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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4 회

제 1 장

1907년 봄

1


일본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기 전야인 그해 4월초, 아직은 바람끝이 사무럽던 어느날 깊은 밤이였다.

이경이 가까와올무렵 느닷없이 경운궁(덕수궁으로 개칭되기 전의 이름)의 정문인 대한문이 삐거덕하며 열리더니 검은 형체 하나가 슬그머니 대궐안에서 나오는것이였다.

대문앞 가로등불빛에 드러난 행색을 보니 궁중의 내관인듯싶었는데 한손에는 보꾸레미가 들려있었다.

대궐문을 지키고있던 왜놈경찰들이 때아닌 밤중에 궁밖을 나온 내관에게 눈을 부라리며 단속하려들었다.

그때였다.

이미전부터 한옆에서 초조하니 서성거리던 왜헌병 하나가 급히 다가가 경찰들을 제지하고는 저쯤 떨어진 으슥진 곳으로 내관을 데려갔다.

그곳에서 양복차림에 도리우찌를 쓴 또 다른 사내가 말 한필과 자전거를 세워두고 기다리고있었다.

헌병과 내관사이에 몇마디의 말들이 짤막하게 오고갔다. 양복쟁이가 가운데서 두사람의 대화를 거들어주는것으로 보아 통변인 모양이였다.

대화가 끝나기 바쁘게 빼앗다싶이 내관에게서 보꾸레미를 넘겨받은 왜헌병은 지체없이 대기시켰던 말우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양복쟁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꾸레미만 한손에 거머쥔채 통감부가 있는 남산방향으로 말을 몰기 시작하였다. 허겁대며 자전거에 오른 양복쟁이도 뒤떨어질세라 서둘러 따라섰다.

인적없는 행길은 쥐죽은양 괴괴하였다.

달마저 구름속에 가리워 사위는 먹물을 뿌린것 같은데 어디선가 야경군의 딱따기소리만이 단조로이 들려올뿐이다.

대한문을 얼마쯤 벗어나자 왜헌병이 조급해나는듯 말배때기를 걷어찼다. 말은 메마른 길바닥을 제껴차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전거와 거리가 벌어진 왜헌병이 개천을 가로지른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 소공동을 지나고있을 때였다.

돌연히 길섶의 어느 으승그린 처마밑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튀여나와 앞을 가로막아나서는것이 아닌가.

두억시니같은 그 모양에 기겁했던지 달려오던 말이 멈춰서느라 앞굽을 껑충 쳐들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바람에 하마트면 휘뿌려질번 했던 왜헌병이 악에 받쳐 고함을 쳤다.

《곤칙쇼!(이 새끼!)》

다음순간 되알진 총소리가 울렸다.

왜헌병이 외마디비명을 토하며 말잔등에서 곤두박질했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개짖는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놀란 말이 대가리를 돌려 반대방향으로 냅다 네굽을 놓았다.

그 서슬에 뒤늦게 쫓아오던 양복쟁이의 자전거도 어쩔새없이 나딩굴고말았다.

눈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시커먼 그림자가 길바닥에 어푸러져 비명을 치는 양복쟁이에게로 씨엉씨엉 다가갔다.

끙끙거리며 머리를 쳐들던 양복쟁이는 두억시니의 손에 쥐여진 권총을 보자 화들짝 놀랐다. 흙먼지가 게발린 양복쟁이의 입이 경련하듯 일그러지더니 혀굳은 소리가 가까스로 새여나왔다.

《다, 당신은 누구요?…》

그럴 때 이지러진 달이 구름속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별안간 주위가 환해지며 시커먼 그림자의 형체가 달빛에 드러났다.

조선군복을 입은 의기당당한 사나이가 가슴을 떡 벌린채 우뚝 서있었다.

쇠장대를 가로지른것 같은 든든한 어깨며 무쇠기둥마냥 뻗지르고 서있는 두다리에서는 단숨에 소도 메칠만치 기력이 넘쳐흐르는데 깊숙이 눌러쓴 군모밑에서 부리부리한 두눈이 시퍼렇게 이글거리고있었다.

《김참위가?!…》

양복쟁이의 입에서 비명처럼 터져나온 소리였다.

거의 동시에 군복을 입은 사나이도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네놈이?!…》

좁다란 얼굴에 반들거리는 쥐눈, 밤송이같은 수염이 돋아난 뾰족한 아래턱…

사나이의 권총이 부르르 떨리며 양복쟁이의 대갈통을 겨눈다. 양복쟁이의 쥐눈이 희뜩 뒤집혀버렸다.

그자는 사나이의 발치에 엎어진채 사지를 와들와들 떨며 비린청으로 손이야 발이야 애걸복걸했다.

《제발 목숨만… 목숨만… 나야 같은 조, 조선사람 아니요. …》

역스럽게 그 꼴을 노려보던 사나이가 이윽고 권총을 내리우며 조용히 내뱉았다.

《너절한 놈, 썩 사라져라!》

양복쟁이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지 사나이의 동정을 흘끔흘끔 살폈다. 그러다가 고개를 재게 조아리며 노죽을 떠는것이였다.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

그자는 사나이의 권총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채 엉금엉금 네발걸음으로 기여 길섶에 물러났다.

얼이 나가 헤덤비는통에 모자와 신발 한짝이 벗겨졌건만 양복쟁이는 주을념도 못하고 그냥 옆골목으로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치고말았다.

대한문쪽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예까지 엎디면 코닿을 거리이니 왜놈들이 낌새를 못 챘을리 없었다.

사나이의 눈빛이 긴장해졌다.

다급히 너부러진 왜헌병에게로 다가간 사나이는 한쪽에 나동그라진 보꾸레미를 집어들고 나타날 때와 같이 소리없이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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