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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오까는 어제 최철림을 백주에 로상에서 체포했다는 보고를 받고 미칠듯 한 흥분에 몸둘바를 몰라했다. 그를 사로잡았으니 이젠 혜신바닥의 지하조직망은 통짜로 내 손아귀에 들어온셈이 아닌가. 그는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리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러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최철림이와 정작 맞설 생각을 하니 어쩐지 속이 편안치 않았다.

언제인가 장마당에서 박히택을 초주검만들었다는 최철림이 아닌가. 그에 대한 련행상황까지 또 듣고나니 자연 기가 눌리였다.

물론 그가 헌 바지같은 신경태와는 판판 다른 강자인것만은 사실일수 있다. 그렇지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달구치고 당근질을 하면 몽땅 게워놓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지. 제까짓게 감히 어따대구…

히라오까가 예상한바대로 사와다가 데려온 철림은 겁나하는 기색은 꼬물도 없이 매우 침착하게 방안을 휘둘러보고는 앉으라는 걸상에 여유작작하게 앉는것이였다.

송수옥의 영향하에 지하투쟁에 나서면서부터 철림의 머리속에 철석같이 뿌리박힌것은 인간에 대한 참다운 사랑, 조국애, 민족애가 굳건하면 두려운것이 없다는 확고한 진리였다. 그는 어제 련행되여오면서도 내심으로 장군님의 말씀을 몇번이고 거듭 곱새기였었다.

…살아도 깨끗하게 살며 죽어도 깨끗하게 죽고 너절하게는 살지 않겠다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라야 혁명을 할수 있다. 그런 각오가 되여있지 않는 사람은 혁명을 하지 못한다. …

그러한 철림이기에 자기를 꺾어보려고 감히 시도하는 놈들을 속으로 가소롭게 여기였다.…

최철림의 듬직하고 름름한 기품에 은연중 자신심을 잃은 히라오까는 체면을 세우려고 엄엄하게 심문을 시작하였다.

《군이 혜신반일회 책임잔가?》

《그렇소.》

그가 예상외로 첫 심문에 순순히 응해나오자 그만 어리둥절해진 히라오까는 인차 자신을 다잡으며 야즐거리였다.

《보아하니 군은 담이 보통 크지 않은것 같은데… 그래 군은 치안유지법 제1조 국체, 국가체제를 변혁하는것을 목적으로 한 결사를 조직한자 또는 결사의 역원이나 그밖에 지도자로서의 임무에 종사한자는 사형 또는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법률조항을 아는가?》

《알구있소. 알아두 잘 알구있소. 그것이 두려우면 어찌 혁명의 길에 나설수 있겠소.》

철림이 너무나 버젓이 대꾸하자 히라오까는 그만에야 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군은 통이 꽤 큰체 하는데 그럼 반일회 지하조직망을 통이 크게 다 드러내놓는것이 좋지 않을가?》

《허허허, 조직망이라. 당신네는 이미 때가 늦었소. 우리 반일회성원들은 조직적단련을 거쳐 벌써 항일유격대에…》

《발언을 삼가하라! 항일유격대가 뭐냐 말이야.》

《그럼 배일유격대라구 할가요?》

《그래 어찌 됐다는건가?》

《다 유격대에 입대했소. 그리구 나를 잡았으니 우리 조직망을 다들어낸셈이요.》

《그렇다면 군이 조직을 대신하는가?》

《지금형편이 그렇지 않소. 정 못미더우면 신경태를 앞세우구 수색해보구려.》

히라오까는 돌연 말머리를 슬쩍 돌리였다.

《송수옥이란 누군가?》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이요.》

그는 추호의 꺼리낌없는 철림의 얼굴을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보았다.

《그가 지금 은신한 거처는 어딘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 동지는 우리 지하조직을 꾸려주고 지도하였으며 우리가 제발루 걷게 되자 이미전에 귀대하였소.》

순간 그는 사이또와 변영근때문에 중심인물을 놓친 절통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그래 삐라살포두 군이 조직한건가?》

《그런건 뻔히 알고있으면서 왜 공연히 묻소? 내가 직접 찍어서 혜신에두, 률곡에두 다 살포한거요.》

《그럼 그 등사기는 지금 어디에 감췄는가? 삐라를 등사한 장소는 어덴가?》

《그것은 내가 지난 방학때 서울 오상덕활판소에서 한트렁크 찍어왔던거요.》

《그 활판소주인은 이름이 뭔가?》

《그 이름이나 알아서 뭣하겠소. 우리 아버지의 친구로서 무던한분이였는데 지난 가을 뇌출혈루 벌써 사망했소.》

히라오까는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코방귀를 뀌며 지껄이였다.

《확실히 군은 거짓말능수야. 너무 아퀴가 딱딱 맞아떨어지거던.》

철림이도 코웃음을 치며 잘라말했다.

《사실도 거짓말로 듣는 당신과는 말할 재미가 없으니 이젠 그만듭시다그려. 당신두 일거리가 많겠는데 거짓말을 들으려구 시간을 보낼 게 있겠소.》

그러자 히라오까는 《그렇다면》 하고 사무탁서랍에서 《3. 1월간》 한부를 꺼내보이며 따졌다.

《이건 어디서 등사한거지?》

순간 철림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어느 곬으로 벌써 저자의 손에 들어갔을가?

《이것두 철림군을 통해 받았다던데…》 히라오까는 그제야 대답이 막히여 어리뻥해있는 철림을 득의만면하여 바라보았다.

잠시후 철림은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오히려 히라오까를 공박하였다.

《여보시오, 당신은 왜 그리 시야가 좁소? 당신네 관할구역인 금산과 산유평까지의 연선에만도 경찰관주재소를 13개나 설치하구 포성갑종주재소에서는 80여명의 경찰이 매일같이 맹훈련을 하구… 전 국경연선에 경찰서, 주재소만 해두 305개 3천 881명의 경찰대를 더 늘이구 또 여기 혜신바닥에만도 헌병분견대, 독립수비대 또 1936년 6월 26일부터는 오가와 슈이찌를 대장으로 하는 〈특설경비대〉까지 날뛰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요? 지난번에도 유격대가 문흥지구에 넘어와서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구 일장 연설까지 하구 바람처럼 사라지지 않았소! 그러니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나 〈3.1월간〉이 얼마든지 흘러든다는것쯤이야 모르지는 않겠는데요.》

《군은 말재간이 여간 아닌것 같은데 겁먹구 미리 발뺌하려고 빙빙 둘러대지 말구 직판 말하는게 좋아. 우리가 군의 입을 강압적으로 열게 하려는게 아니야. 근래에 공포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의 취지에 따라서 군같은 사상범들이 죄를 다시 짓지 않도록 예방보호하려는것이니 안심하구 솔직히 말해보라.》

철림은 흥 코웃음을 쳤다.

《여보시오, 그런 말을 번지기가 낯간지럽지 않소? 뭐 예방, 보호? 그래, 집행유예나 불기소처분자, 가출옥한 사람들의 거주, 교제, 서신거래까지 제한하고 감시하는것두 보호관찰이요? 이거야 바깔세상까지 몽땅 금고로 만들어 사회운동자들을 고립시키고 정신적으로 질식시켜 전향으로 유도하려는 고양이 쥐생각같은 음흉한 술책이 아니고 뭐요?》

저들 극비의 상세한 실태까지 손금같이 꿰들고 낱낱이 발가놓는 철림의 불을 토하듯 하는 말에 히라오까는 그만 기가 질려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됐다! 됐어. 이젠 그만해라!》

출입문곁에 앉아있던 사와다도 너무 놀라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더 건드리면 철림의 입에서 무슨 말이 쏟아져나올지 모를 일이였다.

히라오까는 속이 후두두 떨렸으나 자기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심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사이또와 변영근을 누가 죽였는가?》

《그놈들은 내가 죽였소.》 하고 철림은 서슴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안경밑의 눈이 화등잔같이 휘둥그래진 히라오까는 기가 눌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

《그놈들이 유격대에 탄원해가는 동지들을 미행하다 압록강접경에서 권총으로 쏘려는 순간에 내가 정당방위로 두놈 다 단매에 때려죽였소.》

《네가 감히 그런 살인을?!》

《정당방위한게 그래 잘못이라는건가요? 당신들은 조선사람을 파리잡듯 하면서두 그래 두놈쯤 죽여버린게 그리두 놀랍소?》

다른 범인같으면 벌써 몇번 귀쌈을 후려갈겼을터이지만 상대가 두려워 벨풀이를 도저히 할수가 없었다.

《그래, 그들의 시체는 어떻게 했는가?》

《압록강에 처넣었소!》

히라오까는 또다시 법조항을 걸고들었다.

《사람을 죽이면 저도 죽어야 한다는걸 모르는가, 엉? 〈형법 제2편 제26장 제199조에는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 또는 무기 또는 3년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제돼있어.》

《뭐, 사람? 사이또가 남의 집에 뛰여든 날강도이지 그게 사람인가요? 또 변영근따위같은자도 그래 사람축에 드는가요?》

《황군을 무엄하게 함부로 모독하지 말라!》

《주임, 내 하나 물읍시다. 그렇게 법조항에 정통하고 도덕있게 처신한다면서 〈형사소송법 제11장 제144조 수색에서 비밀을 지키며 수색을 받는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법조항은 란폭하게 위반하고 왜 공공연히 필적감정소동을 일으키고 수색당하는 학생들을 마구 때리구 짓밟구 했소?》

히라오까는 입이 떡 막히였다.

그는 철림의 시종 범같은 기상과 랭철한 판단력, 정연한 론조에 이미 속대가 꺾이고 피동에 빠졌으나 결코 그에 눌리워 심문을 중도반단할수는 없었다.

이윽고 히라오까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더 묻자. 변호연의 본명이 스즈게 묘시라는것과 그의 부친이 류수렬이라는것을 어떻게 밝혀냈는가?》

《아, 그거야 경태가 서캐훑듯이 불었겠는데 구태여 나한테 물을것까지야 있겠소?》

《그게 아니라 어떻게 우리만 아는 극비사실까지 귀신처럼 알게 됐냐 말이야?》

히라오까는 순간 그 극비사실을 자기와 사이또밖에 모른다는 생각이 피꿋 들자 자기의 말실수를 깨닫고 속이 움츠러들었다.

철림은 그놈의 허점을 제꺽 포착하고 역습했다.

《주임나리, 당신은 내 입에서 당신네 고등계안에 우리의 정보선이 있다는 말이 나와야 족할것 같소? 여보시오, 당신네가 그 아무리 오그랑수가 깊고 둔갑술이 능해두 세상의 귀와 눈은 못 속이는 법이요.》

《닥쳐라! 점점 한다는 수작이…》 히라오까는 모욕감에 낯짝이 시뻘개졌다.

철림은 틈을 주지 않고 련속 공박하였다.

《당신은 그 문제를 지지콜콜히 캐묻기가 낯뜨겁지 않소?》

《뭣이?》

《당신네 동향친구인 그의 애비와 공모하여 자기를 밀정으로 만든 내막까지 꺼리낌없이 불어대는 그따위 코흘리개를 심복으로 삼은게 창피하지 않는가 하는거요.》

《닥쳐라! 이 개자식!》

히라오까는 발광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래, 당신네 말대루 〈황국신민화〉, 신념교화의 일선인 교육기관에 그 비린내나는 일본애새끼한테 조선학생의 허울을 씌워 밀정으로 박아넣은 그처럼 해괴하고 치졸한 사실이 홀랑 드러나면 그래 세상은 입을 다물고있을것 같은가?!》

《닥쳐라!》

히라오까는 앞탁을 부스러지라 주먹으로 탕 내리쳤다.

《나는 이 사실을 당장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위시한 각 신문사들과 모든 출판사들에 몽땅 기고할터이요!》

시종 저력있게 거침없이 좔좔 내리엮는 철림의 불같은 단죄에 히라오까는 너무도 기가 질리여 왼쪽가슴을 움켜쥐고 모지름을 쓰다가 걸상에 축 늘어져앉았다.

《야! 그만 닥치라는데두. 나쁜놈!》

사와다는 철림에게 이렇게 욱박대며 제꺽 차관의 물을 고뿌에 따라서 히라오까의 입에 가져다대고 《주임님, 주임님!》 하고 거퍼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한참 동안이 지나 눈을 게슴츠레 뜬 히라오까는 물 한고뿌 마시고 철림을 데려내가라고 헛손질을 했다.

철림은 사와다를 따라 무서운 기상으로 복도에 씽- 나섰다.

그때 저쪽에서 마주 걸어나오던 《박부르도그》는 무심중 철림의 날카로운 눈길과 정면으로 딱 부딪치자 덴겁하여 허-억 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바로 언제인가 장마당에서 딱 마주쳤던 그때에도 철림의 눈빛은 그랬었다.


(저자가 여기에 어떻게? 저자도 공산스파이였단 말인가?!)

박가는 고문실에 돌아왔어도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수가 없었다. 세상무서운줄 모르고 분별없이 맞서는 손때 말랑말랑한 풋내기로 업신여겼던 그한테서 곤죽이 되게 얻어맞던 일을 상기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는 저자의 고문도 자기가 맡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불쑥 솟았다.

(제놈이 아무리 주먹다시 드세고 날쌘들 코꿰운 송아지신세 됐으니 이젠 용빼는 재간이 없지. 여태 하지 못한 보복을 끔찍한 고문으로써 통쾌하게 벌충을 할테다!)


X


어느날 어슬어슬 저무는무렵에 성근은 치료받으러 오는 환자모양으로 가장하고 진두경의원을 찾아갔다.

두경은 조용해진 치료실에서 그동안 속이 새까매지도록 기다리던 설향의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하듯 놀랐다. 바깥형세는 날로 더 살벌해져 어디에 가 수소문도 못해보던 딸의 소식을 성근이 가져온것이다. 두경은 신경태의 변절에 거듭 분통을 터뜨리면서 설향을 구원하고 검거된 철림을 두고 연해 탄복했다. 그는 두눈에 눈물이 글썽해서 성근의 두손을 뜨겁게 움켜잡았다.

《문형, 오늘 기막힌 소식을 전해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니 죽을 고비에 들었던 우리 설향이가 결국 철림군과 같은 그처럼 훌륭한 혁명가에 의해서 구원되였군요! 아, 자기의 희생으루 설향을 구원하다니! 이런 꿈만 같은 일이라구야. 참으루 이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장 뜨거운것이 바루 혁명가들이군요.》

두경은 너무나 격동되여 목멘소리로 거듭 경탄의 소리를 했다.

《문형, 이 사지판에 우정 찾아와 잘못된줄로만 알았던 설향의 소식을 알려주니 무슨 말루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근은 손을 홰홰 내저으며 겸양하게 말했다.

《아예 그런 말씀을 마십시오. 우리가 당연히 알려드려야 할 소식인데…》

성근은 두경과 설향의 차후 안전한 피신처를 상론한 후 인차 헤여졌다.

집에 돌아온 성근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설향이 집에 쪽지편지를 남기고 없어진것이였다. …

《문아버님, 부디 용서하세요. 저는 보고를 드리지 못하고 철림동지가 보관해둔 〈3.1월간〉 30여부를 가지고 삼룡리로 급히 떠납니다.

아버님, 안심하십시오. 무사히 꼭 돌아오겠습니다. 설향 올림.》

(걸음마다 놈들의 눈이 그림자처럼 따르는 그 위험천만한 일을 설향이 자진해서 맡다니! 아, 내가 붙잡을가봐 미리 떠난게구나!)

성근은 가슴이 화끈 달아오르며 눈굽이 쩌릿해졌다.


X


철림은 한시가 새로운 때 급작스럽게 갇힌 몸이 되고보니 분통하기가 그지없었다. 더우기 멀리 떠나간 동지들이 한량없이 그립고 날로 그들의 신변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송수옥동지는 놈들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무사히 귀대하였는지? 아지트는? 문성근동지의 신변에는 별고가 없는지? 태평령에 간 은해동무는? 남석에 간 춘일동무는? 고사리골에 간 향숙의 모녀는? 그리고 삼룡리 현선생, 고선생 등은 다들 안전한지? 물레방아집에 외롭게 남아 마음속으로 갈팡질팡하고있을 설향이 생각에 또 가슴이 알알했다. 또 야학들은 그냥 운영되고있는지? 혹시 그간 페쇄되지나 않았는지?

아, 신경태, 그놈의 변절로 하여 하루아침에 이런 험악한 사태가 빚어졌구나! 변절자! 인간의 낯가죽을 쓰고서야 어떻게, 감히 어떻게 제한목숨을 건지려고 그렇게도 손쉽게 동지들을 팔고 조직을 팔수 있단말인가!

철림은 지난 기간 그렇듯 비렬한 놈과의 값싼 우정에 눈뜬 소경이 되였던 자기자신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고싶도록 통분하였다. 이와 관련한 송수옥의 사려깊은 비판은 지금도 그의 심금을 올리였다. 아니, 그토록 공명정대한 비판은 일생토록 잊지 못할것이였다. …

철림은 문득 지난해 어느날 앞개울의 모래톱에서 경태와 어린시절의 회포를 나눌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미옥은 달래봉에서 방금 딴 산딸기를 쪽바가지에 소복이 담아가지고왔었다. 금시 이슬을 머금은듯 함치르르한 새빨간 산딸기는 대뜸 군침돌게 했다. 미옥은 딸기 한알을 자- 하며 먼저 철림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경태의 입에도 한알을 넣어주려고 하자 그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는것이였다.

《경태오빠, 내 손은 깨꿋해요.》 하고 그의 입안에도 억지스레 넣어주고는 호호 웃었다. 그런데 경태는 얼굴을 찡그리며 딸기를 곧 도로 뱉아버리고는 바지주머니에서 눈같이 흰 손수건을 꺼내여 입술을 닦았다.

《경태오빠, 시나요? 아니, 말큰말큰 익은건데… 오빠 혹시 고향의 산딸기맛두 벌써 싫어진게 아니나요? 오빤 좀 전과 달라, 호호호. 텁텁이오빠가 톡톡이오빠로 변한게 안야? 호호호…》

철림은 눈을 흘기며 꾸짖었다.

《넌 조꼬만게 무슨 발그라진 소리만…》

《피- 내가 못할 말 했나 뭐.》 하고 고운 눈을 할기죽 빨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철없는 미옥이조차 그때 벌써 그의 달라진 모양을 식별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웬일인지 그때 입술을 삐쭉 내밀던 미옥의 모습이 가슴저리게 사무쳐왔다.

바로 그때 간수가 와서 구류장의 자물쇠를 철커덕거리며 열더니 투박하게 한마디 던지였다.

《최철림, 면회!》

철림은 속으로 화뜰 놀랐다.

(갑자기 면회라니?! 누가 왔을가?)

거치장스러운 쇠고랑을 꺼칠꺼칠한 마루바닥으로 끌며 면회구에 다가가던 철림은 뜻밖에도 면회구 쇠그물밖에 진자주저고리를 입고 오똑 서있는 미옥이와 눈길이 딱 마주쳤다.

《오빠!》

미옥의 오돌진 목소리가 다급히 날아왔다. 순간 철림은 너무나도 놀라와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애써 웃음짓는, 그새 더 조그매진것 같은 볕에 탄 감실감실한 얼굴이며 더 가느다래진듯싶은 하얀 목이며가 그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다만 물기어린 가느스름한 눈만은 전과 같이 영채를 뿜고있었다. 본시 오돌찬 미옥이가 오빠를 기어코 만나려고 얼마나 신고했는가를 첫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미옥의 고집스럽게 꼭 다문 도툼한 입술은 오빠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이그러지려고 했으나 그는 끝끝내 참아내였다.

다음순간 미옥은 상글상글 애써 웃으며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오빠! 엄마랑 외할아버지랑 집안걱정은 통 말래요.》

철림은 가슴이 찡 저려왔다. 무언가 조급히 말하려는 미옥을 느슨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미옥은 할깃 간수의 눈치를 살피고는 범상하게 말을 이었다.

《오빠! 태평언니두 엄마의 병문안을 왔댔다. 언니네 집안은 모두 무고하대요. 요새는 아이들까지 봐준다나요 뭐.》

(은해동무가 어머니와 련계되여 조직선을 잡고 결심대로 교단에 벌써 섰구나.)

철림은 미옥의 말을 속으로 이렇게 해석하여 들었다.

《그리구 오빠, 혜경언니는 엄마약에 쓰려구 캐놓은 감초 30뿌리를 현의원선생님에게 맡겼대요. 그다음에는… 역앞 사촌오빠는 이젠 앓지 않는대요.》

(혜경이란 동무는 없다. 그러니 분명 혜경동에 사는 설향동무구나. 아, 그가 무사했구나. 설향동무가 《3. 1월간》 30여부를 종시 현선생에게 넘겨주었구나! 그리고 전춘일동무의 신변도 안전하구나!)

철림은 부지중 가슴이 뻐근해지며 눈굽이 확 달아올랐다.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신신당부하며 련습삼아 몇번 시켜도 보았을 말을 한마디도 헛갈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왼심을 쓰는 어린 동생의 기특한 심정이 마음속에 눈물겹게 안겨왔다.

별안간 미옥은 조그만 손으로 면회구턱에 올려놓은 수갑을 찬 오빠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미옥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어 흘러내렸다.

《오빠, 몸이 퍽 상했어요. 아프지 않나요?》

《미옥아, 울면 못써. 밝게 웃어야지.》

《오빠, 난 안 울어요. 외할아버지랑 엄마랑 절대 울지 말랬어요. 난 그래 절대 울지 않아요.》

미옥은 조그만 입을 옥물고 울면서도 웃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눈물만은 감출수가 없었다.

《오빠! 힘들 때문 장참 내 얼굴만 그려보라요. 그러문 힘이 날거예요.》

면회구덮개가 꽝 하고 내리닫겼다.

(아, 조직은 살아있구나! 동지들도 다 무사하구나!)

철림은 간수놈이 쬐꼬만 계집애가 면회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사흘씩이나 앙탈을 부리며 뻗치였다고 지껄이는 소리를 귀결에 들으며 가슴이 찢기듯 아프고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먼길을 와서 사흘씩이나 한지에서 새우다니!)

그러한 미옥이가 오빠의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 들어보고 160리길을 되돌아설 생각을 하면 억이 막히고 그 애처로운 모습이 가슴을 저미며 눈앞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자정도 넘은 깊은 밤이였다.

철림은 간신히 눈을 떴으나 온몸은 바위에 짓눌린듯 옴짝 움직일수가 없었다.

혜신반일회조직책임자의 심문을 더 끌지 말고 속히 XX형무소에 압송하라는 도경찰부의 독촉을 받은 히라오까는 등이 달대로 달았다. 그는 어떠한 수로든지 철림이 압송되기 전에 그의 입을 기어코 열어보려고 악에 받쳐 련일 악형을 들이댔다. 놈들의 무지스러운 악형이 련속 될 때마다 철림의 눈앞에는 밀림속 바위굴에서 통졸임통으로 자작 만든 양철톱을 들고 자기의 손으로 발가락이 썩어드는 발을 잘랐다는 항일혁명투사의 불사조와 같은 견결한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군 했다. 그에 비하면 자기가 당하는 육체적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가장 악독하기로 악명높은 《박부르도그》가 흉기를 들고 접어들었다. 놈은 불덕에서 불찌가 펄펄 날리는 쇠꼬쟁이를 쑥 뽑아들고는 능글맞은 상판에 깨고소한 비웃음을 담고 육중한 몸뚱이를 움직여 뜨적뜨적 다가왔다. 그 순간 철림은 놈을 향해 쪽걸상에서 몸을 벼락같이 획 돌렸다. 단박에 자기를 집어삼킬듯 한 사나운 기세와 표범처럼 쏘아보는 불이 황황 이는 무서운 철림의 눈길에 박가는 눈깔을 뒤집으며 기겁하여 얼결에 《으흐흐.》 짐승같은 소리를 질렀다. 비실비실 뒤걸음을 치다가 너저분하게 널린 형구에 걸치여 비칠거렸다. 바로 그때 고문실로 들어서던 히라오까는 별안간 발작한듯 담배대를 퉤 뱉아버리였다. 놈은 다짜고짜로 박가의 손에서 불쇠꼬쟁이를 나꾸채여 들고 독사같이 달려들었다. 놈은 불쇠꼬쟁이로 철림의 어깨를 지져대며 《입을 열라! 천하지독한 놈아, 내앞에 입을 안 열고 견뎌배길것 같은가. 입을 열라- 아-》 하고 단말마적인 악청을 질렀다.

놈은 악을 쓰고 기광을 부리다가 입술이 터지도록 이를 사려물고 끄떡도 하지 않는 철림에게 그만 기가 꺾이였다. 제풀에 기진맥진한 놈은 숨을 톺으며 씩씩거리다가 쇠꼬쟁이를 바닥에 탁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역증스럽게 웅얼거리며 나가버렸다.

철림은 문득 자기가 누운 이 독감방이 혹시 경태놈을 전향시키려고 따로 가두었던 독감방이 아닐가 하는 역겨운 생각이 들었다. 고문 한번 받지도 않고 조직과 동지들을 헌신짝같이 줴버린 놈, 그놈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로 그 비루한 목숨을 건졌는가! 그는 속에서 불뭉치가 솟구쳐올랐다.

그는 안깐힘을 써서 가까스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팔을 뻗치고 천근같이 무거운 다리를 끌어당겨 잔등을 구류장벽에 갖다대였다.

그러자 잔등이 서늘해지며 몸가짐이 한결 편해졌다.

…눈같이 새하얀 구름송이들이 떠있는 유난히 파란 하늘과 소학교시절 한무선선생이 그 어떤 절절한 그리움이 안타까이 손짓하는것 같아 종일토록 바라보고싶다던 그처럼 아득한 푸른 산발을 배경으로 하여 난데없이 송수옥이가 마치 땅속에서 불쑥 솟아오른듯 눈앞에 서있었다.

철림은 너무나도 반가와서 《송수옥동지!》 하고 그에게 막 달려가려고했으나 땅바닥에 떡 들어붙은 발을 도무지 뗄수가 없었다. 한순간 난생처음 보는 군복차림에 배낭을 지고 총을 메고 서서 빙그레 웃고있던 그의 모습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꿈이였다. 참으로 아쉬운 꿈이였다. 그는 벽에 잔등을 기대인채 깜빡 잠이 들었던것이다. 복도의 저쪽끝에서 당직간수의 투박한 구두발소리가 한적하게 들려왔다. 잠기는 씻은듯 싹 가셔지고 한순간이나마 꿈에서 본 송수옥의 웃음어린 모습만이 그의 눈앞을 한가득 채웠다. 억년 드놀것 같지 않는 그처럼 도고하고 당당한 억센 모습은 마치도 이렇게 말해주는것만 같았다.

《철림동무! 모든 악형도 이겨내고 일어서세요. 장군님께서 철림동무를 지켜보신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마세요. …》

그는 금시 마음속에 강철기둥이 일어선듯 힘과 용기가 솟구쳐올랐다.

일어서려고 했으나 정갱이와 종다리가 갈기갈기 찢기듯 하고 무릎은 부스러지는것 같았다. 그러나 이를 사려물고 꿋꿋이 일어섰다. 통기창으로는 바람 한점 새여들지 않는데 창밖은 희끄무레하였다.

새날이 밝아오는구나!

철림은 송수옥이 떠난 다음부터 줄곧 혈맥을 잇고 사는 백두산으로 마음은 또다시 줄달음을 쳤다. 그가 매일같이 감회깊이 들려주던 백두광야와 서간도의 험산준령과 준엄한 전구들이 생동한 현실로 하나하나 눈앞에 그려지였다.

문득 송수옥이가 대천강반에서 자기와 은해의 어깨우에 다정히 손을 얹고 김일성장군님의 말씀을 간곡히 새겨주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시금 흉금을 절절하게 울리였다.

사람의 한생에는 누구에게나 청춘시절이 다 있다, 그러나 먼 후날에가서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회상할수 있도록 그 시절을 보낸다는것은 결코 헐치 않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한길에 일신을 깡그리 바쳐가며 피끓는 열정과 불타는 투지로 만난을 헤쳐나가는 그 걸음걸음이야말로 얼마나 값높고 긍지높은 생활이겠는가!…

철림은 장군님의 이 고귀한 말씀을 구절구절 마음속에 새기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백두산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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