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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회

제5장. 구름장을 뚫고 비쳐온 해빛

6

위세를 부리던 추위는 대한고개를 넘어서기 바쁘게 기가 꺾이더니 립춘이 다가오면서부터는 장수 잃은 군사들처럼 걷잡을수없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억봉은 어제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뜰은 이전같으면 억봉이가 세탄장 한구석에 꾸려놓은 자기 오소리굴에서 지내려니 하는 생각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을것이다. 알뜰은 직맹부위원장을 따라 얼결에 시당에 다녀온 이후로 억봉에 대해 순간도 마음놓을수 없었다. 억봉이한테서 평양에 갔다온 이야기며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청사앞에서 산업국의 그 어마어마한 가죽잠바 부국장과 시당비서를 만났댔다는 상서롭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후여서 더욱 그랬다.

알뜰은 아침 일찍 공장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날은 이미 밝은지 오래였으나 이른새벽이여서 사위는 아주 조용했다. 알뜰이 자기네 집앞으로 뻗은 골목길로 분주히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차지훈이 걸어왔다. 지훈은 여느때와 달리 산뜻하게 지은 봄철외투를 입고 검은 중절모를 썼다. 어데 나갔다가 밤을 딴데서 보내고 지금에야 돌아오는지, 아니면 이른아침 어뜩새벽에 일보러 갔다 지금 오는지 그는 찬바람을 휙 풍기며 알뜰이옆을 지나갔다. 중절모를 이마까지 푹 내려쓴채 그는 알뜰을 본척도 하지 않았다. 얼마전에 이른아침 마당을 쓸다가 마주쳤을 때에도 서로 인사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알뜰의 가슴속에서 충격의 파문은 그와 헤여진 후 일어났다. 지금 알뜰의 마음속에 한가득 차있는 억봉에 대한 근심과 불안은 차지훈때문에 생겨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운명은 이번에도 억봉이나 지훈을 서로 용서할수도, 타협할수도 없는 대립 쌍방의 량끝에 세워놓았다. 배송기사건이후로 이들은 하나의 천평저울 량쪽에 선듯 한 관계에 놓였다고 말할수 있었는데 지훈이쪽으로 유리하게 저울팔이 기울어지면 억봉이쪽이 불리하게 저울팔은 올라가기마련이였다.

알뜰은 지훈이가 오늘 아침 여느때없이 산뜻한 차림으로 나선걸 보고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고보면 항상 찌프리고다니던 지훈의 얼굴색이 오늘 아침엔 한결 밝은것 같았다. 배송기사건이라는 저울대팔의 원리를 놓고 따져보면 지훈의 얼굴에 피여난 웃음과 만족은 억봉이한테 쓰거운 한숨과 눈물을 의미했다. 억봉이나 지훈의 일이 다 잘되기를 바라던 알뜰의 마음은 이 순간 동생편으로 기울어졌다.

알뜰은 치마꼬리에 바람이 일 정도로 제철소를 향해 걸어갔다.

숨이 턱에 닿아 해탄구역 세탄장 한구석에 꾸려놓은 억봉의 오소리굴에 이르니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덜컥 채워져있었다. 사위는 동굴속처럼 조용했다.

(이 애가 집에도 안 들어오고 어디 갔을가?)

알뜰은 맥이 빠져 세탄장건물밖으로 나왔다. 세탄장건물 한쪽으로 세워놓은 배송기화차가 바라보였다. 지붕이 훌 날아났던 화차우에 낡은 철판들을 주어다 또 지붕을 해씌웠다. 화차로 만든 창고에도 억봉은 없었다. 수류탄폭발로 뚜껑이 깨지고 발통이 떨어지고 날개에까지 금이 가서 이제는 파철이나 다름없이 된 이 헌 배송기를 억봉은 아직도 신주모시듯 한다.

세탄장건물을 돌아서니 해탄로뒤산이 바라보였다. 방금 떠오른 아침해빛의 조명을 받으며 대동강기슭에 바싹 다가선 자그마한 산봉우리가 묵묵히 서있다. 한때는 소나무가 울창하던 산발이였으나 지금은 나무그루터기 하나 볼수 없다. 봄풀싹마저 머리를 내밀지 못하여 산은 홀랑 알몸을 드러내놓은채 해바라기를 하며 졸고있다. 그 산자드락에서부터 강기슭과 평행선을 그리며 올망졸망한 네개의 해탄로가 서있다. 아침해빛에 선명하게 드러난 거무틱틱한 해탄로의 잔해는 여느때없이 처참했다. 지난해 늦가을과 초겨울에는 그처럼 새까맣게 찾아들던 까막까치떼가 지금은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고목에는 새도 앉지 않는다더니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로체들이 까막까치한테서마저 버림을 받았다. 아직 해탄로가 식지 않았다 해도 따사로운 봄빛이 바야흐로 무르녹는 지금 날짐승들은 해탄로신세를 지려 하지 않을것이다. 오랜 세월 독한 연기에 그슬리우고 석탄진이라 할수 있는 진득진득한 타르에 게발리운 여기, 콕스가루며 석탄가루, 재가루만 무겁게 내려앉은 해탄로와 그 주변은 다 파먹고 내버린 페굴처럼 쓸쓸하기 그지없다.

알뜰은 해탄로와 그 주변에 드리운 무거운 정적과 그속에서 풍기는 싸늘한 랭기를 새삼스레 느끼는 순간 서글픔이 북받쳐올랐다. 바야흐로 새봄이 다가오고있었고 만물은 벌써부터 약동하고있었다. 해방된 새 조국에 찾아오는 이 봄과 함께 온 나라와 온 겨레는 지금 얼마나 감격과 환희로 들끓고있는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위원장으로 추대되시더니 얼마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서는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발포하였다.

세기적숙망을 실현하는 농민들을 도우려 제철소에서만도 수백명사람들이 농촌으로 달려갔다. 어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분이 토지개혁에 동원되는 제철소로동자들을 태우려 자동차까지 가지고왔었다. 석봉이도 그중의 한사람이 되여 봉산으로 떠나갔다. 평양에 가서 공부하는 기봉이한테서 자기도 평남도 어느 바다가마을에 토지개혁을 도우러 간다는 편지가 왔다. 이 봄과 함께 제철소도 소생하고있었다. 며칠전에는 신철공장이 조업을 시작하였다. 이제 곧 박판공장도 시운전을 한다고 했다. 일제때는 박판을 만들지 못했다. 일제는 기계들을 가져다만 놓고 설치도 못한채 망하고말았다.

날에날마다 가슴뛰는 새 소식이 들리고 너나없이 모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춤출 일만 생기는데 어이하여 이 해탄로만 이렇게 주인없는 무덤처럼 버림받아야 하는가.

알뜰은 괴로운 마음으로 해탄로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대동강쪽에서 두사람이 걸어왔다. 앞사람 손에 들린 물건이 해빛에 반사되여 번쩍했다. 알뜰은 잠시후에야 앞에서 건들건들 걸어오는 사람이 억봉이고 뒤에서 어정어정 따라오는 사람이 달모라는것을 알았다. 억봉의 손에 들린것은 물고기꿰미였다.

《누이 왔나?》

억봉은 알뜰에게 손에 든 고기꿰미를 흔들어보이였다. 꿰미에는 둬뽐나마 될 고기가 세마리나 됐다.

《맨 큰 이놈은 내가 잡은거야.》

억봉은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커다란 메기 한놈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이며 자랑을 했다. 오늘 아침 고기가 예상외로 잘 물려 범잡은 포수처럼 마음이 부푼 억봉이다. 시답지 않아하는 알뜰의 표정을 보고 억봉은 누이가 못미더워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증인을 서라고 달모한테 추겨댔다.

《정말이지요? 아저씨―》

《그래―》

달모는 씨물씨물하며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억봉은 자기 솜씨를 자랑하듯 꿰미채 고기를 알뜰에게 내밀었다.

《누이, 정말 잘 왔어. 한번 맛있게 끓여줘. 우리가 끓여먹으니 어디 고기가 제맛 나야지…》

억봉은 배가 고픈지 알뜰이가 끼고온 밥보자기를 보더니 군침을 꿀꺽 삼키며 제법 너스레를 떤다. 알뜰은 참고참았던 서글픔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남들은 토지혁명을 한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동차를 타고 재령나무리와 어러리벌로 달려가는데 집안의 기둥으로 믿어오던 동생은 여기서 강가에 나가놀다 돌아오는 철없는 아이처럼 물고기를 잡아들고 기뻐한단 말인가. 알뜰은 분하고 아픈 마음을 가슴깊이 묻어두며 얼굴에 그것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억봉이한테서 물고기꿰미를 받아들고 세탄장 한구석에 꾸려놓은 휴계실로 향했다. 억봉이가 큼직한 쇠를 열고 철판으로 만든 문짝을 여는 순간 후끈한 열기와 함께 독한 담배내가 코를 쿡 찔렀다. 통풍이 잘되지 않은 방안에서는 어제 밤 밤새 피운 담배연기가 채 빠지지 않아 눈이 아릴 지경이였다.

《얘, 여기선 오소리가 아니라 곰두 잡겠다.》

알뜰은 억봉이가 거처하는 이곳을 사람들이 《오소리굴》이라고 놀려주는것이 우연치 않다고 생각되여 공기 하나 제때에 갈지 않고 살아가는 증판스러운 동생을 탓했다.

《담배 바른데 한번 피워 훌훌 내보내면 되겠어… 연기 못 빠지게 방안에 꼭 잡아두었다가 담배피우고싶을 때 연기라도 마셔야지!》

억봉은 누이한테 롱을 하면서도 안됐는지 방안을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했다.

알뜰은 그들이 방안을 쓸어내는 사이에 고기꿰미를 기계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수도가 있고 난로에 불이 벌겋게 피여있어 물고기는 잠시후 쟁개비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알뜰은 억봉이와 달모가 아침식사를 마치였을 때 집안소식도 전할겸 푸념처럼 입을 열었다.

《석봉이가 그제 봉산에 갔다.》

오래간만에 아침식사를 하고난 억봉은 다 먹은 그릇을 탁자앞으로 밀어놓고 손바닥으로 입을 썩 문지르며 기분좋아했다.

《그 자식 봉산체네한테 단단히 반한게 아니야.》

《넌 정말…》

알뜰은 어이없어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귀머거리가 자기 속에 있는 소리 한다는 옛말은 그른데 없었다. 오소리굴같은 이런데 들어앉아 세상돌아가는 소식조차 제대로 못 들으니 마음편한 소리밖에 할수 없었다.

《토지개혁 도우러 갔어.》

타이르듯 알뜰이 하는 말에 억봉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자식 좋겠는데…》

토지개혁소식은 억봉이도 들었다. 제철소에서 수백명 사람들이 토지개혁방조로 농촌에 갔다는것도 모르지 않았다. 준길삼촌이 살아있고 자위대대장노릇 하던 때 같으면 누구보다 그런 일에 불리웠을 그였다. 억봉이가 자기 동생을 부러워하자 달모는 달모대로 농촌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고향에나 갔댔으면…》

고향에 갔었으면 이번 토지개혁혜택에 그도 토지를 분여받을지 모른다. 제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면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먼산 쳐다보듯 불꺼진 해탄로나 바라보고 앉아있는 지금보다 얼마나 가슴뛰고 기운 뻗칠것이며 생활에 기쁨이 넘쳐날것인가.

세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리우에서는 자기 상념에 빠져있는 그들을 굽어보며 낮전등이 비치고있었다. 단 하나인 창문에 추위를 막느라 철판을 대놓아서 불을 안 켜면 대낮에도 어두운 여기다. 억봉이와 달모가 독한 마라초를 말아 피우기 시작하자 알뜰은 먹고난 그릇이나 가시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때 철판출입문이 벌컥 열리더니 문가에 뜻밖에도 계향이가 나타났다.

《아이 깜깜이야.》

전기불을 켜놓았는데도 계향은 어둡다고 했다. 밝은 해빛아래 있다가 갑자기 이안에 들어서면 어둡기마련이다.

계향은 어둠에 눈이 익어서야 방안의 세사람을 알아보았다. 밝은 밖에서 어두운 세탄장건물안에 들어서다 바닥에 고인 물을 잘못 밟아 발을 적셔버린 그는 양말까지 마친 밸풀이라도 하듯 억봉이를 향해 첫마디부터 곱지 않게 뇌까렸다.

《빨리 지배인실루 오래요.》

계향은 그러고나서 자기 발을 굽어보며 신발에 묻은 석탄물을 터느라 발을 탕탕 굴렀다. 계향의 뜻하지 않던 출현과 그가 불쑥 내뱉은 한마디 말은 방안에 던져진 튀지 않은 수류탄 비슷했다. 알뜰은 계향이가 신발에 묻은 물을 터느라 탕탕 발구르는 소리가 가슴에 부딪쳐 쩡 울리였다. 알뜰은 자기의 불안속에 위구하던 일이 지금에야 눈앞에 닥쳐왔는가 싶었다.

《누굴 말이요?》

억봉은 계향을 말시키려고 이죽거리였다.

《누군 누구겠어요? 동무지…》

계향은 바로 억봉이때문에 자기가 시답지 않은 심부름을 다녀야 하는것이 골난다는 표정이다.

《왜 오랍디까? 이번엔 어디 고와 뭘 주겠다고 오랍디까?》

배송기때문에 지배인실에 한두번만 불리워가지 않았고 사건진상을 밝히느라 시보안서까지 다녀온 억봉이여서 선우치담지배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요즘은 볼이 잔뜩 부어오른다.

《지배인한테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계향은 공연히 자기한테 행패하려드는 억봉이가 눈꼴사나운지 획 돌아서 나가고말았다. 알뜰은 손에 들었던 그릇들을 탁자우에 내려놓고 계향을 따라나갔다. 자기 운명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이 시각 하늘보고 도끼질하듯 동생은 무슨 우둔한짓을 하려드는것인가.

《계향이!》

알뜰이 따라가며 불렀으나 계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알뜰은 세탄장건물밖에 나와서야 계향을 따라잡았다.

《계향이, 너그럽게 생각하라구.》

알뜰은 동생한테 닥쳐온 심상치 않은 일이 계향이로 해서 유리해질수도 있고 불리해질수 있기라도 한것처럼 그의 손목을 붙들고 사정했다. 계향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내뱉는 성미여서 발끈하기도 잘했지만 그만큼 성이 인차 사그라들기도 했다.

《언니, 정말 언니한텐 안됐어요.》

계향은 알뜰에게 자기의 엉성스런 행동을 사과했고 그가 묻는 말에 사근사근 대답했다.

《무엇때문에 찾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제철소에 시당비서선생이 오시였어요.》

계향의 말에 알뜰은 다시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억봉의 일이 점점 커지면서 꼬이는게 틀림없었다. 알뜰은 강둥강둥 뛰여가는 계향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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