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품에 안긴 윤복진의 가슴은 한없는 감격과 흥분으로 끝없이 설레였다.
보고 듣는 모든것이 그대로 시였다.
그러나 막상 붓을 잡으면 웬 일인지 작품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였을가?
어두운 눈물의 나라에서 헤매다가 갑자기 눈부신 웃음의 나라로 들어섰기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윤복진은 그때의 자기 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어둠속에서 헤매던 소경이 눈을 뜬것과 같이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자기를 문학신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좋기만 하였다.》
이 시기부터 윤복진은 참된 삶과 진정한 문학창작의 길을 걷게 되였으며 인민들과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는 개성이 뚜렷한 아동문학작가로 성장하게 되였다.
전화의 나날 윤복진은 군복을 입고 조선인민군의 어느 한 부문에서 사업하면서도 동요창작과 문학공부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혁명의 꽃봉오리! 이 얼마나 뜻깊은 말씀인가!
세상에는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그때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꽃봉오리》라는 표현이 깊이깊이 아로새겨졌다. 외워보면 그 뜻이 그대로 시로 안겨왔다. 이 표현을 잘 쓰면 좋은 동요가 될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무렵(1952년) 우리 나라에서는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있었지만 승리할 조국의 미래를 확신하신
그는 소학교 1학년용 음악교재의 첫머리에 넣을 동요를 창작하라는 영예로운 과업을 받게 되였다.
어떤 동요를 쓸것인가. 그는 늘 가슴속에 품고있던 꽃봉오리에 대한 노래를 쓰기로 하였다.
넓으신 품안에
자라나는 우리들은
새 조선의 꽃봉오리
우리모두 그 품안에
씩씩하게 자라지요
따사론 품안에
방실 웃는 우리들은
새 조선의 꽃봉오리
우리모두 그 품안에
즐거웁게 배우지요
윤복진은 이렇게
후날 윤복진은 지금 와서 이 동요를 보면
그후 30여년이 지난 1985년에 그는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창건 40돐을 맞으며 이 작품의 자매편으로 볼수 있는 동요 《우리들은 당의 품에 피는 꽃송이》를 창작발표하였다.
동요에서는 새 세대 어린이들이 눈바람 사납게 휘몰아쳐도
윤복진은 준엄한 전쟁시기에도 승리의 신심에 넘쳐 밝고 명랑하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노래한 동요 《이 동네는 영웅동네》, 《학교길》, 《기차놀이》(1952년)를 비롯하여 우리 인민군대의 영웅성과 미제침략자들의 추악성을 그린 《미국놈병정 겁쟁이병정》, 《총알형제》(1951년), 《고추먹고 맴맴》(1952년) 등을 창작하였다.
풍자동요 《미국놈병정 겁쟁이병정》은 윤복진의 조국해방전쟁주제 작품창작에서 주목을 끄는 작품이다. 동요에서는 바스락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머리가 쭈빗, 다람쥐 보고도 가을바람소리 듣고도 놀라 헛총질하는 겁쟁이병정, 미국놈보초를 신랄히 풍자조소하면서 우리 인민군정찰병의 슬기롭고 용감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그의 창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은 동요 《아름다운 우리 나라》이다. 이 동요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동요는 윤복진이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 후퇴시기 남조선에서 인민군대를 따라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오는 과정에
이에 대하여 윤복진은 자기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은혜로운 삶의 품인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오는 길은 미제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을 불태우는 길이였고 우리 조국의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새기며 익히는 길이였다.
비록 조국산천은 전쟁의 불길속에 휩싸여있긴 했지만 넓고넓은 들에는 오곡이 물결치고 높고낮은 산에는 푸른 숲이 설레이고있었다. 나는 해방후 불과 몇해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도 몰라보게 달라진 마을과 도시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천리,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끝나자 림진강하류에 있는 고랑도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다시 평양까지 걸었으니 내가 걸은 그 길은 2천리도 훨씬 넘는 머나먼 길이였다.
나는 멀고 험한 길을 걸으면서 오각별 빛나는 조국을 더 잘 알게 되였고 더욱 사랑하게 되였던것이다. 이 과정에 나의 가슴속에는 조국찬가를 쓸수 있는 씨앗이 뿌리내렸다.》
동요 《아름다운 우리 나라》는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아름다운 우리 나라
참 좋은 나라
산에는 금은보화
바다엔 고기
넓고 푸른 들에는
오곡이 물결치는
참 좋은 나라
아름다운 우리 나라
참 좋은 나라
누구나 다 일하고
글 잘 배우고
오각별 공화국기
푸른 하늘 높이 나는
참 좋은 나라
이렇듯 동요는
동요에서는 오곡백과 무르익는 어머니조국의 아름다움을 시적화폭으로 펼쳐보이면서 그속에서 혁명의 후비대로 억세게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의 한없는 긍지와 자부심, 자랑을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동요에는 누구나 다 일하고 배우며 오각별 공화국기 푸른 하늘 높이 휘날리는 고마운 어머니조국을 위하여 몸바쳐 싸울 우리 시대 어린이들의 굳은 결의가 흘러넘치고있다.
동요는 그 시기뿐아니라 오늘도 누구나 다 좋아하는 가요로 전해지고있다.
전쟁의 포화가 멎은 후 윤복진은 왕성한 창작적열정을 가지고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동요들인 《시내물》, 《학습을 다하고서》(1954년)를 비롯하여 《내가 심은 복숭아》(1955년), 《검둥아 멍멍》(1956년), 《자랑찬 우리 평양》, 《꽃가마 들어온다》(1957년), 《림진강기슭에서》(1958년) 등에서는 미제를 물리치고 승리한 그 기세로 전후복구건설에 떨쳐나선 우리 인민들의 벅찬 생활을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다양한 생활과 결부시켜 생동하게 노래하고있다.
이 시기 창작된 동요 《시내물》은 작가의 창작적재능을 보여주는 특색있는 작품중의 하나이다.
동요에서는 시내물이 졸졸 노래하며 흘러간다는 서정적정황을 펼치면서 한굽이를 돌아드니 불탄 산에 새봄 왔다고, 또 한굽이 돌면 새 목장이 생겨나고 물방아 돌던 곳에 전기방아 새로 돌고 또 한굽이 돌면 새 학교가 우뚝 서고 또 한굽이 돌면 봄밭갈이 한창인데 우르릉 뜨락또르 넓은 들을 갈아엎고 또 한굽이 돌고돌면 우뚝우뚝 영웅도시 평양이 일떠선다고 하면서 페허속에서 새 생활을 일떠세우는 전후복구건설의 영웅적현실을 생동한 시적화폭을 통하여 감동적으로 노래하고있다.
동요 《학습을 다하고서》는 작가가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겨 받은 강한 창작적충동에 의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남반부에서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보니 전쟁이 한창인데도
그러던 1952년 어느날이였다. 그는 평양교외에 있는 친구네 집으로 가게 되였다.
그 집에는 딸형제가 있었는데 맏딸은 소학교 1학년생이고 둘째딸은 유치원생이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 마주앉아 회포를 나누는데 들창밖에서 이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언니야, 나하구 놀자.》
《안돼. 숙제를 아직 못다했어. 너 혼자 놀려무나.》
창밖을 내다보니 언니는 웃방에서 공부를 하고 동생은 혼자서 소꿉놀이를 하고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머리속에는 학습주제의 동요세계가 떠올랐다.
그날에 받은 충동으로 윤복진은 정전직후인 1954년에 《학습을 다하고서》를 창작하였다.
동요의 서정적주인공은 기껏해야 소학교 1학년생이다.
사실 꽃이 피고 새가 우짖는 봄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것없이 마음을 들뜨게 하는 계절이다.
작가는 아이들의 마음에, 아이들의 생활에 먼저 찾아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 봄바람 솔솔 불어오는 날을 시적계기로 잡았다.
작품에서 보는바와 같이 동생은 천진하게도 봄놀이에 취해서 자꾸만 같이 놀자고 언니에게 졸라대지만 언니는 숙제공부 먼저 하고 놀아야 한다고 타이른다. 동요는 서정적주인공의 호소를 통하여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있다. 작품의 이 사상은 마지막련에서 잘 결속되고있다.
울긋불긋 꽃동산
꾸며놓고서
혼자서는 심심하여
언니보고 조르지요
정말정말 그만큼 공부하고
나구 둘이 꽃놀이 놀자요
오냐 그래 놀자꾸나
이젠 그래 놀자꾸나
학습을 다하고서
너구 나구 꽃놀이 놀자꾸나
이처럼 동요는 앞날의 훌륭한 일군이 되기 위하여서는 꾸준히 학습하고 배워야 한다는것을 힘있게 확인함으로써 어린이들이 학습의욕과 학습에 대한 옳바른 태도를 가지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뿐아니라 작품은 동요문학의 새 양상을 개척하는데 기여한 특색있는 성과작의 하나로 되였다.
윤복진의 동요창작에서 전성기로 되는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이다.
이 시기 윤복진은 참된 삶의 길로 이끌어주신
윤복진의 창작생활에서 유서깊은
그것은
윤복진은
그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였다. 그가 이 성스러운 사업을 스스로 맡아서 진행할수 있은것은 그만큼 자기를
품에 안아 키워준
동요동시집은 어린 독자들의 열렬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름다운
자랑많은 우리 고향
흘러가는 대동강
푸른 물도 노래해요
만경봉을 얼싸안고
춤을 추며 노래해요
아름다운
자랑많은 우리 고향
푸른 하늘 종달새도
해만 뜨면 노래해요
만경봉을 날아돌며
하늘높이 노래해요
동요
혁명의 성지에 내세워준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하루는 뜻밖에도 바다건너에 있는 일본땅에서 한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나에게 온 편지가 옳긴 옳은가?)
그는 겉봉을 다시 살펴보았다.
자기에게 온 편지가 분명하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을 들여다보며 그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누굴가?)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편지를 읽고난 그는 깜짝 놀랐다.
총련의 한덕수의장이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아니, 그럼 중학시절에 나와 한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던 그 옛동무가 한덕수의장이란 말인가!)
윤복진은 그날 밤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나의 기쁨, 나의 자랑인 아름다운
그가 쓴 회답편지는 인차 한덕수의장앞으로 날아갔다. 그후 그는 조국을 방문한 한덕수의장과 뜻깊은 상봉을 하게 되였다.
그들은 얼싸안고 감개무량하여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윽고 머리를 맞대고 앉아 축배잔을 나누며 아득히 흘러가버린 어린시절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았다.
행복한 시간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헤여질 때가 되였다.
다시한번 얼싸안고나서 윤복진이 그 자리를 떠나 퍼그나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급히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진아, 복진이! 이리 오라구.》
돌아보니 한덕수의장이 뒤따라오며 오라고 손짓을 하고있었다. 웬 일인가 해서 다시 들어가니 한덕수의장이 깜빡 잊을번 하였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처럼 서로 키 대보기를 하자고 하는것이였다.
그들은 돌아서서 등을 맞대고 키 대보기를 하였다. 그들의 입에서는 약속이나 한듯이 어린시절에 부르던 동요가 흘러나왔다.
누가 키가 더 큰가
어디 한번 대보자
올라서면 안된다
발을 들면 안된다
똑같구나 똑같애
래일 다시 대보자
한덕수의장은 키 대보기를 하고나서 아무래도 자기가 좀더 크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처럼 두어깨를 으쓱거렸다. 윤복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사이에는 자주 편지가 오고갔다. 윤복진은 새로 출판한 자기의 동요동시집 《시내물》을 보내고 한덕수의장은 자기가 쓴 가사와 시들을 보내며 의견을 달라고 하였다.
총련에도 유명한 작가들이 있는데 한덕수의장이 왜서 윤복진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였는가.
한덕수의장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 자네야말로 고지식한
이것은 윤복진의
동요동시집 《아름다운
어떻게 하면 유서깊은
그래서 이번에는 산문으로 쓰기로 하였다.
그는 한줄두줄 심혈을 기울여 장편실화문학 《
장편실화문학 《
장편실화문학은
윤복진은 불타는 열정을 안고
이밖에도 그는 동요 《소년단림 고운 새》(1968년), 《꽃침대》, 《꽃피는 산골마을》(1975년) 등 학생소년들의 학습과 조직생활,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과 조국통일주제 등 다양한 내용의 동요들을 창작발표하였다.
특히
윤복진은 년로한 몸에 건강이 좋지 못하여 1980년부터 자택에서 창작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가 집에 들어가서도 쉬지 않고 언제나 책상앞에 마주앉아 책을 읽거나 동요창작에 열중하는것을 보고 젊은 시인들이 윤복진에게 년로한 몸에 건강치도 못한데 어떻게 왕성하게 글을 쓰는가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
그는 이런 열정을 안고 어느 하루도 붓을 놓지 않았다.
동요 《
산 산
구름우에 솟은 산
탄생하신
…
산 산
하늘끝에 솟은 산
자라나신
…
동요는 생략과 함축의 수법을 재치있게 활용하면서
윤복진은 이외에도 동요 《착하신 마음》을 비롯하여 어린시절
윤복진은 1980년대 후반기 병석에 누워서도 아동문학작가의 사명감을 잊지 않고 창작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동요 《저 하늘이 멀고멀어도》(1986년)는 작가가 병환속에서 창작한 성과작이다.
동요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의 동심을 생동하게 노래한 동요는 높은 사상예술성으로 하여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여 출판되였다.
참으로 윤복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