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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제1장. 아물지 못한 상처

4

알뜰은 12포천동뚝길로 허둥지둥 걸어갔다. 동뚝길은 제철소로 뻗어있다.

라웅범이 제철소구내에서 억봉을 보았다는 소식을 집에 와서 전해준지도 하루가 지났건만 아직까지 동생은 집에 오지 않았다. 억봉을 찾으러 나간 석봉이도 여직껏 소식 없다. 알뜰은 온밤 뜬눈으로 밝히고나서 이렇게 집을 나섰다.

(왔으면 집에 올게지 어딜 그리 쏘다닌단 말인가?)

알뜰은 동생이 도무지 철있는것 같지 않았다. 집에서 누이가 눈이 까매 자기를 기다린다는걸 그 애는 생각도 못하는 모양이다. 알뜰은 생각할수록 동생이 야속스러웠다. 그런가 하면 뒤숭숭한 생각에 마음이 불안스럽기도 하였다.

며칠전 범바위골 아무개네 집에 북쪽에서 도망쳐나오던 일본놈패잔병들이 달려들어 쌀을 몽땅 털어갔다는 소문이 아직도 짜하고 소우물 어디선가는 변복한 왜놈헌병 세놈한테 온 가족이 죽었다는 끔찍스런 말도 떠돌았다. 먼데는 둘째치고 준길삼촌도 해방되던 날 한쪽어깨에 온통 피칠갑을 해가지고 오지 않았던가.

아침해가 퍼진지 얼마 되지 않지만 볕은 벌써 뜨겁다.

바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메마른 동뚝길에서는 팔싹팔싹 먼지가 피여오르고 고무신코등에는 어느덧 뽀얗게 먼지가 앉았다. 12포천동뚝길은 조용했다. 하루에 둬번씩 제철소와 석회광산을 오르내리던 빽빽이차도 요즘은 다니지 않고 주변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오던 사람들도 없어졌다.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건만 치료할길 없는 사람들이 황천으로 가는 중간역 비슷한 병막촌으로 쫓겨가던 이 길이고 서로 사랑하면서도 부득이하게 갈라져야 하던 이곳 불고장 청춘남녀들이 괴로운 작별의 마지막밤을 보내려고 찾아오군 하던 외진 여기다.

송림산과 월봉산에서 흘러내린 길지 않은 열두갈래의 물줄기가 모였다는 12포천은 원래 제철소변두리를 적시였으나 제철소구내가 확장되여 지금은 구내 한복판에 끼우고말았다. 그때로부터 맑던 이 물줄기에는 병막촌의 병균과 주택지구의 오물 그리고 제철소의 페설물이 흘러들어 강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시궁창이 되여버리였다.

굽이를 돌아서자 제철소의 철탑과 굴뚝들이 바라보였다. 하늘을 찌를듯 솟아오른 그 어느 굴뚝에서도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제철소우 하늘은 세면이라도 하고난듯 멀끔하다.

알뜰은 황마산기슭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커다란 귀때물동이를 이고 한 처녀가 마주왔다. 치렁치렁 땋아내린 처녀의 실한 머리태는 어깨에 흘러내려 한껏 부푼 흰 저고리 앞가슴에서 가락맞게 잉어뜀을 하고 동이주둥이에서 출렁대며 차넘치는 물방울을 터느라 처녀의 한손은 물을 차는 제비처럼 부지런히 동이굽을 스쳐쓴다. 물동이를 이고 잽싸게 걸어오는 처녀가 계향임을 알아보고 알뜰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계향이까지 만나게 해주려고 오늘은 이른아침부터 까치가 뒤울에 찾아와 깟깟 울어댄 모양이다.

《계향이!》

알뜰은 반가움을 억제 못해 나직이 불렀다. 어쩌면 억봉이가 어제 밤을 계향이네 집에서 보냈는지도 모른다. 억봉은 계향이 오빠 우학이와 죽자살자 하는 사이다. 친구네 집이고 약혼녀가 있는 곳이고보면 아직 거기에 붙박혀있기 쉽다. 그래서 계향은 때아니게 이렇게 물동이를 이고 나섰을수도 있다.

《무슨 물을 이렇게…》

알뜰은 계향의 머리우에서 무거운 물동이를 받아 잠시라도 내려놓아주고싶었으나 계향은 사양했다.

《오빠옷을 좀 빨려구…》

계향의 대답에 알뜰은 다소 실망했다.

《오빠가 집에 있어?》

《삯짐진다구 어제 아침 나갔는데 밤에두 들어오지 않았어요.》

계향이 오빠가 집에 없으면 억봉이도 거기 없을것은 뻔했다.

《우리 억봉이 못 봤지?》

알뜰이 물음에 계향은 귀밑까지 빨개졌다. 알뜰은 자기가 공연히 물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계향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것이 분명했다.

《억봉이가 돌아왔대.》

알뜰이 속삭이듯 반가운 소식을 알려주었건만 계향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성격이 활발하고 개방적인 그여서 금시 울음이라도 터칠줄 알았는데 계향의 표정은 예상외로 차겁기까지 했다.

《저녁에 집에 오라구.》

알뜰의 따뜻한 청에도 계향은 역시 아무 대답 안했다.

《작은어머니랑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 한번두 안 온다구.》

일이 별나게 되여 너무도 갑작스레 벼락약혼을 치르다보니 약혼 당일에조차 작은어머니는 조카며느리될 계향을 보지 못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안계시는 알뜰이네 집안에서 작은어머니는 녀자치고 제일 웃어른이다. 피치 못할 딱한 사정으로 번개불에 콩닦듯 약혼을 하지 않으면 안되긴 했지만 후에라도 집안식구될 웃사람들을 찾아왔어야 도리가 바르다고 할것이였다. 작은어머니가 계향을 나무랄 때마다 그를 적극 두둔해온 알뜰이였으나 그래도 서분함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랑군될 사람이 귀중하면 그의 가족과 친척들도 중할것이 아닌가?

《그럼 전…》

계향은 좋다싫다는 아무런 응대없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알뜰은 물동이를 이고 점점 멀어져가는 계향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제철소쪽으로 걸음을 놓기 시작했다.

(무엇때문일가? 혹시 저 애가…)

야릇한 불안에 알뜰의 마음은 뛰놀기 시작했다. 억봉은 계향이와의 상서롭지 못한 일때문에 어제 집에도 안 온게 아닌지…

알뜰은 새로운 불안이 덮쳐져 설레는 가슴을 안고 제철소로 향했다.

제철소정문에는 《일철주식회사 겸이포제철소》라는 낡은 간판이 땅에 떨어져 아직도 딩굴고있었다. 해방되던 날 강철직장 용해공들이 뜯어버린 간판이다. 쇠가루와 탄가루에 거밋거밋해진 담장과 쇠창살의 무거운 철문을 바라보자 알뜰은 자기자신도 모를 위압감에 사로잡혔다.

처음 오는 곳이 아니면서도 올 때마다 낯설게 느껴지고 무더운 한여름에조차 써늘한 기운이 도는 여기다. 교대가 바뀌는 날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동생들의 밥을 싸가지고 찾아오기 얼마였으며 할퀴우고 뜯기우다 남은 귀떨어진 동전 몇잎의 품삯을 바라고 찾아오기 또 얼마였던가. 철부지 소녀시절부터 제철소구내를 메주밟듯 해오던 알뜰이였다. 알뜰은 남들이 따뜻한 봄볕아래 마당에 앉아 조가비로 땅에 금을 그으며 놀던 한창나이 그 시절부터 장난감조약돌이 아니라 집짓는데 써야 할 주먹만 한 슬라크자갈을 까기 위해 손에 어랭이와 망치를 들어야 했으며 먼지이는 제철소구내에서 시뻘건 광석이나 시꺼먼 석탄이 아니면 파철장의 녹쓴 쇠붙이를 주물러야 했다. 제철소구내는 철부지소녀의 동심과 꿈을 키워준 실생활의 소꿉놀이 유희터였고 숨박곡질마당이였으며 좁은 부엌을 떠나 넓은 야외에서 시뻘건 쇠덩어리나 돌덩어리우에 꽁꽁 언 점심밥을 올려놓고 음식 데우는 법을 배우던 동자질의 첫 숙련터였었다. 그러면서도 좀해 마음 붙이기 어려운 제철소였다. 어머니가 삼십대 젊은 시절에 희고 실한 다리 한쪽을 허벅까지 짤리운 여기였으며 허우대 크고 힘꼴센 아버지가 늘쌍 녹초가 되여 한숨쉬며 돌아오다 나중엔 뻣뻣한 주검이 되여 거적에 말리운채 들것에 들려나온 여기였다.

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귀가 멍멍해지던 기계들의 동음과 소음도 들려오지 않는다. 알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발볌발볌 출입문쪽으로 다가섰다.

수위간쪽에서 한사람이 뛰여나왔다. 발굵은 무명잠뱅이에 소매짧은 적삼을 입은 그 사람은 다짜고짜로 알뜰이한테로 뛰여오며 소리를 질렀다.

《누이!》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알뜰은 자기 눈과 귀를 의심하며 걸음을 멈춘채 마주오는 사람을 멍히 쳐다봤다. 감때사납고 심술고약한 검은 제복의 수위들이 자리틀었던 곳에서 흰 옷차림의 사람이 나타나는것도 이상했고 고함소리와 욕설소리만 울리던 여기에서 누이라는 다정한 부름이 들리는것도 좀해 믿기 어려웠다.

《누이!》

마주오던 사람이 앞을 막아선채 재차 소리를 질러서야 알뜰은 동생을 알아봤다.

《억봉아!》

알뜰은 억봉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갑자기 눈앞이 뿌예와 목갈린 소리로 부르짖었다.

《누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얘, 그새 몸 성했니?》

두사람은 격정에 자기 말만 말이라고 하며 서로 붙안고 돌아갔다.

억봉은 알뜰을 수위막으로 손잡아끌었다. 오랜 세월 앞으로 스쳐지나다니면서도 오늘에야 처음으로 들어와보는 곳이였다. 감옥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각되던 수위막안에서 알뜰을 제일먼저 반겨준 사람은 주학섭이였다. 출입문쪽에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서는 사람은 우학이였다. 그가 일어선 자리에는 역으로 품팔러 가지고 다니던 지게가 눕혀있었다. 방안에 빈 의자가 수두룩하건만 그는 지게등태를 깔고 앉았던 모양이다. 생김생김새가 어리숙하고 말이 적은 농촌태생의 그는 그제 역전에서 만나던 때처럼 두눈만 끔뻑끔뻑하며 아는체를 했다.

방안사람들과 모두거리로 인사를 하고나서 알뜰은 억봉에게로 돌아섰다.

《아니, 왔으면 집에 먼저 들릴게지.》

알뜰의 나무람에 억봉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역전에서 사람들을 만나 곧바로 공장에 오다나니…》

알뜰은 일이 있고 사정이 그래서 억봉이가 집에도 아직 못 왔으리라는 생각에 말머리를 돌렸다.

《석봉이 못 봤니?》

억봉은 싱긋 웃더니 대답대신 방안 한쪽을 턱질했다. 방안구석에 놓인 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는 한사람이 벌렁 드러누워 코까지 골고있었다.

《어제 형한테 얘기 듣느라구 꼬박 밝혔어.》

주학섭이 사람좋게 웃으며 석봉을 두둔하듯 말했다.

(형을 데려온다는게 여기 와 곯아떨어졌단 말인가.)

석봉을 알아보고 알뜰은 기가 찼다. 억봉은 씨물씨물 웃기만 하더니 석봉이가 누워자는 긴 의자앞으로 다가갔다. 억봉은 아이들 책보싸듯 둘둘말아 꾸린 괴나리보짐을 들어 알뜰에게 내밀었다.

《자, 이 안에 누이 치마감이랑 신발이랑 있어.》

《원 애두… 작은어머니나 가져다드려라.》

《작은어머니거두 있지…》

알뜰은 동생의 인정에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까지 죽을지경의 위태로운 곳을 떠돌아다녔겠는데 언제 이런 생각까지 했단 말인가.

《누이, 이 짐 갖고 먼저 집에 가. 내 저녁에 들어갈게…》

억봉은 자기 보짐을 내밀었다.

《빨리 집으로 가자. 작은어머니랑 찾아와서 얼마나 기다리시게…》

알뜰은 인정헤픈 눈물을 보이고싶지 않아 억봉이가 내미는 보짐을 얼른 받아안고 반쯤 돌아섰다.

《난 예서 좀 볼일이 있어, 누이가 삼촌어머니한테 말 좀 잘해-》

억봉은 더부룩한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우리 변호사노릇 해주려구 그런다네. 사실 억봉인 우리때메 집에두 안 가구 역에서 곧바루 여기 왔는데 어디 운영동지회나리들을 만날수가 있어야지. 이달 로임을 받아야 집에 갈 로자라도 보탤게 아닌가…》

《걱정말라》아저씨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건만 알뜰은 말귀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알뜰은 지금 제철소에 불이 꺼져 많은 사람들이 매일처럼 여기를 떠나가고있으며 떠나는 사람마다 로자때문에 고생하고있음을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자기 동생 억봉이가 어디 가서 무슨 변호사노릇을 해야 하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목총을 든채 방안 창문가에 앉아있던 젊은이가 누구에게라없이 소리쳤다.

《저기 운영회가 온다.》

방안사람들의 뭇시선은 창문으로 쏠리였다. 사람들은 제철소 운영동지회를 흔히 《운영회》라고 불렀다.

수위막 유리창문으로 제철소를 향해 걸어오는 두사람이 내다보였다. 맥고모를 쓴채 앞서 걸어오는 사람은 라웅범의 배다른 처남 송표였다. 그는 가느다란 실테안경을 해빛에 번쩍거리며 그림자를 앞세우고 자못 위풍있게 걸어왔다. 알뜰은 라웅범이네 집에 갔다 먼발치서 그를 본적 있었다. 알뜰은 송표와 함께 오는 사람도 낯이 익었다. 모시난방샤쯔바람의 그 젊은이는 한손에 부들부채를 들고 송표보다 반걸음 뒤로 떨어져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그가 제철소정문가까이로 다가왔을 때 알뜰은 차지훈을 알아보고 와뜰 놀랐다.

알뜰은 창가에서 둬걸음 떨어져있었으나 창문으로 그가 들여다볼가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억봉이와 주학섭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우학이도 벽에 기대여세웠던 빈지게를 지고 그들을 따라섰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송표와 차지훈 둘레로 우구구 모여들었다. 잠시후 사람들은 제철소사무실쪽으로 밀려갔다. 알뜰은 억봉이가 변호사노릇을 하기 위해 어제 집에도 오지 않은 리유며 《걱정말라》아저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길목을 지켜 기다린 일에 차지훈이 결부되여있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상서롭지 못한 예감에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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