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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인민배우 한진섭은 자기의 생일 80돐을 몇달 앞두고 자리에 눕게 되였다.

세상에 태여났다가 누구나 다 겪게 되는 인생의 마지막고비였으나 한진섭의 가슴속에는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누려온 행복이 너무도 크고 고마워 그것을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한생을 다시 살아 위대한 그 품속에서 보람찬 예술창조의 그 길을 계속 걸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진섭은 머리맡에 놓인 사진첩을 당겨 맨앞에 정중히 모신 위대한 영상을 우러르며 눈물지었다.

1987년 7월 25일 혁명연극 《3인1당》의 시연회를 지도하시기 위해 극장에 나오시였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배우 리단과 한진섭을 량옆에 세우시고 찍으신 기념사진이였다.

한생을 빛나게 살도록 이끌어주신 위대한 은인을 우러르는 그의 눈앞으로는 눈물을 뿌리며 방랑의 길을 떠난 경기도의 고향땅이며 만주의 거친 풍경이 주마등처럼 흘러갔고 죽어서도 잊지 못할 어버이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따사로운 손길이 온넋을 감싸안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정말이지 위대한 수령의 품, 위대한 령도자의 품에 안기지 못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찌되였을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부풀었다.

위대한 품에 몸을 맡겼기에 그는 적지 않은 나이인 54살에는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에서 준혁의 아버지역을, 년로한 70살나이에도 혁명연극 《성황당》에서 황지주역을, 혁명연극 《혈분만국회》에서 서대감역을, 72살에는 혁명연극 《3인1당》의 연출을 담당수행하여 로당익장하는 혁명적예술인의 참모습을 자랑스럽게 과시할수 있었던것이다.

돌이켜보면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 순간부터 한진섭의 걸음걸음은 백두산위인들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자신심과 긍지와 행복으로 충만되여있었다.

특히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돌려주신 사랑과 배려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수 없었다.

어느해인가 예술영화촬영장에서 한진섭을 만나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정히 그의 손을 잡아주시며 요사이 건강은 어떠한가, 목소리가 갈린것을 보니 피곤한 모양인데 쉬여가면서 일하라고 따뜻이 보살펴주시였고 또 언제인가는 그를 만나시고 혈압이 높다는 말을 들었는데 좀 어떤가고, 나이도 많은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고문역할이나 하면서 일하라고 다심하게 말씀하시였다.

한진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하셨으면 그가 걸어다니기 힘들어할세라 승용차까지 배려해주시였겠는가.

잊지 못할 사랑의 나날을 더듬으며 사진에 모셔진 자애로운 그이영상을 우러르는 한진섭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베개잇을 적시였다.

(아, 그이를 모시고 더 많은 일을 하고싶구나!)

한진섭은 이때처럼 생에 대한 애착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그이를 영원히 우러러모시고 오래오래 배우생활을 하다가 통일된 조국의 광활한 무대를 활보하고싶은 욕망이 못 견디게 솟구치면서 떠나온 고향땅을 밟아보고싶은 간절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한진섭의 눈앞에는 안해 인화를 데리고 아버지, 어머니, 삼촌과 헤여지던 리별의 그날이 어제일처럼 떠오르며 가슴이 저려왔다.

그때 안해는 푼푼이 모아두었던 비상금 1 000원을 눈물이 그렁해 서있는 어머니에게 꼭 쥐여주면서 간절히 당부했었다.

《어머니, 아버님이랑 이 돈으로 잡숫고싶은걸 다 잡수시고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안해의 얼굴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였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꼭 그러안아주시면서 《아가야, 내 걱정말고 너희나 부디 잘살아라.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은 꼭 왔다가거라.》 하고 부탁하고는 아들인 한진섭에게 《이젠 내가 마음이 놓인다. 이런 색시를 맞았으니 정말 마음이 놓인다. 부디 잘들 살아야 한다.》 하고 뜨겁게 당부했었다.

그때 한진섭은 《예, 알았어요.》 하고 울먹이며 대답하고는 안해의 손을 잡고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에게 다시한번 깊이 머리숙여 작별인사를 드리였다.

그 다음 나루가로 나가 목선을 타고 인천으로 가서 형님에게 인사를 하고 북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리별로 될줄이야 꿈엔들 생각하였던가. 만나기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고 속을 썩이며 수십년, 이제는 어느덧 나이가 80고개에 올라서고있으니 헤여진 혈육들을 만날수 없다는 허전함에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한진섭의 눈에서는 다시금 리별의 아픔과 그리움이 자아내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이것이 어찌 나 하나만의 불행이랴 하는 깨달음에 한진섭은 병석에 누워서도 민족의 고통과 불행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천만에 가깝다는 흩어진 가족을 낳은 이 민족분렬의 비극을 어찌 울분과 통탄만으로야 풀수 있겠는가.

사생결단으로 일어나 온 민족이 힘을 합쳐 통일의 문을 열기 위해 피와 살을 아낌없이 바쳐야 할것이다.

한진섭은 생의 출발지점은 남쪽에 있어도 인간으로서 누려온 진정한 삶은 북에 있는 자기의 한생을 돌이켜보며 남이 아니라 북에다 자기의 보금자리를 정한 자신의 운명, 인민의 보호자를 따라 한생을 선택한 자기의 운명에 감사를 보내였다.

(행복했지, 정말… 난 원이 없어. 너무도 영광스러운 삶이였거든. 아, 남쪽의 부모형제가 이 모든것을 다 알수 있다면, 그들의 소식을 알수만 있다면…)

한진섭은 누려온 행복과 풀지 못한 소원이 하나로 엉켜 자아내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자기 한생의 스승이신 어버이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인민의 사랑을 받던 인민배우 한진섭은 이렇게 한생을 마치였다.

그는 갔으나 위인의 사랑은 계속되였다.

한진섭이 숨을 거둔 날 저녁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국립연극단 한진섭동무가 80돐생일을 두달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는데 참 아쉽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그가 남쪽에서 소년로동을 하다가 류랑하여 연극활동을 한데 대하여 이야기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뜨거운 사랑을 담아 다음과 같은 은정깊은 말씀을 주시였다.

《그는 해방후부터 지금까지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참다운 연극예술창조사업에 전념하면서 자기의 재능으로 변함없이 당을 받든 우리의 연극혁명에 한몫한 연극혁명창시자의 한사람이였고 혁명연극활동에 적극 기여한 연극예술의 원로였습니다.

한진섭동무는 내가 영화혁명을 할 때에도 큰 몫을 담당수행했고 자기의 예술적재능으로 변함없이 당을 따라온 관록있는 인민배우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처럼 그의 한생에 대하여 과분한 평가를 주시면서 그의 장의를 잘하도록 하시고 어버이수령님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였으며 그의 령구를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였다.

또한 그에 대한 부고를 여러 신문과 방송들에 내고 남조선에도 널리 알려진 연극배우인것만큼 대외출판물에도 내여 그가 당의 품속에서 수령님을 따라 변함없이 연극혁명의 길에서 자기 재능을 마음껏 꽃피운 관록있는 연극배우였다는것을 크게 소개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그가 무대배우생활을 50여년간이나 오래하였기때문에 심장이 나쁠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연극배우들이 무대에서 자감상태의 지속연기를 하기때문에 심장질환이 많다고 심려하시면서 연극배우들을 위해 정상적으로 검진도 하게 하고 한증탕을 꾸려주어 심장병에 좋은 한증치료도 하게 하자고 이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진섭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훨씬 넘은 2009년 6월 20일 어느 한 연극작품을 보아주시고서도 한진섭동무가 연기를 잘했다고 다시금 뜨겁게 추억해주시였다.

그리고 2010년 4월 26일 경희극 《산울림》을 보시고서는 매우 만족해하시면서 한진섭, 리단동무들이 보았더라면 몹시 기뻐했을거라고 그에 대하여 또다시 감명깊게 추억하여주시였다.

이처럼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보람차고 행복하게 생을 마친 인민배우 한진섭의 삶의 로정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운명은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를 따를 때만이 가장 보람차고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 후세에 빛날수 있게 된다는 귀중한 진리를 가르쳐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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