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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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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까모도 나미오가 대학에 와서 박진우를 만나고 돌아간 그날 교문을 나선 두사람은 《와세다숲》이라고 불리우는 도꾜 서북쪽 교외로 갈가 하다가 서로 약속이나 한듯 우에노공원으로 향하였다.

전시의 어수선한 풍경은 사람들로 붐비던 공원입구 넓은 길에서 《검은 문》에 이르는 곳곳에 즐비하게 늘어선 차집, 각종 상점들의 한산한 모습에도 그대로 비껴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갈곳 없는 떠돌이살이군(랑인), 실업자, 걸식자, 범죄자들의 자태도 끊기지 않았다. 이렇듯 최하층을 이루는 이른바 서민들이 호화층, 지식층과 함께 존재하고있다는것 그자체가 우에노공원에서만 볼수 있는 특유한 잡색풍경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들은 이런 불가사의한 광경을 피하여 수림이 빼곡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너머에 있는 학술기관이나 예술학원, 동물원쪽으로 가는 정적인 숲이였다.

숲속에는 이름모를 무수한 꽃망울들이 바야흐로 터질 미구의 날을 그려보며 가벼운 봄바람에 한들거리고있었다.

싱그러운 봄향기에 흠뻑 취한 미사꼬는 정작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도 엄청나고 벅찬것이여서 쉽게 꺼내놓을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마음속 바재임이 크면 클수록 그 녀자는 박진우도 번연히 알고있을 왕청같은 소리를 하군 하였다. 가령 15메터나 되는 사이고 다까모리의 부식된 동상앞을 지날 때는 그가 조선침략을 제창한 《정한론자》였다는것을 상기시키면 박진우의 기분을 잡쳐놓을가봐 국내외에서 수집한 동물원의 맹금류들이 폭격에 뛰쳐나와 사람들을 해칠수 있어 아쉽지만 작년 여름에 처분하였다든가 재작년에는 전쟁형편이 절망적이 아니여서인지 이 공원 관람자가 무려 300만이 넘었다는 신문기사를 강조하기도 했다. 뿐아니라 자기가 박진우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가 하는것을 암시하려고 본인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있을 와세다대학 총장이였던 명치시대의 정치가 오구마 시게노브의 교육관이라고 하는 이른바 《정신의 독립은 학문의 독립에 의한 자유정신의 육성》이라는것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러고도 부족감을 느꼈는지 그 녀자는 그의 교육관을 엉뚱하게도 박진우의 강한 자존심에 억지로 틀어맞춰보다가 론거가 유치하다는것을 깨달았는지 깔깔거리며 웃음을 호들갑스럽게 웃는것으로 굼때기도 했다.

박진우자신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그 녀자는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어느덧 틈도 두지 않고 어깨나란히 걷게 된것이 마치 바라던 숙원이 이 한순간에 너무도 쉽게 풀린듯 기분이 한껏 떠 이름없는 들꽃 한송이를 뜯어들고 향기를 맡느라 부산을 피웠다. 그때마다 아무말도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는 박진우가 야속한지 고운 눈을 해뜩 흘기기도 하고 빨간 입술을 삐죽거리기도 했다.

그들은 깊은 숲속 이끼낀 진대나무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음침하면서도 호젓한 수림의 정서가 갑자기 숙성한 두 청춘남녀를 까닭없이 신중하게 만들어놓았는지 서로 정중하게 대하려고 무진애를 쓰게 했다.

《참 미사꼬, 의사에게 들으니 약때문에 무척 애를 썼다더군. 미안하오. 그리고 가져다준 최신항만건설잡지 덕분에 내 눈이 굉장히 넓어졌소.》

박진우는 진정으로 치사하였다.

《그런 말씀 딱 질색이예요.

우리들사이에 그런 외교적인 인사가 꼭 오가야 하나요?》

그 녀자는 갑자기 뾰로통해졌다.

《굳이 치사하겠으면 오까모도에게 하셔요. 약값도 잡지도 그 아저씨가… 수재에게 뭘 아낄게 있는가고 하면서 보내주었으니 말이예요.》

박진우는 저으기 놀랐다. 약값으로 아무리 거액의 돈을 썼다고 하더라도 별로 마음싸지는 않았으나 잡지를 그가 보내준것은 참으로 감사하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진우는 취직권고를 받아들이면 그런 구할수 없는 책들을 더 많이 얻어볼수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와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그렇소? 참으로 고마운 선배님이군요.》

《이젠 그런 딱딱한 이야기는 그만하자요. 선생님은 인간생활에서 책밖에 모르시는가보죠?》

미사꼬는 진우를 골려준것이 깨고소한지 깔깔 웃었다.

한동안 깔깔거리던 그 녀자는 돌연히 정숙해졌다. 그리고 억년가도 말할것 같지 않은 침묵을 지키며 고정하게 앉아있었다. 호들갑을 떨 때보다 침묵을 지키는것이 진우는 왜 그런지 싫었다.

《참 선생님, 오늘은 좋은 날인데 제 생각을 죄다 털어놓아도 탓하지 않으시죠? 좋은 날에 한 이야기는 죄되는 법이 없다나봐요.》

무거워졌던 침묵을 먼저 깨친 미사꼬가 작고도 고운 두손으로 공연히 앞가슴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는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허나 그런 동작도 잠시뿐 그 녀자는 박진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떨리는 소리로 묻는 그 녀자에게 박진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전, 전 아이참 어떻게? 참 선생님은 제, 제 운명을 책임져야겠다는 의무를 느껴본적은 없는가요, 네?》

여전히 올려다보기만 하던 그 녀자의 까만 눈은 젊은 생기가 뿜어나오다못해 활활 불타고있었다.

질문을 받은 박진우는 못내 당황하였다. 대범한척 덤덤히 앉아있었으나 그는 짙은 눈섭조차 이 순간에는 꿈틀거리지 못할만큼 긴장해졌다.

갑자기 서먹서먹해진 감정을 더는 견딜수 없었던지 그 녀자는 박진우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전, 선생님이, 아니 당신이 이미 저의 심혼과 그밖의 모든것을 벌써 마이즈루앞바다에서 빼앗아갔다고 말하려댔어요. 그러니 무장해제된 전 어떻게 하면 좋아요? 대답해주세요. 이건 저의 진정한 심정이며 솔직한 고백이예요.》하며 중얼거렸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런지 당돌하다고 해야 할런지 모르겠으나 갑작스러운 질문앞에 박진우는 말문이 막히고말았다. 허나 회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미 어느때인가 이 녀자에게서 이러루한 이야기가 튀여나오지 않을가 예감한것만큼 그는 미사꼬의 진정을 불타는 눈속에서 알아차렸고 벌써 응할 마음의 차비가 돼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월감이 강한 사람들의 못된 버릇대로 또 이지러진 소리로 《내가 〈반도인〉이라는걸 망각한게 아니요?》하고 퉁명스레 내쐈다.

《전 그런걸 몰라요. 알고싶지도 않고요. 여기에 그런 관념이 어째서 끼여들 자리가 있나요? 전 다만 당신의 그 뛰여난 두뇌와 고상한 인품에 넋을 빼앗겼을뿐이예요.

당신이 받아주신다면 전 당신의 노예로, 영원한 노복으로 충실하게 살 결심을 내렸을따름인걸요. 이젠 처분에 따르겠어요.》

격정에 넘쳐 불붙는 심정을 토하고난 그 녀자는 마치 사선을 헤쳐온 사람마냥 희디흰 볼에 땀을 쫙쫙 흘리고있었다.

박진우는 더이상 침묵을 유지할수 없었다. 만약 고집스럽게 침묵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벌써 자기 기만이며 진정만을 갈망하는 미사꼬를 우롱하는것으로 될것이다.

허나 선뜻 대답할수도 없었다. 대답을 하자니 너무도 갑작스럽기도 하거니와 마음이 콩볶듯 튀여 두서를 잡을수도 없었다. 다만 자기에게 노복을 다짐하고나선 처녀, 가장 순결한 마음으로 민족우에 사랑을 앉혀놓고 그앞에 무릎을 꿇으려는 처녀, 그런 처녀에게 침묵으로 이 자리를 모면하기에는 자기의 량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미사꼬를 쭈그러뜨려놓기라도 할듯 으스러지게 감싸안았다. 그리고 놓아주지 않았다.

박진우의 품에 안겨 행복에 겨워 모든것을 잊고 그의 흥분된 얼굴을 넋없이 쳐다보던 그 녀자는 자기의 깨끗한 사랑이 드디여 박진우의 리해를 얻어 바야흐로 성공의 문어구에 들어섰다는것을 피부로, 심장으로 느꼈다.

깜찍한 참새가 《어두워지는걸요.》하고 놀려대며 다가오는듯싶어졌을 때 그들은 아쉬움을 안고 일어섰다.

하숙으로 돌아온 박진우는 오까모도의 취직권고에 이렇다할 반대근거도 없이 지나친 의심만 품어오던 지난날을 다시한번 곰곰히 따져보았다.

권고를 받아들이면 눈앞에 닥쳐올지도 모를 징병, 징용을 면할수 있을뿐아니라 더 배울수 있는 조건이 담보돼있다는것이 무엇보다도 현실적이였다. 자기의 졸업론문을 마치 특허처럼 값높게 인정해주는 허심한 태도, 선배들의 기성연구성과들을 쉽게 습득하도록 해주겠다는 유혹―이것은 박진우로 하여금 오까모도의 권고를 고맙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했던것이다. 게다가 미사꼬의 집요한 간청은 그의 마음을 기울게 하는 지레대가 되였다고 할는지…

좀 께름직한것은 사복차림으로 론문변론장에 나타났던 오까모도가 미사꼬의 말에 의하면 해군대좌라는것이다.

그가 왜 처음부터 항만건설기술자로서 해군성에 복무한다는것을 명백히 하지 않았을가 하는 의혹도 없지 않았지만 군항이든 민항이든 항만건설기술이야 어디 가겠는가. 더구나 지금과 같은 전시조건에서 정부나 업체들이 민항건설에 눈돌릴 여가가 없다는거야 불보듯 뻔한게 아닌가. 어차피 군항건설에 몸을 잠그더라도 노린 목적이 달라질것도 아니며 그 뜻만 이룩된다면 전쟁이 끝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그것을 현실로 꽃피우면 될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그 의혹을 눌러버렸다.

야심만만해진 박진우는 도꾜에서 떠나기 앞서 성대한 졸업식에 당당한 주인으로 참가했다.

《어디에 가더라도 모교의 영예를 떨쳐주게.》

《야, 부럽구나. 수재로 인정되자마자 지옥과도 같은 징병, 징용에서도 면제되는구만.》

《이봐 친구, 이제야말로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내선일체, 1억1심할 때야,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쭈그러들지 말고 그 탁월한 지식을 제국의 필승에 이바지해주게.》

교수들과 동창들의 격려를 받으며 그는 교문을 나섰다.

그는 기다렸다는듯 총알처럼 날아온 무라야마 미사꼬의 땀배인 손에 잡히웠다. 그 녀자가 안겨주는 빨간 장미꽃송이를 받는 순간 그는 자기의 졸업을 축하해줄 밭은 친지도 없는 고독한 타관이라 대번에 감격에 휩싸였다.

쓸쓸하고 외롭던 고학시절은 이로써 드디여 끝장나고 이제부터는 빨간 장미꽃을 마음속에 품은 보호자, 의탁자나 다름없는 미사꼬의 지극한 관심속에 화려한 새 생활이 바야흐로 대문을 열어제끼고 기다리고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듯 뿌듯하였다.

그는 쉼없이 묻고 조잘거리는 그 녀자의 이야기를 마치 노래처럼 들으며 이끄는대로 걸었다. 고학시절에는 지겹도록 괴롭히던 거리가 오늘은 웬일인지 푹 정든 거리처럼 안겨왔다.

《끝내 소원성취하셨어요. 다시한번 축하를 드려요. 대학거리에서는 온통 칭찬뿐이더군요. 선생이 음악의 오묘한 세계를 깊이 알고있듯이 저도 일찍부터 항만건설 지식을 다소나마 소유했었더라면 이런 날 졸업론문의 진가를 더 값높게 사주어 보다 기쁘게 해드릴것인데, 그럴수 없는 저라는 존재가 민망스럽군요. 용서해주세요. 그대신 제 선생의, 아직은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섭섭해마세요. 그대신 우리 집에 선생을 초대하겠어요. 선생의 자격으로 응하셔야 해요. 물론 파티는 아니예요. 그저 졸업을 축하하는 저의 성의뿐인걸요. 마음껏 즐겁게 해드릴길이 저에게는 더이상 없으니까요.…》

그 녀자는 수집은듯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나 어둠이 깃들자 스스럼없이 박진우의 팔을 끼고 걸으며 어린애처럼 깡충거리기도 했고 신사숙녀처럼 정도이상 점잔을 피우기도 했다.

천진란만한 몸가짐과 익살군다운 장난과 해학이 넘쳐나는 롱담, 아낌없는 찬사로 즐겁게 해주려는 미사꼬의 참사랑을 느끼며 박진우는 어느덧 무척 정갈한 자그마한 목조건물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뭘 우물쭈물하세요. 제 집이예요. 아버지는 안계셔요. 노상 바다에 떠다니시니까요.》

그 녀자는 마치 이 집의 주인이 뭘 주저하느냐는듯 그의 등을 가볍게 밀며 박진우를 앞세웠다.

마루를 깐 좁은 복도를 거쳐 경사가 급한 나무계단을 톺아오른 그들은 규격맞춰 깔아놓은 다다미방에 들어섰다.

방안에는 참숯불화로가 이글거려 몹시 훈훈하고 아늑하였다. 방안 한복판에는 검은색바탕에 흰자개박이 네모교자상이 놓여있고 량켠에는 물에서 노니는 원앙새 한쌍을 수놓은 진곤색모본단방석이 단정하게 놓여있어 안온한감을 한층 북돋아주고있었다.

《이건 뭐요?》

박진우는 일본집 어데서나 볼수 있는 수수한 방보다도 어쩐지 그 녀자가 의의를 부여했을 첫 초대에 준비없이 온것이 어색하고 옹색하여 우정 걸걸하게 물었다.

말뚝처럼 서있을수만 없어 무심히 던진 말이였으나 그의 기분은 곰팡내가 풍기는 하숙방과 너무도 상반되는 방이여서 마음이 차차 평온해지는것을 느꼈다.

《너무 서둘러 재촉하지 마세요. 전 아직 마담이 아니니까요.》

독촉도 아닌 물음에 왕청같은 대답을 하는 그 녀자도 하냥 즐거운지 백옥같은 흰이를 살짝 드러내며 상냥하게 웃었다.

박진우는 그 녀자가 잡아끄는대로 축음기옆에 가앉았다.

진우의 약값으로 저당잡히려던 축음기였다.

《좀 기다려야 해요. 그동안 저기 저의 사진첩을 보시든지 수집한 민요들을 취입한 레코드를 들으시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하시죠?》

그 녀자는 동의를 구하는척 하면서도 그건 인사치레뿐이고 어느새 제 손으로 사진첩을 갖다바치고 축음기를 틀어놓았다.

타악기의 발작적인 리듬이 울려나왔다.

그러자 얼굴을 살짝 붉힌 그 녀자가 《귀설지요?》하고 서둘러 꺼버렸다. 몰취미의 일단을 드러내보인것이 창피하였던지 이번에는 은은하면서도 폭넓은 선률의 레코드를 틀어놓았다. 마치 광활한 황야에서 외로운 나그네가 끝없이 헤매이는듯한 쓸쓸한 곡상의 민요여서 그런지 박진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묵묵히 듣기만 했다.

어느덧 교자상에는 학생신분의 그 녀자로서는 좀 지나치다고 할만큼 갖가지 맛나는 음식이 올랐다.

《시장하셨을테죠? 어서 나앉으세요.》

그들은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따끈하게 데운 왜소주가 잔에 쏟아져내리면서 연한 김을 피워올렸다.

잔을 섬겨받는 박진우의 마음은 어느덧 가벼워졌다.

기나긴 고학시절에는 있어보지도 못했고 바랄수도 없었던 좌석이 그의 고달프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던 심혼을 한껏 유혹하고있었다.

《가만, 우리 둘뿐이니 나도 미사꼬에게 한잔 부어야 하지 않을가? 그 술병을 이리 주오.》

박진우는 극력 사양하는 그 녀자의 손에서 술병을 넘겨받았다.

목밭은 백자술병을 넘겨받자 그는 술을 치려고 손을 뻗쳤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앉았던 그 녀자가 웃몸을 반쯤 일으켜세우고 두손으로 술잔을 받쳐들었다.

《벌써부터 강권을 발동하면 전 못견뎌요. 하지만 권고를 물리칠바 가히 없어 그저 받아만 놓게 해주세요.》

저으기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든 그 녀자는 세배하듯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하하, 술을 멀리하면 정열의 예술인 음악가로서의 자격이 없지 않을가? 우리 나라 속담에 술은 정으로 마신다고 했소. 동무도 안해주겠다니 정도 달아날테지.》

《꼼짝못하게 강박하시네. 그럼 기꺼이…》

두사람은 잔을 쳐들었다.

《미사꼬, 무엇을 위해 들가?》

술에 들어서는 그 역시 애숭이였지만 일부러 어른됨을 과시하고싶었는지 허세를 부렸다.

《제 선생님의 성공을 바라며 영원한 노복이 되겠다고 맹세한 오늘의 약속을 죽어서도 고수하기 위해서 잔을 들겠어요. 선생님, 불쌍한 이 소녀를 생각해서라도 꼭 성공해주세요. 간절히 빕니다.》

그 녀자는 다시한번 고개를 갑삭거리고 박진우의 잔굽에 자기의 잔을 갖다찧었다. 좀 방정스럽게 보였지만 그 녀자의 축원이 가식이 없고 너무도 진지하여 제법 공식석상에서나 느끼게 되는 엄엄한 분위기가 방안에 떠돌았다.

《고맙소, 고맙소. 하지만 내 오늘만은 미사꼬가 입버릇처럼 외우던 생명의 은인된 자격으로 마시겠소.》

《아니, 전 싫어요. 싫단 말이예요. 제가 노예로 되겠다는건 노예주가 이미 정해져있다는것을 뜻하는게 아닌가요.》

미사꼬는 정중하게 강조하였다.

《정 바란다면 우리에겐 혼례식때 동배주하는 관습이 있는데 내 그런 뜻으로 이 잔을 들어도 일없을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으나 방안공기는 가벼워진게 아니라 예상밖에 더 무거워졌다. 미소를 머금고 잔을 찧던 때와는 달리 그 녀자가 갑자기 어깨를 떨며 울고있었던것이다. 기쁨에 겨워서인지 행복에 겨워서인지 그것은 그 녀자자신도 미처 가늠할수 없는 그런 격정의 분출이였다.

《미사꼬, 이러지 마오. 이 좋은 날에 왜 우오?》

녀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이런 때 처녀가 왜 돌연히 우는가 하는것을 알지도 못하고 당해보지도 못한 박진우는 당황하였다.

《울음을 거두겠습니다. 너무도 고마와 그만 실례했습니다.》

미안해서 몸둘바를 몰라하던 미사꼬가 눈물고인 눈으로 진우가 들고있는 잔을 정담아 바라보며 어서 들라고 몇번씩이나 간청하였다.

박진우는 서슴없이 마셨다. 따끈한것이 목을 지지며 넘어가자 그 녀자는 희고 쑥 빠진 목을 갸웃이 숙인채 《그럼 소녀도 달게 마시렵니다.》하고 잔을 입술에 댔다가 떼더니 재빨리 내려놓고 음식그릇를 두손에 받쳐들고 박진우의 턱밑에 바싹 내밀었다.

무심히 내려다보던 박진우는 저으기 놀랐다. 흰 잣알과 빨간 실고추, 파아란 실파 그리고 얇고 네모나게 썬 무우가 둥둥 떠있는 조선나박김치였다.

(저 녀자가 어떻게 조선음식을?)

아무말도 할수 없게 된 박진우는 눈앞에서 아물거리는 연한 실안개를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제앞에 놓인 왜식도자기 사시숟가락으로 김치국물을 입에 떠넣었다. 새큼하고 찬 김치국물은 목을 타고 흘러든 술 못지 않게 그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조선처녀도 아닌 그 녀자가 고마와, 그 마음과 정성이 갸륵해서 박진우는 이 좌석이 한갖 시시껄렁한 소리나 하고 인상좋은 웃음이나 남기고말 그런 자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중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 곳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그는 고맙다는 치사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 녀자의 갸륵한 마음을 값눅은 몇마디로 굼때는것자체가 미안하고 경박한짓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는 미사꼬의 진정에 떠받들리여 한껏 취하고싶었다.

그러나 취해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왜냐면이 소중한 자리를 술의 도움으로 너스레나 피우고 실속없는 허세로 빈 약속을 하는 자리로 만들고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그보다도 더 좋기는 지금 서로가 다른 민족이라는 엄청난 장벽을 더 높이 쌓아올리고 약동하는 젊음도 무모한 정열도 서서히 눅잦혀 얼마전처럼 범속한 인간관계로 되돌려세웠으면 하고 그는 바랐다. 이런 의미에서 두사람의 생각이 같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또 그럴 필요에 대하여 서로 생각해보지 않은것은 아니나 그들이 너무도 젊은탓에 쉽게 망각해버리고말았던것이다.

박진우가 최후정점에로 줄달음치려는 걸음을 잠시 멈춰세우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가라는 속담에 마음쓰게된것은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는 단순하지도 않고 정상적인 관계도 아닌 자기들의 결합을 어떤 풍파에도 깨여지지 않을 하나의 세포로 탄생시키려면 좀 어색하고 새삼스럽긴 하지만 이제라도 미사꼬의 최후결심을 다시 듣지 않을수 없었다. 또 자기자신도 그 녀자앞에 깨끗한 마음으로 정중하게 언약해두는것이 미덕이기에 앞서 인간된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일본처녀에게서 나박김치나 대접받았다고 하여 우물쭈물 얼버무리고 그냥 스쳐지날 일이 아니라는것을 자각한 그는 미사꼬가 또 쳐준 술잔을 소리나지 않게 상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아해서 쳐다보는 그 녀자의 까만 눈동자를 불태워버리기라도 할듯이 이윽토록 여겨보았다.

《아이, 왜 저를 그렇게? 눈에 티가 끼였나요? 아니면 그 눈길로 저의 눈을 뚫러놓으려고 그래요? 설사 뚫러놓는대도 전 조금도 무서워 안할텐데요.》

그 녀자는 장난을 하듯 어리광을 부리며 볼테면 실컷 보라는듯 한모금 술에 발깃발깃해진 눈과 볼을 한껏 가까이 내댔다.

두사람의 눈길은 흔들리지도, 휘여지지도 않고 그냥 맞댄채 강렬하게 엇갈렸다.

어느쪽도 먼저 내려깔념을 안하는 눈길은 상대방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속을 밝혀내려는듯 예리하면서도 끈덕지게 오가며 섯돌고있었다.

숙어들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 눈길에 그 녀자의 굳은 의지가 어려있음을 확신한 박진우는 드디여 술잔을 다시 잡고 《미사꼬, 우리 서로 심중을 털어놓을 필요가 있을가? 새삼스레, 그러니 이 술잔을 찧는것으로써…》하고 정중히 제기하였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그 녀자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였다.

오늘로써 인생의 전환점이 결정되면 천진하고 꿈많던 처녀시절은 드디여 끝나고 운명의 배에 실려 정해진 항로를 따라 어데론가 쉼없이 흘러가 되돌아오지 않을것만 같은 아쉬움이 이 순간 그 녀자를 서글프게 해주고있는지도 몰랐다.

했건만 그 녀자는 묵묵히 그리고 침착하게 잔을 들어 박진우가 쳐든 잔밑굽에 조용히 갖다대더니 《먼저 드셔요.》하고 매우 자애로운 소리로 권했다. 역시 그 녀자도 이 운명의 갈림길을 정중하고 엄숙하게 맞을 최종결심을 힘겹게 내린것 같았다.

뒤따라 잔을 비우고난 그 녀자가 이번에는 안주를 권하거나 들지도 않고 무릎을 고쳐 꿇고 옷깃을 단정하게 여미였다.

《전 이미 심중을 깡그리 털어놓았습니다. 경솔했다면 용서를 빌겠어요. 하지만 일시적흥분에 못이겨 고백했다고는 제발 생각지 말아주세요. 귀국에 갑작사랑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더군요.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재삼 말씀드리지만 전 박진우씨의 그 자신만만해하는 실력과 도고한 넋 그리고 말씀드리기에는 얼굴이 간지럽지만 사나이다운 미모에 홀딱 반했나봐요. 그런 자존심과 넋, 사내다운 기질을 지닌이는 한번 품은 마음 쉽게 버리지 않는다고 저는 알고있답니다. 굳이 한마디 더한다면…》

하던 말끝을 흐린 그 녀자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였다.

《소녀가 진정으로 바라는건 그저 한 일본녀인이 당신을 열렬히 사랑했다는 추억을 잊지 않으신다면 전, 전 더 바랄게 없답니다.》

방금까지 정숙한 자세로 앉아있던 그 녀자가 갑자기 발딱 일어나 씽 하고 다가오더니 무엇인가 말하려는 박진우의 입을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막아버렸다.

박진우의 진정을 듣는것이 못내 두려웠던지 눈물이 맺힌듯한 귀여운 눈으로 이윽토록 내려다보던 그 녀자는 《미워요. 보기 싫어요.》하고 중얼거리며 그의 두어깨를 다듬질하듯 콩콩 두들겨댔다.

《하하, 살려놓으니까 내 보따리 내놓으랬다는 격이로군그래. 응? 미사꼬.》

박진우가 소리내여 웃으며 잔을 마저 내였다. 그러나 그녀자의 량볼에서는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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