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은 영원하다
아무리 《작고도 큰 문학》이라고 하여도 동요는 역시 모래알과 같다. 어떻게 두터운 장중편소설이나 서사시와 비길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일부 사람들과 성인작가들속에서는 은근히 동요문학을 차요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 영향을 받아 몇몇 젊은 아동시인들은 한평생 동요나 써서는 크게 성공할수 없다고 생각하며 긍지감을 가지지 못하고 성인시문학을 넘보거나 지어는 방향전환까지 하였다.
그때마다 윤복진은 《요란한 명성을 꿈꾸는 아동시인은 좋은 동요를 쓸수 없습니다. 자기를 소학교, 중학교 교원이라고 생각하고 동요를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군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동요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있긴 하였지만 동요문학에 대한 그릇된 경향을 론박하는 주장이 강하게 울려나오지 못했기때문에 젊은 작가들의 심장을 크게 공감시키지 못했다.
그러했던 그가 어떻게 되여 문학의 높은 단상에 자기의 동요를 안고 당당히 오를수 있었던가. 누가 그의 창작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세상만복을 다 안겨주었으며 누가 그를 영생의 언덕에 높이 내세워 영원한 삶을 누릴수 있게 하여주었던가.
그런데도
어느덧 그의 나이가 일흔고개에 들어서게 되자 가정에서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가 모여앉아 70돐생일상을 차릴 의논을 하고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윤복진은 공연한 걱정들을 한다고 하면서 식구들에게 70돐생일에 대한 말을 밖에 나가서는 일체 하지 말도록 하며 집안식구끼리 조용히 쇠는것으로 토의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집에서는 큰 경사가 났다. 아래웃방이 축하하러 온 손님들로 붐비였다.
로작가들은 어서 새옷을 입고 사랑의 생일상이 차려져있는 아래방으로 내려가자고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윤복진은
… 이 사랑을 언제나 가슴깊이 새기고 동요창작의 붓을 더 힘껏 틀어쥐겠습니다.》
이어 며느리가 술을 붓고 아들이 그 잔을 아버지에게 드리였다.
이제는 다 자라서 어엿한 일군이 된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다가 윤복진은 《오냐, 고맙다. …》 하며 다시 눈굽을 적시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 순간 그는 남녘땅에 두고 온 안해 로연양과 두 딸자식을 생각하였던것이다.
어떻게 잊을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도
며칠후 그는
책상앞에만 앉아있을수 없어 그는 대동강가로 나갔다. 련광정을 안고 도는 유보도를 거니는 그의 귀에는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의 잔물결소리도, 꽃잎사이로 날아도는 꿀벌들의 나지막한 붕붕소리도 크게 들렸다.
한편 그 시각에 창작실에서는 한 녀류아동시인이 책상에 마주앉아 동시 《사랑의 보청기》를 쓰고있었다.
《쉬쉬, 이젠 이젠 우리 할아버지 들으신다》라는 인상적인 구절로 엮어진 동시에서는 사랑의 보청기를 보내주신
녀류아동시인은 《동요할아버지》가 들어오자 자기의 동시를 소리높이 읊었다.
그러자 윤복진은 《아이구, 귀청이 떨어지겠다. 왜 그렇게 큰소리로 읊노.》 하고 웃으면서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 좋은 동시를 써주어 고맙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러시고 건강이 좋지 못한 그가 즉시 치료를 받을수 있는 대책까지 다 세워주시였다.
그날 밤 윤복진의 집 창가에서는 밤새도록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윤복진은 원고지를 정히 펴놓고 한자두자
정성을 담아 수기
그가 쓴 수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의 참된 삶의 첫걸음은
…
일제식민지학정에서 피멍이 들고 남반부에서 미제의 악독한 구두발에 응혈졌던 나의 가슴에 흘러든 사랑의 해빛, 그것은 진정한 재생의 봄빛이였다. …》
그 이튿날 이른아침에 윤복진은 꽃다발을 안고 가족들과 함께 만수대언덕에 올라
그는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로부터 창작의 걸음을 내디딘 후 우리 나라 동요문학창작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성장한 《동요할아버지》 윤복진은 1990년대초에 들어서면서 자주 병석에 누워 운신하기 어려워하였다. 80고령에 이르자 로환이 그의 정신적인 지향을 무시로 방해하여나섰다.
자기가 운명의 마지막시각을 보내고있음을 깨달은 그는 있는 기력을 다 모아 펜을 가누어쥐고 또박또박
이렇게 쓰고 마지막점까지 찍고난 그는 펜을 떨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그와 영결하러 찾아온 조객들은 눈처럼 하얀 화환들속에 웃으며 누워있는듯 한 《동요할아버지》를 눈물속에
바라보며
(
이것이 조객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