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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서 장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2


그 시각 흥복헌에는 순종과 다름없이 괴로움에 신음하는 또 한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병풍뒤에서 어전회의를 여겨듣고있던 순종의 안해 윤씨였다.

윤씨는 살에 맞은 새마냥 푸들푸들 떠는 가슴을 누르며 가까스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온 누리가 한켠으로 기울어지며 와르르 무너져내리는것 같았다.

끝끝내 망국의 시각이 닥쳐온것이다. 500여년의 왕조가 그의 눈앞에서 고목 넘어가듯 거꾸러지고있었다.

기가 찼다. 조정의 대신이라는 인간들이 나라를 넘기자는 말을 저리도 쉽사리 입에 올리다니.

저들의 안중에 나라나 임금은 헐면 아무때고 바꿔입을수 있는 옷가지에 불과하였던가.

대대손손으로 조정의 록을 타먹으며 살아온 사대부들이 아닌가. 《주욕신사》(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뜻)를 입버릇처럼 외워온 중신들이 아닌가.

어쩌면 황족들과 척족들마저 일본의 《합병》타령을 앵무새처럼 따라외울수 있는가.

황족귀인과 정부대관가운데 매국노 아닌자가 없다고 규탄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가 윤씨의 뇌리를 모질게 채찍질했다. 수긍하기는 쓰거워도 천만번 지당한 소리라 아니할수 없었다.

저들은 이 나라의 신하들이 아니였다. 금빛오얏꽃을 화려히 수놓은 대례복차림에 가슴노리마다엔 조정에서 준 떡짝만 한 훈패들을 한아름씩 달고있어도 저들은 이미전부터 통감의 신하들이였고 왜왕의 노복들이였다.

하늘도 무심하구나.

백길 낭떠러지우에 선 이 나라를 구원할 충무공과 같은 충신은 과연 없단 말인가.

하다못해 나라의 굴욕을 눈뜨고 볼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영환 같은분이라도 있다면…

병풍틈새로 어전회의장의 정경이 어릿거린다. 역신들의 핍박에 시달리며 허수아비모양으로 외로이 앉아있는 남편의 구부정한 잔등이 윤씨의 눈을 아프게 찌르고들었다.

어쩔 사이없이 그 녀인의 두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걷잡을수가 없었다. 금방 목멘 흐느낌소리가 새여나올것만 같아 윤씨는 강잉히 입술을 깨물었다.

간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장탄식만 하던 남편의 가긍한 모습이 떠올랐다.

《〈합병〉은 천명인가보오. 아아, 나는 종사(종묘사직)의 죄인이 되였소. …》

《상감마마께옵서는 이 나라의 지존이시옵니다. 부디 맥을 놓지 마시옵소서.》

윤씨가 거듭 이렇게 간청하며 위로하여도 순종은 눈물범벅인 얼굴을 어린 안해의 가슴에 묻은채 자기는 죄인이라고 맥빠진 소리만 되뇌일뿐이였다.

불우한 군주였다. 내우외환이 그칠새 없는 약소국의 궁중에서 태여난탓에 갖은 풍파와 환란을 피할 길 없었던 남편이였다.

악착한 왜인들에게 국모였던 어머니를 졸지에 잃었는가 하면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생사기로에서 헤매기도 하였었다.

그뿐인가. 명성황후가 고른 남편의 첫 안해도 을미년의 그 참변을 직접 겪은 충격에 짓눌린채 병석에서 신음하다가 애처롭게 요절하지 않았던가.

일본의 강압으로 밀려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옥좌에 오른 뒤에도 남편은 매국대신들과 통감부의 렴탐군들만이 들끓는 조정안에서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하는 처지였다.

날 때부터 유약했던 남편의 성정은 파란많은 세파속에서 더욱 유약해져갔다. 매사에 환관처럼 소심했고 단지 바라는것은 덧없는 평온과 안식뿐이였다.

그때문이여선지 어린 나이에 황태자비로 들어온 윤씨에게 있어서 20년이나 우인 남편은 스스럼없이 기댈수 있는 가장이라기보다 구완하고 돌보아야 할 병약한 오라버니같이 여겨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윤씨는 지치고 주눅이 든 남편의 마음을 보듬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통감부의 흉계와 간신들의 야욕이 판을 치는 대궐안에서 무기력한 상감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한 윤씨를 남편은 바람벽도 미덥지 않은 불안한 궁중에서 두려움없이 속을 터놓을수 있는 유일한 벗으로 믿게 되였고 나이는 어리지만 속이 깊은 안해에게 모든것을 의지하게 되였다.

그래서였던가. 달포전 윤씨가 문안차로 덕수궁을 찾았을 때 태황제가 무거운 한숨끝에 불쑥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사직은 점점 기울어가는데 상감은 문약하기만 하니 잠이 오질 않소. … 아무쪼록 중전께서 내조를 잘해주시기 바라오.》

강박에 쫓겨서이기는 하나 아비를 황위에서 몰아내려는 일본의 횡포무쌍한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즉위한 아들을 저으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태황제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줄곧 경각에 이른 사직과 자식의 운명을 두고 속태우는 태황제의 어둑컴컴한 낯빛을 보며 윤씨는 슬프면서도 비장해지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일본의 손아귀에 멱이 눌린채 마지막숨을 몰아쉬고있는 이 나라였다.

나라의 운명이자 임금의 운명이고 임금의 운명이자 황실과 윤씨자신의 운명이거늘 구중심처의 녀인일지라도 어이 공손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할수 있으랴.

태를 치고 몸부림을 쳐서라도 허물어져가는 사직을 지탱하고싶었다. 혼신의 힘을 다 바쳐 바람앞의 초불처럼 흔들거리는 상감을 부축해주고싶었다.

중전의 몸으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곳에까지 이렇듯 남모르게 찾아온것도 애오라지 그런 심정에서였다. 허나 정작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도 억이 막히지 않는가.

쓰라린 분노와 아픔으로 하여 윤씨의 가슴은 미여지는듯 하였다.

이제라도 병풍을 헤치고 뛰쳐나가 상감을 협박하는 무리들을 향해 가슴속의 불길을 쏟아놓고싶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역신들이 어이 대궐의 룡마루밑에서 버젓이 머리를 쳐들수 있느냐고,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고 분연히 꾸짖고싶었다.

윤씨가 솟구치는 오열을 간신히 삼키고있는데 갑자기 별실쪽에서 귀따가운 전화종소리가 터져나왔다.

필경 통감부에서 또다시 어전회의의 결과를 물어오는 전화일것이다.

회의장이 뒤숭숭해졌다. 중신들이 거북스레 몸을 움직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가운데 때마침이라는듯 리완용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지금이야말로 장래를 위해 주저없이 용단을 내려야 할 때인줄로 아옵니다. 감히 주청하옵건대 소신에게 〈합병조약〉체결의 전권을 위임해주신다면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진력을 다하겠나이다.》

순간 윤씨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버렸다.

전권을 위임해달라구? 을사년의 그때처럼 임금을 제쳐놓고 저들끼리 다시금 나라의 운명을 롱락하겠다는 소리였다.

땅이 꺼지게 몰아쉬는 순종의 한숨소리가 고통의 하소연인양 그 녀인의 가슴을 흔들었다.

정말로 사직의 운명을 매국역신들에게 맡겨버린다면, 하여 유구한 세월속에 물려받아온 이 나라의 모든것을 가증스러운 저 왜나라에 고스란히 넘겨버린다면, 정녕코 그리된다면 무슨 낯으로 태황제와 조상들을 대하고 자손들을 대한단 말인가.

백성들은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의 이름에 대를 두고 침을 뱉을것이고 황족들은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이 땅에서 떳떳이 설자리조차 찾을 길이 없게 되리니 아, 천년이 흐르고 만년이 흐른다한들 어이 그 치욕을 다 씻으랴.

설음인지 전률인지 모를 그 무엇이 뜨거운 피와 함께 목을 치받는다.

문득 윤씨는 자신이 해야 할바를 깨달았다.

안된다. 결코 그리되여서는 안된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것이 치욕일진대 사직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치욕속에 비루한 삶을 이어갈수는 없다. 죽어서도 천추만대의 오명을 쓰고 후손들의 손가락질을 당할수는 없다.

윤씨는 다급히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총총히 흥복헌을 나섰다. …

드디여 순종은 매국노들을 앞세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리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는데 동의하고말았다.

칙명이 떨어지자 리완용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전권위임장을 순종의 앞에 내놓았다.

그것은 조선봉건정부에서 작성한 문서가 아니였다. 통감인 데라우찌가 사전에 제멋대로 작성하여 순종의 서명과 날인을 받아오라며 리완용에게 쥐여준 협잡문서장이였다.

헌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터질줄이야.

상감의 금고에 보관되여있던 옥새가 사라져버렸다는것이다. 옥새를 가지러 갔던 내관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 소식을 전하자 회의장에 있던 중신들의 낯빛이 대번에 질려버렸다.

옥새가 없어지다니? 임금의 도장인 옥새를 찍지 못하면 전권위임장은 한낱 휴지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대관절 누가 감히 옥새를 치웠단 말인가?…

의심쩍어하는 눈초리들이 자연히 상감에게로 향해졌다.

하건만 순종은 텅 빈 눈길을 허공에 둔채 묵묵부답일뿐이다. 마치 이 세상사람이 아닌듯싶었다.

밖에서 일본경관들의 긴장된 군화발소리가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뒤섞여 어수선하게 들려왔다. 하도 황당한 사태앞에 중신이라는자들도 경황실색하여 쩔쩔매기만 하였다.

그중에서도 바빠난것은 시종원경 윤덕영이였다. 왜서인지 불길한 예감에 명치끝이 무지근해왔다.

상감의 앞이라는것도 잊고 애꿎은 내관을 닥달하며 불난 강변에 덴 소 날뛰듯 바빠하던 윤덕영은 순종에게 잠간 나가보겠다고 여쭈고 부랴부랴 회의장에서 나와 별실로 들어갔다.

별실에는 어전회의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통감부관리와 황궁경찰서장 그리고 중전의 아버지이자 윤덕영의 동생인 윤택영이 있었다.

그런데 윤덕영이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일본인통감부관리가 대뜸 달구지바퀴 굴리듯 눈알을 굴리며 호통치는것이 아닌가. 기관총을 쏘아대듯이 조급하게 내쏘는 왜말을 통 알아들을수가 없어 윤덕영이 물고기모양 눈만 껌벅거리는데 언제 뒤쫓아왔는지 왜말에 능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통역을 해주었다.

《시종원경각하, 옥새가 사라졌다는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대사를 앞둔 이 중대한 시각에 통감부를 희롱하겠다는건가요? 당신들의 얕은꾀가 우리 대일본제국에 통할것 같으냐 말입니다!》

그만에야 윤덕영은 숨이 컥 막혔다.

불쌍놈 같으니! 함부로 뉘앞에서 그따위 버르장머리냐! 데라우찌가 칼밖에 모르는 우직한 위인이니 종복들도 이따위 잡놈들일수밖에.

윤기가 찰찰 도는 시종원경의 나비수염이 노기를 품고 파르르 떨린다.

머리가 앞뒤로 불거져나와 《대갈대감》으로 불리우는 윤덕영은 중전의 큰아버지인데다 임금의 시중을 드는 시종원을 거느린것으로 하여 순종의 수염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궁중의 세도가였다.

게다가 워낙 간계에 능통하고 리욕을 차리기 위해서는 체면도 돌보지 않고 영악스레 달라붙는 탐학무치한 됨됨때문에 윤덕영이라 하면 쥐구멍으로 통영갓도 굴려낼 꾀바리인 리완용조차 마주 서기 꺼려하는 상대였다.

그렇듯 제노라는 그에게 어디서 굴러온지 모를 섬나라 쪽발이가 감히 하인취급을 하려들다니. 《합병》이 박두하니 통감부의 눈에는 이 나라의 정1품 대감도 상가집 개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게지 하는 생각에 윤덕영은 오장이 뒤집혀와 견딜수가 없었다.

직성대로라면 단박에 개목걸이같은 넥타이가 걸려있는 그자의 멱살을 움켜잡고 귀뺨이라도 한대 후려쳐야 속이 후련할상싶었다.

윤덕영이 분통을 삭일길 없어 앙가슴을 내밀고 헐떡거리는데 한켠에서 지켜보던 황궁경찰서장이 다가왔다. 서장은 윤덕영을 노려보며 익숙한 조선말로 떠벌이는것이였다.

《각하, 황궁경위를 담당한 경관으로서 배를 갈라 죄를 빌어도 부족할 막중한 책임을 통감합니다. 우리가 추측컨대 옥새는 분명 이 대궐안에 있을겁니다. 대단히 엄중한 사건이니만치 속히 통감부의 결재하에 일본군대와 경찰을 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대궐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잃어진 옥새를 반드시 찾아낼테니 상감께서 너무 심뇌하시지 않도록 각근히 위로해드리기 바랍니다.》

랭랭한 웃음을 입가에 문채 뇌까리는 서장의 말에는 등골이 서늘해지게 하는 무서운 의미가 있었다.

군대와 경찰을 풀어 대궐을 뒤지겠다구? 설마하니 을미년때처럼 또 궁중에 피바람을 일구겠다는건가.

윤덕영은 찬물을 뒤집어쓴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라니? 그보다 더한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일본이다.

그래도 그때는 명색이나마 조선군대라는것도 있었고 이 나라의 리권을 탐내는 렬강들이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대던 시절이 아니였던가. 그럼에도 꺼리낌이 없던 일본인데 하물며 이 땅에 세력을 뻗칠대로 뻗친 오늘에 와서야 두려울게 뭐가 있을라구.

15년전에는 국모 하나를 도륙내는걸로 그쳤지만 이번에는 아예 《합병》이란 간판마저 다 걷어치우고 황실이니, 대감이니 하는 거치장스러운것들을 말끔히 없애려들지도 모른다.

(실지로 일이 그렇게 번져진다면 이날이때껏 부귀영화를 누려온 내 처지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보니 정1품 대감의 도고하던 기세는 가뭇없이 잦아들고 엉겁결에 윤덕영은 오줌이라도 마려운듯 엉거주춤한 자세가 돼버리고말았다.

그는 예속을 자인하는 공손한 표정을 서둘러 그려보이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서장에게 간청했다.

《이보시오 서장, 수고롭게 군대까지 동원할 필요야 있겠소. 그러다 민심이 소란해질수 있소. 아마 무슨 착오가 생긴것 같은데 내 곧 알아보리다. 부탁인데 나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서장의 눈이 비웃듯이 번뜩거렸다. 말없이 눈을 내리깐채 타산을 굴려보는듯 하던 그자는 잠시후 눈살을 꼿꼿이 세우며 씨벌이였다.

《좋습니다. 시종원경각하의 확약을 통감부에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일이 아니라는걸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소.》

윤덕영은 주린듯이 서장의 말을 부여잡았다.

벌렁벌렁 뛰는 가슴을 문지르며 윤덕영이 별실을 나서는데 그때껏 일본인들의 서슬에 눌려 침먹은 지네같이 시르죽어있던 윤택영이 뒤따라 나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찾는것이였다.

《대감.》

돌아보니 동생의 얼굴이 월식을 만난 달마냥 꺼멓게 질려있었다. 급히 일러줄 말이 있다는 표정이였다.

명치끝이 또다시 무지근해왔다. 윤덕영은 동생이 황급히 이끄는대로 어느 빈방에 들어갔다.

《어인 일이시오이까?》

방에 들어서자바람으로 조바심치며 던지는 윤덕영의 물음이였다.

윤택영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끙끙 갑자르다가 우거지상이 되여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옥새는 중전마마께서 간수하신듯 한데…》

《?!…》

윤덕영의 얼굴이 돌미륵처럼 굳어져버렸다. 불시에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것 같았다. 끝내 중전이…

아닌게 아니라 옥새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맨 먼저 중전이 떠올라 윤덕영은 더우기나 속을 졸이고있던 참이였다.

대궐안에서 상감보다도 더 한사코 《합병》에 도리를 젓는 인물이 다름아닌 중전이였던것이다. 만날 때마다 《합병》만은 절대로 안된다고, 죽으면 죽었지 나라가 망하는것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할수는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절규하던 중전이였다.

그러는 중전의 모습에서 윤덕영은 작두날에라도 올라설것 같은 결연함을 느끼며 가슴이 선뜩해질 때도 있었다.

허나 밀려드는 큰물에 주먹질이나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윤덕영에게는 중전의 그 모든 애원과 절규가 대세의 엄혹함을 모르는 아녀자의 한갖 푸념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었다. 헌데 이런 변고가 생기다니.

피가 꼭뒤까지 뻗쳐올랐다. 치미는 부아통을 가삐 누르느라 윤덕영이 입을 앙다물고있는데 곁에서 겁에 질린 동생의 목소리가 역정이 나도록 계속 들려왔다.

《어이구, 이 일을 어찌하면 좋사오이까. 일본사람들이 알면 중전을 가만두지 않을텐데…》

오두방정을 떠는 윤택영의 두눈이 초점을 잃고 희번덕대고있었다. 동생의 그런 꼴에 윤덕영은 더욱 화가 동해났다.

작달막한 키며 벗어진 이마, 앙바라진 가슴 등 겉모양은 더 말할것도 없고 탐욕스러운 기질에 능갈치는 솜씨, 거기다가 낯바닥이 땅두께같은 뻔뻔함을 보면 대주지 않아도 한배속에서 나온 형제라는것이 누구에게나 헨둥한 두사람이였다.

그렇지만 그들형제에게는 구별되는것도 있었으니 형인 윤덕영이 바늘로 찔러도 피 나올데가 없을만치 암팍지고 모지락스러운 성미였다면 동생인 윤택영은 허영과 허세에만 눈이 어두울뿐 속은 텅 빈 경박한 허풍선이였다.

하기에 윤덕영은 내심으로는 늘쌍 동생을 원두쟁이 쓴 외 보듯 하였고 윤택영은 임금의 장인인 부원군이 되여서도 형을 대할 때면 자연 주눅이 들군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은 제가 저질러놓고 뒤치닥거리는 노상 집안사람들에게 떠밀어버리던 어릴적 버릇그대로 윤택영은 오늘까지도 곤경에 빠지면 이렇게 형부터 괴롭히려드는것이다.

《녀자와 소인은 길들이기가 어렵다더니…》

세상물정 모르는 중전을 비난하는것인지, 주책머리없는 동생을 핀잔하는것인지 모를 웅얼거림소리가 윤덕영의 입에서 새여나왔다.

하건만 혼맹이가 빠져버렸는지 동생은 그 소리도 알아듣지 못한채 황망히 하소연을 토하고있었다.

《대감, 중전마마를 살려주사이다. 비록 중전일지라도 사사로이는 대감의 친조카가 아니오이까. 필시 중전마마께서 모진 마음을 품으신게 분명한데 이 아비의 힘으론 용빼는 재간이 없사오이다. 제발 대감께서 나서시여 중전마마를 설복…》

청승궂게 늘어놓던 윤택영의 넉두리가 별안간 동이 나고말았다. 비지땀이 흐르는 형의 이마에 지렁이같은 피줄이 시퍼렇게 부풀어오른것을 뒤늦게야 알아보았던것이다.

역증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윤덕영은 동생을 거들떠보지도 않은채 차겁게 내뱉았다.

《이 일은 제가 알아 조처하겠으니 부원군께선 더이상 소란을 피우지 마시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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