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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서 장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1


처서무렵의 마지막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날 오후, 창덕궁 대조전의 흥복헌에서는 조선봉건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고있었다.

괴괴한 관속인양 납덩이같은 침묵이 어전회의장에 무겁게 드리워있었다.

지겹게 뚝딱거리는 시계추소리가 숨막히는 침묵을 더욱 무겁게 하는데 천정에서는 날개긴 선풍기들이 끈덕지게 달려드는 더위를 밀어내느라 맥빠진 비명을 지르며 허덕거리고있었다.

임금의 배석하에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조정의 중신들은 땀에 젖은 얼굴을 훔칠념도 못하고 칙명이 떨어지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있었다.

회의가 시작된지도 퍼그나 시간이 흘렀다. 이따금 멀지 않은 별실쪽에서 시끌덤벙한 왜말소리가 독촉하듯 울려나온다. 일본인 황궁경찰서장이 전화통에 대고 시시각각으로 어전회의의 정황을 통감부에 보고하는 소리였다.

허나 조선봉건왕조의 27대임금 순종은 온몸을 맥없이 옥좌에 실은채 허탈에 빠진 모양으로 망연히 앉아있을뿐이였다.

순종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입은 비통하게 꽉 다물려있었다. 황실의 지고한 권위를 상징하여 후광마냥 등뒤에 두른 일월병풍이며 훈패가 번쩍거리는 요란한 군복차림도 고뇌와 절망, 비탄에 잠긴 순종의 가긍한 모습을 가리우지 못하였다.

어전회의에 오른 의제는 일본이 강요해온 《한일합병》에 관한 안건이였다.

《합병》이라는게 대체 무슨 소린가. 두 나라가 서로 평등한 자격으로 하나가 된다는것이 아닌가.

헌데 일본이 강박하는 《합병》안이란 조선의 왕조를 뿌리채 들어내고 이 땅의 모든것을 통털어 집어삼키겠다는 수작이였다. 그런 짓거리를 두고 《합병》이니, 《병합》이니 강변하며 도장을 누르라 억지다짐을 하니 실로 도척도 낯을 붉힐 횡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무심한 초목들도 치를 떨거늘 그것은 《합병》이 아니라 강탈이였고 《병합》이 아니라 병탄이였다.

그러고보면 제아무리 무도한 섬오랑캐들이라 해도 뒤가 켕기는 구석은 있었던 모양이다.

저들의 《합병》안을 수락하는 어전회의를 너렁청한 편전에서가 아니라 겹겹이 담으로 둘러막은 깊은 곳에 있다 하여 구중궁궐이라 불리우는 중전(임금의 안해)의 침전(대조전)에서, 그것도 대조전에 딸려있는 흥복헌이라는 자그마한 부속건물에서 슬그머니 열게 하였으니 말이다.

순종의 입에서 억눌린 한숨이 새여나왔다.

천하의 날강도무리였다.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내정권과 군권마저 속속들이 털리운 나라에서 조정이니, 임금이니 하는것은 한갖 빈 허울에 불과할따름인데 바야흐로 왜적들은 그 허울마저 말짱히 앗아내겠다는것이다.

《합병》안을 재가하라구?

결국 더이상 자기가 이 나라의 군주가 아님을 만인앞에 스스로 선언하라는 소리였고 500여년의 종묘사직앞에서 왕조의 멸망을 고하라는 소리였다.

조상대대로 물려온 삼천리강토가 이제는 일본의 속지로 되여버렸음을, 반만년세월 단군의 피줄을 이어온 이 땅의 백성들이 왜왕의 종으로 굴러떨어졌음을 만천하에 스스로 공포하라는 소리였다.

금시라도 통곡이 터져나올것만 같아 순종은 어금이를 꽉 깨물었다.

못나고 무력한 왕조의 세자로 태여나 외세의 전횡이 란무하는 굴욕의 세월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그였다.

그러한 순종으로서도 500여년 사직의 림종을 자인하는 사망확인서에, 자기의 백성들을 왜국의 노예로 넘기는 종문서에 도장을 찍는다는것은 너무나 곤욕스럽고 가슴떨리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결단코 《합병》안을 수락할수 없다는 고함이 목구멍으로 연송 치밀어올랐다.

하건만 순종은 피를 삼키듯 그 고함을 눌러삼키며 고통스러운 침묵만 지키고있었다. 서글프게도 그것이 왜적의 살기찬 칼날아래서 허수아비옥좌를 지키고있던 조선봉건왕조의 마지막임금이 할수 있는 유일한 항거였던것이다.

《상감마마, 재삼 아뢰옵건대 우리 황실과 백성을 영구히 보전할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일본과 〈합병〉하는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줄로 아옵니다. 부디 성총으로 헤아려주시기 바라나이다.》

천근만근의 침묵을 깨며 총리대신 리완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여쭈는 말이였다.

순종이 고뇌에 흐리멍텅해진 눈길을 천천히 쳐들었다.

초조한 기색이 떠도는 리완용의 반드러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느라니 어전회의에서 선참으로 일어나 일본제국의 《보호국》으로 남아 렬등취급을 받기보다 차라리 일본과 《대등한 통합》을 이루어 《문명개화》의 길로 나가고 2천만 백성들로 하여금 《세계 1등국민》인 일본제국 국민의 지위를 누리게 하는것이 낫다고 력설하던 그의 말이 다시금 쓰겁게 떠올랐다.

박쥐와 견줘도 짝지지 않을 리완용이였다. 한때는 미국을 입이 닳도록 찬양하며 돌아치더니 아라사(로씨야)가 득세하는 기미를 보이자 약삭바르게 친로파의 거두로 둔갑하여 《아관파천》을 조종한 인물,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김홍집을 친일파대신으로 몰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는데 앞장섰던 장본인도 바로 저 리완용이 아니였던가.

그러던 인간이 오늘에 와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싶게 매국대신으로 돌변하여 일본에 외교권을 섬겨바치고도 모자라 나라를 통채로 팔아넘기는데 선봉장으로 나섰으니 간신은 임금도 이긴다는 말을 어찌 그르다 하랴.

괘씸한 생각으로는 방자스레 튀여나온 리완용의 반질반질한 이마에 대고 《완용, 너야말로 불충이 극에 달했도다!》고 한바탕 호통을 치고싶었지만 통감부의 서슬푸른 위세를 등에 업은자인지라 순종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턱만 부들부들 떨었다.

왕조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른 이때 저런 간흉이 조정의 총리대신으로 틀고앉아있으니 종시 하늘은 이 나라를 버리려는것인가.

순종의 눈길이 한가닥 구원의 반디빛이라도 찾아보려는듯 허둥거린다. 그러던 그의 눈앞에 이번에는 내부대신 박제순의 시꺼먼 입수염이 어른거렸다.

형언할수 없는 망극지통을 호소나 하려는듯 잔뜩 오만상을 찌프린채 이마를 떨구고있는 박제순을 알아보는 순간 순종은 등덜미로 벌레 같은것이 서물서물 기여오르는듯 한 느낌에 몸을 움츠리고말았다.

인간은 왜 저리도 우거지상인가. 회의에서 《합병》안을 찬동한것이 가책이라도 된다는 시늉인가, 아니면 나라가 망해 벼슬을 잃게 되는것이 절통하기 그지없다는 시늉인가.

문득 《을사5조약》이 날조되기 전야에도 박제순이 저렇게 노죽을 부렸었지 하는 생각이 미쳐왔다.

그때 외부대신이였던 박제순은 여러차례나 참정대신 한규설을 찾아와 자못 비장한 낯빛으로 임금과 함께 순직할 각오를 표명하면서 왜인들에게 절대로 빼앗기지 않도록 외부대신의 도장을 련못속에 집어넣어두겠노라고까지 곱씹어 다짐하지 않았던가.

허지만 막상 이등박문의 표독스러운 협박에 부닥치자 대번에 기가 죽어 망국의 문서장에 외부대신의 도장을 누르고 나온 박제순은 련못에 집어넣는다던 도장을 어찌했느냐고 꾸짖는 한규설앞에서 아무 대꾸도 못한채 얼굴만 붉혔다지 않는가.

그처럼 용렬하고 주대가 없는 위인이니 나라가 망하는 이 마당에서도 필경 속으로는 저 하나의 운명만을 주먹구구하고있을테지.

비단 박제순뿐이랴. 저 농상공부대신이나 탁지부대신, 법부대신 같은 내각대신들은 물론이고 궁중에서 임금의 지팽이가 되여야 할 궁내부대신이며 시종원경, 시종무관장에 이르기까지 사직의 운명이나 임금이 당하는 치욕따위는 먹다버린 죽사발만치도 여기지 않는 위인들이기에 하나같이 《합병》안을 찬동해나선것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원로를 대표하여 허연 수염발을 드리우고 앉아있는 중추원 의장 김윤식은 《합병》안에 대한 가부를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했던가.

《불가불가(不可不可)》

반대한다는 뜻(不可 不可)인지 불가불 찬성한다는 뜻(不可不 可)인지 그 의미를 가리기 힘든 묘한 대답이였다.

리완용의 무리들이 《합병》안을 론의할 때 자문역할을 해주었다고 들었었는데 정작 이 자리에 나서서는 70을 훨씬 넘긴 늙은 몸임에도 떳떳이 소신을 밝히기 저어하는 김윤식의 거동을 보며 순종은 입이 쓰거워나지 않을수 없었다.

문벌가의 후손으로, 조선유학계의 거목으로 행세해온 인물의 지조라는게 고작 저런것이였던가.

하기야 황족을 대표하여 회의에 참석한 황제의 큰아버지 리재면마저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데 동의해나섰으니 굳이 비루한 신하들을 원망할 체면도 없는 순종이였다.

어둠속을 헤매는 새처럼 회의장의 여기저기를 향방없이 방황하던 순종의 눈길이 한쪽벽에 매달려 불안스럽게 데룽거리는 시계추에 가 부딪쳤다.

흡사 그 모양이 껍데기만 남은채 공중에 드리워 건둥거리는 거미를 보는것만 같다. 자신도 저 거미의 신세와 다를바가 뭐랴 하는 설음에 눈앞이 뿌잇해왔다.

한스럽도다. 어이하여 태황제(고종)는 설음이라도 마음놓고 터놓을 변변한 신하 하나 곁에 없는 옥좌를 물려주었단 말인가.

어이하여 이리도 못난 나라를, 남에게 수모당하고 놀림거리가 되여도 하소할데조차 없는 가련하고 루추한 나라를 자식에게 물려주었단 말인가.

태황제인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때없이 한숨을 토하군 하는 순종이였다. 그럴 때마다 그리워지는것은 어머니인 명성황후의 모습이였다.

어머니의 반듯한 이마가 어제런듯 눈에 선했다. 당차고 오연한 어머니의 한맺힌 그 눈빛에 자다가도 소스라쳐 일어나군 하였다.

림기응변의 재략과 서리발같은 독기로 조정을 주름잡고 대국들을 업어넘기던 어머니,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무릅쓰며 부녀자의 몸으로 정사에 참견하고 척신들을 끌어들인것도 다름아닌 일족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아, 막막한 이 시각 그 어머니가 곁에 있었더라면 무맥하고 외로운 아들을 위로라도 해줄수 있으련만…

어머니를 그려보는 순종의 멍한 눈빛이 서러움에 젖어들고있었다.

그때였다. 답답하게 침묵만 지키는 순종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키던 궁내부대신 민병석이 간이 달아 못 견디겠던지 벌떡 일어났다.

《상감마마, 성려를 더시옵소서. 이미 소신들이 루루이 아뢰온바이지만 〈한일합병〉은 전승자가 패전자를 압제하는 형식이 아니옵니다. 외국에 있어서의 합병의 례를 본다면 법국(프랑스)은 마도(마다가스까르)를 〈합병〉한 뒤 마도왕을 외진 섬으로 류배보냈사옵고 미국은 하와이를 〈합병〉한 뒤 하와이국왕을 한낱 백성으로 전락시켰사옵니다. 하오나 일본은 금번의 〈합병〉안에서 우리 황실의 지위와 안녕을 철석같이 담보하였사오니 〈합병〉후 피합병국의 원수를 릉멸하는것과 같은 일은 절대 있을수 없는줄로 아옵니다. 상감마마, 황실의 백년안태를 위해 〈합병〉안을 재가하심이 마땅한줄 아뢰옵니다.》

그런즉 《합병》안을 재가하지 않으면 마도왕이나 하와이왕의 신세가 된다는 소린가?!…

궁내부대신의 뒤를 이어 앙바틈한 몸집의 시종원경 윤덕영도 나비수염을 파들거리며 일어섰다.

《상감마마, 통감부에서 벌써 수차에 걸쳐 하회를 물어왔사옵니다. 저어… 사내통감(데라우찌 마사다께)은 이등공(이또 히로부미)과 달리 만사를 일도량단으로 처리하는 무사출신인지라 만일 이 회의에서 〈합병〉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통감의 심기를 해쳐 화를 불러오지 않을가 심히 념려되옵니다. 상감마마, 속히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민병석은 민씨척족의 중견이고 윤덕영은 중전의 큰아버지이다.

척신들을 바라보는 순종의 눈길이 바람맞은 초불마냥 흔들거렸다. 재가를 재촉하는 그들의 황겁한 목소리가 절망의 수렁속에서 갈팡거리는 순종에게 피할 길 없는 진실을 일깨워주었던것이다.

강약이 부동이라고 일본이 작심을 하고 달라붙은 이상 어차피 《합병》이 이루어질것은 자명한노릇이였다.

오욕의 《을사5조약》을 한사코 거부하던 태황제도 종당에는 간악무쌍한 일본의 간계와 공갈에 밀려 주권을 빼앗기고 황위마저 잃지 않았던가. 그럴진대 맨발로 바위차기로 일본의 감정을 건드려 그네들이 지금보다 더 가혹한 《합병》안을 들이댄다면?…

민병석의 말대로 그래도 현재의 《합병》안에서 일본은 겉치레일망정 망국의 황실에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고있지 않는가.

느닷없이 복도에서 칼집이 철컥거리는 바람에 순종은 흠칫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궁성밖에서 어지러운 말발굽소리들도 들려온다.

어전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칼을 차고 궁내 곳곳에 배치되여있던 일본경관들의 살벌한 모습이 되살아났다.

일본군의 보병과 기병들이 회의가 열리는 창덕궁은 물론이고 태황제가 유페되여있는 덕수궁에까지 기관총을 걸어놓고 지켜서있다던 어느 내관의 말도 생각났다.

덕수궁이라구? 왜인들이 헤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강제퇴위시킨 고종황제에게 조롱이나 하듯 덕을 쌓으면서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라는 이름을 지어붙이고 대한제국의 황궁이였던 경운궁도 한낱 보잘것없는 사택으로 끌어내리려고 뜯어고친 이름이 바로 덕수궁인것이다.

가슴이 화들거렸다. 그렇듯 간활하고 포악무도한 왜인들이 무슨짓인들 못 저지르랴.

불현듯 순종의 눈앞에 전률을 일으키며 다가드는 광경이 있었다. 떠올리기도 소름끼치는 을미년의 그 참경이였다.

사납게 허공을 가르던 일본도들, 야수처럼 포효하며 미쳐날뛰던 무리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던 궁녀들의 비명소리와 선혈이 랑자하던 명성황후의 침전 그리고 고종황제에게 폭행을 가하고도 모자라 아들인 자기의 상투를 거머잡고 칼등으로 후려치며 어머니가 있는 곳을 대라고 을러메던 왜놈들의 저주로운 그 상통이 악몽과도 같이 덮쳐들었다.

렬강들을 상대로 위태로운 줄타기놀음을 벌리며 일족을 지켜내고저 모지름쓰던 명성황후도 그날 잔학한 섬오랑캐들에게 란도질을 당하고 시신도 변변히 남기지 못한채 한줌 재가 되여버리지 않았던가.

온몸이 경련을 만난듯 덜덜 떨려왔다.

그런 날강도들이니 그네들의 《합병》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또다시 이 대궐안에서 을미년의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으랴.

순종의 입에서 《끄응-》 하는 된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합병》안을 수락하자니 천고의 죄인으로 락인찍히는것이 두려웠고 거부하자니 일본의 칼도마우에 오른 자신과 황실의 운명이 불안스러웠다.

심약한 넋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력사의 중압에 짓눌려 순종은 등어리로 줄땀이 흘러내리는것도 의식하지 못한채 괴롭게 허덕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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