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3 회

서 장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3


윤덕영은 정신없이 중전의 처소로 향했다.

어리석은 동생이나 조카를 생각해서가 아니였다. 벼랑끝에 놓인 자신과 윤씨가문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터져나오는 줄욕을 입안에서 뭉개며 그는 걸음을 다우쳤다.

천둥벌거숭이같으니! 세상일에 어두운 구중궁궐의 녀자이기로서니 어찌 맨발로 바위 찰 생각을 한단 말이냐. 그래보았자 제 발부리나 부러질걸 가지구.

흥, 일본사람들이 알면 중전을 가만두지 않을거라구? 미련하기란. 중전 하나로 그칠것 같으냐. 그악한 왜인들이 윤씨가문을 깡그리 족살내려들텐데 그때 가서 뭐 말라빠진 사직이고 옥새라는거냐. 도대체 다 망해버린 임금의 옥새가 뭐가 그리 중해 제 목숨도 부족해서 온 가문의 운명까지 내던지겠다는거냐 말이다. 코 막고 답답한것 같으니!

밖에서는 불볕이 끓고있었다. 흥복헌에서 중전의 처소까지는 불과 몇십보안팎이건만 이 시각에는 왜 이다지도 천리처럼 느껴지는것인지…

목에서 겨불내가 났다. 구불구불한 땀발이 윤덕영의 얼굴로 연신 흘러내렸다.

(한시바삐 옥새를 찾아내야 해. 일본사람들의 눈밖에 나서는 절대로 안되고말고.)

윤덕영은 대감의 체면도 돌볼새없이 반달음을 놓아 대조전의 대청앞에 헐레벌떡 이르렀다.

대청을 지키고있는 궁녀에게 중전마마를 뵈러 왔다고 이르니 몸이 편찮아 후날 만났으면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래 상감을 내놓고 소임이 없이는 들여다볼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중전의 안방인지라 여느 신하들 같으면 두말 못하고 물러났겠지만 윤덕영은 그쯤에 꿈쩍할 위인이 아니였다.

《경각을 다투는 일이니 중전마마를 꼭 뵈워야겠다고 다시 아뢰게.》

고집스레 되뇌는 그의 미간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궐내의 세력가인데다 찰거마리마냥 끈덕진 시종원경의 기질을 잘 아는지라 궁녀도 감히 만류하려들지 못했다. 얼마후 들게 하라는 중전의 분부가 내렸다.

중전의 안방은 대청의 서쪽에 있었다. 성급히 대청우에 올라선 윤덕영은 궁녀가 조심스러이 장지문을 열자 방안에 들어서며 절을 하였다.

《중전마마, 미령하시다는 말을 듣고도 이렇게 경황없이 뵙기를 청해 송구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신하이지만 문중어른이기도 한 윤덕영이 찾아오면 중전도 일어나 례를 갖추는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오늘은 윤씨가 일어날념을 않고 보료우에 앉은채 맞아들이는것이였다.

《분망하신 대감께서 어인 일로 이리 급히 래림하셨사옵니까?》

(중전이 정말로 몸이 불편한가?)

이런 생각을 하며 허리를 펴던 윤덕영은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윤씨가 상복차림을 하고있지 않는가.

아무런 치레도 없이 가리마를 반듯이 타 머리를 쪽지고 하얗게 소복을 갖춰입은 윤씨의 모습에서는 쉬이 범접하기 힘든 서느러운 기운이 떠돌고있었다.

《중전마마, 어이하여 상복을 입으셨사옵니까?》

윤덕영이 어리벙벙하여 묻는 소리였다.

그러자 윤씨는 외면하며 괴로이 한숨을 내긋더니 서글프게 대답하는것이였다.

《나라가 망하는데 국모로서 상복을 입는거야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사옵니까.》

윤덕영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슬픔과 원한이 어린 윤씨의 말에 염통이 찔려났던것이다. 당황해서 조카딸을 바라보니 평소의 순한 눈매가 아니였다.

어둡게 흐린 윤씨의 눈에는 그 어떤 처절한 결심이 폭우를 품은 먹구름처럼 서려있었다.

(이 철없는것아, 지금은 제 머리우에 떨어지는 벼락부터 피하고볼 때야!)

일이 수월치 않겠다는 예감에 윤덕영의 온몸은 움켜쥔 주먹처럼 팽팽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불집이 더 번지기 전에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러지 못하여 일본군대가 궁중에 쓸어드는 때엔 모든게 끝장나는것이다.

촉급해난 그의 눈길이 안방을 재빠르게 훑었다. 고풍스러운 정갈함이 배인 방안에 운치가 흐르는 가구들이며 병풍이 제자리에 방정하게 놓여있었다.

중전이 옥새를 어디에 건사했는가?

불붙는 심사에 쫓겨 황황급급해하던 윤덕영은 불쑥 랭정을 되찾았다.

이런 정황에서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은 중전이 스스로 옥새를 내놓게 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중전이라 하나 아직 숫구멍에 피도 안 마른 철부지가 아닌가. 어르고 으르면서 어린 중 젓국 먹이듯 한다면야 제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었다한들 버티여낼 재간이 있을라구. 암, 산전수전 겪은 이 대갈대감이 치마두른 애숭이조카 하나 휘여잡지 못할소냐.

윤덕영은 마음을 도슬러먹으며 윤씨가 권하는대로 자리에 앉았다.

《물러나있거라.》

윤씨가 나직이 분부하자 시립해있던 지밀나인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갔다.

방에는 두사람만이 남았다. 숨가쁜 침묵이 흘렀다.

윤씨는 흐르는듯 한 치마폭속에 한쪽무릎을 세우고 오연히 앉아있었다.

그런 조카딸을 차겁고 약빠른 눈초리로 흘끔흘끔 살피며 윤덕영은 말머리를 어찌 뗄가 하고 잔머리를 굴렸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능청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중전마마, 상감마마께옵서 옥새를 찾고계시옵니다.》

순간 따지고들듯 크게 뜬 윤씨의 눈에서 싸늘한 불신의 빛이 튀여나왔다. 불안스럽게 치마폭을 비다듬는 녀인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윤덕영은 그 모습을 보며 틀림없이 옥새가 중전에게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낯선 사람인양 큰아버지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던 윤씨는 체념한듯 이내 눈길을 거두고말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윤덕영은 쓰라린 침묵속에 모대기는 중전을 향해 슬슬 그물을 당기기 시작하였다.

《중전마마, 신하된 몸으로 이런 심뇌를 끼쳐드려 황송무지로소이다. 그러하오나 신은 사사로이는 중전마마의 백부되는 몸이기도 하옵기에 이 자리에서 혈친의 정을 담아 간곡히 아뢰옵고저 하나이다. 중전마마, 옥새는 나라를 상징하고 임금을 나타내는 지엄한 물건이온지라 함부로 가까이해서는 아니될줄로 아옵니다. 천하의 권력이 담겨있고 뭇사람들의 생사흥망이 걸려있기에 하늘이 정해준 자리에 놓여있으면 천행만복을 가져다주오나 그렇지 못하면 도리여 재앙을 불러오는것이 바로 옥새가 아니겠사옵니까. 더우기 지금은 황실과 신하들의 운명이 결딴나는 칼끝같은 시각이옵니다. 이러한 때 온갖 흑심들이 시뻘겋게 눈독을 들이는 나라의 옥새를 안방에 간수한다는것은 참으로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드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중전마마, 하늘이 만든 화는 피할수 있어도 제가 만든 화는 피할수 없다 하였사온즉 바라옵건대 황실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간수하신 옥새를 내놓으시여 화단을 미연에 제거하심이 마땅한줄 아뢰옵니다.》

자못 절절하니 들려오는 윤덕영의 《충언》이였다.

윤씨는 고개를 떨구었다.

심장을 조이는 고독과 절망감에 몸이 으슬으슬해왔다. 목젖너머로 북받치는 설음을 삼키느라 한동안 숨을 고르던 녀인은 이윽하여 조용히 실토정을 하는것이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대감께서 이르시였듯이 나라의 상징이고 임금의 표식인 옥새를 안방의 아녀자가 간수한다는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옵니까. 하오나 어이하겠사옵니까. 조정에는 나라의 옥새를 지켜나설 단 한분의 어른도, 대장부도 없사오니 저 같은 아녀자라도 나설수밖에요. 대감께 묻고싶사옵니다. 나라를 일본에 넘기기 위해 임금의 옥새를 더럽히는것이 과연 신하된 도리이온지요? 어이하여 이 나라의 국록을 받는 조정의 중신들이 그리도 한결같이 〈합병〉에 찬동해나서는것이옵니까?…》

갑자기 윤씨의 목소리가 떨리였다. 참기 어려운 울분이 눈물과 뒤섞여 목을 메우는 바람에 녀인은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그 시각 윤씨에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원망스러운 사람은 다름아닌 자기앞에 앉아있는 큰아버지라는 인간이였다.

여러날전부터 궁내부대신 민병석이며 부원군인 아버지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상감께 문안을 드린다고 찾아와서는 《합병》의 불가피함과 《리득》을 귀가 아프도록 곱씹으면서 일본의 《합병》안을 수락해야 한다고 매일과 같이 남편을 괴롭혀온 윤덕영이였다.

그러는 그에게 제발 상감마마를 핍박하시지 말아달라고, 어떻게든 흔들리는 중신들을 다잡아 사직을 구원해달라고 윤씨는 얼마나 애절히 신신당부하였던가.

그러나 윤씨의 피타는 하소연을 윤덕영은 다 낡아빠진 질그릇 깨지는 소리마냥 하찮게 여길뿐이였다.

윤씨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있었다.

자기가 큰아버지라고,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혈친들을 리완용이나 송병준보다도 더 혐오하게 된 기막힌 운명앞에 몸부림이 쳐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윤덕영은 눈을 내리뜨며 랭소를 머금었다.

천진한것 같으니. 안방에 들어앉아 사서삼경이나 외우고 렬녀전이나 읽는다고 세상일을 다 안다더냐. 노상 구중안에서만 맴도는 네가 호두속같이 복잡한 세상만사를 어찌 알수 있다더냐.

나비수염속에 반쯤 가리워진 윤덕영의 입가로 쓴웃음이 스쳐갔다.

하지만 그는 애써 내색을 감추었다. 머리가 열두쪼각이 난다 해도 옥새부터 뺏아내야 한다는 끈질긴 일념에 사로잡혀 그는 다시금 설교를 시작했다.

《중전마마, 조정의 중신들과 원로들이 이구동성으로 〈합병〉에 동의한것은 무엇보다도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생각해서이옵니다. 〈합병〉이 성사되면 우리 황실은 일본〈천황〉페하의 두터운 은혜와 보호를 받게 되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와 중전마마께옵서는 일본황족의 지위를 누리시는것과 더불어 일본으로부터 그에 해당한 충분한 비용을 보장받으시게 되옵고 황족들 역시 자손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대우를 향유하시게 되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도 대세에 순응하실줄 아는 현명한분이시기에 오랜 숙고끝에 〈합병〉안을 수락하시옵고 총리대신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칙명을 내리시온게 아니겠사옵니까. 하오니 중전마마, 상감마마의 칙명을 받드는것이야말로 신하된 근본도리이옵거늘 어서 옥새를 내주시옵소서.》

《상감마마께옵서 〈합병〉안을 수락하시였다구요?》

윤덕영을 바라보는 윤씨의 두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파랗게 질린 녀인의 입술이 오한을 만난듯 바르르 떨렸다.

일본의 《합병》안을 수락할바에는 차라리 죽는게 편하겠다고 오열하던 상감이였다.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간밤에 떨리는 손으로 안해에게 옥새를 맡기던 남편이였다. 자기에게는 일본인들과 역신들의 강박을 끝까지 견디여낼 힘이 없다면서. 그러던 상감이…

윤씨는 치마폭을 부여잡으며 세차게 도리를 쳤다.

《아니옵니다! 그건 결코 상감마마의 진심이 아니옵니다! 간흉의 무리들이 주상을 공갈하여 꾸며낸 거짓이옵니다. 저들의 흉심을 상감마마의 칙명이라 사칭한것이 분명하옵니다!…》

《사칭이라니?!…》

윤덕영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이 대뜸 새빨개지고 눈이 올챙이배처럼 불어났다.

하건만 윤씨는 진정할수 없었다. 그 녀인은 자신의 의지에 전혀 순응하지 않는 걷잡을수 없는 격정을 난생처음 느끼고 부끄러워하면서 깜짝 놀랐다.

분노에 맥박치는 숨을 다그어쉬며 윤씨는 골풀이치는 비분을 불길처럼 쏟아놓았다.

《저는 도저히 깨닫지 못하겠사옵니다. 〈합병〉이라는것이 이루어지면 상감마마께옵서는 하루아침에 왜왕의 신하로 전락되고 황족들도 끈 떨어진 갓신세가 될텐데 상가집 개만도 못한 그런 신세속에서 황실의 안녕이고 존엄이고를 어이 생각이나 할수 있사오며 상감마마께옵서도 그런 치욕을 어이 진심으로 바라실수 있겠사옵니까. 저에게 진실을 말씀해주시오이다. 정녕 중신들과 원로들의 안중에 황실이 있기나 한것이옵니까?》

윤덕영은 명치가 뜨끔해왔다. 정곡을 찌르는 윤씨의 면박이였던것이다.

하기야 《합병》에 동조해나선자들중에 진실로 황실의 운명을 걱정하는 위인이야 눈을 씻고 찾아보재도 어디 하나라도 있는가.

일본수상 가쯔라에게 1억엔만 내면 이 나라를 무난히 넘길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송병준 같은 무뢰한은 더 론할것도 없고 내각의 총리대신이라는 리완용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불현듯 통감부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생각났다.

며칠전 리완용이 조중응과 함께 통감관저로 찾아가 데라우찌에게서 일본의 《합병》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헌데 설명을 듣고난 두 대신은 추호도 이견이 없다고 쌍수를 들어 환영하면서 다만 《합병》후 황제였던 제 나라 임금의 칭호를 대공으로 하는것이 어떠냐고 제켠에서 먼저 제안하였다는것이다.

너무도 비굴한 그 제안에 되려 통감부쪽에서 어리둥절해하면서 예로부터 내려온 칭호인 왕으로 하는것이 낫겠다고 생색을 냈다는것이 아닌가.

대공이든 왕이든 빈 허울뿐이기는 매일반이였으나 통감부로서는 《합병》을 앞두고 겉발림으로나마 황실을 회유하기 위해 그리하였을것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윤덕영은 천하에 불충무도한 간신들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대공이라면 유럽에서 코딱지만 한 소국의 군주에게 붙이는 이름일터인데 아무리 《합병》이 되여 성 쌓고 남은 돌이 된다 할지라도 여태껏 모셔온 자기 임금을 그렇게까지 릉멸하자고 스스로 제안하다니.

인제 와서 상감이나 황실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리완용무리들의 방자한 짓거리앞에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입버릇처럼 외워온 시종원경의 고결한 타성은 진노하지 않을수 없었다.

허나 그것은 허세일따름이였다. 딴은 윤덕영자신도 안팎이 다르기는 리완용에 조금도 짝지지 않았던것이다.

원래 그는 현재의 존귀한 지위를 잃게 될가봐 전전긍긍하면서 《한일합병》에 저으기 소극적이였었다.

《합병》을 순조롭게 단행하려면 황실의 반발을 무마하는것이 중요했고 그러자면 궁중의 세력가인 윤덕영을 틀어쥐여야겠다고 타산한 데라우찌는 어느날 밤 은밀히 그를 불러들였다.

시종원경을 만난 통감은 회유와 협박을 섞어가며 저들에게 협조해나설것을 강요해왔다.

윤덕영의 마음은 저울추처럼 흔들거렸다.

어느쪽에 가붙을것인가?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있었다. 파선된 쪽배와도 같은 이 왕조가 더이상 자기에게 복락을 담보하지 못하리라는것은 손금보듯 뻔한 일이였다.

급기야 그는 장래의 영달과 안락을 담보한 통감의 확약을 믿고 일본제국이라는 든든한 새 배에 옮겨타기로 결심하였다.

그렇게 되여 데라우찌는 궁중에서의 《합병》공작을 윤덕영의 수완에 전적으로 맡기게 되였고 윤덕영은 민병석이며 윤택영 등 궐내의 친일세력과 야합하여 상감과 황족들에게 갖은 감언리설과 위협을 집요하게 들이대여온것이다.

그런즉 윤덕영이건 리완용이건 입만 벌리면 황실의 안녕부터 운운하지만 실상 그들의 관심에서 황실은 벼룩의 뜸자리만도 못한것이였다.

들여다보면 그들이 눈에 화등잔을 켜달고 신경을 도사리는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합병》후 저들이 일본으로부터 받게 될 대우문제가 아니던가.

윤덕영의 얼굴에서 쥐가 풀떡거리는데 의분에 찬 윤씨의 목소리가 채찍마냥 귀전을 때렸다.

《엎어진 둥지에 성한 알이 없다고 들었사옵니다. 나라가 있어야 황실도 있는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참말로 황실의 안녕을 걱정한다면 어이 그리도 흔연히 나라를 넘기자는 소리가 나올수 있겠사옵니까. 저는 비록 구중속에 갇혀 지내는 아녀자라도 그만한 사리는 분별할수 있사옵니다. 그런 소리를 하는 인간들은 나라를 팔고 임금을 팔고 백성을 팔아 제 배만 불리면 그만이라 여기는 매국역신들이라는것을 말이옵니다!》

《어흠!》

윤덕영이 중전의 앞이라는것도 잊고 범 우는 소리로 헛기침을 톺아올렸다. 노기가 오른 그의 낯가죽이 튕기면 소리가 날듯 댕댕해졌다.

자기를 곧바로 보는 윤씨의 눈에 경멸의 빛이 확연한것을 알아보는 순간 그는 만신창이 된 자존심으로 하여 뒤목이 뻣뻣해왔다.

윤덕영은 소태같이 쓰거운것을 꿀꺽 삼키고나서 어린 황후를 향해 훈시하듯 따져물었다.

《중전마마, 하오니 어찌하겠사옵니까? 나라를 넘기지 않으면 당장 뺏으려들텐데 무슨 뾰족한 방책이 있는가 말씀이옵니다. 우리에게 강토를 지킬 병졸 하나 있길 하옵니까, 힘을 빌려줄 이웃 하나 있길 하옵니까. 자고로 큰 나라들 틈에 끼여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한 이 나라이옵니다. 늘 사대로 굽신거리며 간신히 연명해온 이 나라가 아니옵니까. 그리해서 우리는 아직까지 살아남을수 있었사옵니다! 그리해야 우리는 앞으로도 살아남을수 있사옵니다!》

《…》

목에 피대가 동해올라 터뜨리는 윤덕영의 항변에 윤씨는 돌연 할 말을 잃고말았다.

그것은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였던것이다.

애당초 이 나라에 힘이 있다면 어찌 일본이 저렇듯 오만무도하게 달려들수 있으랴. 볼품없이 힘없고 초라한 약소국이여서 어제는 저 나라, 오늘은 또 다른 나라에 가붙으며 고단한 세월을 이어오지 않았던가.

윤씨는 피가 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오는데 참을길 없는 흐느낌이 가슴속에서 간간이 새여나왔다.

그러는 녀인에게 윤덕영이 다소 누그러든 어조로 지꿎은 설교를 계속했다.

《일본이 어떤 나라이옵니까.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청국과 맞서싸우고 아라사와도 주저없이 싸워이긴 천하강국이 아니옵니까. 그러한 일본이 인제 와서 옥새 하나 없다고 물러앉겠사옵니까. 쪽박이나 쓴다고 벼락을 피할수는 없는 법이옵니다. 을사년때 일을 돌이켜보시옵소서. 그때 태황제께옵서는 마지막까지 옥새를 내놓지 않으셨사오나 종시 이등(이또 히로부미)은 조약을 만들어내고야말지 않았사옵니까. 이등은 채찍으로 사람을 쳤지만 사내(데라우찌 마사다께)는 쇠사슬로 사람을 칠 인물이옵니다. 중전마마, 지금은 제 한몸부터 돌보아야 할 때인줄로 아옵니다. 혈친의 정으로 재삼 간곡히 청하옵건대 부디 옥새를 내놓으시여 백척간두의 위기를 모면하시옵소서.》

애간장이 마르는지 윤덕영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하였다.

향방을 잃은 윤씨의 눈길이 한순간 허공을 헤맸다. 창자를 끊는 고통과 슬픔, 사무치는 원한이 녀인의 눈에서 푸르스름한 독을 풍기고있었다.

윤씨는 숨막히는 압박감속에서 사납고 광포한 힘이 사정없이 자기에게 덮쳐들고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잠시후 초연히 대답했다.

《그리할수는 없사옵니다. 제가 이 나라의 국모로 살아숨쉬는 한 옥새는 절대로 내놓을수 없사옵니다.》

결연한 대답이였다. 소복을 입은 윤씨의 모습에 비장한 그림자가 떠돌고있었다.

윤덕영은 당황망조하여 부르짖었다.

《아니되옵니다! 감히 아뢰옵건대 그리하시오면 중전마마께옵서는 필시 명성황후마마의 비운을 면치 못하시옵니다. 어찌 중전마마뿐이겠사옵니까. 부원군께서와 신은 물론이고 온 윤씨가문이 일본사람들의 독수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하고말것이옵니다. 중전마마, 그만 자중하시옵소서!》

그러자 윤씨의 짓타는 눈길이 윤덕영에게로 날아들었다.

《멸문지화라 하셨사옵니까?》

이렇게 되쳐물으며 녀인은 가슴속에서 고패치던 설음과 분노를 벌물마냥 터치였다.

《차라리 그리되는것이 낫겠사옵니다. 망국노가 되여 치욕을 당할바엔 차라리 보잘것없는 이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나라 백성들앞에서 황실의 한쪼각 체면이나마 세우는것이 낫겠사옵니다. 후손들한테 매국노의 가문이라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당할바엔 차라리 온 가족이 순국하여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것이 마음편하겠단 말씀이옵니다!》

윤덕영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기꺼이 죽기를 각오한듯 한 윤씨의 도담하면서도 서러운 도전을 그는 얼나간 사람모양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아연했다. 인제 고작 17살밖에 안된 어린 중전에게 저토록 무서운데가 있을줄이야 꿈엔들 상상이나 했던가.

허랑방탕하고 매련없는 동생이 어떻게 저런 딸을 두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였다.

그때였다.

불시에 흥복헌쪽에서 왜말소리들이 들려왔다. 윤덕영은 불에 덴것처럼 몸을 흠칠했다.

(일본사람들이 벌써 기미를 챈게 아닌가?)

피줄로 차디찬 전률이 줄달음쳤다. 매몰차게 시간을 독촉하던 황궁경찰서장의 목소리가 또다시 등덜미를 후려갈겼다.

윤덕영은 등이 달아올라 윤씨에게 거듭 간청했다.

《중전마마, 일본사람들이 알아차리면 큰일나옵니다. 어서 옥새를 내주시옵소서!》

그러나 윤씨는 단호히 도리를 흔든다.

《아니되옵니다!》

서리찬 그 기상앞에 윤덕영은 자기가 중전을 너무나 어리숙하니 빗보았다는것을 때늦게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시끌시끌한 왜말소리들이 이리로 오는듯싶었다. 윤덕영은 수염에 불이 달린양 화급해나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당장에라도 일본도를 뽑아든 왜인들이 문을 박차고 뛰여들것 같았다. 자기에게 온갖 특혜를 아낌없이 약속하던 데라우찌의 너그럽던 얼굴이 졸지에 포악스러운 상통으로 뒤바뀌여 으르렁대는것만 같았다.

종내 옥새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대번에 간이 졸아들었다. 《합병》후 귀족의 작위와 막대한 세습재산을 안겨주겠다던 데라우찌의 화려한 약속은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꺼져버리고 여태껏 누려온 부귀영화도 영낙없이 잃어버릴것이다.

단지 그뿐이랴. 흉포하기 그지없는 일본인들의 살기에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우리니 이 일을 어이한단 말인가.

별안간 윤덕영이 눈을 치뜨며 입을 비틀었다.

(흥! 이 대갈대감이 그렇게 호락호락 거꾸러질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지랄발광을 쳐서라도 기어코 옥새를 뺏아낼테다!)

충혈된 눈알을 독스럽게 굴리며 그는 안방의 여기저기를 갈팡질팡 두리번거렸다.

문갑이며 사방탁자 같은 가구들은 물론이고 지어 중전이 앉아있는 보료와 사방침, 안석까지도 뻔뻔스러이 훑어보았다.

대관절 옥새를 어디에 감추었을가? 눈에 쉬이 뜨이는 문갑안에 넣어두었을것 같지는 않고 혹 사방침속에? 아니면 아예 밖으로 내다치운건 아닐가?…

얼굴에는 진땀이 비오듯 하는데 아무리 골을 쥐여짜보아야 도무지 짚이는데가 없었다.

왜말소리들이 군화발소리들과 뒤엉켜 점점 가까와오고있었다. 그 소리들은 급줄이 나 덤벼치는 윤덕영의 귀가에 천둥같이 우르릉 쾅쾅 울려왔다.

막다른 궁지에 몰려 체통마저 잃은 그는 울상이 되여 윤씨에게 다시한번 애원했다.

《중전마마, 혈친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옥새를 내놓으시옵소서!》

하건만 윤씨는 더욱 이악스레 치마폭을 움켜잡으며 강잉히 대답했다.

《내놓을수 없사옵니다!》

다음순간 허둥대던 윤덕영의 눈망울속에서 꿰지르는것 같은 날카로운 빛발이 튀여나왔다. 아까부터 치마폭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중전의 이상한 거동에 뒤늦게야 신경이 미쳤던것이다.

윤덕영은 숨을 끊고 윤씨의 치마폭을 쏘아보았다.

(중전이 옥새를 치마폭에?…)

그제서야 자기가 들어서는데도 일어날념을 못하던 윤씨의 행동이 뇌리를 치는것이였다.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중전이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있을줄이야.

배속에서 흐득흐득 웃음이 괴여올랐다.

먹이를 발견한 맹수마냥 자기의 치마폭을 파고들듯 노려보는 윤덕영의 열뜬 눈초리를 의식하는 순간 윤씨의 심장은 금시 얼음덩이가 되여버리고말았다.

공포에 살이 졸아들고 무엇인가 목에 걸린듯 하여 질식할것만 같았다. 윤씨가 속이 한줌만해서 숨을 죽이고있는데 윤덕영의 철면피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전마마, 그걸 어서 내놓으시오이다.》

방금까지도 빌붙듯 애걸하던 그 어조는 어느새 랭혹하고 위압적인 어조로 돌변해있었다.

윤씨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를길 없는 혐오감에 숨쉬기조차 괴로왔다.

녀인은 자기의 생명인양 치마폭에 품은것을 두손으로 부둥켜잡으며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다.

《절대로 아니되옵니다!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결코 옥새를 내줄수 없사옵니다!》

윤덕영의 나비수염끝이 독사의 혀끝처럼 파들거렸다. 그의 두눈이 독을 뿜으며 불꽃을 튕기였다.

(오냐. 목숨을 끊겠거든 얼마든지 끊어라. 그래도 옥새는 내놔야 한다!)

윤덕영은 입을 앙다물며 앙바틈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무작정 머리를 꼬나박은채 중전에게로 달려들었다.

《당장 옥새를 내놓으시오이다!》

악에 받친 그의 손아귀가 조카딸의 치마폭을 거머잡았다.

윤씨의 입에서 기겁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무슨짓이옵니까!》

허나 윤덕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전도, 대감의 체면도 눈앞에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명줄이 걸린 옥새만이 있을뿐이였다.

윤덕영은 옥새를 내놓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중전에게 거품을 물고 덤벼들었다. 기승스럽게 날뛰는 그의 눈에서 불이 튀고 이마에 힘줄이 험상궂게 뻗쳐올랐다.

치마폭이 째지는 소리와 녀인의 비명소리가 윽윽대는 거치른 숨소리와 뒤섞여 어지러이 터져나왔다.

황겁히 뛰여든 지밀나인도 윤덕영이 팔굽을 내지르는통에 저만치 나동그라진다.

끝끝내 중전에게서 옥새를 빼앗아낸 윤덕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황히 나가버렸다.

《아이구머니!-》

절망과 비탄에 찬 중전의 통곡소리가 대조전에 메아리치고있었다. …

이리하여 순종의 옥새가 찍힌 전권위임장을 억지로 받아낸 리완용은 그길로 데라우찌에게 달려갔다.

남산자락의 통감관저에서 리완용과 함께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한 데라우찌는 그날 자기의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합병문제는 이처럼 용이하게 조인을 끝냈다. 가가(呵呵).》

한 나라를 집어삼킨 정복자의 포만감에 얼마나 도취되여있었으면 《가가》라는 껄껄 웃는 소리까지 덧붙여놓았겠는가. …

이전페지   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