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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회

제2장. 파 혼

4

기차는 레루우를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올망졸망한 다섯딸과 처를 데리고 메산자보따리를 둘러멘채 렬차에 오른 주학섭은 승강대우에 서서 손을 들어올리였다.

《잘 있으라구.》

목메인 그의 목소리가 아프도록 알뜰의 귀를 찔렀다.

《몸성해요, 아저씨―》

알뜰은 갑자기 눈앞이 콱 흐려와 작별의 인사말을 저혼자 입속에서 웅얼거렸다. 렬차가 점점 멀어져가자 알뜰은 주학섭과 헤여지는 서글픔에 또 하나의 괴로움이 짙은 안개처럼 밀려와 덮치는것이였다.

(파혼을 하다니? 우리 억봉이가 파혼을 하다니?)

알뜰은 텅 비여가는 역구내에 우두커니 서서 입속으로 자꾸만 같은 말을 곱씹었다. 알뜰은 주학섭을 바래주려 임을 이고 역에 나와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롱하기 좋아하는 주학섭이 자기한테 어쩌나 보려고 해보는 소린줄 알고 알뜰은 처음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학섭은 작별의 마지막순간조차 눈물이 글썽해 억봉의 일을 근심해주었다. 롱에는 한도가 있다. 주학섭은 우스운 소리도 곧잘 하고 남을 골려주기 잘해도 절대 분수없거나 실없는 사람이 아니였다. 입담이 세고 말로는 노래기 회쳐먹게 비위를 부려도 마음이 어지여 모르는 집에 가서 물 한그릇 못 달라는 사람이다.

알뜰은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흰 연기를 날리며 렬차가 산모퉁이로 사라진 후에도 알뜰은 그쪽만 바라보고 서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도시변두리 진펄쪽에서 불어왔다. 한소나기 내리려나부다. 밤이면 선기가 나도 아직 한낮 볕은 따갑다.

바람에 흰옷고름을 날리며 뿌리박힌듯 서있던 알뜰은 억봉을 만나 모든 사실을 속시원히 묻고싶은 생각에 집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구내를 나와 거리에 들어서니 한무리의 청년들이 렬을 지어 걸어갔다. 각이한 옷차림에 총대 하나씩을 둘러메고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다. 갓 조직된 자위대대렬이 지나가자 길거리에 크게 내다붙인 광고판옆에서 키 큰 한사람이 모자를 벗어들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웨치는 소리가 들리였다.

《여러분, 오늘 저녁 우리 무궁화영화관에서는 7시부터 도에서 내려오신 선우치담선생의 시국강연이 있습니다. 우리 겸이포가 낳은 웅변가 선우치담선생은 제노라던 일본의 한다하는 변호사들을 수세에 몰아넣던 그 능란한 언변으로 여러분들이 애타게 찾고있는 우리 삼천만 백의동포가 가야 할 길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알려드릴것입니다. 우리 조선이 갈길을 모색하는 애국자들과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열혈청년들은 시국강연을 들으러 우리의 무궁화영화관으로 오시오. 시국강연이 끝난 후에는 멋진 사랑의 영화가 상영됩니다.》

발걸음을 멈춘채 알뜰은 청산류수로 엮어대는 광고군의 말을 한참이나 들었다. 광고군의 말재간에 귀가 홀려 한동안 발목을 붙들렸던 알뜰은 다시 제 갈길을 걸었다.

억봉은 집마당에서 장작을 패고있었다. 어디 가서 끌어왔는지 마당에는 낡은 침목이 석대나 딩굴었다. 집에는 억봉이 혼자 있었다.

《그 장작 어디서 났니?》

알뜰은 토방에 맥없이 주저앉으며 억봉에게 물었다. 억봉은 대답않고 씩씩 장작만 팼다. 요즘 알뜰은 병막골 뒤산에 자주 갔었다. 벌거벗은 주변산이건만 삭정이 하나라도 더 긁어들이려고 뜨문하게 이악을 떨어야 했었다. 이것을 보다못해 억봉은 오늘 동생까지 휘여잡아가지고 운수부에 가서 낡은 침목을 얻어온것이다. 알뜰은 억봉이 장작을 패다말고 잠시 숨을 태우는 틈에 다시 물었다.

《삼촌네 집엔 갔댔니?》

《못 갔어.》

억봉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손에서 도끼를 놓았다. 억봉은 오늘따라 누이가 치근치근 말붙이는 낌새를 눈치채고 패놓은 장작더미우에 덜썩 엉뎅이를 놓았다. 지금까지 토방에 앉아 억봉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알뜰은 마침한 기회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주변에는 자기들외에 아무도 없었다.

《억봉아, 나 하나 좀 물어보자.》

알뜰은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억봉은 담배를 태우려고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다 말고 누이를 바라봤다.

《너 파혼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게 정말이냐?》

알뜰은 그 누가 엿들을가봐 주저하듯 나직이 묻고나서 숨마저 죽인채 동생을 바라봤다.

《응.》

억봉은 픽 웃으며 단마디명창이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알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였다. 그런 일을 집안사람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 아이들 놀음처럼 이게 뭐란 말인가.

억봉은 약혼때도 그랬었다. 그때는 사정이 딱해 그랬으려니 하고 참았었고 약혼녀가 우학의 동생 계향이라는것을 알고는 색시감을 그만하면 괜찮게 골랐다고 은근히 좋아도 했었다.

《집안에 부모님들은 안계신다만 삼촌두 계시구 삼촌어머니도 계시지 않느냐? 웃어른들한테 아무 의논하지 않고 너 그게 뭐냐? 이 사실을 아신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두…》

알뜰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옷고름을 눈에 가져갔다. 알뜰의 노여움은 억봉이가 자기 일생의 중대사를 제멋대로 혼자 처리했다는데만 있지 않았다.

알뜰은 이 순간 계향을 생각했다. 알뜰은 누이로서 억봉의 편에만 설수 없었다. 그는 녀자였다. 녀자로서 녀성의 권리와 인격을 지켜야 했다. 자신이 걸어온 피눈물나는 생활을 통해 이것은 알뜰에게 거의 본능화된 감정이고 지향이였다. 알뜰은 녀자들과 흐지부지하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

알뜰에게 계향을 옹호하는 감정이 생긴것은 언젠가 제철소정문에 가서 억봉을 자기 오빠로 잘못 알고 뛰여가던 그를 보던 그때부터였다. 오빠를 위해 성의껏 지어온 밥이 수위놈의 구두발에 짓밟히우고 계향이 우는것을 보았을 때 알뜰은 이곳 실정을 알지 못하는 그한테 미리 귀띔해주지 못한 자신을 탓하였고 말할수 없는 동정심을 느끼였었다. 억봉의 저녁밥을 가지고 공장으로 가던 그날 알뜰은 거리에서 그를 만났었고 제철소정문이 어데냐고 물어보는 그를 정문으로 데리고 갔었다. 팥밥을 해왔으면 그우에 조밥이나 수수밥을 덧씌워 수위놈을 속여야 한다고 한마디 미리 귀띔만 해주었어도 그날 계향은 그처럼 가슴아픈 일을 당하지 않았을것이였다. 알뜰은 그날 슬피 우는 계향을 위로하며 서로 통성을 하였었고 여기 철의 지구 녀인들이 알아야 할바를 자기 아는껏 가르쳐주기도 하였었다. 그리고 처녀공출바람에 그가 억봉의 벼락약혼녀로 되였다는것을 알았을 때 알뜰은 억봉의 팔에 매달렸다가 얼굴이 빨개져 도망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타고난 연분은 연분이라고 저혼자 빙그레 웃기까지 했었다.

억실억실한 생김처럼 성미 역시 씨원씨원한 그, 오누이 성격이 서로 바뀌였으면 제격이라고 할 정도로 활량인 그는 새침데기보다 억봉이한테 어울릴지도 몰랐다. 집안의 기둥격인 동생의 색시감이여서 녀자로서는 지내 괄괄한 성격상의 약점마저 좋게만 생각해오던 계향이, 지금까지 애정을 가지고 대해오던 이 처녀때문에 억봉이가 《징용반대 불온분자》로 딱지가 붙어 징용에 걸리게 되였을 때 알뜰은 눈앞이 아뜩했다. 집안의 기둥이 찍히였다는 분한 생각이 앞서면서 알뜰은 무작정 계향이가 미워났다. 하지만 억봉이가 고향을 떠나던 날 역에 따라나와 괴롭게 눈물짓는 계향을 보았을 때 알뜰은 그 뜨거운 눈물에 증오와 반감이 말끔히 씻겨내리고말았다. 닥쳐온 불행은 두 녀인을 오히려 가깝게 만들었다. 한숨과 눈물속에 두사람은 서로 의지했고 리해를 깊이했다. 두사람은 불행의 검은구름이 어서 가셔지기만 바랐다. 해방과 함께 바라던 모든것이 뜻대로 돼가는가싶은 지금 파혼이라니 너무도 당치 않았다.

알뜰은 북받쳐오르는 노여움과 자기 설음에 눈에서 옷고름을 떼지 못했다. 억봉은 누이가 쿨쩍거리자 마음이 약해지고말았다.

《원 참, 누이두… 파혼, 파혼하는데 내가 언제 뭐 약혼을 했댔어?》

알뜰은 눈굽에서 옷고름을 내리우고 반쯤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벼락약혼바람에 소문은 얼마나 냈구 값은 얼마나 물었냐? 1년이나 죽을 고생 다하고선 벌써 그걸 잊었단 말이냐?》

《누이두… 그거야 장난으루 연극놀았던거지… 뺏아가다못해 나중엔 체니까지 군대노리개로 끌어가는 일본놈이 미워서 잠간 연극논건데 그게 어디 약혼이야?》

《장난할게 따로 있지 누가 그런 일생의 중대사를 가지고 장난한다더냐?》

《그럼 어떻게 해? 공출에 끌려가 죽는가 사는가 하는 판에…》

《그러게 너때문에 계향이가 얼마나 속태우고 눈물흘린지 아니?》

누이의 말은 뜻밖이였다. 억봉은 이 세상에서 누이 아닌 다른 녀자가, 그것도 젊은 처녀가 자기때문에 속상해하며 눈물흘린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었다.

《네가 떠나던 날 계향은 널 바래주겠다구 역에까지 따라나왔댔단다. 버선을 지어갖구… 엿이랑 떡이랑 꿍져가지구 나와 울기는 얼마나 섧게 운줄 아니?》

억봉은 누이의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억봉은 징용에 끌려 자기가 고향을 떠나던 때 일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자기를 바래주러 나왔던 여러 사람들중에서 억봉은 계향을 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하긴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어수선하여 남에 대해서는 생각할래야 할수 없었던 때여서 못 보았을수도 있었다.

억봉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알뜰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리구 네가 징용에서 무사히 도망쳐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기뻐한줄 아니? 그 소식을 전해주니까 그 앤 글쎄 네거리에서 나를 붙들고 빙빙 돌면서 동동 뛰더라…》

억봉은 누이를 통하여 계향이가 자기때문에 눈물도 흘리고 기뻐도 했다는걸 알게 되자 마음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억봉은 계향을 사귀거나 리해할만 한 기회가 없었다. 서로 편지 한장 주고받은적도, 잠시나마 함께 거닌적도 없었다. 이름이나 알고 풋낯이나 아는, 동무의 녀동생으로 여겨왔을뿐이다. 벼락약혼은 동무를 위해주려는 하나의 악의없는 장난이였었다. 억봉은 면사무소 호적서기를 찾아가 거짓 혼인신고를 하던 그때만 해도 계향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했을뿐이지 그를 자기의 안해로 맞겠다는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었다. 하건만 계향은 자기를 진짜 약혼자만큼 여긴 모양이다.

억봉은 자기가 애꿎게도 남의 처녀속을 태우고 어린 그 가슴에서 한숨과 눈물을 짜냈다고 생각하니 기가 찼다. 억봉은 며칠전 해탄로 굴뚝옆에서 우연히 계향을 만났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그때 다소곳이 머리숙여 인사를 하며 자기를 바라보던 그의 두눈에는 반가움과 함께 이름하기 어려운 애틋한 정이 넘쳤었다. 그때 억봉은 그 어떤 알수 없는 절절한 소망과 열정으로 반짝이던 그 눈때문에 서둘러 우학을 찾으며 그옆을 떠나고말았었다.

누이의 공격에 할말이 없어진 억봉은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괜히 그러느라 그런거지 계향이가 날 좋아할게 뭐야? 언제 봤다구…》

억봉의 말에 알뜰은 속으로 흥하고 코방귀를 뀌고말았다. 계향이가 억봉이를 마다할수 있단 말인가? 억봉이가 계향이보다 기운다면 공부를 못한 그것 하나다. 계향은 소학교를 졸업했어도 억봉은 소학교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하였다. 돈이 없어 학교에는 못 다녔지만 억봉은 남만큼 읽고 썼으며 총기도 있었다. 알뜰은 억봉이가 자기 동생이래서 그런다기보다 실지로 어디 내놓아도 남한테 별로 기울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억봉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자랑해왔었다. 성미가 우락부락하나 그대신 뒤는 없었으며 미욱하지도 않았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하고 무엇이건 마음먹으면 결패있게 해내고야마는 성미도 남자쌌다. 알뜰은 자기 동생이 절대 계향이보다 못하거나 그한테 기운다고는 생각해본적 없었다.

《그럼 넌 짝이 기울어 파혼하자구 손들고 나앉았니?》

억봉은 점점 더 난처해지고말았다.

《누이, 계향이가 그렇게 정 마음에 드나?》

《난 계향일 꼭 우리 집사람으로 삼겠다고 마음둬서 그러는건 아니다. 네가 녀자들을 알길 우습게 알구 흐지부지하는게 안돼서 그러지…》

알뜰의 말마디는 맵고 짰다. 억봉은 누이마음 어느 구석에 이런 올곧고 살찬데가 있었는가싶었다.

억봉은 별치 않게 생각해온 벼락약혼과 그 파혼이 우학이와 자기사이는 물론 누이하고까지 관계를 미묘하게 만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내 원 정말…》

억봉은 엉뎅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힘주어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굵다란 장작이 쩍쩍 짜개져 여기저기 흩어지고 손바닥같은 도끼밥이 돌멩이처럼 날아가 문짝을 때리고 지붕우에까지 날아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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