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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치

 

배우의 가치는 연기술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하였다. 과연 그런것일가?

만약 그렇다면 한진섭이 연기를 잘하지 못하여 해방전에 그리도 불우한 인생행로를 겪으며 살아왔단 말인가?

한진섭의 쓰라린 체험은 배우의 가치가 결코 연기술의 높낮이에만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생활적으로 증명하여주고있다.

한진섭이 단장으로 있었던 극단 동방의 연극인들은 서둘러 조국인민들앞에서 자기들의 연극을 펼치였는데 당시 혁명적인 연극작품을 가지고있지 못했던 이들은 해방전 만주에서 떠돌며 공연하던 인정세태적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같은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수밖에 없었다.

한진섭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홍도의 오빠역을 담당하였는데 해방된 조국의 앙양된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여서 그는 공연을 진행하면서도 내심 자신에 대한 불만감으로 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여 그는 《압록강》과 《어머니》를 창조하여 신의주시에서 공연활동을 벌리였으며 연극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서자 대담하게 어버이수령님을 형상한 연극 《조선빨찌산》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리였다.

이것은 한진섭의 창조활동에서 사상정신적으로 커다란 전진이 아닐수 없었다.

연극인으로서 그의 사상적립장과 창작태도, 창조활동에서 그가 노는 역할은 극예술부문에서 결코 무시할수 없는것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런 연고로 하여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1945년 10월에 하신 교시에 따라 다음해인 1946년 5월에 조직된 예술단체의 하나인 중앙예술공작단(오늘의 국립연극단의 전신)으로 조동되게 되였다.

한진섭은 바로 이때부터 참다운 예술,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연극예술창조의 길에 들어설수 있게 되였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날에날마다 변화발전의 길을 걷게 되는 자기 운명의 걸음걸음을 두고 조국을 해방시켜주시고 우리 인민모두에게 자유와 행복, 삶의 희망을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께 마음속으로 거듭거듭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였다.

그리고 매 인간의 운명은 민족의 운명과 련결되여있으며 민족이 제 나라도 없이 다른 나라에 예속되여있으면 차라리 죽은 목숨보다도 못하다는것을 해방전과 해방후의 대비적인 생활체험을 통하여 뼈저리게 절감하고있었다.

한진섭이 중앙예술공작단으로 조동될 당시 이 집단에서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과 항일혁명투사들의 충직한 모습을 형상한 장막극 《뢰성》을 창조하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 1돐을 앞두고 진행되고있는 이 연극을 북조선로동당창립대회 경축공연작품으로 선정하고 지도해주시였으며 대표들과 함께 친히 공연을 보시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나라의 천만가지 중하를 한몸에 지니시고 일분일초의 시간을 얻어내기조차 힘드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연극을 몸소 지도하여주시는것을 직접 목격한 한진섭은 정처없이 떠돌던 연극인들의 불우한 인생이 이제야 운명의 보호자, 연극예술의 위대한 스승을 모시였구나 하는 행복감으로 눈굽을 적시였다.

그는 자기가 그리도 하고싶었던 일을 인제야 마음놓고 할수 있고 걷고싶었던 길을 인제야 비로소 마음껏 걸을수 있게 되였다는 희열로 하여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는 연극인들과 모든 예술창조자들의 진정한 삶의 품은 어버이수령님의 품이라는 진리를 실지생활을 통하여 터득한것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48년 3월 5일 장막극 《백두산》(장편서사시 《백두산》 각색)의 작가와 연출가를 비롯한 창조성원들을 당중앙위원회청사로 불러주시고 작품의 내용을 료해하신 다음 사람들의 실생활을 파고들어 진실하고 깊이있게 그릴데 대한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나흘후 첫 시연회를 보아주시고는 성과와 부족점을 하나하나 지적해주시였다.

특히 인물들의 성격창조에서 정치성과 인간성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킬데 대한 원칙적인 문제와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전형화하는것이 예술창조에서 근본으로 된다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이것은 연극예술인인 한진섭의 관점과 립장을 새롭게 정립시켜준 하나의 전환적인 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8년 3월 27일 북조선로동당 제2차대회 대표들과 함께 연극 《백두산》을 보아주시고 아주 잘된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하여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작품은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의의를 예술적으로 잘 형상하였다고, 특히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주는 장면을 잘 형상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와 같은 높은 평가와 고무는 한진섭으로 하여금 연극예술의 눈부신 발전에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하고있다는 긍지와 함께 이 성스러운 길에서 자기의 삶을 보람있게 꽃피워갈 신심과 락관을 가지게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 한진섭이 출연한 작품들인 《봉화》, 《춘향전》, 《산사람들》을 보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또다시 주시였고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신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1951년 9월 1일 연극 《탄광사람들》을 친히 보아주시고 작품이 이룩한 성과와 결함을 지적해주시면서 전형적인것을 보여줄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한진섭은 어버이수령님의 이 교시를 창조실천에 구현하여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사실주의적인 연기의 묘술을 하나하나 터득하게 되였다.

이렇듯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직접적인 가르치심속에서 인민이 좋아하고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우리 시대의 참된 배우로 성장할수 있었다.

한진섭의 배우생활과 연기형상에서 최절정을 이룬것은 1968년에 창작공연된 혁명연극 《승리의 기치따라》창조때였다.

이 연극창조에서 한진섭은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수령님의 역을 맡아 수행함으로써 배우로서 누릴수 있는 최고의 절정에 올라서게 되였다.

연극 《승리의 기치따라》가 공연의 막을 열게 되자 극장은 매일과 같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의 거룩하신 영상을 뵈옵고싶어 누구라 없이 매일처럼 극장을 찾아왔고 지방에 있는 수많은 근로자들과 인민군군인들, 청년학생들도 먼길을 달려와 극장으로 밀려들군 하였다.

연극 《승리의 기치따라》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역을 맡아 훌륭히 수행해낸것으로 하여 한진섭은 유명해졌으며 가슴벅차게도 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직접 만나뵙고 가르치심을 받는 최상최대의 영광과 특전을 누릴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69년 5월 30일 이 연극을 보시고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시면서 연극이 385고지전투를 위주로 한 생활을 반영하면서도 아주 폭이 넓게 잘되였다고 높이 평가하여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어버이수령님의 형상이 보다 더 완벽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 잘못된 세부들을 바로잡아주시였고 385고지전투에서 녹아나 비명을 지르는 미제침략자들의 몰골을 사실그대로 진실하게 보여줄데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한진섭은 위대한 예술의 영재를 모시고 공연을 하는 영광과 더불어 천금보다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무한한 감격과 기쁨의 눈물로 옷깃을 적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한진섭의 연기형상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에게 최대의 믿음을 주신것은 연극 《승리의 기치따라》를 지도하여주시기 전인 1968년 1월 3일이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를 보시고 5형제의 아버지역을 맡은 한진섭이 연기를 잘한다고, 형상이 구수하고 진실하다고 하시면서 그의 연기는 완전무결하다고 말할수 있다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지방순회공연중인 한진섭을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창조사업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비행기까지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처럼 한진섭은 연극무대는 물론 영화화면을 통해서도 위대한 장군님의 극진한 믿음과 보살피심을 받는 행복한 배우가 되였던것이다.

바로 그 사랑이 있었음으로 하여 그는 영광스럽게도 연극혁명의 첫 포성을 울린 혁명연극 《성황당》창조에 참가하여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쳐 맡은 역형상을 훌륭히 수행할수 있었던것이다.

한진섭은 그때의 그 영광에 대하여 1978년 11월 국립연극단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격정에 넘쳐 토론하였다.

《…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한량없는 사랑과 배려에 의하여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각색한 혁명연극 〈성황당〉의 지주역을 맡게 된 저의 감격과 흥분은 진정할수 없는 창조적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동지들!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각색한 혁명연극 〈성황당〉을 무대에 올리는 사업과정은 무엇보다도 우리 집단에 남아있던 서방연극리론과 부르죠아연극리론, 사대주의, 교조주의의 온갖 잔재를 깡그리 털어내고 창작실천을 통하여 당의 주체적문예사상과 리론을 깊이 체득하며 그를 실천해나가는 과정으로 되였습니다.》

그의 이 토론은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이 뿜어내는 진정의 토로였다.

혁명연극창조에서 주역을 맡았다는 긍지와 자부심, 창조적열정이 크다고 하여 그것이 곧 형상적인 성과로 되는것은 아니였다. 모르고 내는 열정이 똑바른 결실을 가져올수 없는것은 당연한 리치였다.

그는 풍자극은 풍자적웃음으로 일관되여야 한다는 낡은 연극관념에 사로잡혀 덮어놓고 웃기는 연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형상이 심화되여감에 따라 그의 연기가 너무 과장되고 신파냄새가 풍긴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78년 6월 14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연극의 첫 시연회를 보아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인물들의 성격은 생활의 론리에 맞게 형상하여야 합니다. 생활의 론리를 떠나서는 웃음도 슬픔도 사색도 진실하게 보여줄수 없습니다.》

이날 오랜 시간에 걸쳐 새로운 혁명연극창조에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주역을 맡아 수행한 한진섭이 무대생활을 오래동안 하였기때문에 무대심장이 크겠는데 무대에 등장하는 첫 순간에는 연기가 좀 뜬것 같다고 하시면서 그의 잘못된 연기를 바로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연극을 지도하시면서 풍자극의 세계적이며 고전적인 틀을 완전히 마사버리고 우리 식의 풍자극을 창조할데 대하여 밝히시면서 사실주의적인 풍자극의 본질과 독창적인 극작술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풍자극이라고 하여 웃음으로 관통되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풍자극도 생활의 론리를 따라야 한다고 하시면서 생활의 론리를 따르는것은 작품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담보라고 가르치시였다.

풍자극도 생활의 론리에 따라 웃음도 있고 사색도 있게 끌고나가야 한다는것이 그이의 천재적인 발견이였다.

한진섭을 비롯한 연극인들은 풍자극양상에 대한 독특한 해명으로 새로운 연극의 극작술원칙을 독창적으로 밝혀주시는 그이의 빛나는 예지앞에서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세계연극사를 더듬어보면 고대그리스의 도리아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희극은 2 400년동안 양상에 생활을 억지로 틀어맞추면서 웃음을 조작하는것을 목적으로 삼고 흘러왔다.

그 실례로 문예부흥기의 유명한 대표적희극들인 쉑스피어의 《말괄랭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몰리에르의 《동쥬앙》, 《수전노》, 《따르뜌프(위선자)》 등을 들수 있다.

희극은 자기 발전의 전기간 풍자적인 부정인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야유, 조소, 악의없는 비웃음으로 관통되여야 한다는것이 하나의 법칙과도 같은 관례로 굳어져있었다.

그런데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풍자극의 기존틀을 완전히 마스고 《성황당》식혁명연극창조의 새로운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완벽하게 밝혀주시였으니 한진섭을 비롯한 오랜 배우들과 창조성원들의 기쁨과 감격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었으랴.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으면서 혁명연극창조에 열정을 기울이고있던 한진섭은 자기가 전혀 다른 배우, 지난날의 연극인과는 대비도 안되는 가장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예술인으로 다시 태여났다는 희열로 하여 힘든줄도 피곤한줄도 몰랐다.

한진섭은 비로소 해방전부터 그리도 바라고바라던, 하고싶던 일로서의 연극배우, 가고싶던 길로서의 연극창조의 길이 바로 백두산위인들의 품에 안겨서야 완전무결하게, 새롭고 긍지높이 성취되였음을 똑똑히 깨달았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모든 예술인들을 가장 참답게 살도록 보살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문학예술의 영명한 스승이시고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이것이 50여년동안 더듬어온 무대생활에서 한진섭이 찾은 인생의 철리, 삶의 진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78년 8월 31일 혁명연극 《성황당》공연을 보아주시고 한진섭을 비롯한 창조성원들과 기념사진도 찍어주시였다.

1982년 4월 혁명영화 《조선의 별》 제6부의 우사령역을 담당한 그에게 관록있는 배우라는 치하의 말씀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84년 3월에는 혁명연극 《혈분만국회》공연을 보아주시고 한진섭과 창조성원들을 불러 또다시 기념사진을 찍어주시였다.

그리고 1987년 3월 20일에는 그가 연출을 맡아하는 혁명연극 《3인1당》의 창조정형에 대하여 료해하시고 작품을 훌륭히 형상완성해내도록 고무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와 보살피심속에서 수많은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역형상을 훌륭하게 창조해냄으로써 우리 나라 연극계의 관록있는 배우로, 온 나라가 다 알고 사랑하는 인민배우로 자라난 한진섭은 우리 로동당시대가 인민의 무대우에 세워놓은 또 하나의 믿음직한 거목이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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