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윤 복 진(작가)

 

• 1908년 1월 9일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출생.

• 1931년 일본에서 고학.

• 1964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

• 1991년 7월 16일 사망.

김일성상계관인.

                                                           

 

 

우리 나라의 재능있는 수많은 작가들중에는 앞날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의 친근한 교양자로 동심의 향기를 풍기며 한생을 동요창작에 바친 아동문학작가 윤복진도 있다.

윤복진은 현대조선동요문학발전에 자기의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으며 창작생활 전기간 사상예술성이 높은 아동시들을 창작하여 후대교양에 이바지하였다.

그래서 동시대작가들과 시인들은 그를 《동요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해외에서 활동하고있는 아동문학작가들속에서도 그는 《동요할아버지》로 불리워지고있다.

남다른 존경과 사랑의 호칭으로 불리우고있는 《동요할아버지》 윤복진의 한생은 어떻게 흘러왔으며 인생의 마무리는 어떻게 지었는가.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1908년 1월 경상북도 대구시변두리의 한 가난한 가내수공업자네 집에서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여무지게 흘러나왔다.

풀이나 나무, 돌 같은 자연재료에 의거하여 고리도 엮고 솔이나 도시락도 만들어 팔아 연명해가는 미여지게 가난한 이 집에 태여난 아들애가 후날 우리 나라의 현대아동문학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는 인재로 될줄 그 누가 알았으랴.

타고난 재간은 귀신이 돌보아 빛을 내게 해준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모든 일을 성공시키는데서 천성이 중요하다는것을 강조해주는것이지 결코 타고난 재간이 있으면 성공이 저절로 온다는 말은 아닌것이다.

천성적인 재간을 가진 어린것들이 너무도 무참히 굶어죽고 맞아죽고 앓아죽고 한것이 해방전 우리 나라 실태가 아니였던가.

《고리쟁이》, 《솔쟁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는 아버지를 따라 산에도 오르고 들에도 나가고 장에도 나들며 어린 윤복진은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못사는것이 현실이라는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였다.

손톱끝이 닳도록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덕에 윤복진은 가까스로 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우리 글을 알게 된 그때부터 그는 즐겨 책을 읽고 글을 지어보면서 문학적소양을 쌓았다.

소학교를 마치고 계성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3학년때부터 아동시도 써보고 성인시도 써보았는데 그 과정에 점차 아동시문학에 마음이 끌리게 되였고 동요창작에 열중하게 되였다.

조숙한 윤복진이 처녀작으로 지상에 발표한 작품은 14살 나던 해인 1922년 봄에 지은 동요 《종달새》이다.

어느날 아침 그는 학교로 가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달새의 처량한 울음소리를 듣게 되였다. 가까이 가보니 길가집 추녀밑에 걸려있는 조롱안에서 한마리의 종달새가 애처롭게 울고있었다. 자유를 잃고 구슬프게 우는 종달새의 울음소리가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내 고향, 내 조국이 일제의 발굽밑에 짓밟혀 신음하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못견디게 치밀어오르는것이였다.

그날 윤복진은 학교에 가서 그 종달새를 두고 눈물어린 동요를 썼다.

 

보리밭에 종달새

봄이 왔다고

은방울 흔들면서

노래하기를

누구든지 같이 와

놀고 가래요

 

처마끝 조롱속의

옛집 그린 새

보리밭을 보면서

슬피 울기를

갈래야 갈수 없는

맨몸이래요

 

동요는 이렇게 짧은 2련으로 되였다.

조롱속에 갇혀있는 새, 옛집을 그리며 슬피 우는 종달새는 어떤 새인가.

순수 자연의 새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종달새는 사랑하는 옛집, 조국을 원통하게 빼앗긴 우리 어린이들이였으며 우리 겨레였다.

동요는 세상에 발표되자마자 작곡이 되여 나라를 빼앗기고 봄마저 잃었던 이 땅의 아이들에 의해 즐겨 불리워졌다. 산골에서 나무하던 소년들도 지게를 지면서 부르고 도회지에서 공부하던 소년들도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불렀다.

윤복진의 처녀작은 이처럼 나라잃은 설음속에 흘리는 눈물의 동요로부터 시작되였다.

처녀작발표후 윤복진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수십편의 동요를 창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사랑과 설음,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노래한 동요들인 《두만강을 건느며》(1924년), 《고향집》(1927년), 《고향하늘》, 《강남가는 제비》(1928년) 등을 비롯하여 착취사회의 최하층에서 온갖 학대와 빈궁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와 비극적운명을 보여주는 동요 《쫓겨난 부엌데기》(1927년), 《팔려가는 우리 황소》, 《스무하루밤》(1928년), 《후여 딱딱 참새야》(1930년) 등 여러 주제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작품들은 모두 망국의 비운이 드리운 땅에서 작가자신이 직접 체험한 나라없는 어린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심어린 눈물속에서 펼쳐보인것들이였다.

동요 《두만강을 건느며》는 그 대표작의 하나이다.

윤복진은 어렸을 때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수많이 보았다. 그때 윤복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거장이 있었다. 동무들과 함께 정거장에 나가보면 일본이나 만주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람루한 옷차림, 이고 진 보짐, 백발의 로인들, 배고파 칭얼거리는 어린것들… 조국을 떠나가는 류랑민들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하여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 그들가운데는 이웃에서 같이 살던 사람들도 있었고 한마을에서 함께 놀던 어깨동무들도 있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저 늙은이들이 살아서 고향땅에 다시 돌아올 날이 과연 있기나 할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서글픈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정거장에 갔다온 날 밤이면 불쌍한 류랑민들의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리고 처량한 기적소리가 귀전에 울려와서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윤복진은 이 눈물겨운 두만강에 깃든 기나긴 력사의 이야기를 동요에 담아보려고 붓을 들었다.

 

눈보라는 펄펄

가는 길 막는데

보짐을 이고 지고

떠나야만 하나요

이 강을 건너서면

남의 나라 땅

 

돌아보면 내 나라

그리운 내 고향

언제 오나 묻지 말아

다시 올 날 있으려니

잘 있으라 내 나라

그리운 내 고향

 

동요 《두만강을 건느며》는 눈물속에 조국을 떠나가는 겨레의 모습과 그리운 조국산천을 돌아보며 해방의 날을 고대하는 서정적주인공의 심정을 생동하게 펼쳐보이고있다.

동요 《쫓겨난 부엌데기》도 작가가 눈물나는 생활체험속에서 쓴것이다.

윤복진의 집옆에는 울타리도 없는 오막살이 한채가 있었다. 코구멍만 한 단칸방에 자그마한 부엌이 달린 집이였다.

그 집에서는 갓난이라는 아이가 어머니와 단 둘이서 참으로 가난하게 살고있었다. 해빛이 들지 않아 방안은 대낮에도 어둑컴컴하였다.

어린 갓난이는 노닥노닥 기운 헌 치마를 입긴 하였지만 여간만 귀여운 아이가 아니였다. 일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하여 물도 긷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였다.

복진은 갓난이와 세간놀이를 할 때마다 새각시, 새서방이 되군 하였다.

윤복진네 집도 살기가 어려웠지만 누룽지가 생기면 갓난이 손에 쥐여주고 어쩌다 떡을 치면 갓난이네 집에도 가져갔다.

그런데 하루는 웬 일인지 갓난이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되여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윤복진은 갓난이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가만히 물어보았다.

《갓난이는 어디 갔나요?》

갓난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무런 말도 없이 먼산만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그러고있던 갓난이 어머니는 옷고름으로 눈굽을 닦고나서 갓난이가 아버지의 빚값에 팔려 먼곳에 부엌데기로 끌려갔다고 말해주는것이였다.

윤복진의 두눈에서도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후 윤복진네는 멀리 성밖으로 이사를 하였다. 새로 이사한 집은 자그마한 초가집이였는데 앞에는 대궐처럼 요란한 고대광실 큰집이 솟아있었다. 그때 대구에는 잘사는 지주들이 많았다. 그가운데서도 앞집은 소문난 큰 부자집이였다. 집은 대문이 몇개나 되는지 몰랐다. 성문처럼 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깥문과 안문이 있고 중간문과 사랑문이 있었다. 그 집에서는 일년내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거들먹거리며 호화롭게 살았다. 이른새벽부터 고기를 굽고 지지는 냄새가 높은 담을 넘어 풍겨오고 《순아, 순아?》 하고 부엌데기를 찾는 소리가 연방 들려왔다. 밤이면 술판을 벌려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혀꼬부라진 소리와 함께 기생들의 간드러진 노래소리, 장고소리가 그칠줄을 몰랐다.

어느해 여름, 며칠동안 내린 장마비에 그 부자집 담장 한쪽모서리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때에야 복진은 지주집 부엌을 들여다볼수 있었는데 너렁청한 부엌에서 부엌데기들이 땀을 흘리며 눈코뜰새없이 돌아가고있었다.

높이 쌓은 담장너머에서 부엌데기를 찾는 지주녀편네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는 잊지 못할 소꿉동무 갓난이를 그려보군 하였다.

그애는 어느 집에 끌려가서 죽을 고생을 다하고있을거야, 살아있기나 한지…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길가에서 오돌오돌 떨고있는 한 소녀를 보게 되였다. 그 모습이 신통히도 갓난이같아 가까이 가보니 다행히도 아니였다.

집에 돌아온 윤복진은 그날 밤 들창밖에서 흩날리는 차디찬 눈을 바라보며 동요 《쫓겨난 부엌데기》를 썼던것이다.

 

바람불고 눈오는 추운 겨울에

가엾은 부엌데기 쫓겨났어요

심술궂은 마님한테 쫓겨났어요

 

솜옷을 입어도 추운 겨울에

가엾은 가엾은 부엌데기 쫓겨났어요

홑옷입고 발발 떨며 쫓겨났어요

 

바람차고 눈오는 추운 겨울에

쫓겨난 부엌데기 어디로 가나

집도 없는 부엌데기 어디로 가나

 

동요에서 보여준 쫓겨난 부엌데기의 모습은 착취자, 압박자들에게 짓눌려사는 불쌍한 우리 어린이들의 운명이였다.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밝은 희망의 앞날을 안겨주지 못한 부족점이 있기는 하지만 쫓겨난 부엌데기의 눈물겨운 모습을 통하여 독자들의 가슴속에 지주를 미워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뜨거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윤복진의 눈물의 동요는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노래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일제의 가혹한 책동으로 해마다 수많은 우리 인민들이 살길을 찾아 남의 나라로 떠나갔다. 그 시절에는 한마을에서 살던 소꿉동무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의례히 부모를 따라 현해탄을 건너간것이였고 한학급에서 공부하던 동창생이 없어졌으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떠나간것이였다.

윤복진네 집살림도 점점 쪼들려갔다.

일제는 끈을 꼬아 장마당에 내다 파는 가내수공업자의 자그마한 기계마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가로막아 나섰다. 하여 그런대로 밥술이나 먹던 살림마저 가랑잎처럼 흩날리고말았다.

집안어른들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살아갈 길을 걱정하였다.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는 《우리 집 형편에 공부가 당치 않다. 우리 대에 와서 책 한권이라도 뗀 사람이 있으면 좋기는 하련만…》 하고 말하고나서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자 복진이 아버지가 나앉으며 《이제 한두해만 고생하면 중학을 마칠텐데… 하나밖에 없는 손주가 아닙니까.》 하고 하소연하였다.

윤복진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가슴아픈 이야기를 더는 앉아서 듣고만 있을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도 고향을 등지고 북간도로 떠나가야 한단 말인가.

그는 울적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발길 가는대로 걸었다. 그날따라 고향의 푸른 산과 넓은 들이 더더욱 유정하게 보이였다. 집앞을 감돌아흐르는 작은 시내물도 《가지 말아, 가지 말아.》 하고 속삭이는듯 하였다. 이 심정을 동요에 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일어났다. 직접 당하는 일이라 붓만 쥐면 단숨에 쓸것 같았다.

윤복진은 논두렁에 앉아서 북받쳐오르는 시정을 동요 《고향하늘》에 담았다.

 

푸른 산 저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그리운 하늘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저 산 넘어 하늘만 바라봅니다

 

처음에 그는 동요의 첫머리를 《푸른 산》으로 하지 않고 《백두산》으로 떼였다. 그때 두만강에 피눈물을 뿌리며 북간도로 떠나간 사람이나 관부련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 사람이나 그 누구 할것없이 백두산을 바라보며 내 고향, 내 조국의 앞날을 그려보군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검열때문에 《백두산》이라는 표현대신에 《푸른 산》이라고 쓸수 밖에 없었다.

빼앗긴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동요는 발표후 몇해가 지나 윤복진이 일본으로 가려고 도항증을 떼는데 애를 먹였다.

그가 대구경찰서를 찾아갔을 때 여우같이 생긴 고등계 주임놈은 차마 입에 담을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것이였다.

《우리는 대구소년회때부터 네놈을 주목해왔다. 어린 놈이 그때부터 배일사상이 강했다. 민요 〈우리의 마실〉을 비롯하여 우리를 반대하는 노래를 적지 않게 썼지. 그리고 두해전에는 고향을 노래하는척 하면서 조국을 노래했지. 〈푸른 산이란 무슨 산이야? 그것은 백두산을 두고 하는 말이지? 우리가 모를줄 아는가! 너 같은 놈은 공부를 하면 더 나빠질수 있다. 어디 한번 된매를 맞아보아야 정신이 들겠는가?》

윤복진은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참을수 없는 분한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으나 그 자리에서 당장 어찌할수 없었다.

그 이듬해 봄에야 그는 겨우 현해탄을 건너갈수 있었다.

윤복진은 도꾜에서 고학을 하면서 없는 시간을 짜내여 조선인류학생회가 운영하던 야학을 찾아다니며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쳤다.

빈민굴로 소문난 후꾸가와 혼죠, 스미다가와 마라기와 기슭에 가면 재일동포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윤복진이 재일동포들과 그 자녀들에게 새로 나온 우리 나라 노래를 배워주고있는데 동요 《고향하늘》은 이미 그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고있었다.

서글픈 감정으로 노래를 지었건만 이국땅에서 조국과 고향이 그리워 부르는 동포들을 볼수록 나라를 빼앗은 일제놈들에 대한 원한과 증오심이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1931년 봄, 도꾜에서 고학을 하며 창작활동을 벌리고있던 어느날 그는 조선에 갔다온 한 친구로부터 가슴뛰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인즉 백두산마루에 장군별이 높이 솟았는데 피끓는 조선의 젊은 용사들이 장군별두리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는것이였다.

그 친구는 두만강류역에 있는 친척집에 갔다가 들었다고 하면서 《백두산에 별이 솟네 장군별이 솟네》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윤복진은 이 소식을 혼자만 알고있을수 없어 몇몇 친구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들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들은 쉬쉬 하며 왜놈들의 귀에 들어가면 손에는 쇠고랑, 목에는 칼이 들어온다고 하면서도 신이 나서 수군거리는것이였다.

나래돋친 이 소식은 삽시에 도꾜와 요꼬하마 등 재일동포들이 살고있는 일본 각지로 날아갔다.

윤복진의 가슴은 환희와 격정으로 설레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백두산장군별과 그 용사들을 찬양하는 동요를 써야겠다는 욕망이 불같이 일어났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린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눈덮인 산발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백두산에는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을가. 빨찌산들은 눈속에서 나무잎을 덮고 자며 풀뿌리로 끼니를 에우겠지. 그러자니 고생인들 오죽하랴.)

동요에 그들의 생활을 담고싶은 심정은 절절하였지만 당시 일제가 우리 겨레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고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까지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펴놓고 출판물에 대한 감시에 미쳐날뛰고있는 조건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놈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넘길수 있는 백두산에 대한 동요를 쓸수 있을가 하고 오래동안 궁리하였다.

왜놈들을 속여넘기려면 상징과 은유의 수법으로 써야 했다. 그러나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오래 신고하던 끝에 그는 백두산을 《흰눈 첩첩 저 산》으로 표현하고 우리 겨레가 애타게 갈망하는 희망의 날을 《꽃피는 새봄》으로 표현하기로 하였다. 잘만 쓰면 어린 독자들도 련상할수 있다는 신심이 생겼던것이다.

그렇다면 춥고추운 겨울에 누구보다도 꽃피는 새봄을 앞당겨오기 위하여 앞장서서 날고있는것이 무엇일가. 나비? 하지만 나비는 너무 연약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옳지. 산새, 산새이다. 산에 사는 산새는 작아도 얼마나 강한가. 사나운 눈보라가 기승을 부려도 봄맞이뜻을 굽히지 않고 앞서 날며 노래를 부른다. 그래, 산새를 그리자. 그러면 독자들은 그 산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것이다. 그 산새는 바로 백두산의 산새, 장군별님의 용사들이라는것을 알게 될것이다.

이렇게 되여 윤복진은 《산새는야 춥겠네》라는 제목을 달고 동요를 써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산새는야 춥겠네

정말 춥겠네

 

흰눈 첩첩 저 산에서

어떻게 사나

 

산에 사는 저 새는

불새인가봐

 

여기까지 쓰고나서 《불새》라는 표현을 두고 오래동안 생각해보았다. 굳센 의지의 상징인 불새란 말을 써서 검열관놈들이 또 트집을 걸수 있었던것이다.

하고싶은 말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빙빙 에돌면서 쓰자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불새》라는 새의 이름을 놓고 거듭 생각해보던 그는 더 적중한 단어를 찾아낼수 없어 우리 나라 옛말에도 《불새》라는 말이 있으니 그대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산새는야 춥겠네

정말 춥겠네

 

꽃피는 새봄은

언제 오려나

 

기다리는 우리 봄아

어서 오려마

 

동요에서 《산새는야 춥겠네 정말 춥겠네》를 의도적으로 반복한것은 어린 독자들의 가슴속에 고생하는 산새의 표상을 강하게 새겨주자는데도 있었지만 놈들의 출판검열을 무사히 넘기자는데도 목적이 있었다.

동요가 신문지상에 발표되자 윤복진의 기쁨은 말할수 없이 컸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쓰고싶던 백두산에 대한 동요를 은유적인 방법으로 밖에 쓰지 못한것이 한스러웠다.

장군별님의 용사들을 뻐젓이 자랑스럽게 표현하지 못한 그는 망국노의 설음을 다시한번 통감하게 되였다.

그후에도 윤복진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지펴올리신 보천보의 불길이 온 삼천리강토를 붉게 물들였을 때 환희와 감격에 넘쳐 쓴 동요 《빛나는 사이다공패》(1937년)에서 항일유격대의 빛나는 위훈을 상징적인 사이다공패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여 쓴 또 어떤 동요에서는 왜놈병정을 《누렁병정》으로 에둘러 표현하여 발표하였다.

윤복진이 눈물의 나라에서 눈물의 동요밖에 쓸수 없었던 그 시기 강도 일제는 조선민족의 넋이 깃들어있는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까지 제놈들의것으로 고칠것을 강박하였다.

윤복진은 1940년대에 들어와 유희동요 《솔잎침》을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설음속에 쓰던 붓대마저 꺾지 않으면 안되였다.

작가로서 붓을 꺾는다는것은 참으로 가슴아프고 괴로운 일이였으나 일본말과 일본글로 쓸바에는 차라리 자기 손으로 붓을 꺾는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것이다.

창작에서 물러난 그는 1943년 가을부터 강원도 화천군의 유령광산에서 일을 하며 어두운 귀틀집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사랑하는 부모처자가 있는 고향을 멀리 떠나 홀로 살아야 했던 그 나날은 윤복진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저녁이면 가물거리는 광솔불을 바라보며 (새봄아, 새봄아, 어서 오려마.)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군 하였다.

드디여 고대하던 해방의 날은 왔다.

서울에서 8. 15해방을 맞이한 윤복진은 다시 붓을 들고 창작의 길에 나섰다. 하지만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가 일제시기와 다름없이 진보적문학창작을 광란적으로 탄압해나서자 정의의 피가 끓던 그는 미제와 리승만역도를 반대하는 진보적인 문화인대렬에서 인민들이 지향하고 요구하는 문학창작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였다.

그러나 미군정하의 남조선에서는 지난날과 같은 눈물의 동요밖에 창작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은 그는 새 생활이 꽃펴나는 공화국북반부를 찾아 떠나간 박세영을 비롯한 문학예술인들이 부러웠다. 자기는 왜 그들과 함께 떠나지 못했는가 하는것이 생각할수록 안타까웠다.

(언제면 나도 공화국북반부로 갈수 있을가?)

1950년 가을, 그는 드디여 전쟁의 불구름을 헤치고 자나깨나 마음속에 그리던 공화국북반부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디게 되였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윤복진이 우유부단했던 자신을 박차고 스스로 선택한 운명의 길은 그에게 어떤 미래를 약속하여주었던가.

이전페지   다음페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1)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2)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3)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1) 항쟁의 거리에서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2) 그가 안긴 품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3)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1)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2)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3)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4)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1)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2)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3) 그의 삶은 영원하다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1)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2) 인생의 가치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3)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1) 《해변》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2) 《5월의 농촌》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3)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4)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1) 족쇄를 찬 희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2) 환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3) 웃음의 철학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