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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설향이한테 손때매운 귀쌈을 벼락같이 얻어맞은 그 순간부터 경태의 머리속은 온통 뒤죽박죽되고 그 즉시로 자신의 모든것이 산산쪼각이 나버리는듯 하였다.

한낱 연약한 처녀한테서 따귀세례를 받은 수치감보다 설향이가 고등계의 각본에 따라 자기에게 겹겹이 씌워진 연막을 대번에 발가버린데 놀랍고 기가 질리였다.

설향이가 자기의 행동을 두고 미심쩍어하던끝에 뒤를 밟은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이 사실이 철림에게 알려지면 즉석에 나를 감쪽같이 없애버릴수도 있다! 지금쯤은 설향이도 조직원이 되지 않았을가? 그렇다면?! 목숨을 건지려고 피한 길이 도리여 더 위험천만한 외통목에 들어선셈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하여 이 사실을 히라오까에게 실토했다가는 자기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것이였다. 마침내 그는 철림이네 손에 귀신모르게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히라오까에게 자신의 실책을 눈물로 사죄하고 통사정을 하여 목숨을 건지는 편이 낫지 않을가 하는 막다른 생각에 이르게 되였다.

한번은 림복자도 어깨를 축 처뜨리고 방구석만 지키는 경태의 꼴이 하도 민망스러웠던지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야비한 말을 쏟아놓았다.

《요새 당신은 왜 그렇게 멍청이가 됐어요? 서서두 멍해, 앉아서두 멍해, 제 눈에는 이 복자가 안 뵈는게지. 혹시 어느 뺀뺀한 계집년에게 딴 눈 파는게 안야?》

경태는 그한테 속내가 드러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펀뜻 들자 용기를 내였다. 그는 자기의 턱밑에 바투 다가앉아 이죽거리며 치떠보는 복자를 발작하듯 와락 그러안았다.

《요, 눈에 넣어두 아프지 않을 내 귀염둥이.》

복자는 자기의 허리를 숨가쁘게 감은 경태의 팔을 느슨하게 풀어버리며 아양을 떨었다.

《당신은 아무리 뜯어보아야 꼭 바람쟁이야. 미친것처럼 제 볼재미를 실컷 보더니 벌써 내가 싫어진게 안야? 똑똑히 알아둬. 날 업신여기면 히라오까주임님에게 다 일러바칠테야.》

사실 복자는 얼굴도 해반주그레하고 살집이 좋고 뭉실뭉실한 더없이 만족스러운 녀자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류달리 아름다운 설향의 모습은 잠시도 그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도 키가 늘씬하고 지성미 풍기는 해말쑥한 설향이 해오라기라면 복자는 한갖 물오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다 무르익은 과일같은 그 탐스러운 설향을 허궁 떼우게 되다니!)

경태는 자신의 경망한 불찰로 설향을 종시 놓치게 되고 딴놈의 소유물이 될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어느날 저녁 경태는 복자를 내세워 혜림일본료리집 뒤고방에서 사와다와 단둘이 은밀히 만났다.

경태는 무슨 중요한 단서라도 잡은듯 설향이와의 관계와 그한테 자기의 뒤꼬리를 밟히게 된 경위를 실토했다.

본시 암팡진 사와다도 시종 입을 딱 벌리고 울먹이며 번지는 경태의 두서없는 말을 꺾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는 쓰다달다 말이 없이 인츰 자리를 뜨면서 주임에게 그대로 보고하겠노라고 했다.

한편 히라오까는 요즘 심사가 매우 사나와져 표정변화가 없는 그의 목각얼굴에 노상 독기가 뻗쳐있었다.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와 도경찰부의 매일같은 닥달질에 기를 펼수가 없었다. 경찰서관할구역 국경일대에 무시로 공산유격대가 출몰하고 군경내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반치안사건들을 지금같이 떨떨하게 다루다가는 몽땅 적색화될수 있다느니 뭐니하며 전화를 들기 무섭게 마구 조겨대는것이였다.

게다가 서내에서는 미욱한 미우라가 사이또실종건과 혜신, 률곡 등에서의 삐라건을 불궈두고 신물이 나도록 말끝마다 거들며 못살게 굴었다.

히라오까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금시 살이 내리고 혈압이 튈 지경이였으나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체 처신하며 뜬뜬해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심으로 자기가 좌우명으로 삼는 신중지론에 대한 회의심이 불쑥불쑥 머리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것을 곧 부정하군 하였다. 사실은 성급하게 제멋대로 서두른탓에 사이또와 변영근이 귀신모르게 실종됐지만 자기는 경태라는 《잔가지》를 성급하게 꺾지 않았기때문에 줄기격인 최철림에게 바싹 접근할수 있었고 또 지금은 그 뿌리가 공산정치공작원 송수옥이라는것까지도 톺아내게 되지 않았는가. 단지 분통이 터질노릇은 변영근의 실종으로 하여 실지로 움직이는 최철림과 송수옥을 현장에서 단번에 사로잡지 못한것이였다. 최철림은 송수옥의 다음가는 그네들이 말하는 핵심골간, 지도핵심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깊이 위장된 변호연의 정체를 대번에 쫄딱 발가낸것이라든지 제반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가 지하조직 책임자라는것이 이미 명백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태는 끝내 불지 않는것이였다. 그가 철림을 불지 못하는 리유가 단지 서푼짜리 우정때문이라고 짐작되였다.

바로 이때 출입문에 손기척을 낸 사와다가 쓰거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목례를 하는 사와다를 보더니 대뜸 히라오까의 팽팽하게 켕겨있던 얼굴근육이 느슨해지며 희색이 만면해졌다.

이윽고 사와다는 심중한 목소리로 경태가 마침내 고백한 말을 그대로 옮기였다.

순간 눈알을 꼿꼿이 뒤집고 입을 딱 벌린채 그의 말을 듣고있던 히라오까의 눈섭꼬리가 푸들푸들 떨었다.

《무엇이?! 저런, 시라소니같은 놈!》하며 히라오까는 걸상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갔다. 입이 쓴듯 거듭 《저런 멍텅구리, 저런 반편, 저런 미물!》하고 역정스럽게 되뇌이였다.

《그 눈치가 발바닥같은 놈이 제 몸뚱이건사를 얼마나 마련없이 했으면 새파란 녀고생계집한테 일조에 홀딱 벗기운단 말인가!》

《그 녀고생이 여간내기가 아닌것 같습니다. 림복자와 뜨게부부생활하는 내막까지 홀랑 발가냈다구 하더군요.》

히라오까는 두팔을 깍지끼여 가슴우에 얹고 창문에 마주서서 울컥 치받치는 분을 가까스로 누르고있었다. 경태의 정체를 깊숙이 묻어두고 철림에게 바싹 접근시켜 도저히 그 거처를 알아낼수 없는 송수옥을 일거에 사로잡자고 미루어온 계획이 일조에 수포로 돌아가고만것이다.

기가 막혔다. 분김대로라면 그 팔삭둥이 멍텅구리를 당장 쏴갈기고싶었다. 다음순간 그의 머리속에 언제인가 호연으로부터 경태의 하숙방에 한 녀고생이 드나든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그런 또래들속에 흔히 있을수 있는 일로 여기고 귀너머로 들었던것이다. 그때 그말을 명심해듣고 다른 방안을 세웠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게 아닌가! 개미구멍이 뚝을 허문다더니, 내가 감히 이런 실수를 범하다니!

한순간 히라오까의 머리속에 신경태의 변절이 어차피 공산지하조직에 알려지면 그들은 지체없이 거처를 옮기고 일제히 종적을 감출수 있다는 생각이 번개쳤다. 그는 사와다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사와다군, 경태의 뒤가 다 드러난 이상 혜신지하조직망을 시급히 일망타진해야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구 저…》

《뭔가?》

《주임님, 경태가 죽을죄를 짓구서야 비로소 혜신반일회책임자는 최철림이며 부책임자는 김길수라는것을 불었습니다.》

히라오까는 입귀를 찡그리며 코방귀를 뀌였다.

《그자는 역시 시라소니야. 그래 제가 저지른 죄값을 최철림에 대한 고발로써 종교식 속죄를 한다는 수작인가? 그건 제가 지은 죄를 좀 삭감해보려는 약은 꾀에 불과한거야.》

《주임님, 어쩌겠습니까. 기왕 우리 일에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그는 히라오까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양보를 구했다. 《길들여 써먹어야지요. 》

히라오까는 그 말에 응대없이 잠시 덤덤해있다가 그사이 머리속에서 정리한 계획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자구. 오늘 밤 12시 지하조직원들의 가택수색을 일제히 벌려야 하겠어. 더 어물대다간 게두 구럭두 다 놓칠수 있어!》

《알겠습니다, 주임님.》

《첫째 목표는 최철림이야. 그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해. 송사리 백명보다 최철림 하나가 더 값비싼거야. 그만 잡으면 혜신지하망을 한손아귀에 걷어쥐는거나 같거던. 또 경태를 돌려놓은 다음 더 늘어났을 조직망두 그를 놓치면 색출해내기 힘들다는것을 명심해야 돼. 그러니 사와다군.》

《녜!》

《군이 신경태를 앞세우구 최철림을 직접 체포하게!》

《하잇!》 사와다는 몸이 꼿꼿해서 대답하였다.


형사들과 밀정들까지 총출동시켜 불의에 지하조직원들의 가택을 겹겹이 에워싸고 밤새껏 수색작전을 벌렸으나 모조리 허탕을 치고말았다.

악에 받친 놈들은 집집의 안팎은 물론 창고와 뜨락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으나 신통히 단 한명도 찾아낼수 없었다.

히라오까는 화가 꼭뒤까지 치밀어 펄펄 뛰였다.

그는 난생처음 허탈감에 사로잡혀 금시 까무라칠 지경이였다. 신경태가 제공한 지하조직원들의 명단과 주소대로 그들이 어쩔 겨를도 없게 불시에 들이닥쳤으나 하나같이 자취를 감춰버린것이였다. 히라오까는 자신의 무력함과 동시에 지하조직의 이를데 없이 민감한 움직임에 공포감을 느꼈다.

그는 다음날 오후 형사들을 모두 자기 방에 집합시켰다. 그것은 형사들의 실태보고를 재삼 들으며 자기의 생각을 침착히 정리하고 비상사태를 재빨리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맨먼저 일어난 사와다는 최철림을 놓친것이 전부 제탓인듯 저으기 통분해하며 보고했다. 그는 하숙집을 기습하여 발칵 뒤졌지만 아무 단서도 잡지 못했노라고 했다.

《하숙집녀편네는 철림이 간 곳도 모르거니와 그가 하숙에 발길을 끊은지 오래다는 얼빤한 소리뿐이고 고보에서도 학급장인 그가 통지없이 며칠째 등교를 안한다는겁니다.》

《바로 그 하숙집아들, 전춘일이도 조직원이 아닌가?》

《네, 그자두 벌써 자취를 감추었구 기관구에서는 그자가 삼촌이 중풍으로 위급하다는 핑게루 사흘째 머리두 안 내민다는겁니다.》

히라오까는 송곳눈을 사납게 쪼프리며 그의 보고를 특별히 채심해 들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앞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다음?》

메주볼이 늘어지고 체통이 우람진 형사가 함지배를 내밀고 쐑소리로 보고했다. 그는 김길수의 집은 애당초 텅 비여있고 창고문짝에는 못을 박아놓기까지 했더라고 하였다.

《아마공장에 조회해보니 서무과 과원이였던 그자가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수 없다는 핑게로 썩 전에 사직원서를 내고 어대진쪽으루 돈벌이를 떠났다는것입니다.》

이어 뒤켠에서 잘망스럽게 생긴 형사가 짤딱 일어섰다.

《에- 북일사진관집 딸인 녀고생 한은해는 갑자기 학교에두 안 나오구 애비란 작자는 〈부모한테 속두 안 주구 제멋대루 돌아치는 그깐 년 간데를 내 알게 뭐유.〉하고 태연스럽게 잡아떼지 않겠습니까. 그만 손이 근질거리는걸…》

더이상 들어봐도 그것들한테 속히우고 얼리운 턱자없는 소리들뿐이였다. 독이 오를대로 잔뜩 오른 히라오까는 더 참지 못하고 마침내 분통을 터뜨리였다. 그는 별안간 앞탁을 주먹으로 탕 치며 고아댔다.

《보라구들, 엉? 우리 고등계형사들의 꼬락서니가 이게 도대체 뭔가 말이야, 엉? 형사들이란게 빈총에 맞은 사람처럼 얼뜬해가지구 돌아가며 얼리우구 속히우구… 밤낮 눈을 희번득거리며 싸다니면서도 어디 하나 걷어쥔게 있나 말이야? 그러니 메주만 먹는게 당연하지 않는가!》

그는 한참동안이나 고아대고나서야 직성을 가라앉혔다.

워낙 그는 평상시에 대가연하며 점잔을 빼다가도 일단 독이 오르면 입이 여간만 걸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짓수굿하고 앉아있는 형사들을 잠시 둘러보다가 갑자기 기분을 홱 돌려 누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구 아직 실망할건 없어. 수사진으로 혜신주변을 에워쌌으니 놈들이 일체 새나가지 못할것이구, 이제 혜신바닥을 참빗질하느라면 놈들이 아무때든 우리 손에 걸려들게 돼있어.》

그는 말을 끊고 형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일별하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은 진두경의원의 딸 녀고생 진설향이가 이 수사의 매듭을 짓기 위한 마지막끈이다. 그가 정식 지하조직원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우리 일과 깊이 련관돼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 시각부터 진의원집주변에 잠복감시를 붙이고 그 녀자의 뒤를 그림자처럼 밟으며 그가 누구와 만나는가, 누가 그를 찾아오는가, 그가 나다니는 곳은 어디인가 어느 한순간두 놓치지 말고 그의 연줄을 찾자는것이다.》

히라오까는 형사들을 미덥지 않은 눈길로 다시금 일별하며 뇌까렸다.

《절대루 이 계획이 새나가지 않게 해야 해. 다시 언급하지만 진설향을 절대루 놀래우지두 말구 놓치지두 말아야 해.》

모임을 끝낸 후 그는 사와다만 따로 남게 했다.

《사와다군, 지하조직원들이 한날한시에 바람처럼 사라진게 아무래두 수상하거던.》

《예. 》

《진설향이가 경태의 변절을 눈치채고 지하조직에 알린게 아닐가?》

《글쎄요, 저두 그런 생각이 듭니다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리치가 뻔하지 않나. 아직은 그가 지하조직과 내통한다구 단언할순 없지만 여하튼 진설향을 둬두고 면밀히 감시하다가 때가 오면 잡아들여 족쳐봐야 할것 같아.》

《아마 그게 상책일것 같습니다.》

《그리구 문흥지구에서 들어온 형사들을 좀 불러주게.》

《알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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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림은 놈들의 살벌한 움직임이 날로 우심해질수록 불안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멀리 떠나보낸 동지들한테 도중에 무슨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그 어떤 돌발적인 정황과 맞다들지나 않았는지 앉으나서나 걱정되였다. 더우기 한은해는 녀성의 몸으로 여러가지 임무를 걸머지고 그 먼길에 끝까지 무사했는지? 전춘일은 혹시 젊은 혈기를 누르지 못하여 조심성을 잃고 임의대로 행동하다가 놈들의 눈에 드러나지는 않았는지? 특히 향숙이네 모녀는?… 시흥읍까지는 기차로 간다치고 거기서 고사리골까지의 50리 산골길은 무난히 갔는지? 철림은 어릴 때 외할아버지를 따라 매사냥을 가본 일이 있는 고사리골까지의 로정이 눈앞에 어려왔다. 설향은? 만약 경태가 자기의 퀴퀴한 리면을 밝혀낸 설향을 끝내 고발했다면 그는 필시 놈들의 박해에서 벗어날수 없을것이고 자칫하면 묶이워갈수도 있다.

또한 수색에서 허탕친 놈들이 경태를 길잡이로 앞세우고 조직성원들의 흔적을 찾아 샅샅이 뒤질수도 있었다. 그런 예감이 들수록 아지트의 안전이 우려되였다. 성근이 신통하게 표현한대로 《우리 조직의 보금자리》인 아지트의 안전은 문성근의 안전이며 문성근의 안전은 아지트의 안전이였다. 그래서 철림은 성근으로 하여금 당분간 낟알찧으러 오는 사람외에는 그 누구와도 접촉을 극히 삼가하며 함부로 바깥에 나다니지 않도록 간곡하게 말했었다.

철림은 급한 대목에 이르러 외계와의 련계도 두절되고 임의로 나다닐수 없는 몸이 되였다는 생각에 속이 바질바질 탔다. 그는 많은 생각끝에 일감을 하나 찾아냈다. 그의 눈앞에는 불쑥 은해가 언제인가 춘산리 조직원들속에서도 《3. 1월간》에 대한 수요가 말할수없이 높다고하면서도 일에 무던히 볶이우는 자기한테 더 찍어달라는 요구를 차마 못하던 아련한 모습이 안겨왔다. 철림은 은해가 떠나간 지금이라도 그를 대신하여 춘산리의 조직원들을 적극 도와주고싶었다. 춘산리는 류달리 애착이 갔다. 그곳은 은해와 함께 야학의 밤길을 수없이 걸은 애틋한 추억의 고장이였다.

철림은 남은 종이를 들춰내여 《3. 1월간》을 단 한부라도 더 찍으려고 등사간에 꾹 박혀있었다. 그는 줄창 등사에 너무 골똘했던 나머지 머리가 너무 욱신거려 소풍도 할겸 뜨락에 나섰다.

바로 그때 거리에 장보러갔던 성근의 안해가 저자바구니를 들고 급히 걸어왔다. 본시 성미가 침착하고 온화한 그가 무슨 영문인지 오늘은 낯빛이 질려가지고 뜨락에 들어서자바람 철림에게 설레발치며 말했다.

《적은이, 아이구 글쎄 내가 실 한타래를 사갖구 잡화전을 나서는데 설향아지미가 날 못 보구서 그냥 앞을 지나가지 않겠수. 그런데 글쎄 중절모를 푹 눌러쓴 수상한 놈이 사방을 휘뜰휘뜰 살피며 아지미뒤를 바싹 밟는게 아니겠수. 그렇다구 소리쳐 알릴수두 없구. 그저 가슴만 자꾸 활랑거리구 속이 바질거려서… 그리구 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들으니 지금 그 옘병만나 뒈질 놈새끼들이 골목마다 개싸다니듯 한다우. 적은인 한발자국두 나다니지 말아야겠수다.》

철림은 그 순간 놈들이 자기의 뒤를 밟는줄도 감감 모르고 마음놓고 나다니는 설향의 모습이 눈앞에 어려오자 당장이라도 달려가 피신하도록 그를 돕고싶었다. 그러나 어떤 수로 어디에로 피신시키겠는가! 그는 속에 불이 활활 일었다.

문득 대천강의 숲속길로 급급히 달려와 눈물머금고 자기의 막막한 심정을 토로하던 설향의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

《철림동지, 나를 좀 도와주세요. 이젠 은해마저 내곁을 떠났으니 내 어디에 마음을 의탁하고 살겠어요. 지금은 눈앞이 캄캄하고 앞길이 막막해요. 내가 그 인간추물인 경태놈의 그늘밑에서 얼마나 많은것을 잃었나요. 영란이, 찬숙동무들이 걸은 그 의로운 길을 따를 생각도 못한 자신의 저주스러운 지난날을 마구 짓밟아버리고싶어요. 이제와서 아무리 한탄한들 뭘하나요. 곁에 은해가 있을 땐 절망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손잡아 이끌어주고 철림동지와 련계해주어 희망의 빛을 찾았댔는데… 이젠 누굴 믿고 누구에게 의지해 살겠나요. 지금의 나를 부모님들도 구원할수 없어요. 오직 철림동지만이 구원해줄수 있어요. 나에게 아무런 임무든 맡겨주세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람답게 재생의 길을 떳떳이 걷고싶어요! 나를 꼭 믿어주세요!》

그날 설향의 호소는 너무도 간곡하고 눈물겨웠다. 그는 목이 꽉 메고 가슴이 얼얼하여 그저 알겠소, 힘껏 돕겠소라는 말만 되풀이한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성근은 방아간에서 나와 목수건으로 옷에 오른 겨먼지를 털다가 피꿋 저바로 마을어구에 들어서는 시꺼먼 경찰복차림의 사나이에게 눈이 미쳤다. 순간 그는 등골이 서늘하여 《으험!》하고 습관적으로 위험신호를 했다. 그리고는 얼른 바람벽에 세워둔 싸리비자루로 마당을 쓰는척 하며 갈림길목에 이른 경관을 유심히 살폈다. 팔자걸음을 보니 다행히도 그는 허순사였다. 그는 흰이를 드러내고 히죽이 웃으며 거수경례를 붙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아니, 허순사나리가 오늘은 어찌되여 이른아침에…》 성근은 반색하며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문형, 밤새 안녕하오? 》

그는 목소리도 전에없이 시쁘등하고 체신도 저으기 휘주근해보였다.

그는 환도를 철거덕거리며 멍석을 깐 토방우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순사두 요즘 꽤 볶이는게구만.》

그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말두 마우. 요샌 로상에서 꼬박 새울내기에 통 죽을 지경이우.》

《아니, 로상에서 밤을 꼬박 새우다니?》 성근은 우정 놀라는척 하며 반문했다.

《문형은 치안에 영 깜깜이구만. 그래서 내 오늘 문형한테 인사두 하는겸 들렸수다. 이제부턴 문형두 자주 못 만날것 같수다.》

《난데없이 그건 또 무슨 소리우? 우선 방에 좀 들어가셔야지.》

《아니아니, 난 시간없수다. 곧 가야 하우.》

무슨 심상치 않는 기미를 챈 성근은 그의 속을 뽑아볼 심산으로 무작정 방안으로 이끌었다.

《아, 어디 간다면야 송별주라두 한잔 나누어야지 하루이틀 사귀여온 사이두 아닌데 이렇게 섭섭하게 토방에서 헤여지겠수?》

허순사는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더니 《그럼 좀 앉았다 가?》하고 못이기는척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성근은 급히 부엌문을 열고 안해에게 술상을 빨리 차리라는 눈짓을 한 다음 방에 들어가 허순사와 마주앉았다.

《대관절 자주 못 만난다는건 무슨 소리우? 갑자기 딴데 전근이라두?》

《문형한테야 무슨 못할 말 있겠수. 솔직히 전근이 아니라 강구동지구에 증원대루 뽑혀가게 됐수다.》

《증원대라니?》

허순사는 별안간 눈이 휘둥그래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문형, 요새 국경상황이 날루 험악해지구있소. 며칠전에는 국경부근에 〈토벌대〉를 끌고갔던 스께가와중좌이하 전원 몰살당하구 퇴각을 주장하다가 혼자 살아남은 한 중위는 즉시에 배를 가르고 목을 잘리는 형벌을 받았소. 생각만 해두 머리칼이 곤두서우. 그래서 또 강구동지구에 경찰증원대를 파견하는거라우. 그런들 신출귀몰하는 유격대를 당해낼것 같수? 흥, 어림두 없지. 나두 이렇게 총알받이루 끌려다니다가 귀신모르게 황천객이 될것 같수.》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이때 성근의 안해가 사이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성근은 움쭉 일어나 사이문을 열고 술상을 받아들였다. 상우에는 술되병과 사기고뿌 두개가 놓여있고 가운데 놓인 늄남비에서는 토장냄새를 풍기며 물고기탕이 보글보글 끓고있었다. 성근은 되병을 기울여 허순사의 고뿌에 술을 가득 따랐다.

《이 술은 내가 담근 다래술이우.》

허순사는 《다래술?》하고 한고뿌 쭉 들이켰다.

《야, 술이 꽤 향기롭군!》

원래 술부대인 그는 련거퍼 두세고뿌를 들더니 술기운이 올라 만사를 잊은듯 퍼더앉아서 이야기판을 벌려놓았다.

《문형, 여기 혜신지구 치안상황때문에 수일내루 도경찰부장두 내려온다는 소문이요. 매일 욕감태기를 쓰는 미우라서장두 목에 피대가 뻗치구, 그 살모사같은 히라오까주임두 잔뜩 독이 올랐수. 우리까지 마구 몰아대며 날뛰는 판국이요.》

다래술에 혹한 허순사는 술이 정말 달다며 련속 고뿌들이를 했다.

《내 지내보니 문형은 진짜요, 진짜. 하지만 내 없는 사이에 주의하우.》

《아, 나같은 방아잡이야 뭘…》 허순사는 정색해지며 못을 박았다.

《아니요, 아니야. 내 말을 허술히 듣지 마우. 요새는 닥치는대루 마구 잡아들이는판이요. 집안에 꾹 박혀있는게 그저 땅수요.》

그는 물고기탕을 크게 한술 입에 떠넣고 우물우물 씹어삼키더니 갑자기 옆에서 엿듣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죽였다.

《윤형사가 쉬쉬하는 말이 요즘은 밤마다 수색작전에서 허탕만 치는 판이요. 그리구 이건 문형만 딱 알구있소. 지금 진두경의원집에두 특별감시가 붙었다질 않소.》

《아, 그야 고명한 의원이구 무던한 사람인데…》

《그 의원이 아니라 진설향이라는 그 집 딸이 내 전번에 말한 롱구주장 신경태의 뒤를 홀랑 발가놓았다누만. 그러니 그 딸때문에 고등계일이 다 튄걸루 알구 그 연줄을 잡아쥐려구 집에는 잠복감시를 붙이구 딸의 꽁무니에도 꼬리가 달렸다는거요. 또 조만간에 요시찰인들에 대한 전면검거두 단행될것 같소. 무서운 판국이요. 정말 조심하우.》

허순사는 술에 곤죽이 되여가지고서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태는 그야말로 급박해졌다. 지금 설향은 생사기로에 서있다. 놈들이 지하조직원들을 놓치게 되자 연약한 설향을 조직선의 실마리를 잡기 위한 미끼로 삼으려는것이 분명했다. 이와 같은 뜻밖의 비상사태가 일 때마다 철림은 매번 성근이와 심중히 마주앉군 하지만 이번 사태는 특별히 엄중하고 심각하였다.

매번 먼저 입을 열군 하던 철림이가 오늘은 별로 침묵을 지키자 방안에 무거운 공기가 숨막히게 서리였다.

그래서 성근이가 참다못해 먼저 말머리를 뗐다.

《그러니까 결국은 설향이가 그 경태놈의 퀴퀴한 리면을 발가놓은게 화단거리 됐군.》

《…》

《종개 한마리가 온 강물을 흐린다더니 한놈의 변절로 얼마나 피해가 막심하우. 그 찢어죽여두 시원치 않을 놈!》 성근은 억이 막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련거퍼 피웠다.

철림은 놈들의 음험한 모략을 상세히 알게 된 순간부터 가슴은 걷잡을수없이 들뛰였다. 설향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는데 지금 당장 그를 어떻게 구원해야 할지 막막했다. 송수옥동지도 얼마나 애정깊이 설향을 념려하였던가! 오죽하면 떠나가는 시각까지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것이 설향이라고 하며 비록 곱게 자라긴 했지만 세심하고 마음씨 고운 그를 잘 이끌어주면 훌륭한 혁명동지로 될수 있다는 믿음까지 주지 않았던가!

(설향을 절대로 놈들의 손에 잘못되게 해서는 안된다. 그를 무조건 구원하자! 그의 고운 마음을 지켜주고 이끌어주자!)

그러나 지금같은 상태에서는 희생적각오가 없이는 그를 도저히 구원해낼수 없는것이였다. 진정 인간에 대한 열렬한 사랑만이인간을 위한 값높은 희생성을 발휘할수 있다. 나자신도 그 사랑에 의해 혁명의 길에 나섰고 그 사랑이 나를 혁명가로 키우지 않았던가. 내 한목숨을 바쳐서라도 설향을 구원하자! 하지만 그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수 있겠는가?

(지금 설향의 집은 고등계 감시의 초점이고 그의 뒤에는 미행이 붙은데다가 또 은해마저 없으니 그들 둘이 즐겨찾던 대천강가나 석탑공원에는 혼자서 발길을 돌리지 않을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와 만날수 있는 장소란 오직 학교와 집사이의 로상뿐이구나!)

로상 역시 위험천만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철림은 속으로 자기의 결심이 확고하게 무르익혀지자 드디여 성근에게 자기의 의향을 내비치였다.

《문동지, 아무래도 제가 설향동무를 만나러 가야 할것 같습니다.》

순간 성근은 대뜸 두눈이 휘둥그래지며 철림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아니, 만나러 가다니?! 그것두 말이라구 하우?》

《지금형편에서야 나밖에 갈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말을 들어보면 설향은 철림동무를 잡으려는 놈들의 미끼인데 그 사지판에 부득부득 본인이 나선단 말이요? 아니, 나는 동의할수 없수다!》

성근은 두말을 못하게 딱 잘라맸다.

《문동지, 내가…》

《제발 나이든 사람 말두 좀 들어주우. 철림동무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조직책임자요. 아니할 말로 위험도 위험이지만 이날껏 손끝에 가시물 한번 적셔보지 못하구 온실화초처럼 고이 자란 그가 막다른 고비에 이르면 어떻게 나올지 어찌 안단 말이요? 또 설향은 아직 우리 회원두 아니지 않소.》

방안에는 또다시 숨막히게 답답한 침묵이 한참동안 흘렀다.

철림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사뭇 너그러운 어조로 진중하게 자기의 립장을 표명했다.

《설향동무는 진짜 마음 고운 동뭅니다. 나는 벌써 비록 적은 성의로나마 인민혁명군을 돕고싶어하는 그 마음의 진정을 읽은지 오랩니다. 이번에두 경태놈한테 순진한 마음을 무참히 짓밟힌 괴로움은 뒤전에 두구 그놈의 변절을 조직에 먼저 알려 우리를 도운 그 마음이 얼마나 기특합니까. 또 지금은 재생의 길을 걸으려고 눈물겹게 일떠선 동무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아름다운 인간은 제 한목숨을 건지려고 남을 해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문동지, 생사기로에 있는 한 인간을, 그렇게두 고운 마음을 지닌 설향을 목숨바쳐서라도 구원할 마음이 없다면 제가 무슨 혁명가이겠습니까!》

《정 그렇다면 나두 더 할말은 없수다만…》

성근은 마지못해 이렇게 말하며 후- 한숨을 길게 지었다.

철림은 자기의 신변을 그처럼 가슴아프게 우려하는 성근의 뜨거운 마음에 진정으로 머리숙어지였다.

그는 떠나면서 설향의 피신처를 성근의 집에 정하도록 합의하였다.

한편 요즘 검정중절모를 눈섭까지 푹 눌러쓰고 낯짝을 반이나 가리는 시꺼먼 색안경을 낀 신경태가 사복형사들틈에 끼여 곳곳으로 뻔질나게 돌아치는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얼마전 집중적인 가택수색에서 허탕을 친 다음부터 히라오까의 계책에 따라 사와다는 아무리 변장을 한대도 최철림이나 지하조직원들을 대번에 제꺽 색출할수 있는 신경태를 마치 목사리 안한 세퍼드처럼 끌고다니였다. 오늘도 사와다는 신경태를 끼고 장거리의 요소요소를 샅샅이 훑기 시작하였다.


×


철림은 한낮쯤 되여 5일장 보러 가는 시골장군들속에 섞이여서 설향의 하교시간을 속으로 가늠하며 스적스적 걸었다. 학생복차림대신 검정모자를 머리에 얹고 옷잔등이 누릿하게 바래고 안자락이 좀 처진 검정양복저고리에 회색바지를 입은 그를 쉽게 알아볼 사람은 없을것이였다. 게다가 흰 수건을 목에 느슨하게 동여매고 허름한 지하족을 신은 그의 인부다운 행색은 손수레군들과 어디서나 눈에 띄우는 품팔이군들과 쉽사리 어울리였다. 그는 녀고보에서 넘어오는 대천강다리목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우시장(소장마당)에 들어섰다. 우시장은 소란스럽기짝이 없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소편자를 신기는 토닥거리는 마치소리, 소영각소리, 소말뚝에 비끄러매인 황소들이 느침을 잔뜩 물고 앞발통으로 땅을 파헤치며 으르렁대는 소리에 귀가 멍멍해졌다.

철림은 소거간군과 소살쭈(소를 흥정붙이는 사람)의 주위에 붙어도는 사람들틈에 끼여 슬그머니 다리주변을 살피였다. 건너편 다리목에는 빈대떡같은 캡을 꼭뒤에 얹었거나 작업모를 눌러쓴 두 사나이가 서성거리며 행인들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다리중간쯤에는 나무란간우에 두팔 굽을 얹은 중절모사나이가 강가에서 반두질을 하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는척 하고있었다. 그리고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장마당의 구석이며 골목길에도 이러루한 사나이들이 얼핏얼핏 눈에 띄였다.

그때 방금 역을 벗어나 철다리를 건느는 혼합렬차의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주변의 번잡한 소음을 단번에 짓눌러버렸다.

마침내 저 멀리 공설운동장을 등지고 앉은 하얗게 회벽칠을 한 녀고보교사에서 마지막하학종소리가 뗑뗑 들려왔다. 한참 지나서 녀고생들이 무리로 밀려나오고 그뒤로는 서넛이 또는 두셋씩 짝을 지어 웃고떠들며 다리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초간하게 떨어져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걸어오는 설향이가 눈에 띄였다. 본시 키가 늘씬하고 희멀끔한 그는 녀고생들속에서 유표하게 두드러져보였다. 철림은 별안간 온몸에 긴장을 느끼며 신경이 바싹 켕기여졌다. 건너편 다리목의 사나이들과 다리중간에 있는 사나이의 눈초리들이 설향이쪽으로 쏠리였다.

다리를 거의 건너오던 설향은 자기를 누구인가 지켜보는듯 한 륙감적인 감촉을 느끼고 무심결에 눈을 들다가 천만뜻밖에도 변복한 철림의 눈길과 딱 마주쳤다. 와뜰 놀라 입을 딱 벌리려는 순간 철림은 입가에 미소를 짓는듯 하더니 인춤 얼굴을 돌리는것이였다. 한순간 설향은 그가 꼼꼼히 변장하고 급히 외면하는 거동이 마치 그 어떤 불길한 암시, 위험경고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생긴걸가? 혹시 경태의 비렬한 앙갚음을 피하자고 해서 그러는게 아닐가?! 그래서 은해도 갑자기 사라지고, 그래서 철림씨도 별안간 변장하고 나타난게 아닐가?)

한순간 설향의 머리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번개쳤다. 문득 그는 지금 자기가 어떤 괴한의 감시속에 든듯 한감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향은 두번다시 철림이쪽에 얼굴을 돌릴 엄두를 감히 못 내고 어쩐지 부자연스러워진 발걸음을 기계적으로 느릿느릿 더디게 옮기였다.

철림은 우시장군들과 함께 큰길에 슬쩍 나서서 설향이와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제갈길을 가는척 했다. 그는 서로 무관한 사람처럼 설향과 두어걸음 사이로 슬그머니 접근하여 걷다가 자전거수리소앞에 이르자 사람들이 좀 뜸해진 틈을 타서 재빨리 속삭이였다.

《설향동무, 놀라지 마오. 철림이요. 나를 쳐다보지 말구 앞만 보며 가던 길을 그냥 곧바로 가오.》

철림은 옆을 지나는 사람들이 뜸해질 때마다 낮은 목소리로 모를 박아 말했다.

《내 말을 마디마디 명심해듣소. 설향동무집에 지금 놈들의 잠복감시가 붙고 동무한테도 붙었소. 절대로 집에 가지 마오. 곧바로 위현동물방아집 문성근동지댁에 가 피신하오. 꼭… 내 말을 한치라도 어기면 즉시 잘못되오. 이것은 조직이 동무에게 주는 첫 과업이요! 꼭 뒤를 살피며 다니오. 자, 저 장마당… 장군들속으로 빨리 사라지오!》

설향은 마음이 허둥허둥하여 단 한번의 곁눈질도 없이 종종걸음을 쳐 마구 붐비는 혼잡한 장군들속에 묻히였다.

철림은 설향이가 장군들속으로 무사히 사라지는것을 제눈으로 확인하고서야 후-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이때 문득 또 다른 걱정이 머리를 들었다.

(설향동무가 이 훤한 대낮에 함부로 움직이다가 혹시… 내 왜 그런 주의까지 못 주었을가? 아니야, 그렇게 마련없이 행동할 설향이 아니야. 무슨 수로 내 거처도 알아내고 찾아왔던 영민한 그가 아닌가.)

다음순간 자기를 보내놓고 한시도 마음놓지 못하고 가슴을 조일 성근에게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올 때처럼 우시장쪽으로 해서 오전장을 보고 돌아가는 시골장군들속에 섞이여 가려고 곧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바로 이때 혜림동뒤골목을 빠져나오던 경태가 혜림려관담모퉁이에서 무춤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앞을 지나는 인부행색인 한 청년의 류달리 재고 힘있는 걸음새며 웃몸자세이며가 퍽 눈에 익어보여 그에게 눈길을 박고 유심히 살피였다. 그가 피뜩 자기쪽에 얼굴을 돌리는 순간 경태는 기급하여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다른 곳에 돌렸다.

(아, 바로 철림이였구나! 내 눈이 틀릴수가 없지.)

경태는 속으로 환성을 올렸다. 그는 곧 뒤따라 골목에서 나오는 사와다에게 철림을 가리키며 얼먹은 목소리로 밀고했다.

《형사님, 저잡니다.》

《뭐? 저자라니?》

사와다는 그가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는쪽을 보며 눈이 떼꾼해서 물었다.

《저자가 바루 최철림입니다.》

사와다는 그만 눈이 뒤집힐듯 놀랐다.

《뭐, 최철림?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사와다는 사나운 눈찌로 저만치 뒤에 떨어져오는 형사들에게 《야! 저기 길가는자를 빨리 잡으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놈들은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고있는 철림에게 욱 밀려갔다. 어느결에 신경태는 기름쥐처럼 꼬리를 감추었다.

《야! 서라!》

네댓명의 형사들이 순식간에 철림을 빙 에워쌌다. 길가던 장군들이 화닥닥 놀라며 비켜섰다.

철림은 흠칫 놀라며 자기를 에워싼 사나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담차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왜 길가는 사람의 앞을 무지하게 가로막는거요?》

그의 당당한 자세에 위압을 느낀 형사들이 머뭇거리고있을 때 희색이 만면하여 배통을 내밀고 나타난 사와다가 제법 틀지게 물었다.

《네가 최철림인가?》

최철림이라는 말에 형사들은 놀랍게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렇다! 당신은 누구요?》

철림은 서슴지 않고 대꾸했다.

《나? 고등계 사와다요.》 그는 씨물씨물 웃으며 시까슬렀다.

《사와다? 그러니 당신은 사찰과 출신이군.》

《뭣이?》

사와다의 상통에서는 비양스러운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형사들앞에서 겁먹는 기색도, 위축감도 없이 태도가 너무나 도도한 철림의 당당한 기세에 사와다는 혀가 굳어졌다. 그는 설 다루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에 있는 형사에게 《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말상을 한 키꺽다리형사가 쇠고랑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 자식, 두손 내밀어!》

한순간 철림이 눈깜빡할 사이에 바른손칼로 쇠고랑을 탁 쳐갈기였다. 쇠고랑은 허궁 공중날아 길건너쪽 도랑창에 철거덕 나떨어졌다. 형사들은 그 바람에 일제히 놀라 눈들이 퀭해졌다. 사와다는 권총을 제꺽 뽑아들었다.

《나쁜놈의 새끼!》

저발치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왁 흩어지였다.

철림은 사와다의 야비한 지껄임에 속이 울컥했으나 꾹 참았다.

《여보, 사와다나리, 그따위 〈닭다리〉나 내흔든다구 겁낼 사람 아니요. 당신네 신경태를 끌어갈 땐 직업적인 특무노릇을 시키려고 수갑두 안 채웠을테지. 마음놓으라. 시시하게 도망갈 사람 아니니까.》

숱한 《사상범》을 다뤄본 사와다이지만 권총앞에서도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는 도고한 자세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또 그 순간 언제인가 바로 이 장마당에서 그가 황소같은 《박부르도그》를 단매에 반주검이 되게 했다던 경태의 말이 뇌리에 번개쳤다. 기가 눌린 사와다는 도랑에서 쇠고랑을 주어들고 다시 달려들려는 꺽다리를 손으로 저지시켰다.

철림은 형사들에게 에워싸인채 꿋꿋이 걸어갔다.

한편 법석 봄비는 장군들속에 몸을 감추고 한숨 돌리고난 설향은 철림의 신변이 더럭 걱정되여 사람들 틈에서 거리를 살펴보다가 그만 《앗!》소리를 지를번 하였다. 그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경찰서쪽으로 가는 운송점앞길에서 여러 사나이들한테 끌려가는 철림을 본것이다. 그는 금시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다음순간 무조건 빨리 피하라던 철림의 당부가 피꿋 떠올라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가까이에 있는 가게방을 에돌아 단층골목으로 들어갔다.

설향은 게딱지같은 단층집들이 숨막히게 들어앉은곳에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다가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그는 앞뒤를 살피며 사람의 형체 하나 얼씬하지 않는 대천강기슭에 내려섰다.

무서움도 잊고 철림이 일러준대로 걸음마다 뒤를 살피며 나무잔가지들이 얼굴을 알알하게 후려치는 버들방천을 따라 바삐 걸었다. 밭너머 큰길쪽에서 술취한 사람의 왝왝대는 노래소리가 마디마디 들려왔다.

설향은 성근의 집 문지방을 넘어서기 바쁘게 방바닥에 푹 어푸러져 어깨를 떨며 울음을 터치였다.

성근은 가슴이 철렁하여 후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의 안해는 황급히 설향을 안아일으켰다.

《아지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문아버님, 아, 철림동지가…》

《뭣이, 그래 어찌됐다는거요?!》

《아버님, 철림동지는 놈들에게 체포됐습니다. 저때문에… 으흑…》

《아니 뭐, 철림동무가 체포됐다구?!》

성근은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는 한순간에 호흡이 딱 멎은듯 다음말을 잇지 못했다.

《아, 이런 기막힌 일이라구야. 아, 우리 철림동무가 끝내…》 그는 너무도 절통하여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설향은 그냥 흐느끼고 성근의 안해는 치마귀로 눈굽을 훔치였다.

방아공이 맥없이 떨어지는 찌-꿍소리와 밤객차의 먼먼 기적소리가 서글프게 들려왔다.

성근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향이, 그만하라구. 우리 울지들 말자구. 이건 철림동무가 바라는것이 아니야. 그는 마지막 한명의 동지라두 끝까지 구원하려구 자기를 희생시킨 사람이야. 그는 설사 설향이한테 놈들의 총탄이 날아온대두 선뜻 제 가슴으로 막아나섰을 사람이요. 철림동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람들을 혁명에 나서게 하구 혁명가로 키워준다는 장군님의 금언을 생명으로 간직하구 사는 참된 사람이였지. 나라구 왜 그 귀중한 동지를 잃은게 가슴아프지 않구 눈물이 없겠나. 하지만 설향동무, 우리는 이 아픔과 눈물에 지지 말구 일어서야 해. 설향동무, 조직책임자동무의 그 마음을 굳이 저버리지 말라구.》

설향의 귀전에는 철림이 헤여지기 전에 마디마디 모를 박아 해주던 당부의 말마디들이 다시금 울려왔다. 가슴이 미여져왔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간직한 사람만이 할수 있는 그의 진심에 넘친 행동! 철림씨는 그렇게 고결한 정신을 간직한 사람이였단 말인가! 철림씨와 함께 투쟁의 길에 나선 은해나 이 문성근도 다 그런 훌륭한 인간들이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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