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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회

제1장. 아물지 못한 상처

7

기쁜 일을 당해서조차 근심이 앞서는 알뜰이였다. 알뜰은 억봉을 만나는 순간 동생의 몸이 성하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오만가지 시름이 순간에 풀리면서 상봉의 기쁨을 달래일 사이도 없이 어서빨리 라웅범네 집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억봉이 돌아온 오늘같이 기쁜날을 그냥 보낼수는 없었다. 이제 저녁이면 친척들과 동리사람들이 모여들것이고 또 동무 많은 억봉이 집으로 오면서 혼자 오지 않으리라는것도 뻔한 일이였다.

어제 웅범은 억봉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알뜰이더러 자기네 집에 왔다가라고 하였었다. 그 집에 가야 쌀되라도 들어올수 있고 술도 몇병 가져올수 있다. 알뜰은 심보사나운 송설자를 생각하면 그 집에 발길 들여놓고싶은 마음이 꼬물만큼도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자기를 각별히 위해주던 웅범을 생각해 그럴수 없었고 또 당장 사람들이 밀려들 형편에서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동생을 기쁘게 하여줄 생각때문에 때없이 설레이던 알뜰의 가슴에 찬물이 끼얹어진것은 차지훈의 출현이였다. 알뜰은 제철소정문에서 유리창문너머로 지훈을 알아보는 첫순간 이상하게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고 억봉이네가 운영동지회로 우르르 밀려가는것을 보았을 때 웬일인지 후두두 가슴이 뛰였었다. 어린시절부터 억봉이와 지훈은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였고 그것때문에 두사람 짬새에서 적지 않게 마음고생을 하여온 알뜰이였다. 알뜰은 까닭을 알수 없는 불안에 서성거리며 오래도록 제철소정문을 떠나지 못하다가 무거운 걸음으로 라웅범네 집으로 향했다.

마음꺼려 순조로이 되는 일은 없었다. 웅범네 집으로 가는 길에서 피해오던 지훈을 만나게 될줄이야.

알뜰은 자기 생각에 골똘했던탓으로 차지훈이 지척에 다가오도록 알지 못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머리를 들었을 때 지훈은 땅만 내려다보며 앞으로 걸어오고있었다. 외통길이고 너무도 가까운 거리여서 피할수가 없었다. 알뜰은 길 한옆으로 비켜선채 그와 어기기를 기다렸다.

그가 머리를 드는 순간 알뜰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보였으나 인사에 대한 대답으로 멸시에 가까운 차거운 눈길을 온몸에 받았을뿐이였다.

알뜰은 차지훈이 서리기운을 풍기며 자기 옆을 스쳐지난 후에야 떳떳이 마주보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였다.

(내가 그 사람한테 무슨 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알뜰은 자기자신에 대한 반발과 함께 억봉이와 차지훈사이에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것때문에 지훈은 멸시하듯 자기를 바라보았을것이다.

알뜰은 한때 지훈을 사랑했었다. 사랑해도 열렬히, 온 심장을 다해 사랑했었다. 그 사랑은 지심깊이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자기자신도 어쩔수없이 북받쳐오르는 깨끗한 감정이였고 헌신적인 열정의 분출이였다.

알뜰은 귀중한 그 감정이 언제부터 자기 가슴속에 자리잡았으며 봄날의 새싹처럼 소리없이 자라올랐는지 알지 못하였다. 알뜰은 젖먹이막내동생을 연약한 소녀의 몸으로 받아안던 설음많던 그 시절에 슬피 우는 자기를 말없이 위로해주며 생활의 중하에 비틀거리는 자기를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여주는 신비롭고 억센 힘이 이 세상에 있다는것과 그 힘에 대한 믿음이 자기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박혀있다는것을 자기스스로 느끼고 깨달았을뿐이였다.

알뜰은 어머니가 로동재해를 당하던 그때부터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불구된 어머니를 대신하여 가정의 어린 주부가 되여야 했었다. 인정많던 어머니는 무정하게도 젖먹이동생마저 알뜰에게 맡겨버린채 한많은 세상을 떠나가고말았다.

이 시절에 알뜰이 생활의 무거운 짐을 이겨낼수 있은 힘의 하나는 차지훈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이였었다. 차지훈이 우유때문에 둘째동생 석봉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에 왔던 그 다음날 억봉은 토방우에 우유병이 새로 나타난것을 보고 석봉이가 차지훈이한테 우유도적이라고 끌려오던 분한 마음이 삭지 않아 그것을 발길로 차버리고말았었다.

그 다음날에도 우유병은 토방에 또 나타났다. 매맞고 울던 석봉을 생각하면 알뜰은 그 우유병에 손이 가지 않았으나 등에 업혀 배고파 우는 젖먹이막내동생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았다. 젖없는 막내동생에게 그 우유는 유일한 생명의 담보였다. 하루도 번지지 않다싶이 우유병은 거의 매일 나타났다.

어느날 알뜰은 아버지에게 우유병의 모든 내막과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수굿이 머리를 숙인채 올방자를 틀고앉아 뻑뻑 담배만 들이빨더니 다음날 꼬기꼬기 꾸겨진 돈을 알뜰에게 주었다.

《적지만 어쩌겠니. 이거라두 먼저 줘라. 후에 돈벌어 신세갚는다고 말해라.》

다음날 알뜰은 아버지가 준 돈을 갖고 지훈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지훈은 언제 왔다가는지 만나기 어려웠다. 알뜰은 벼르고 벼르다 며칠만에야 지훈을 만날수 있었다. 알뜰은 저고리고름에 싸고쌌던 돈을 내밀었으나 지훈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후에 더 드려요.》

알뜰은 적은 돈밖에 줄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안타까왔다.

《이건 내가 빚진걸 갚는거요.》

지훈은 빙그레 웃었다. 알뜰은 지훈이 자기를 놀리려드는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거짓말이 아니예요. 후에 꼭…》

알뜰은 지훈이 자기 말을 믿지 못해 그런다는 생각에 그를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아니요. 나도 거짓말이 아니요. 알뜰씨는 언젠가 무릎깨진 나에게 수건을 주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난 아직 그걸 돌려드리지 못하였소. 또 내가 더위 먹었을 때 귤을 사온 신세갚음도 하지 못하구…》

알뜰은 보통학교시절의 운동회가 떠오르고 정월대보름날 더위를 팔던 놀음도 생각났다. 알뜰은 뽈을 몰고 뛰여가는 지훈을 보고 가슴조이던 일이며 그가 상했을 때 놀라던 일 그리고 억봉이한테 더위를 사던 그해 지훈이가 더위먹던 일들이 눈앞에 삼삼 그려졌다. 그때로부터 6년이란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오늘과 그때가 너무도 인연없어지고보니 알뜰은 모든것이 아득한 옛날일처럼 생각되였다.

그날 지훈은 자전거에 치고다니는 우유구럭에서 먹음직스러운 포도까지 두송이 꺼내주고 돌아갔다.

알뜰은 잠든 동생을 업고 길에까지 따라나와 골목길로 사라지는 지훈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가을도 저물어가고있었으나 그때부터 알뜰의 가슴속에는 때아닌 봄이 옷자락을 펼치기 시작했다. 락엽지고 된서리내리는 계절에도 알뜰의 마음속에는 지훈이가 주고간 청포도송이들이 푸르싱싱하게 자라며 나날이 달고 맛있게 익어가는것이였다. 알뜰은 차지훈이 고맙게 생각될수록 그의 수고를 보상해주고 그한테 동생 우유값을 돌려주고싶었다. 알뜰은 지훈에게 우유값을 물어주기 위해 아버지와 삼촌이 가져다주는 돈을 푼푼이 쪼개가며 아끼였고 젖먹이동생을 업은채 슬라크처리장에 가서 자갈을 깠다. 알뜰은 성의껏 한푼두푼 모은 돈을 지훈에게 전할수 없었다. 알뜰이 두달분의 우유값을 모았을 때 지훈은 우유배달부노릇을 그만두었다. 망했던 아버지의 기업이 일어서기 시작하여 지훈은 다시 학교로 가게 된것이다.

알뜰은 지훈이 다시 공부하게 된것이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 알뜰은 지훈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싶었고 힘자라는껏 그를 위해주고싶었다.

지훈은 학교로 떠나기 전날 밤 알뜰을 찾아왔었다. 두사람은 12포천 동뚝길을 함께 거닐었다. 그날은 달도 몹시 밝았었다. 방울산봉우리우에 걸린 둥근달을 바라보며 두사람은 동뚝우에 그려진 그림자를 이끈채 걷고 또 걸었다. 말없이 거닐던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뜰씨, 〈심청전〉을 읽으셨겠지요?》

《네.》

《〈심청전〉에 나오는 몽운사가 바로 저 방울산 맞은편 금산에 있지요. 》

지훈은 놋쟁반같은 둥근달이 금시 굴러내릴듯 위태롭게 올라앉은 산발을 가리켰다. 톱날같이 우죽비죽한 봉우리들은 환한 달빛아래 줄느런히 파도쳐갔다. 알뜰은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서 황주 복숭아꽃동 심봉사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열번도 더 들었고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다녀오면서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자기 몸을 팔게 된것은 저 몽운사의 고약한 중놈들때문이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몽운사쪽을 가리켜주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였건만 난생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것처럼 지훈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넋없이 바라봤다.

지훈은 시를 읊조리듯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심청이같이 효성이 지극하고 마음씨 고운 녀인이 우리 고장에 태여난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부모와 동생들을 위하는 알뜰씨의 갸륵한 마음이 심청이 못지 않다고 봅니다.》

《아이참…》

알뜰은 어처구니없어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였다.

《아닙니다. 심청의 갸륵한 정성에 심봉사가 눈을 뜨게 되는것처럼 아버지와 동생들을 위하여 몸바치는 알뜰씨의 갸륵한 마음에 꼭 행복의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알뜰은 지훈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춥고 배고파 우는 동생들을 배불리 먹이고 뜨뜻이 입힐수만 있다면 심청이처럼 자기 한몸을 주저없이 바치고싶었다.

알뜰은 달빛에 동뚝길이 대낮처럼 밝았건만 돌부리를 걷어찼다. 그바람에 몸의 균형을 잃고 비칠거렸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였으나 지훈은 옆에서 날쌔게 그의 팔을 부축했다. 알뜰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바로세운 후에도 지훈은 붙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손으로 슬며시 알뜰의 손목을 잡으며 열에 떠 부르짖었다.

《알뜰씨, 저를 기다려주겠습니까?》

알뜰은 불에 데기라도 한것처럼 손이 화끈거려왔으나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나른해지는 바람에 꽉 붙든 지훈의 손에서 자기 손을 뽑아내지 못하였다.

《알뜰씨, 저를 기다려주겠다고 한마디만 대답해주십시오. 제 장원급제하고 돌아오는 리몽룡이처럼 공부 잘해 성공해가지고 알뜰씨한테로 돌아오겠습니다.》

알뜰은 가슴이 터질듯 활랑거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한테 꼭 알려주오.》

알뜰은 차지훈이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긴채 공부하러 평양으로 떠나간후에야 그한테 종시 우유값을 주지 못했다는것을 깨달았다. 학습장이라도 사서 쓰라고 주머니에 넣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어째서 자기가 그런 생각을 못하였는지 후회되였다.

그때부터 알뜰은 어서 방학이 되여 지훈이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알뜰은 지훈에게 주려고 모았던 우유값을 싸고싸서 뻘겅뒤주 뒤구석에 깊숙이 넣어둔채 온 가족이 굶주리던 나날에도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막내동생이 끝내 어머니를 뒤따라가서 불쌍한 동생을 어머니무덤곁에 묻어주고 돌아오던 가슴아픈 그날에도 알뜰은 지훈이가 가서 공부하는 평양쪽하늘을 우러르며 마음을 위로하였고 장난세찬 동생들때문에 속상해 울고싶던 때에도 달밝은 12포천 동뚝길에서 지훈이가 꼭 행복의 날이 오리라고 하던 말을 생각하여 마음을 눅잦히였다. 고달프나 그리움에 출렁이며 흘러오던 알뜰의 생활에는 돌연 낭떠러지가 앞을 막아나섰다. 아버지가 가스중독으로 화상까지 입고 덜컥 눕게 되자 집안살림은 기둥뽑힌 집처럼 기울면서 온갖 짐을 알뜰의 어깨우에 지워놓았다. 아직 완전히 굳어지지 못한 알뜰의 연약한 두어깨는 생활의 무거운 그 짐을 혼자 걸머지기엔 너무도 무력하였다. 알뜰이가 앓아누운 아버지와 가정을 위하는 길은 단 하나 자기 몸을 파는것이였다. 한창 피여나는 알뜰의 미모에 난봉군들과 중매쟁이들이 모여들었다.

잡풀속에 끼운 한떨기 아름다운 꽃송이처럼 젊음에 넘치는 알뜰의 아름다움은 구차한 살림과 오히려 뚜렷한 대조를 이루어 더 나타났고 알뜰은 타고난 그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으로 하여 남다른 시달림까지 받아야 했다. 알뜰이네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중에는 많은 돈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었다.

녀자는 나이차면 시집가기마련이라면서 작은어머니는 괜찮은 혼처가 나섰을 때 알뜰의 혼사를 치르자고 했다.

알뜰은 빠질빠질 속이 탔다. 알뜰은 차지훈이 공부하러 떠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한테 꼭 알리라고 신신당부하던 말이 생각났으나 공부하는 사람한테 쓸데없이 시름을 끼칠것 같아 써놓았던 편지를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이제 얼마 있으면 방학이였다. 방학이 되면 차지훈이 돌아올것이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방학이 돌아왔으나 지훈은 알뜰을 찾아주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 알뜰은 억봉에게 구원을 청했다.

《지훈씨가 왔는가 집에 한번 가봐주렴. 오셨거든 내가 꼭 전할 말이 있다고 알려줘.》

억봉은 누이의 심부름을 하려고 말없이 돌아섰다. 억봉은 어깨가 쩍 벌어진게 벌써 총각꼴이 나기 시작했다. 억봉은 심상치 않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지훈이 장개 간대.》

《뭐라구?》

《잔치날까지 받아놨는데 지훈이가 달아나 소동이 났대.》

알뜰은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를 불행에서 구원해주리라고 믿어오던 지훈자신이 불행에 빠져있을줄이야.

어딘가로 숨어버렸다던 지훈은 부모들이 받아놓은 잔치날을 며칠 앞두고 알뜰이한테 만나자는 쪽지를 보내왔다.

날이 어두우면 12포천 동뚝으로 나오라고 하였으나 알뜰은 지훈의 쪽지를 받아쥐기 바쁘게 자기들이 처음으로 사랑을 속삭이던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알뜰은 치마폭으로 두무릎을 감싸고 해저무는 동뚝에 앉아 지훈을 기다렸다.

동뚝의 누런 잔디우로 락엽을 굴리며 바람이 불어왔다. 마가을 찬바람에 잎떨어진 관목의 잔가지들과 마른풀잎들이 애처롭게 떨었다. 차겁고 쓸쓸한 늦가을의 동뚝이였으나 서쪽하늘가를 물들인 노을만은 아름다왔다. 알뜰은 붉게 타는 노을을 보자 잊을수 없는 지난날이 걷잡을수없이 떠올랐다. 차지훈이 우유배달자전거에 치고다니던 우유구럭에서 푸른 포도 두송이를 꺼내주고 가던 그때도 저렇게 노을이 아름답게 불탔었다. 알뜰의 가슴속에 지훈에 대한 그리움의 파도가 출렁이게 되고 희망과 동경의 그 바다우에 사랑의 꽃구름이 피여나게 된것은 죽은 막내동생을 위해 차지훈이 우유를 가져다주던 그때부터라고 할수 있었다. 배고파 우는 동생에게 주라고 말없이 우유를 가져다주던 지훈을 생각할수록 알뜰은 고마움을 금할수 없었다. 고마운 그 은정에 자기는 무엇으로 보답했던가. 자기 집 토방우에 놓이던 우유병을 생각할수록 알뜰의 두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을이 스러지며 황혼이 찾아왔다. 하늘에는 낮의 여광이 남아 아직 훤했으나 12포천 건너편 산기슭의 수림에는 밤이 갑작스레 찾아든듯 컴컴했다. 희끄무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드러난 시꺼먼 산릉선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경계만이 아니라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둠을 가르고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는 그 무슨 경계선인상싶었다.

알뜰은 땅거미진 12포천 동뚝의 어둠속에 옹송그리고앉아 자기로서는 감히 날아오를수 없는 훤한 하늘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어둠속에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소리는 알뜰이 가까이에 와서 멎었다. 알뜰은 자기옆에 나타난 지훈을 보자 자기를 불행의 어둠속에서 구원해주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나타나기라도 한것처럼 놀랍고 반가왔다. 두사람은 자기들이 처음으로 행복의 미래를 함께 꿈꾸던 12포천 동뚝길을 다시 걸었다. 그밤의 그 길은 두사람이 함께 걸은 사랑의 마지막밤길이였다. 지훈은 불덩어리같은 손으로 알뜰의 손목을 꼭 잡은채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알뜰씨,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집에서는 지금 촌부자집 딸한테 장가를 들라고 야단입니다. 제가 싫다니까 아버지는 이제부터 공부를 못한다고 위협이고 어머니는 양재물을 마신다고 야단입니다.》

알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지훈이가 물어보는 말은 알뜰이자신이 그한테 묻고싶던 말이였다.

《아, 알뜰씨!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부모들의 말을 따르면 알뜰씨한테 죄를 지어야 하고 장가를 안 들자니 부모들한테 죄를 지어야 하고… 돈! 돈이 무엇이길래 배움을 좌지우지하고 우리의 사랑을 이렇게 갈라놓는단 말입니까? 아, 황금에 희생되느니 저 물에 빠져 제스스로 목숨을 끊고싶습니다.》

알뜰은 지훈이가 자기를 잊어버려달라고 가시돋친 말로 욕하였더라면 가슴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것이였다. 괴롭게 하소하는 그의 말마디들은 알뜰의 가슴에 흘러들어 물에 섞인 쇠물처럼 무서운 폭발을 일으켰다. 자신의 불행에 지훈의 불행까지 합쳐진 그 폭발은 자기 한몸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자기 희생성을 불러일으켰다. 알뜰은 이 순간 자기가 지금까지 꺼리던 시집을 가는것이 응당하다는것을 순간에 결심하게 되는것이였다. 많은 돈을 내놓으며 청혼해온 저 성진 어디선가 도십장을 한다는 사람한테 자기가 시집을 가야만 굶어죽게 된 가족들을 먹여살릴수 있었고 지훈이도 부모들이 권한다는 녀자한테 장가들게 할수 있었다. 돈냥이나 갖고있다는 촌부자집 딸한테 지훈이 장가를 들면 목마르게 바라는 배움을 계속할수 있었고 기울어져가는 집안일도 바로잡을수 있었다. 지훈은 수재형의 총명한 사람이였다.

배우기만 하면 그는 얼마든지 재능을 활짝 꽃피우고 총명을 빛내일수 있었다. 지금의 형편에서 알뜰이 지훈의 배움에 보탬하는 단 하나의 길은 그가 돈있는 집 딸한테 장가들게 하는것이였다.

알뜰은 꽉 붙들고 놓지 못하는 지훈의 손에서 자기 손을 살며시 뽑아냈다.

《지훈씨, 저를 잊어주세요. 저는 지훈씨의 사랑을 받을만 한 그런 녀자가 못된답니다. 저는 이미 돈에 팔리웠어요. 성진사람한테 시집을 가야 한답니다.》

모든것이 이미 결정되기라도 한것처럼 알뜰의 입에서는 거짓말이 태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알뜰은 본의아닌 괴로운 거짓말을 하고나서 품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만년필을 꺼내였다. 지훈에게 우유값을 돌려주려고 싸고싸서 보관했던 돈으로 알뜰은 얼마전 일본인백화점에 가서 이 만년필을 샀었다. 사랑을 고백받던 순간에는 행복에 취하여 잊어버리였댔으나 서로 영영 헤여져야 하는 괴로운 이 순간에만은 은혜를 잊고싶지 않은 알뜰이였다.

《언젠가 하시던 말씀처럼 공부 잘해 꼭 성공하세요. 부디부디 행복해요.》

알뜰은 지훈의 학생복 웃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아주고나서 뒤로 돌아섰다.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보이고싶지 않아 알뜰은 어쩔수 없는 자기 운명의 길을 가듯 12포천 동뚝길을 걸어갔다.

《알뜰씨- 알뜰씨-》

지훈은 다급히 소리쳐불렀으나 알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도망치듯 어둠속으로 반달음치였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때 알뜰이가 입었던 마음의 상처는 컸다. 자기 한몸을 주저없이 불행에 떠맡긴 값비싼 희생은 새라새로운 불행만을 가져왔다. 새로운 아픔은 지난날의 아픔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알뜰은 아픔으로 아픔을 달랠수 있었다.

사랑의 루각은 허물어져버린지 오래였고 그 루각이 솟아있던 들판마저 세월의 풍파에 거칠어져버리였다. 우거진 잡초속에 흩어진 기와장들처럼 아득한 추억의 쪼각들만 드문드문 남아있을뿐이다. 알뜰은 심한 열병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병을 나은 먼 후날 열병의 진통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자기가 몹시 앓던 그때를 잊지 못하듯 불행한 첫사랑을 지금도 말끔히는 못 잊고있었다. 그래서 알뜰은 오늘까지 지훈을 만나지 않으려고 애써 피해왔었다.

모멸에 가까운 지훈의 눈길이 알뜰의 마음속에 던진 파문은 컸다.

알뜰은 가던 길을 잊고 한참이나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먼지이는 길바닥에 누운 그림자는 아까보다 퍽 길어졌다.

깟깟…

어디선가 저녁까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알뜰은 저녁차비가 늦어질것 같아 라웅범네 집을 바라고 걸음을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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