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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회


제 1 장

7


배가 무쯔만을 뒤에 남기고 혹가이도와 아오모리사이에 길게 가로누운 쯔가루해협을 벗어나 남쪽으로 기수를 돌리자 박진우는 온몸이 나른해졌다. 하루사이에 벌어진 복잡한 일들이 일단 제나름으로 수습되자 그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저도모르게 깜빡깜빡 졸았다. 더구나 이제는 고향에 가게 됐구나 하는 안도감이 건장한 육체와 강한 의지력을 지닌 스물세살의 박진우를 배의 동음조차 느끼지 못하게 잠속에 몰아넣었다.

얼마나 깊이 잤는지 그가 눈을 떴을 때에는 사위가 온통 환한 보름달속에 잠긴 한밤중이였다. 이따금 저 멀리 해안선에 나타나군 하는 불빛만이 배가 쉼없이 항행하고있다는것을 암시해줄뿐이였다. 그 불빛은 어째서인지 박진우에게 짐작할수 없는 불안을 안겨주는것 같았다.

미지의 불안―그것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끝내 따라나선 무라야마 미사꼬가 이 배로 함께 귀국한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초래된 심리적인 고뇌에서 오는것이 아닐가? 해방된 오늘 일본녀자를 데리고 귀국하면 고향이 자기를 어떤 태도로 맞아줄것이며 낳아주고 키워주고 공부시켜주느라고 손에 피멍이 들었을 시골아낙네인 어머니는 어떤 표정으로 대해줄것인가? 메마른 앞가슴에 자식을 품어주지 못해 밤마다 잠을 설쳤을 어머니가 너무도 억이 막혀 막 달려오던 걸음을 멈추고 땅을 치며 터지는 울음을 씹어삼키지는 않을가?

내 그런 어머니를 무슨 말로 설복하며 위로해줄수 있단말인가.

박진우는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였다.

내 어찌다가 일본녀자와 인연을 맺어 이런 괴로움을 겪게 되였단 말인가. 기쁨안고 귀국하게 된 이 마당에서…

그는 각박해진 자기의 처지를 두고 이리저리 변명해보았으나 그 모든것이 허위이며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다는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 이제라도…)

따라오는 미사꼬를 뿌리치고 홀로 귀국하자고 결심을 내리자니 이번에는 인간으로서 량심과 의리가 없는것 같아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 미사꼬의 허상이 생생하게 나타났다. 울며 바지가랭이에 매달리는 미사꼬가 아니라 《어서 그렇게 하세요.》라고 하며 상냥하게 웃고있는 그 녀인이…

(아, 정녕 그렇게 할수 없어. 엄마한테, 고향사람들한테 밟혀죽는 한이 있더라도…)

박진우는 미사꼬의 그 상냥한 미소가 가슴속에 별처럼 박혀있다는것을 부정할수 없었다.

상봉이 잦아질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별처럼 느껴지군 하던 그였다.

그 별은 곰곰히 따져보면 그가 가장 곤경을 겪고 심한 고독감에 모대길 때 마음속에 새겨진것으로 하여 더욱 강렬한것으로 인박혀지는것 같았다. 그 별이 처음으로 마음속에 자리잡은것은 아마 작년봄이였을것이다.

년초부터 공부하는 시간보다도 엄청나게 더 많이 강요된 전시부역에 전적으로 내몰릴 때였으니까. 지겨운 고역, 허기진 배, 반겨줄이 없는 낯선 타관하숙, 끝없는 부역으로부터 오는 권태감, 학생인지 품팔이군인지 구분할수 없는 생활― 이 모든 생활의 다반사가 무시로 들이닥치자 그는 끝내 고독감에 사로잡히고말았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것과 같은 매우 범상한 자연의 정상적인 변화조차 느낄수 없을만큼 모든게 귀찮아졌고 모든것에 지쳐버렸다. 더 살아야 하겠는지 죽어야 하겠는지 모를 지긋지긋한 절망속에서도 계절은 찾아와 봄꽃이 만발하던 저녁 그는 부역에서 돌아와 우에노역에서 내렸다.

상긋한 봄향기가 확 풍겼다.

역사를 나서자마자 펼쳐진 우에노공원의 온갖 꽃들이 독특한 향기를 뿜고있었던것이다. 하숙이라고 찾아가야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지쳐버린 그는 공원에 놓여있는 긴걸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라리 꽃향기라도 게걸스럽게 맡고싶었다. 피곤에 몰린 눈은 자꾸만 내려감기였으나 꽃향기에 취한 그에겐 어느덧 고향집의 따끈따끈한 구들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고달픈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불쑥 떠오른것이 안방구들이였으리라. 그리운 고향집이 눈앞에서 얼른거리자 그렇지 않아도 일어설 기력이 없던 그는 걸상등받이에 기대여 팔로 턱을 고인채 스르르 잠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꽃속에 묻혀 사색에 잠긴 대학생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가?

《아이참, 얼마나 찾았다고요. 이렇게 만날줄이야. 참으로 죄송해요.》

박진우는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수 없었으나 분명 녀자의 청고운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여났다. 천근무게가 실린듯 깔깔하고 텁텁해진 눈을 겨우 떴을 때 그는 흔히 동화속에 나오는 요정인지 아니면 영화화면에 나타난 아릿다운 녀배우인지 가려낼수 없었으나 백설과도 같이 샛하얀 이발을 약간 드러내며 상냥한 웃음을 짓고있는 미모의 처녀가 너무도 반가와 어쩔줄 몰라 서있는것을 띠여보았다.

그는 혹 마녀에게 홀리지 않았을가싶어 눈을 비비며 다시 올려다보았다. 어덴가 낯익어보이기도 하고 생판 모르는 녀자같기도 했다. 다만 처녀의 손에 오선지책이 들려있는것이 꿈이 아니라는것을 시사해줄뿐이였다.

《실례했습니다. 명상에 잠기신걸 방해해서, 절 모르시겠습니까?》

《?…》

박진우는 못마땅한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나치게 무례하고 거만한 눈길로 처녀를 피뜩 살펴보고 또다시 눈을 감았다. 숙녀차림의 비밀창녀가 득실거리고 간사한 웃음으로 순박한 학생들의 여윈 주머니를 해묵은 먼지와 함께 털어내고 간을 빼내여 곧잘 얼간이로 만들어놓는 일본땅이라는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그는 달아나거나 쫓아버리고싶었으나 지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외면해버리고말았다.

《그렇게도 기억이 나지 않나요? 지난 여름 마이즈루앞 바다에서…》

(아, 그 녀자로구나. 《우끼시마마루》조타수의 딸.)

그는 눈을 감은채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마이즈루의 무인도를 상기하였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우에노음악학교 학생 무라야마 미사꼬라고 부른답니다. 죄송합니다. 생명의 은인을 오늘에야 찾아뵙게 된 제가 무슨 인간이겠어요. 해를 넘겼지만 만난김에 그때 약속한대로 사례하겠어요.》

박진우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저 녀자는 나를 무엇으로 알고 만나자마자 계산을 하려드는가. 비록 왜땅에서 고학하고있지만 난 그런 너절한 사례나 받자고 살려주었거나 저주로운 이곳까지 온게 아니다. 너희네 족속에게 배우긴 하지만 난 그것으로 하여 일본사람들에게 비굴하게 빌붙거나 동정을 바라지는 않아. 내 너희들에게 얕잡아보일것 같은가. 천만에, 지금은 내 처지가 이꼴이지만 미구에 너희들의 두뇌진을 짓밟고 그우에 디디고 올라서려는 야심으로 꽉 차있는 조선청년이다.

박진우는 제나름의 이런 긍지와 반발심으로 하여 그 녀자의 동정에, 아니 한푼이라도 틀리지 않게 철저히 회계하려는 장사군다운 처사에 속으로 침을 뱉았다.

《미사꼬양이라고 했지요? 예술을 지향한다면서 회계를 하자니 부끄럽지도 않소? 내앞에서 당장 그 말을 철회하고 용서를 빌지 않으면 가만히 둬두지 않겠소.》

쏴보는 박진우의 눈은 무섭게 번뜩거렸다.

미사꼬는 가슴이 섬찍하였다. 자기로서는 극히 례사로운 인사치레로 인간의 도리를 지키려고 한것인데 저 청년은 어찌하여 정도이상 펄펄 날뛰는것일가? 그것도 처녀앞에서.

그는 도저히 리해할수 없었다. 허나 그는 상대가 무례하게 나오긴 했으나 어쨌든 그렇게 찾지 못해 애써온 생명의 은인을 만났으니 참는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청년의 무례함은 자기의 존엄을 귀중히 여기는 도고한 인간에게서만 찾아볼수 있는것이 아닐가 하고 넓게 리해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두, 제가 그렇게 처신하지 않으면 전 인간다운 인간이 못되지 않습니까? 그쪽에서도 저의 딱한 립장을 조금이라도 리해해주셨으면 해요.》

례의를 중히 여겨온 미사꼬는 어느 정도 주눅이 들긴 하였으나 자기의 진의도를 저저이 납득시키려고 했다.

미사꼬의 이런 언행은 박진우로 하여금 지나치다 할만큼 독선적인 태도를 다시 되돌아보게 할 틈을 가지게 했다.

생각해보면 자기가 터뜨린 분노는 인간들, 특히 식민지청년들을 전쟁의 희생물로 마소와 같이 취급하는 이 나라 《대본영》에 대한 맺힌 원한의 폭발이였다. 그 울분과 잠재의식이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미사꼬에게 분풀이를 하게 한셈이였다. 설사 그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사례하겠다고 한 말만은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다고 박진우는 생각하였다.

《그만두시오. 인간을 사경에서 구원하는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도 범상한 일이란 말이요. 그런데 그걸 마치 대단한 미덕인것처럼 여기며 날보고 코에 걸고 다니라는거요?》

박진우의 주장은 의연 완강하였으나 격했던 심정은 저으기 풀리였다.

《알겠습니다. 꼭 바라신다면 저의 경솔로 인정하고 철회하렵니다.》

미사꼬는 자기의 응당한 례의를 받아주지 않는 그가 야속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아직까지 대해온 뭇남자들에 비해 전혀 다른 성품을 지닌 사나이라고 짐작하였다. 흔히 보아온 남자들은 일부러라도 그런 기회가 차례지지 않아 안달아하며 의례히 치근거리지못해 몸살을 하는 무례한들이였다. 그러나 그런 《혜택》을 전혀 바라지 않는 저 청년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것이상 큰 은혜가 없을진대…

미사꼬는 어쩐지 첫눈에도 비천한 청년의 외모보다도 그가 지녔을 고상한 인도주의와 훌륭한 정신세계에 놀랐으며 그것으로 하여 오히려 심한 구속감을 느꼈다.

《솔직히 진심으로 사례하고싶었어요. 절 상인다운 녀자라고 치부해도 말입니다. 실례이지만 잊지 않으렵니다.》

미사꼬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속삭였다.

박진우는 그의 솔직한 고백에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서 자기 소개를 해야 례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식민지청년에게 사례가 당치 않을텐데요.》

박진우는 조선사람이라는것을 숨기지 않았다.

순간 웃고있던 미사꼬의 눈에 실망과 당황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고학생활에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더구나 낯선 타국에서…》

미사꼬는 동문서답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피차 서먹서먹해질 감정을 재빨리 피하려는 그의 기지는 예상외로 기발하였다.

《습관됐는걸요.》

《그러세요? 마침이군요. 제 그렇지 않아도 반도인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처녀는 수집게 웃었다.

《도와드릴게 있으면 도와드리지요. 하지만 내앞에서 두번다시 〈반도인〉이라는 표현을 쓰면 나는 그가 비록 미사꼬양과 같이 연약한 녀자라고 하더라도 결코 용서할수 없습니다.》

박진우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반도인》이란 표현은 왜놈들이 조선사람들을 극도로 멸시해서 부르던 대명사였던것이다.

《노엽혔다면 다신, 습관이 돼놔서…》

미사꼬는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 녀자는 그제야 옆에 다소곳이 앉으며 오선지책을 내보였다.

《이건 조선민요예요. 또 노엽히는게 아닌가요?》

박진우는 악보를 덤덤히 내려다보았다.

《전 민요수집애호가라고 할는지, 세계민요를 죄다 수집하려고 한답니다. 목적은 뚜렷하지 않지만 아마 타고난 취미겠지요. 3학년때 반도에 나간 기회에 아이참, 미안해요. 고친다는게 그만…》

그 녀자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부르쥔 박진우의 주먹을 겁먹은 눈으로 응시했다.

《제발 한번만 더 용서해주세요, 네? 다신…》

부처앞에서처럼 두손을 합장한 미사꼬는 고개를 갑삭거렸다.

거친 숨을 내쉬던 박진우는 불쑥 일어나 가버릴가 하다가 용서를 비는 녀자앞에 사나이로서 지나치게 옹졸한 처사같아 《도움받자는게 뭐요?》하고 매우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해요. 실은 조선에 갔다가 우연히 채보한것인데, 그때…》

미사꼬의 눈앞에는 어느덧 그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휘청거리면서도 빠른 가락의 코노래를 부르며 뛰다싶이 부지런히 걷는 물지게군, 갱핏한 얼굴에 온통 구레나룻이 뒤덮여 겉늙어보이는 물지게군…

미사꼬는 뜻밖에도 들어본적 없는 코노래가 새여나오자 급히 뒤따르며 주의깊게 듣고 기억해두었다. 물지게군이 어느 잘사는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돌계단에 쭈그리고앉아 오선지우에 재빨리 코노래의 선률을 옮겼다.

처음 듣는 조선민요라 그는 몹시 흥분했고 채보하는 손은 심히 떨렸다.

물지게군이 되돌아나왔을 때 그는 갑삭 고개숙여 인사하고 선률을 불러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물지게군은 랭기어린 시선으로 쏴보더니 훌쩍 사라져버렸다.

뒤쫓아가며 사정했으나 종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에서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확인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온 미사꼬는 조선류학생들을 찾아다녔으나 헛물만 켰다. 만난 류학생모두가 중부조선이남에서 왔으므로 그 민요를 몰랐던것이다.…

오늘도 미사꼬는 한 류학생을 찾아갔다가 맥없이 돌아오는 길이였다.

한편 미사꼬가 채보했다는 악보를 받아본 순간 박진우의 가슴은 몹시 활랑거렸다. 고향의 민요 《돈돌라리》였던것이다. 고향에서 범상하게 여겼던 《돈돌라리》를 산설고 물설은 타향, 그것도 일본의 한 녀자가 관심을 돌려서인지 그의 마음은 갑자기 둥 떴다. 마치 고향의 정든 바다가백사장이며 숨박곡질을 하며 이골짜기, 저골짜기를 주름잡아 뛰놀던 모래산에 안긴듯 무척 반가왔던것이다. 그런가 하면 바다바람에 귀밑머리를 날리며 기다려주던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사람들은 흔히 생면부지라 하더라도 제 고향에 갔다온 사람을 만나면 마치 제가 고향에 다녀온것처럼 기뻐한다지 않는가. 그는 악보를 쥔채 한동안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 민요를 아세요?》

미사꼬는 그가 악보를 볼줄 모른다고 단정했던지 몇소절 불렀다. 밝은 선률이 어색하게 들렸을 때 진우는 제 고향이 쭈그러진 모습으로 보이는듯싶어 화가 치밀었다.

《그게 아니요. 그렇게 부르는게 아니란 말이요.》하고 못마땅해서 내쐈다. 했건만 조선민족자체를 말살하려고 발광하고있는 때에 일본의 국시를 무시하고 조선민요를 채보한 그 마음이 기특하여 박진우는 격정을 억눌렀다.

《이건 내 고향 북청민요요.》

《아이, 그래요?》

미사꼬는 얼마나 기뻤던지 진우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처럼 손벽을 치다가 희고 고운 두손을 가슴우에 모아쥐였다.

《그런데 어떻게 서울에서 채보할수 있었소?》

박진우는 허전해났다.

의례히 제 고향에서 들었다고 대답하리라는 기대가 허물어져서인지도 모른다.

그의 심중을 알리없는 미사꼬는 서울의 물지게군, 로골적인 랭대를 받긴 하였으나 구레나룻이 덮인 물지게군이 부르더라는것을 신바람이 나서 력설했다.

(그렇단 말이지? 서울의 물지게군? 서울에 북청물지게군이 많으니까 그럴수도 있다. 혹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돌아가실 때까지 물지게를 져서 학비를 대주신 아버지일런지도 모른다.)

등이 휜 아버지, 다문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돈돌라리》장단에 맞춰 속보로 걷다싶이 했을 아버지, 거치른 구레나룻을 방울방울 흐르는 땀으로 적시였을 아버지, 제 몸을 깡그리 불태워 이자식에게 바친 아버지였건만 이젠 이 세상에 안계신다.

미구에 성공한 자식의 덕―그것이 기껏해야 초가삼간집을 짓고 량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는 동요정도에 불과한 소박하고 보잘나위없는 덕이였건만 그 덕도 입어보지 못하고 골병이 들어 북망산에 가신 아버지를 생각할 때 박진우의 가슴은 터질듯 아팠다.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할 때 앞에 앉은 어머니와 누님에게 《진우를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싶은데 그럴수 없지비. 그앤 꼭 크게 성공할 애요.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다니던 대학을 졸업시켜주오. 내 땅속에 묻혀서라도 그래야 눈을 감을것 같구려.》하셨다는 유언이 가슴을 친다. 듣자니 그 유언을 지켜 어머니와 누님이 가산을 저당잡히고 서울로 올라가 팥죽장사, 물지게군이 되였다고, 누님의 약혼자인 철호형님도 홀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자 서울로 따라가 누님대신 물지게를 졌다고 했다. 아버지가 부르시던 《돈돌라리》를 부르며…

박진우는 골수에 사무치고 애틋한 인연으로 인박힌 그 《돈돌라리》를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일본처녀 미사꼬의 오선지책에서 보게 되자 이 인연은 어차피 숙명이라고 할수 있을지언정 결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꾸며지고 가공된 현실이 아닐가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자신도 아버지처럼 대학 전기간 이 민요를 가슴에 안고 온갖 신고를 이겨냈고 고난에 찬 고학의 가시덤불길을 헤쳐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곡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온전하게 채보하지 못해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던지… 그런데 오늘 또 구세주를 만나게 됐군요. 참 운명이란 묘하지요?》

미사꼬는 희열에 넘쳐있었으나 박진우는 밝지 못한 마음으로 악보를 훑어보았다. 악보는 틀린 곳이 많았다.

토색짙고 특이한 선률과 장단에 처음으로 맞다들었겠으니 그럴수 있으리라고 리해하였다. 그는 미사꼬에게 곡을 불러주어 다시 채보하도록 할수 있었으나 고향의 민요가 타인의 손에서 어지러워질것 같아, 아니 그보다도 아버지, 어머니, 누님이 민속명절때마다 모래산에서 바가지장단에 맞추어 부르던 그 소리가락이 너무도 생생하고 그 추억이 너무도 귀중하여 제손으로 직접 그려주었다.

《아니, 당신은 와세다 리공학부 학생이 옳긴 옳아요? 혹 음악가가 아니세요?》

그 녀자는 대뜸 그려놓은 악보를 살펴보며 고개를 갑삭거리더니 돌연히 가슴에 안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삭였다. 아마 감탄보다도 의혹이 앞서는것 같았다.

박진우는 그저 빙그레 웃고말았다.

《놀랍군요. 음악을 전공하지 않으시면서?》

그 녀자는 대번에 존경심에 잠겨 그렇게도 잘 웃군 하던 상냥한 웃음도 짓지 못했다. 이윽고 수집은듯 고개를 떨군 그는 목소리를 고를새도 없이 악보를 시창했다.

《이제야 비슷하게 불렀소. 그러나 아직 리듬이 생소해서 그런지 제 맛을 잘 내지 못하는군요.》


돈돌라리 돈돌라리 돈돌라리요

모래동산의 돈돌라리요


박진우는 은은한 소리로 불러주었다.

감사의 정이 미사꼬의 두눈에 맑은 눈물로 고여올랐다.

《전 많은 민요를 수집했지만 이런 아름답고 민족적특색이 진한 민요는 처음이예요.》

진실로 기뻐하고 고마와하는 미사꼬를 보자 박진우는 어째서인지 이 나어린 녀자에게 친근감이 갔다. 극단한 배타적감정과 조선사람을 멸시하는데 버릇된 왜인고유의 더러운 인습에 때묻지 않고 진실앞에, 예술앞에 허심하고 값높이 살줄 아는 학생이라는 너그러운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렇소?》

《선생님, 제가 이렇게 부른다고 다르게 생각지 마세요. 정말 은인을 만나 고마와서 그럽니다.》

그 녀자는 진정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아하, 또 실수하는군요. 난 선생이 아니라 대학생이라지 않소. 그것도 수식속에 사는 리공과…》

박진우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아무리 마다하셔도 전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어요. 선생님, 가사를 붙여주세요.》

한동안 명상에 잠겨있던 미사꼬가 악보를 다시 내밀었다.

그는 악보에 조선말로 가사를 달아주었다.

《아이참, 제 아직 조선말을…》

미사꼬는 얼굴을 붉히며 또 상냥하게 웃었다.

《당신은 세계민요를 수집한다고 자기 소개를 하지 않았소. 그러니 조선민요는 조선말로 불러야 제 맛을 알게 아니요. 배워서라도 말이요.》

《그걸 어떻게 당장…》

《당신네 나라와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말도 모르면서 어떻게 세계민요수집가라고 하겠소? 그것부터가 조선을 멀리하고 깔보는 습성이 아니겠소. 아마 당신은 에스빠냐나 이딸리아, 영국, 로씨야, 지어 하와이민요까지도 일본말로 부르지는 않겠지요?》

미사꼬는 창피하고 민망스러워 선생앞에 꾸중을 받는 학생처럼 머리를 깊숙이 떨구었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 꼭 조선말을 배워서 이 훌륭한 민요를 부르겠습니다. 선생님한테서 채찍을 받으면서라도 배우렵니다.》

미사꼬는 또 버릇대로 고개를 갑삭거리며 진심으로 사과했고 진정으로 청원했다.

애교도 가식도 과장도 없는 미사꼬의 진정에 박진우는 감동했다. 왜인모두에 대한 증오심으로 두텁게 얼어붙었던 마음의 장벽이 스르르 녹아내리는것 같았다. 그는 시험때마다 자기의 지식을 구걸하며 동냥하지 못해 치근치근 접근해오던 왜인동창생들에게는 그렇게도 거만하고 도고했던 굳어진 우월감이 이 미사꼬앞에서는 너무도 쉽게 사그라지는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미사꼬양, 이 민요의 제목은 왜 묻지 않소?》

《아이참, 깜빡 잊었댔어요. 이 민요와 선생님에게 너무 반했나봐요. 비웃지 마세요. 전 솔직히 또다시 구세주를 만난 심정이예요. 생명의 구세주, 민요의 구세주를 말이예요. 제가 세계민요를 수집해보려는것자체가 무슨 큰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런 민요들을 바탕으로 작곡을, 제발 비웃지 마세요. 장차 교향곡을 작곡해보자는데 뜻을 두었다고 할는지, 제 생각이 그런만큼 전 배타적인 민족관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아직 미숙한 제 생각을 렴치없이 털어놓았다고 나무람하셔도 말입니다. 어쩐지 리해해주실것 같아 제 생각을 숨김없이 말씀드렸나봐요. 철부지죠.》

시원하게 쭉 빠진 목을 약간 수그린 미사꼬의 볼에 연한 장미빛이 어려있었다.

그 녀자가 자기의 심중을 죄다 털어놓자 박진우는 그의 사람됨에 차차 끌려들어갔다. 이 감정의 변화가 이성에 대한 어쩔수 없는 그리움으로 이어질가봐 겁이 났다. 사랑은 마녀와도 같은 끌힘(그는 이것은 인력이라고 생각했다.)을 내재하고있는게 아닐가 하고 짐작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자기의 짐작을 부질없는것으로 여기고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만약 자기가 미사꼬를 사경에서 구원해준 생명의 은인이 아니였다면 그리고 미사꼬가 일본처녀가 아니였다면 그는 흔히 이성감정에 초년생인 풋내기들이 쉽사리 범하는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는지도 모른다.

감정은 무모하고 분별없이 날뛰려 하였건만 강한 리성은 극한점을 용케도 뛰여넘지 못하게 눌러버렸다. 그래서 그는 이성이 어떤것인지도 모르는 애숭이들이 뻔한 속심을 감추려는 유치한 수법그대로 돌연히 태연자약하게 《제목은 말이요. 〈돈돌라리〉라고 하오.》하고 정도이상 큰소리로 웨치며 악보꼭대기에 활달한 필체로 일필휘지하였다.

미사꼬 역시 사랑에는 애숭이였다. 그래서 박진우가 왜 갑자기 무뚝뚝해져서 성난 사람처럼 제목을 써주는지 미처 그 속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돈돌라리? 무슨 뜻이죠?》

미사꼬는 가쯘한 흰이를 살짝 드러내며 물었다.

《그건 말이요. 동틀 날이 오리라는 말이 줄어지면서 생긴 제목이요. 무슨 뜻인지 알만 하오?》

박진우는 얼핏 두리를 살펴보았다.

《우리 조선을 강점한 당신네 일본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내몰고 아름다운 조선에 평화롭게 살 날이 다시금 동터오리라는 뜻이란 말이요.》

박진우는 작은 소리로, 그러나 주저없이 말했다.

《그랬댔군요. 그럼 제 여기 제목옆에 〈조선의 애국민요 발상지. 박진우선생의 고향 조선북청지방〉이라고 써넣겠어요. 허락하시죠?》

허락을 요청하면서도 미사꼬는 벌써 다 써넣고 《조선 구레나룻물지게군로인이 경성에서 부른것을 무라야마 미사꼬 채보. 박진우선생 수정확인. 1944년 3월 24일 도꾜 우에노공원에서》라고 주석을 달았다.

《참 선생님, 영원한 기념으로 여기에 수표를…》

미사꼬는 장난꾸러기처럼 방긋 웃으며 악보책을 진우의 무릎우에 올려놓고 졸라댔다.

《별취미를 다 가지고있군요.》

가볍게 야유했으나 박진우는 민요수집가로서의 미사꼬의 진지한 학구적태도가 엿보여 《와세다대학 리공학부 졸업반 박진우》라고 시원시원하게 써주었다.

미사꼬는 자기의 요구에 선뜻 응해준것이 너무도 고마와 빼앗다싶이 악보를 잡고 기쁨에 겨워 몇번이고 인사하였다.

《제 영원한 가보로 귀중히 간직하겠어요.》

그 녀자는 속삭이듯 중얼거렸으나 속으로 너무도 감격하여 울고있었다. 이윽고 물지게군을 그려보듯 먼 하늘을 바라보며 코노래로 조용히 《돈돌라리》를 부르고있었다.

《이제야 이 민요의 참맛을 알것 같애요. 확실히 특색있는 훌륭한 민요예요.》노래를 부르고난 미사꼬는 저녁노을이 붉게 피여오른 서쪽하늘을 명상에 잠겨 이윽토록 여겨보다가 《선생님, 용서하세요. 우리의 악착한 사무라이의 후예들이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 조선을 정복하고 짓밟고있는 큰죄를 속죄할길 없는 이 불쌍한 소녀를 말이예요. 제 그 죄를 빌고 또 빌면서 이 민요를 영원히 사랑하며 부르렵니다.》하고 울먹거렸다.

그 녀자의 고백에는 솔직성과 진실성이 깃들어있었다.

《형사들의 요시찰인이 될는지도 모르겠는데 무섭지 않소?》

그는 슬쩍 비위를 건드려보았다.

《제발 놀리지 마세요. 하지만 전 선생님의 진정은 그게 아니라고 믿고싶어요. 전 어머니없이 자란 녀자예요. 그러니 조국을 잃은 선생님의 심정이야…》

《고맙소, 미사꼬양.》

《그게 무라야마 미사꼬가 아닌가?》

뒤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 녀자는 놀란 토끼마냥 화닥닥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가 깍듯이 인사했다.

《불러놓고보니 실례했는걸. 실은 아버지가 먼 항해를 떠나면서 도꾜에 가면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오까모도대좌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에게도 이미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참모님이 어떻게… 공원을 산책하실 여유가 생긴가보죠? 전시에 말입니다.》

사나이는 사이고 다까모리동상쪽을 가리켰다.

《그 륙군대장에게 관심이 깊으신가봐요?》

미사꼬는 오빠를 만난 애처럼 반겼다.

《그렇다고 할수 있지. 〈정한론〉제창자로서의 강경한 자세가 마음에 드니까. 대동아공영권을 사수하려면…》

진우에게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저 오까모도도 일본국시에 충실한 사나이라고 짐작했다.

《그럼 안녕히, 인차 돌아가라구. 전시가 아닌가.》

밭은 친지다운 각근한 충고였으나 되돌아온 미사꼬는 왜 그런지 입을 삐쭉거렸다.

그들은 곧 헤여졌다. 오까모도를 만난 여운이 더이상 민요이야기를 나눌수 없게 했던것이다.

미사꼬는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박진우를 허전한 마음으로 바래웠다.…

쉼없이 파도를 헤가르는 《우끼시마마루》를 따라오던 이름모를 바다새가 바래여진 보름달빛으로 사위가 희끄무레해지자 용약 배전을 들이받기라도 할것처럼 쏜살같이 내려꽂다가 돌연 위험을 느꼈던지 공중으로 치솟아 날아가버렸다.

진우는 어째서인지 그 바다새가 다시 와주었으면 하고 공연히 기다렸으나 말못하는 미물도 위험을 무릅쓰고 들이받는것이 심히 무모한짓이라는것을 깨달았는지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배는 여전히 쾌속으로 남하하고있었다.

희끄무레한 달빛아래에 펼쳐진 검푸른 바다를 헤가르며 《우끼시마마루》는 쉼없이 달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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