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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긴 세월이 흘렀다.

1951년 여름, 당시 우리 인민은 날강도 미제와 리승만괴뢰역도가 도발한 전쟁의 어려운 시련을 힘겹게 헤쳐가고있었다.

그날은 혜신읍에 대한 미제공중비적들의 무차별적맹폭격이 신새벽부터 해저물기까지 숨쉴틈도 없이 이어졌다.

혜신하늘을 온통 갈가마귀떼처럼 뒤덮으며 천연산마루를 스칠듯이 연방 내리꽂히는 적기들의 대폭격으로 온 도시가 자욱한 폭연과 먼지구름속에 잠기였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속에 치를 떨며 몸부림을 치는 거리로는 의료일군들이 떨쳐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련속 업어날랐다.

인민병원 기술부원장 진설향이 눈코뜰사이없이 련달아 들이닥치는 부상자들을 구급처치를 하고 구급실 쪽걸상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리는데 젊은 녀의사가 와서 입원실에서 원장선생이 찾는다고 조용히 귀뜀을 해주었다. 설향이 그를 따라 입원실에 조심스럽게 들어서니 무거운 표정으로 서있는 원장앞 침대우에 한 부상자가 잠들어있었다.

원장은 설향에게 귀속말로 잠든분이 군당위원장동지인데 오늘 폭격속에서 인민들을 방공호에 대피시키다가 넙적다리에 총상을 당하여 응급처치만 받고 금방 잠들었다고 하였다.

설향은 며칠전에 타군에서 군당위원장이 새로 부임돼왔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었다.

설향은 어쩐지 그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것 같은감이 들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디서 보던 얼굴같기도 하고 전혀 낯선것 같기도 했다. 설향은 그가 잠시동안이라도 동통을 잊을수 있는 잠에서 깬 다음에 상처를 봐주려고 한동안 기다렸다.

그는 이볼밖에 비죽이 내민 발에 눈이 갔다. 하여 이불깃을 바로 덮어주려다가 그만 섬찍하여 손을 움츠리고말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찬찬히 살펴보니 열발톱을 모조리 뽑히운것이였다.

설향은 별안간 화들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다시금 직업적인 눈초리로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이불우에 구붓하게 드러난 팔도 정상같지 않았고 손톱들도 전혀 없었다. 가슴이 저려났다. 분명 그 어떤 악한들의 귀축같은 고문의 흔적이였다.

설향은 그의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뜯어보다가 하마트면 《앗!》 하고 소리지를번 하였다.

그가 바로 최철림이 아닌가!

너무도 뜻밖이여서 심장이 뚝 멎는것만 같았다.

(아, 최철림동지! 그렇게도 소식을 몰라 안타까와했던 귀중한 동지를 10여년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만나다니!)

한순간 저절로 눈물이 비오듯 줄줄이 쏟아져내렸다.

(악귀같은 왜놈들이 철림동지를 이 지경으로 참혹하게 만들었구나!)

그의 곁에 서있던 젊은 녀의사가 사뭇 놀라운 눈길로 설향을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부원장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설향은 손수건을 꺼내여 눈물을 닦았다.

《나두 모르겠어요. 어쩐지 그저 눈물이…》

눈물을 머금고 하염없이 철림의 얼굴을 지켜보는 순간 문득 그의 머리속에 철림이 남기고 간 일을 조금이라도 맡아서 하고싶어 죽기를 결단하고 뛰여다니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가 체포된 날 온밤을 눈물로 꼬박 새우고나서 문성근이 자리를 뜬 기회를 타서 《3. 1월간》뭉테기를 몸에 간수하고 석계천가의 침침한 숲속을 단숨에 반달음하여 현선생에게 넘겨준 일이며 철림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고심하여 등사한 《3. 1월간》 수백여부를 안고 그 험준한 춘산령숲속길을 톺아넘어 은해가 늘 자랑삼아 외우던, 그의 야학생이며 조직원인 강동무를 힘들게 찾아 마침내 넘겨주던 일 그리고 자기가 정식 혜신반일회조직성원이 된것을 축하해주며 그제야 송수옥동지와 철림동지의 소원이 풀렸다면서 문성근이 기뻐하던 일이며…

그날 문성근이 철림의 옥중투쟁소식도 들려주었었다.

《철림동무는 경찰서구류장에 갇혀있으면서두 우리한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구있지. 심문받을 때 그가 묻는 말에 척척 대답을 하니 놈들이 귀가 항아리만 해져 듣다가 종당에 단서잡힐 말은 한마디두 없는것을 알고 악이 날대로 났다오. 게다가 고등계의 내부비밀까지 몽땅 꿰뚫고 무섭게 공박하는 바람에 심문하던 주임놈은 너무 질겁해서 까무라치기까지 했다네. 결국은 놈들이 철림동무의 정신력앞에 무릎을 끓은셈이지.》

…그 통쾌한 소식을 듣던 때로부터 어언 10여년이 지나 이렇게 꿈만같이 만나게 되다니!

시간이 퍼그나 흘러서야 철림은 그 누구인가가 자기를 지켜보는듯 한 기미를 감촉했는지 조용히 눈을 떴다. 한참이나 설향의 얼굴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철림도 얼굴에 별안간 화기가 확 피여올랐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요? 이게 꿈이요, 생시요?!》 하며 급히 몸을 일으키려는것을 설향이 얼른 어깨를 붙잡아 저지하려고 하자 《일없소, 일없소. 의사선생, 내 이 잔등을 좀 받쳐주시우.》 라고 요구했다. 그는 젊은 녀의사의 부축을 받아 베개를 겹놓은 우에 잔등을 대고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젊은 녀의사는 조용히 입원실에서 나갔다.

《군당위원장동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향은 그저 놀랍기만 하여 어리둥절해있었다.

《허허허, 인생이란… 목숨만 붙어있으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누만. …》

철림의 눈에도 물기가 어리였다.

설향은 그만 목이 꽉 메여 다음말을 더 잇지 못했다.

《설향동무, 우리끼리니 그저 철림동무라구 불러주우.》

그는 사뭇 감개무량해하며 푸근하게 말하였다.

《철림동지는 그저 여전하시군요. 놈들이 그때 얼마나 모진 악형을 가했으면 몸이 이렇게까지…》 설향은 또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놈들은 나중에 나를 끝까지 전향시켜보려구 별의별 악행을 다 들이댔지요. 손톱눈을 참대꼬챙이로 찌르다못해 뻰찌루 손톱, 발톱을 모조리 뽑아내구 왼쪽어깨뼈까지 부셔놓지 않았겠소. 어리석은 놈들이지. 그런다고 굽어들줄 알았겠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 은해동무는 어떻게 지냅니까?》

설향이 궁금하여 물었다.

설향은 해방전, 시골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지하투쟁을 하던 그와 조직적인 련계가 이루어져 간혹 만나군 했었다. 그리고 해방후에는 그가 미옥이와 함께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하는 철림을 맞이하고는 도병원에 장기입원한 그의 병구완을 한다는것까지는 소식을 들어 이미 알고있었다.

《내 있던 군의 녀맹총무사업을 맡아보는데 전쟁판이니 아직 따라오지 못했소. 그래 부모님들이랑 다 무고하시우?》

《네.》

《아버님두 같은 병원에서 일보십니까?》

《그래요. 참 어머님과 미옥이랑 모두 무고하십니까?》

《네, 참 내 경찰서구류장에 있을 때 설향동무가 그 사지판을 뚫구 삼룡리 현선생한테 〈3. 1월간〉을 모두 넘겨준 소식두 면회온 미옥이한테서 다 들었댔소. 아, 글쎄 내 형무소에 있는 동안 미옥은 세번이나 면회오지 않았겠소. 오빠! 엄마와 난 오빠를 꼭 믿어요, 하던 말이 내내 나한테 큰 힘을 주었댔지요.》

《미옥이가 참말 용쿤요!》

철림은 먼 기억을 더듬듯 한참동안이나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설향동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느라면 별의별 해괴한 일도 다 있지 않겠소. 내 이야기를 하나 할테니 좀 들어보우. 내 여기루 오기 착 전에 있은 일인데… 참말로 기가 막힌 일이였소.》

그는 잠간동안 말을 끊었다가 저으기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잇는것이였다.

《아니글쎄 하루는 군내무서장동무가 키가 훤칠한 한 텁석부리사나이를 데리구 내 방에 들어서는게 아니겠수. 그런데 설향동무, 놀라지 마시우. 그 텁석부리가 바로 신경태더란 말이요!》

《네-에?!》

설향은 기급하여 소리질렀다.

《제발 진정하구 좀 들어보시우. 아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잠간 멈추구 그전 이야기부터 먼저 좀 합시다.

자백에 의하면 경태는 나라가 해방되자 지난 기간 군사교련을 시키면서 짐승다루듯 너무 악착하게 군 청년들이 무서워 남으루 내빼려다 38도선이 턱 가로막혀 되돌아섰소. 그는 조내칠이로 변성명을 해가지구서 구포리 인민학교(당시) 교원으로 슬쩍 잠입했지요. 그랬다가 후퇴시기에 림복자를 끼구 월남도주했단 말이요.》

철림은 입에 올리기도 역겨운듯 쓴웃음을 지었다.

설향은 살이 떨리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올랐다.

《워낙 역적질이 골수에 밴 놈이라 또다시 다른 상전놈들의 훈련을 받구 아직두 우리 령내에 두더지처럼 은페한 괴뢰패잔병들과 합세하려구 대신평등판에 락하산을 타구 내렸단 말이요. 이건 그야말루 연극같은 장면인데.》

그는 여기서 말을 끊고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 다시 이었다.

《그런데 글쎄 경태는 중대를 거느리구 백수봉숲속에 숨어있다가 그만 수색전에 동원된 자기의 제자 박상권에게 딱 붙잡히지 않았겠소, 참…》

설향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경태의 천인공노할 악착한 행위에 온 혜신사람들이 치를 떨던 일이 상기되였다. 경태는 고보를 졸업하고 한동안 영림서 업무과에서 빈둥거리다가 인츰 체육교원으로 돌아앉아 학생들과 주변청년들에게 군사교련을 시키면서 온갖 폭행을 다했었다. 한번은 제자였던 박상권청년이 왜식정보행진을 제대로 못한다고 하여 징박은 제 구두짝으로 그의 얼굴을 무지하게 쳐갈겨서 이틀을 몽땅 물러나게 했다.

그 소문이 한동안 아근에 짜했었다. 경태놈이 바로 그 박상권에게 붙잡힌것이였다.

《너무 급해맞은 경태는 두손을 버쩍 쳐들구 와들와들 떨며 제자앞에 애걸복걸 빌었지요. 〈박상권군,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내 목숨만 살려주면 내 중대를 몽땅 바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

보시우. 그놈이 어제는 일본놈들앞에 목숨을 애걸하면서 지하조직을 다 불더니 오늘은 우리앞에 제 목숨을 애걸하며 제 졸개들을 모조리 넘겨바치겠다는거요.》

철림은 허거프게 웃으며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본이야기로 되돌아갑시다. 그날 경태는 내가 거기 군당위원장이라는것을 어떻게 알구 꼭 만나게 해달라구 애걸해서 데려온것이였지요. 그는 나를 첫눈에 인츰 알아보고 〈아, 철림이! 아니, 군당위원장님, 내 목숨만 살려주시우. 목숨만 살려주시면 무엇이든 하라는대로 내 다하겠습니다, 다-아.〉 이러질 않겠소.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말이 나가지 않더군. 〈여, 족제비두 낯짝이 있다는데 이거야 너무하지 않아. 그래, 네가 죽이려구 고발했던 사람앞에서 제 목숨을 구걸하다니!〉 나는 분통이 터져올라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지.

〈야 경태, 이놈아! 그 구린내나는 고기덩이가 그리두 아까와서 자기 애인두, 자기 동지들두, 자기 조직두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렸는가? 이 께끈한 놈아! 그 비루한 생명이 그리두 귀중해서 그렇게두 눈물겨운 진정을 그렇게두 쉽게 배반하구, 혁명을 배신하구, 조국을 반역했는가? 참다운 인간애, 민족애, 조국애를 등지구 오로지 원쑤놈들이 바라는대로 살아온 너의 그 비루한 삶이 결국 네놈을 적아의 두 총구앞에 내던졌어! 너의 그 더러운 목숨을 살리구말구하는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공화국의 공정한 법이 결정할거다. 법앞에 가서 공명정대하게 처리를 받으라! 끌어가시오.〉 나는 경태의 그 가련한 몰골을 보면서 우리 장군님께서 청년시절을 어떻게 사는가 하는것이 사람이 일생을 옳게 살며 일생의 훌륭한 결실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하신 말씀의 심오한 뜻을 가슴깊이 되새겨보게 되였지요. 사람이 청년시절을 옳게 산다는것이 과연 무엇이겠소. 그것은 그 시절에 옳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혁명적신념을 목숨처럼 귀중히 간직하고 떳떳이 사는것이 아니겠소.

바로 그 신념이 인간사랑에 뿌리를 두고, 인간사랑의 토대우에 굳건해질 때만이 확고부동한 혁명신념으로 될수 있다고 봅니다. 오직 그러한 신념을 심장깊이 간직한 사람은 죽어도 혁명신념을 버리지 않지만 그렇지 못할 때 신경태와 같이 서푼값도 안되는 더러운 제 한목숨을 건지려고 혁명신념도 순간에 서슴없이 줴버리게 된다구 생각하오.

참으로 우리의 청년시절이 오늘은 얼마나 심각한 교훈을 주고있소?!》

설향은 철림의 이야기를 심중하게 새겨들었다.

그는 한고향에 태를 묻고 소꿉시절부터 송아지동무, 어깨동무로 생활의 한궤도를 나란히 걸어온, 뿌리깊은 우정으로 얽혀졌던 두 청년- 뜨거운 인간애에 기초한 혁명가의 신념을 생명으로 간직하고 지켜낸 불굴의 인간 최철림과 참된 인간애가 없었던탓에 혁명의 원쑤로 전락된 신경태의 운명을 놓고 생각이 깊어졌다. 신경태의 더러운 한생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순결한 인간애가 더럽혀지고 사막화되면 뿌리깊은 우정도 사랑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줴버리는 인간쓰레기로 변질되며 마침내는 조국과 인민의 배반자로 전락되고만다는 피의 진리를 뼈에 사무치도록 가슴에 새겨주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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