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정 종 여(미술가)

 

1914년 12월 30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출생.

1935년부터 일본 오사까미술학교에서 공부.

1954년부터 평양미술대학 강좌장으로 사업.

1964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화분과위원장으로 사업.

1984년 12월 30일 사망.

인민예술가, 부교수.

                                                           

 

 

아름드리거목도 뿌리에서 시작되고 만사람이 다니는 대통로도 초행길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자랑스러운 민족회화로 나날이 만발해가는 조선화의 풍요로운 화원을 볼 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여 무성한 꽃들을 자래운, 주체미술의 초행길을 걸어간 선대미술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화가 정종여도 그러한 선구자들중의 한사람이다.

 

 

《해변》

 

정종여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면 상동이다.

1914년 12월 가난한 농가의 셋째아들로 태여난 그는 거창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벌써 미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늘 꽃과 새, 나비, 닭 등 주위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즐겨 그렸는데 어찌나 생동했던지 교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허나 초가지붕을 짓누르는 가난의 무게는 금방 싹트기 시작한 나어린 재능마저 압박해왔다.

그는 1928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살림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진학은 꿈조차 꿀수 없었다. 별수없이 약국과 개인병원을 떠돌며 잡심부름을 몇달 하던 그는 일자리를 찾아 현해탄을 건느게 되였다.

도꾜까지 흘러간 그는 신문배달도 해보고 자전거와 전구를 만드는 자그마한 공장에 들어가 일하기도 하면서 이국살이의 설음을 지긋지긋하도록 맛보아야만 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미술에 대한 동경만은 접을수 없었던 그는 낮에는 가네모도전구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구로자와초상화야간학교에 다니면서 한해동안 짬짬이 인물초상 그리는 법을 수업받았다.

1935년에 그는 직업적인 화가가 될 꿈을 안고 오사까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주간학교에 입학하기는 했으나 그의 처지로서는 힘에 부치는 고학생활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학비를 물기 위해 아침이면 신문을 배달하고 밤이면 삯일을 찾아 거리를 헤매이군 하였다. 거기다가 일본인들의 멸시와 천대까지 겹치여 모든것을 엎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몇번이나 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기에는 그림을 그리려는 그의 열망이 너무도 강렬했다.

어느날 그는 내가의 물오리를 그린 신사임당의 그림을 보게 되였다. 으슥한 작은 내가에서 깃을 다듬으며 한가로이 노니는 다섯마리의 물오리를 형상한 그림이였다. 무더운 여름날 물비린내가 풍겨오는듯 한 내가에는 낯익은 풀들이 무성해있는데 저녁노을에 반사된 물오리들의 깃색갈이 야릇한 감동을 자아내며 정종여의 마음에 젖어들었다. 아마도 그 깃색갈은 호분(조선화색감으로 쓰이는 조개가루)을 섞어 조색한것 같았다.

그림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이 이상하게 설레였다.

(우리는 이렇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데 모국의 산천은 어이하여 저토록 아름다운것일가?)

자기도 그려보고싶었다. 맑은 공기가 차흐르던 소나무숲과 발가숭이몸으로 자갈밭에 뒹굴던 소꿉시절의 강변을, 초가우에 박이 달처럼 걸려있던 고향동네를 그려보고싶었다.

조상의 얼과 숨결은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피와 살속에 스며드는 모양이다. 심신이 약해질 때마다 태를 묻고 자라난 그곳을 화폭에 담고싶어, 옛 미술가들의 뛰여난 필치에 고무되여 그는 다시금 붓을 잡군 하였다.

하여 미술학교에 다니는 기간 그는 고향산천을 그린 적지 않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중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비교적 폭이 있게 형상한 조선화작품들로 《해인사계곡풍경》(1937년), 《가을교외》(1938년), 《산촌의 물소리》(1939년), 《3월의 눈》(1940년), 《홍류동의 봄》(1940년) 등이 있는데 《3월의 눈》은 동백꽃우에 눈이 소복하게 내려쌓인것을 진채화법으로 선명하게 그린 그림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젊은 미술가의 장래를 내다볼수 있게 한 우수한 그림으로 당시 화단의 눈길을 끌었다.

걸음마다 들씌워지는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며 전문부 2년과 동양화과 3년, 연구과 2년을 마친 정종여는 마침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에 귀국하였다.

조국에 돌아온 그는 고향과 강화도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청계》라는 호로 여러 전람회들에 조선화작품들을 출품하였다. 그중에는 일본미술가들의 작품을 누르고 입상되여 조선사람의 예술적재능을 시위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석굴암의 내부정경을 시간적계기와 일치시켜 정취가 느껴지게 그린 조선화 《석굴암의 아침》(1941년)이라든가 《눈내린 뜰》(1942년), 《기다리는 사람들》(1944년)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해방전에 창작한 그의 작품들가운데는 근로하는 조선녀성의 모습을 정확하면서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한 《해변》이라는 제목의 조선화도 있다.

바다가의 두 녀인을 그린 작품에서는 머리에 임을 인 녀인과 바위우에 앉아있는 녀인의 성격이 그들의 행동과 얼굴표정을 통하여 생동하게 전달되고있다. 비록 바다물속에서 조개를 줏고 미역을 따내며 힘들게 살아가는 녀인들이지만 그들의 건장한 체구와 소박한 모습, 더우기 조선옷을 입은 형상을 직관성있게 그림으로써 정종여는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도 민족성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나가는 우리 인민의 강의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일제의 가혹한 략탈과 탄압에 항거하여나선 우리 인민의 보다 적극적인 투쟁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있었다.

화가는 화폭우에 묘사대상을 옮기기 전에 자기자신의 마음을 옮겨놓는다.

그는 여직 해변가에 머무르고있었다. 투쟁의 격랑으로 높뛰는 시대의 바다 한복판으로 뛰여들지 못하고있었다.

해방전 그의 작품들이 주로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순수 자연풍경을 그리는데 머무른것은 바로 그때문이였다.

하지만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미술의 정화인 조선화를 계속 고수해나간것은 애국심이 없이는 할수 없는 일이였다.

정종여는 8. 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았다.

민족재생의 희열속에서 31살의 젊은 화가는 자기의 앞날을 그려보았다.

10여년세월이 흐른 뒤 정종여는 남녘에 있는 어느 한 벗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환희로웠던 그 나날에 대하여 이렇게 추억하였다.

《… 우리 나라가 일제기반에서 해방된 초기 형과 운포와 나 셋이 종로5가 어느 2층집에서 긴긴 밤을 새우며 열렬하게 토론하던 그때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때 우리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우리 조선화를 어떻게 살려나갈것인가에 대하여, 그 전망에 대하여 밤가는줄 모르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 눈앞에는 조선화의 휘황한 장래가 떠올랐고 자신들을 힘과 신념을 가진 용기백배한 사람으로 느꼈었지요. …》

그는 새 조선의 미술발전을 위해 주추돌이 되리라 결심하고 서울 성신녀자중학교와 배재중학교의 미술교원으로 있으면서 후대교육사업에 정열을 기울였다.

하지만 해방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미국이 또다시 이 땅우에 민족비운의 먹장구름을 몰아왔던것이다.

자주냐 사대냐? 독립이냐 예속이냐?

격동의 해방정국이 들이대는 준엄한 이 질문앞에서 시대의 해변가에 서있던 정종여 역시 자유로울수가 없었다.

어제날의 망국노들은 저들이 주인된 진정한 나라를 갈망하고있었다. 사대와 굴종으로 얼룩진 오욕의 력사가 자주독립국가를 념원하고있었다.

겨레의 생사흥망을 판가름해야 할 시각에 과연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허무한 환상을 피워올리는 자욱한 담배연기속에 묻혀 서유럽의 로맨스나 감상하고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양키병정들의 초상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든가, 고관대작들의 명함장을 얻어 제 그림이나 파는데 만족해야 한단 말인가.

무릇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성을 떠나, 량심과 도덕을 떠나 아름다움에 대해 론한다는것은 한갖 궤변에 불과할따름이다. 넘어진자와 약한자를 위하여 말하기 두려워하는자에게, 허위와 불의에 침을 뱉기 두려워하는자에게 어찌 참다운 예술가의 심장이 있다고 말할수 있단 말인가.

정종여는 인민이 가는 길을, 정의와 량심의 길을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사찰풍경이나 꽃, 새, 풀과 벌레 등을 담던 화폭에 사나운 파도와 같이 일떠선 인민의 모습을 담기 시작하였다.

조선화 《5월의 데모》(1946년), 《병든 서울》(1947년), 《분노한 인민》(1947년), 《산사람들》(1948년), 《돌아온 사람들》(1948년), 《고향》(1949년), 《해녀》(1949년), 《금강산설로》(1949년), 《금강산초여름》(1949년) 등은 그 시기에 정종여가 창작한 작품들이다. 《5월의 데모》와 《분노한 인민》, 《산사람들》과 같은 주제화들에서 화가는 반미구국투쟁에 일떠선 남조선인민들의 항거의 모습을 조선화의 필법으로 격조높이 형상하고있다.

고루한 상아탑속에 갇혀 목가적인 아름다움만을 좇던 그가 드디여 시대정신에 민감한 화가로 되여 현실의 한복판에 용약 뛰여들었던것이다.

미제와 주구들은 그의 미술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반동들의 박해를 피하여 대구와 부산일대로 피해다니면서 뜻을 같이하는 미술가들과 함께 7인전을 여는 등 진보적인 창작활동과 사회운동을 계속 벌려나갔다.

정의와 진리, 참다운 아름다움을 갈망하던 정종여는 전쟁이 일어나자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민심의 용용한 대하에 합류해나섰다.

해방된 남녘땅에서 문화선전성 문화국에서 사업하던 그는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애국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배낭속에 벼루와 붓을 넣어가지고 북으로 들어왔다. 천여리가 넘는 간고한 후퇴길이였다. 험산준령을 넘고 죽음의 고비들을 헤치며 밤낮으로 가야 했던 길이였지만 그 길이 진정한 삶의 길이고 력사앞에 떳떳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그들은 끝까지 걸을수 있었다.

그후 정종여는 중앙미술제작소 회화부 부원으로, 미술가동맹 창작가로 활동하면서 전쟁 전기간 우리 인민과 인민군군인들을 승리에로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전투적인 미술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러한 작품들로 조선화 《농민들속에 계시는 위대한 수령님》(1951년), 선전화 《미제에 죽음을 주라》(1950년), 《현물세를 제때에 바치자》(1951년), 조선화 《2차로 서울을 해방한 인민군》(1951년), 《진격》(1951년), 《바다가 보인다》(1952년), 《전선수송》(1952년) 등과 그밖에 《습격조》, 《야간춘경》, 《빨찌산》 등이 있다.

사생결단의 판가리싸움이 계속되는 전쟁의 엄혹한 현실은 무엇보다도 미술작품에서 강한 선동성과 설득력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는 결국 조형성에만 적지 않게 치우치고있던 종래의 묘사방법에서 벗어나 인민대중이 쉽게 리해하고 감동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평이하고 통속적인 형상들을 창조함으로써만 해결될수 있었다. 정종여의 조선화 《바다가 보인다》는 그런 측면에서 우수한 전례를 창조한 작품이였다.

《조선미술사》 2권(사회과학출판사 1990년) 26페지에는 이렇게 서술되여있다.

《들끓는 현실과 근로인민의 투쟁과 생활을 반영한 주제의 조선화는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보다 활발히 창작되였다. 조선화화가들은 낡은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전시의 준엄한 현실속에 대담하게 뛰여들어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용사들과 후방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을 주제로 한 조선화작품들을 련이어 내놓았다.

조선화 〈바다가 보인다〉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미제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데 대한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인민군용사들이 패주하는 미제침략자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남으로 진격하던 길에서 높은 령마루에 올라 지척에 펼쳐진 남해바다가를 바라보고있는 감동적인 형상을 통하여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장병들이 발휘한 영웅적위훈을 보여주었다.

작품에 창조된 인간과 자연형상들은 선묘법과 몰골법을 배합한 현대조선화의 풍부한 표현기법을 잘 보여주고있다. 특히 인물의 성격적모습과 남해의 고유한 자연미를 선명하고 힘있게 그려낸것은 해방직후에 전통적인 조선화화법을 우리 인민의 현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는데서 이룩한 귀중한 성과로 된다.》

작품은 사회주의나라에서 열렸던 순회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여 우리 인민군대의 사상정신적풍모를 널리 선전하였다.

자기의 운명을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결합시킬 때 인간은 강해지며 삶의 보람과 사명을 찾게 된다. 어느덧 정종여는 시대의 앞장에서 대중을 선도해나가는 미더운 인민의 예술가로 성장한것이다.

가렬한 전화의 나날이였다. 하건만 그속에서도 사람들은 억세게 숨쉬며 새 생활의 봄을 마중해가고있었다.

중앙미술제작소가 오늘의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에 소개되여있던 나날 정종여는 박인숙이라는 한 처녀를 알게 되였다. 순천이 고향인 박인숙은 해방후 평양에 나와 수예를 배우고 당시 미술제작소에서 수를 놓고있던 녀성이였다.

두사람은 진실하고 소박한 성격의 공통성으로 하여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그들은 새 가정을 이루었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1)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2)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3)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1) 항쟁의 거리에서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2) 그가 안긴 품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3)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1)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2)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3)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4)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1)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2)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3) 그의 삶은 영원하다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1)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2) 인생의 가치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3)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1) 《해변》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2) 《5월의 농촌》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3)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4)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1) 족쇄를 찬 희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2) 환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3) 웃음의 철학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