람으로 허궁 궁둥방아를 찧고말았다.

얼떠름해있던 량기탁은 뒤늦게야 앞에서 마주오던 서너명의 조선군대 병정들을 알아보았다. 총은 그들중 한사람이 쏜것이였다.

량기탁은 달아오른 화승총을 틀어잡은 그 병정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기골이 들차보이는 청년이였다. 내찌를듯 일어선 솔잎같은 눈섭밑에서 불길이 펄펄 날리는 부리부리한 두눈이 양놈들을 노려보고있었다.

《장할시고!》

량기탁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지지리도 못나고 어질어빠진 이 나라에 민족의 존엄을 지켜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길줄 아는 저런 병정이 있다는 사실앞에 속이 후련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조정의 임금이, 문무백관들이, 이 강토에 태를 묻은 사람들 모두가 저 병정같다면 어느 누가 감히 조선사람을 업수이 대할수 있으랴.

량기탁은 통쾌한 마음을 금할수 없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흐뭇한 심정은 오래갈수 없었다. 양놈들과 같이 있던 조선관리가 천둥에 놀란 개처럼 천방지축 달려내려와 총을 쏜 병정에게 야단을 치기 시작했던것이다.

《너 이놈! 감히 뉘앞에서 불질이냐! 검정군복을 입었으면 단줄 아느냐 이놈! 양인들을 상하게 하구 나라얼굴에 똥칠을 해놓았으니 네 목이 열개라도 남아날상싶으냐 말이다, 이 미욱한 놈 같으니!…》

병정의 흙빛얼굴이 분노로 하여 컴컴해졌다. 손가락같은 굵은 피줄이 그의 관자노리에서 꿈틀거렸다.

병정이 거센 눈빛으로 마주보며 숙어들념을 안하자 관리는 삶은 문어모양 낯빛이 시뻘개져 더욱 왜가리청을 돋구었다.

당장 군영에 알려 옥에 처넣겠다느니, 륙군법원에 고소하여 물고를 내게 하겠다느니 하며 화가 상투끝까지 솟구쳐 펄펄 뛰는 관리의 욕설을 듣는 과정에 량기탁은 농군에게 총질을 한 양놈일행이 이 부근에서 금광탐사를 하느라 돌아치는 미국인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이가 없었다. 큰 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굽신거리며 온갖 리권을 섬겨바치면서도 제 나라 백성이나 병정은 개돼지 대하듯 무시하는 그 비굴한 사대의식에 욕지기가 치미는것을 견딜수 없었다.

량기탁은 입에 거품을 물고 고아대는 관리에게 다가가 의분을 쏟았다.

《여보시오. 죄를 따져묻는다면 이 병정이 아니라 무고한 백성을 총으로 조롱한 저 양인들에게 해야 마땅하지 않겠소. 헌데 도리여 진짜범인앞에선 한마디 말도 못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군사로서 응당 해야 할바를 한 제 나라 병정에게 욕을 보이려드니 과연 당신은 이 나라 관리요, 아니면 저 미국의 관리요? 대관절 누가 나라얼굴에 똥칠을 하고있는가 말이요?!》

《거, 거긴 대체 뉘시오?…》

관리가 말문이 막혀 쩔쩔매는 소리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량기탁은 미국인들을 향해서도 영어로 준절히 꾸짖었다.

《이자 당신들이 저지른짓은 조선사람들을 심히 릉멸하는 행위였소. 묻건대 그런게 당신들이 즐겨 외우는 박애이고 서양의 신사도인가? 나는 무도하기 그지없는 당신들의 행위를 우리 정부에 고발하겠소. 반드시 당신들이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할테요!》

조선에서 처음으로 되는 《한영사전》의 편찬자인데다 미국에도 여러해 다녀온적이 있는지라 량기탁의 영어발음은 류창했다.

뜻밖의 된경을 치르고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상대가 총을 든 병정들이여서 선뜻 덤벼들지 못하던 미국인들은 량기탁의 도고한 언변과 뛰여난 영어실력에 그만 기가 꺾이고말았다.

미국인들이 관리를 달고 슬그머니 꼬리를 사린 뒤 량기탁은 병정들을 만나 격려해주었다.

알고보니 그들은 성천에 친정나들이를 가는 평양부윤의 소실을 배행해주고 오는 길이였다.

량기탁은 함께 가던 일행과 다른 병정들에게 화를 당한 농군을 돌봐주라고 이르고나서 호기심에 이끌려 미국놈을 혼내운 그 병정을 따로 만나보았다.

그 병정이 바로 평양진위대의 정교(상사)였던 김상건이였다.

보잘것없는 일개 병정을 옹호하여 서리차게 관리를 단죄하던 량기탁에게 믿음이 갔던지 김상건은 자기의 심정을 숨김없이 터놓았다.

평양 기림리에서 야장의 아들로 태여난 김상건은 청일전쟁때 아버지를 잃었다고 한다.

평양성에 달려든 왜놈들의 포격에 참혹하게 찢겨진 아버지의 시신과 렬강들사이의 싸움으로 무참히 파괴된 평양성을 목격하며 9살 나던 소년은 처음으로 《나라》에 눈뜨게 되였다.

나라의 대문을 지키는 군사가 되고싶었다. 하여 남들이 함부로 겨레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싶었다.

그러한 욕망으로 가슴을 끓여왔기에 기회가 닥쳐오자 김상건은 망설임없이 군복을 입었고 남다른 충의심과 군사로서의 천성을 인정받아 몇해만에 정교로까지 승진한것이였다.

허나 군복을 입었건만 나라와 백성을 지켜 그들이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큰 나라 병졸들이 제 집뜨락인양 이 땅에 마구 드나들어도 멍청하니 바라봐야만 했고 오랑캐들이 이 나라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모욕해도 고함조차 지를수 없었다.

오히려 국권을 되찾기 위해 일떠선 의병들을 향해 왜적의 총알받이가 되여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였으니 김상건은 부끄러웠다.

이렇듯 비굴하고 물러빠진 나라의 군복을 입고있는것이 죽고싶도록 부끄럽고 한스러웠다.

《선생님, 도대체 우린 왜 군복을 입고있습니까? 제 나라를 지켜 총 한방 쏠수 없는 우리가 무슨 군댑니까?!》

항변하듯 터치는 김상건의 절규에 량기탁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천백번 지당한 소리였던것이다.

방금전에 자기가 미국인들앞에서 정부에 고발하겠노라고 제법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돌미륵도 웃을 가소로운 망발이 아닌가.

고발했댔자 굴욕스러운 불평등조약들에 묶여있는 정부가 무슨 수로 외국인들의 횡포를 법으로 다스리며 렬강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숨도 마음대로 못 쉬는 나라가 어떻게 큰 나라들에 대고 삿대질을 할수 있으랴.

약소민족의 막막한 현실앞에 가위가 눌린듯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와 겨레의 비운을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청년들이 있다는것이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고통을 느끼기에 인간은 고통의 화근을 가시기 위해 무진 노력을 다하는것이다. 치욕으로 만신창이 되고서도 고통을 느낄줄 모른다면 그 민족의 장래를 어찌 생각할수 있겠는가.

그렇다. 고통받는자들에게는 고통받는자들만의 힘이 있다.

량기탁은 그날 김상건에게 맥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총을 잡은 군사들마저 마음이 흔들리면 나라는 더이상 지탱해내지 못한다고 간절히 일깨웠다.

우국충정에 불타는 그의 말은 젊은 병정의 심장을 세차게 울려주었다.

김상건은 숯불같은 눈으로 량기탁을 바라보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군사된 본분을 다할것을 후덥게 다짐했다.

그렇게 헤여졌던 병정이 다음해 시위대 참위로 발탁되여 한성에 나타날줄이야.

이전 같으면 평민이 무관벼슬인 군관으로 된다는것은 꿈도 꿀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걷잡을수 없이 와해되여가고 량반들이 하급군관직을 천시한것으로 하여 필요한 인원을 충당하기 어렵게 된 조선봉건정부는 결국 김상건과 같이 평민출신이여도 자질이 넉넉한 병정에 한해서는 군관으로 제발하는데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량기탁은 김상건의 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바쁜 속에서도 그가 찾아오면 반겨맞아주었다.

김상건은 많은것을 물어보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량기탁은 어지러운 시국과 조정의 형편에 대하여, 렬강들의 치렬한 각축전이며 다른 나라들의 군사제도에 대하여 아는껏 들려주군 하였다.

망국의 《을사5조약》에 접하고 여기저기서 열혈남아들이 매국원흉들을 징벌하기 위해 뛰쳐나섰을 때 김상건도 동료들과 함께 군부대신 리근택을 처단하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사전에 기미를 챈 왜놈들이 경계를 몇곱절로 강화하는 바람에 뜻을 이룰수 없게 되자 김상건은 량기탁에게로 달려와 울분을 터뜨렸다.

《선생님, 이런 땐 어째야 합니까? 저 역적들이 뻔뻔히 살아숨쉬는데 군복을 입었다는 우리가 무슨 낯으로 하늘을 쳐다보는가 말입니다!》

피를 토하듯 웨치는 김상건을 부여잡고 량기탁은 그때 강잉히 말했다.

《김참위, 남아의 피는 헐값이 아니요. 언젠가는 나라를 위해 값비싸게 피를 바쳐야 할 때가 반드시 올거요.》

그처럼 나라의 운명과 군인의 본분을 두고 모대기는 김상건의 참됨을 잘 알고있었기에 량기탁은 오늘같은 급박한 정황속에서 꺼림없이 그에게 중대사를 맡길수 있었던것이다.

하건만 왜 이리도 감감무소식인가?…

리준과 마찬가지로 량기탁의 마음도 희망과 절망사이를 시계추마냥 쉬임없이 오가고있었다.

그렇게 일각이 삼추같은 시간이 흐르는데 마침내 인기척이 나더니 김상건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김참위!》

막혔던 물목이 터지듯 두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소리였다.

땀과 먼지에 얼룩진 김상건의 얼굴에 피로가 실려있었다. 리준이 갈급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가 성급히 묻는다.

《어찌되였소?》

김상건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더니 손에 든 보꾸레미를 쳐들어보였다.

리준은 떨리는 손으로 보꾸레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방 한켠의 탁자우에 가져다놓았다.

량기탁도 높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누르며 벽에 걸린 남포등을 벗겨가지고 다가갔다. 남포등을 보꾸레미가까이에 놓은 그는 등피를 쳐들고 불심지를 돋구었다.

잠시후 리준은 천천히 보꾸레미를 풀기 시작하였다.

허름한 무명보자기를 푸니 붉은 비단보로 고이 싼 모난 물건이 나졌고 그것을 다시 푸니 검붉은 옻칠을 한 함이 나타나는것이였다.

긴장한 숨소리들이 엉켜도는 가운데 리준이 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랬더니 그안에 붉은 돌을 다듬어 만든 더 작은 함이 들어있는것이 아닌가.

량기탁이 마른기침을 참느라 킁킁거렸다.

김상건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있었다.

한순간 눈을 지르감은채 마른침을 모아 삼키고난 리준은 이윽고 후들거리는 손으로 작은 함의 뚜껑을 열었다.

다음순간 세사람의 낯빛이 숙연해졌다.

네모진 몸체우에 거북모양의 손잡이를 올려앉힌 황금빛도장이 붉은 비단끈을 달고 자태를 드러냈던것이다.

다름아닌 옥새였다. 황제의 옥새가 그들의 눈앞에 꿈이런듯 놓여있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나라의 도장을 난생처음 보는 그들은 이름할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버렸다.

목이 꺽 메여오는지 리준이 고개를 떨군다.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는 그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량기탁의 심정도 다를바없었다.

나라의 지엄한 물건을 마주한데서 오는 공경과 두려움때문이였던가. 아니, 그보다도 이 나라 사람들의 신성한 존엄이 왜적들의 터럭손에 여지없이 모멸당하고있다는 비통함이 세 사나이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있었다.

리준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강개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됐소. 옥새를 찾았으니 이젠 해아(헤그)에 가게 됐소. 기어이 국권을 회복해서 오늘의 이 치욕을 씻어야만 하오!》

량기탁이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호응했다. 그리고나서 김상건을 돌아보며 진심으로 치하했다.

《김참위, 나라를 위해 정말 큰 공을 세웠소. 내 김참위한테 무슨 말루 인사를 드려야 할지 바이 모르갔소.》

무척 흥분되였는지 량기탁의 입에서 본향인 관서말투가 저도 모르게 튀여나왔다.

리준도 흔흔히 코수염을 쓰다듬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요. 과시 운강선생이 사람을 잘못 보시지 않았군요.》

김상건의 얼굴이 수수떡이 되고말았다.

당황해서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를 미덥게 바라보던 량기탁이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어 왜 그리 늦었는가고 물었다.

김상건은 혹 뒤를 밟힐가봐 에돌아오다나니 그렇게 되였다고 대답하며 옥새를 찾아오던 과정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난 량기탁이 우려의 빛을 숨기지 못했다.

《헌데 김참위를 알아봤다는 그자는 어떤자요?》

《오석구라고 왜놈헌병대에서 통변노릇을 하는 일진회놈인데 이전에 맞닥뜨린적이 있었습니다. 그놈까지 마저 요정낼가 하다가 그래두 동족의 허울을 썼는데 개심할 기회를 줘야 할것 같아 놔주구말았습니다만. …》

김상건의 설명을 듣고도 량기탁은 청년이 걱정되여 여전히 낯색을 펴지 못했다.

량기탁의 그런 속마음을 헤아린 김상건이 헌헌히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실은 저도 이미전부터 작정한바가 있습니다. 선생님, 전 이 참에 아예 의병이 되렵니다.》

《의병이?!…》

량기탁이 놀라서 반문했다.

《예. 리강년어른을 찾아갈가 합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리준도 끼여들었다.

《리강년이라면 왕년의 그 의병장말이요?》

《그렇습니다. 그동안 고향에 은거해서 도를 닦고있다는 소문을 들었더랬는데 지난달 소백산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 어른의 휘하로 모여들고있습니다.》

김상건의 거침없는 이야기에 리준도 량기탁도 선뜻 응답하지 못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분연히 떨쳐나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류린석의병대의 유격장으로 활약한 리강년에 대해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비단 리강년뿐이랴. 어제날의 농군들과 포수들, 군인들과 유생들이 왜적을 무찌르고 국권을 되찾자고 절규하며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키고있었다.

그렇지만 손에 든것이라야 대창이나 화승대따위가 대부분인 그들이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왜군과 맞선다는것은 닭알로 바위치기가 아니겠는가.

그들이 헛된 피를 흘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렬강들을 설득하여 대세를 돌려놓아야 한다고 리준은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리준은 진정을 담아 김상건에게 말했다.

《김참위, 의병들의 장한 뜻이야 내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지금의 형세하에서 국권회복의 가장 바람직한 길은 국제렬강에 호소하는것이요.》

리준의 그 말에 김상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기연가미연가 하는 눈치였다.

김상건이 주저하며 속생각을 토로했다.

《저도 선생님들의 뜻을 모르지 않지만 정말 큰 나라들이 우릴 도와나설가요? 을사년때두 다들 왜놈들 편역을 들었지 우릴 생각해준 나라야 하나도 없지 않았습니까?》

리준은 아픈 곳을 찔리운듯 미간을 찡그렸다. 무거운 숨을 몰아쉬고난 그는 짐짓 헌거로이 웃으며 대답했다.

《김참위의 우려는 십분 리해되오. 허나 너무 그렇게 비관하기만 할 일은 아니라고 보오. 청국과 아라사는 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일본에 원한이 깊은 나라들이요.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라지만 어디까지나 아라사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이지 결코 일본이 고와서 그러는건 아니지 않소. 또 미국도 아직까지는 동양에 지반이 튼튼하지 못하다보니 일본에 양보할 때도 있지만 원체 약소국들을 동정하는 나라인데다 일본의 팽창을 무한정 지켜보기만 할리는 만무한것이요. 덕국(도이췰란드)이나 법국(프랑스)도 사정은 마찬가지고. 한즉 렬강들의 알륵과 득실을 잘 살펴서 외교활동을 적절히 벌려나간다면 일본을 견제할 방도가 분명 나질거요. 10여년전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아라사주도의 〈3국간섭〉으로 기세가 꺾이던 일을 돌이켜보오. 강대국들이 우리를 지지해나선다면 제아무리 서슬이 등등한 일본도 물러서지 않을수 없소. 우리가 이번에 렬강들이 모여드는 해아회의에 한사코 참가하려는것도 바로 그때문이요!》

연단에 나선 연사마냥 열변을 토하는 리준의 두눈은 홰불처럼 타고있었다. 김상건도 달아오른 심정을 금치 못해하였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기운이 솟습니다!》

그러는데 한옆에서 머리를 짓숙인채 침묵만 지키고있던 량기탁이 천천히 입을 여는것이였다.

《천만다행으로 옥새는 되찾아왔는데 다음 일이 실로 난사요.》

리준과 김상건이 의아해서 량기탁을 바라보았다. 량기탁은 무거운 어조로 불안을 터놓았다.

《시급히 옥새를 황제페하께 전해야 할텐데 왜놈들이 궁성을 철통같이 둘러막고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제서야 리준과 김상건은 량기탁이 근심하는바를 깨달았다. 그들의 얼굴빛이 일시에 하얗게 바래졌다.

아닌게 아니라 밀사들이 품고 갈 황제의 신임장을 받으려면 한시바삐 옥새를 대궐로 들여보내야 하였다.

하건만 작년에 통감부가 황족의 안녕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황궁의 출입을 통제하는 《궁금령》이라는것을 공포실시하게 한 뒤로 궁성경비는 여간만 삼엄해지지 않았다.

궁성의 문들마다 일본경찰들이 파수를 서고 《문감》이라는 표딱지가 있어야만 궁에 드나들수 있었다. 결과 궁성에 출입할수 있는자들은 극히 제한되고 조선사람이 출입하는 경우에는 대신이라 할지라도 엄격히 단속당하였으며 황제는 외부와의 련계를 완전히 차단당하게 되였다.

그런 상태에서 궁안에서 빼내오던 황제의 옥새를 감쪽같이 탈취당하였으니 왜놈들이 더더욱 눈에 쌍심지를 켜고 궁성을 봉쇄할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였다.

리준이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해아회의가 코앞에 닥쳐왔는데 이것 참 야단이군.》

김상건의 마음도 살을 메운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그러는 그의 귀전에 누구에게라 없이 조용히 뇌이는 량기탁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수를 찾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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