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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은해한테서 경태가 정상등교한다는 말을 들은 설향은 걷잡을수 없는 희열로 기분이 붕 떠있었다. 그런데 왜 지구별 승자전에서 돌아왔으면 나부터 찾지 않았을가?

그는 날이 저물기를 조바심을 치며 기다리다가 경태의 발길이 하숙집에 닿게 될무렵을 가늠하여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가 하숙집에 이르렀을 때에도 경태의 방창문은 여전히 캄캄하고 출입문은 꼭 닫겨있었다. 한순간 그리도 간절하던 기대가 허물어지고 마음은 쓸쓸해졌다.

때마침 가시물소래를 들고나오던 하숙집녀인이 반색을 하였다. 녀인은 부엌에서 열쇠를 꺼내여 경태방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는 전등을 켜고 설향에게 그사이에 보고 들은 소식을 신명이 나서 옮기였다.

《어머니, 경태오빠가 이제는 아주 돌아왔다지요?》

《돌아오구말구. 그새 어데 가서 훈련두 무던히 잘하구 온거야. 이달안으루 도에 올라가 한두번 이기면 서울루 가게 된다누만.》

《그래요?》

《그 어간에 아들소식이 궁금했던지 아버지두 왔다갔다구.》

(아버지가?)

설향은 어쩐지 아버지가 왔다갔다는것이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오빠는 요새두 이렇게 늦어지는가요?》

《무슨 훈련이 그리 바쁜지 가물에 콩나듯 들리군 하는데… 그 사람은 왜 그런지 그전같질 않아. 참 그리구 며칠전에는 사촌누이동생이라며 데리구 와서는 책장의 책두 더러 솎아가구 어항두 가져갔네.》

《어항을요?!》 설향은 깜짝 놀랐다.

《글쎄 어항의 물을 좀 찌우구 금붕어채루 들고가는걸 보니 나두 속이 알알하더라구.》

설향은 어항을 가져간것이 몹시도 놀라왔다. 바로 그 어항은 집에 놀러왔던 경태가 아버지의 방에 놓인 어항을 사뭇 부러워하길래 그의 생일기념으로 그중 신식으로 된 꽃모양의 어항을 사서 놓아준것이였다.

금붕어 두마리가 꼬리를 치며 노는 그 어항은 방안의 공기를 늘 신선하게 하고 즐거움을 주었었다.

설향은 마치도 사촌녀동생이라는 녀자가 자기의 마음을 뽑아간듯 허무하고 야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지금껏 경태한테서 혜신에 사촌누이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적도 없었다.

《나두 여태 그 사람한테 이 혜신바닥에 사촌녀동생이 있다는 말은 듣다 처음이네. 체네는 보통키에 몸이 실하구 해사하게 생겼더구만.》

설향은 어쩐지 사촌누이동생이라는것이 거짓부리처럼 들렸다. 그가 진짜 동생이라면 무엇때문에 숨겨왔겠는가? 또 그는 제 입으로 자기네 항렬의 누이들은 다 시집을 가버리여 마음의 안식처가 없노라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설향은 이들사이의 애매한 관계에 필시 그 무슨 일이 있을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 그 누이동생이 어디서 산다는 말은 없었나요?》

《나두 미처 그건 못 물어봤네. 아지미한테니 말하네만 그 사람은 요즘 별나졌어. 늘 사람을 웃기던 싱거운 소리두 싹 없어진거랑 하숙에 마음을 붙이지 않는거랑… 하기야 졸업을 눈앞에 두었으니 생각이 많기야 하겠지만서두.》

설향은 녀인의 속깊은 말을 곰곰히 새겨들었다. 그것은 경태의 마음속에 일종의 변화가 일고있다는 말과 같았다. 아무튼 난데없는 사촌누이동생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화단거리일것 같았다.

(어떻게 하나 경태와 사촌누이동생간의 관계를 속시원히 알아야겠다.)

사흘후 오전공부를 마치고 대천강다리를 건너 네거리모퉁이에 들어서던 설향은 저바로에서 같이 오던 학생들과 갈라져 혜선동 골목길을 따라 곧추 걸어가는 경태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어망결에 《경태오빠!》하고 소리쳐부를번 했다. 일전에는 밤늦도록 하숙집에 종시 돌아오지 않던 경태를 대낮에 하숙집방향과는 다른 길거리에서 문득 보게 되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설향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경태의 뒤를 따라 움직이였다. 그는 전에없이 머리를 수굿하고 성큼성큼 걷는것이였다. 헛눈을 한번 파는 일없이 걸어가는 경태의 뒤를 설향은 안심하고 부지런히 따를수 있었다.

경태는 어느새 왜인거류민골목을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회칠을 하얗게 한 아담한 단층집에 이르러 누군가를 찾는것이였다. 인차 아래방문이 열리며 장발한 녀자가 해죽 웃어보이고는 경태의 책보를 나꾸채듯 앗아들고 들어갔다.

(저 녀자가 사촌누이동생이라는 녀자일가?)

잠시후 집안에서 녀자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어 축음기에서 《나그네설음》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어 그냥 서있던 설향은 슬그머니 그 집을 에돌아 큰길쪽으로 가보았다. 그 집은 큰길쪽에 화장품가게가 잇달려있었다. 그는 큰길옆에서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태연하게 화장품가게에 들어섰다.

매대앞 우측켠에 람색코트차림의 갱핏한 녀자가 한쪽팔에 손가방을 걸치고 비스듬히 서있었다. 그는 진하게 분칠을 하고 입술에 피칠을 하듯 연지를 바른 얼굴로 설향을 힐끗 쳐다보았다. 녀자의 앞매장유리판우에 동집게, 눈섭먹, 손거울이 놓여있는것으로 보아 경태를 맞이하던 그 녀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모양인것 같았다. 잠시후 벽중간문의 대문발을 제끼며 그 녀자가 나왔다.

갱핏한 녀자가 그를 보고 시시덕거리며 시까슬렀다.

《너 그 학생이 점심식사하러 온거구나.》

설향을 화장품 사러 온 고녀생으로만 알고있는 그들은 마음놓고 쉬쉬 지껄여댔다. 집안에서 금방 나온 얼굴이 이쁘장하고 온몸이 몽실몽실한 그 녀자는 곧 손거울을 들고 동집게로 이마에 보시시한 솜털을 뽑으며 《얘, 너 말 좀 조심해. 그 학생이 뭐니. 남의 바깥주인을 보구.》하고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음, 벌써 그렇게 된? 복자, 너 정말 이름처럼 복가마를 탔다 얘. 림복자니까 그 복이 수풀처럼 무성해질지두 몰라, 호호호. 신경태라는 랑군은 희멀쑥한 미남이겠다.》

《얘, 새빠진 소리 그만해. 그런 말 아무데서나 망탕 하다간 네가 무사치 못할수 있어.》

그들은 목소리를 죽이고 한참동안이나 귀속말로 소곤소곤거리며 킥킥 웃었다.

복자라는 녀자는 눈섭먹으로 눈섭을 그리며 《그러게 남자라는건 아무리 신사인체 점잔을 빼두 단 하루밤이면 알아봐. 우리 바깔주인두 벌써 내 치마폭에 마구 어푸러지는 판이야, 호호호…》

설향은 간간이 들리는 그들의 말을 듣고 속에서는 피가 거꾸로 치솟아올랐다. 너무나도 뜻밖인 기막힌 현실앞에 눈앞이 아뜩해지고 참을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감으로 하여 볼편이 떨리였다. 방안에서는 경태의 류행가소리가 역겹게 간신히 새여나왔다.

설향은 그들이 아무런 기미도 채지 못하게 일부러 크림 한통과 향수 한병을 사가지고 도망치듯 가게를 나섰다. 그는 너무 억이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 발이 길바닥에 닿는지 안 닿는지도 느끼지 못하며 두발을 기계적으로 옮기였다. 집에 가고싶은 생각도, 점심을 먹고픈 생각도 싹 없어지고말았다. 그 진정이, 그 순결한 마음이, 그 순진한 믿음이 화류계의 기생충들같은 그 천박한것들의 입부리에서 모욕당하고 짓밟히우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우는것만 같았다.

(내가 혹시 잘못 보고 잘못 들은거나 아닐가? 인간이 어쩌면 그렇게 될수 있을가?!)

마치도 어떤 허깨비한테 홀리워 꿈속을 방황하는것 같은 허황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피기를 싹 거둔 창백한 얼굴로 가까스로 문지방을 넘어섰다.

《어머니, 나 좀 눕고싶어요.》

어머니는 황황히 담요를 깔고 설향의 학생복을 벗겨주었다.

《얘, 점심 먹구 누우려마.》

설향은 몸을 던지듯 담요우에 누웠다.

《얘, 너 또 전번처럼 몸살이 와서 그러잖니?》

어머니는 걱정에 싸여 물었다.

《아니예요. 어머니, 나 좀 혼자 있게 해주세요.》

어머니가 나가자 설향은 애써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오열에 어깨를 떨었다.

(아, 인간이, 인간이 어쩌면 그렇게 될수 있을가?!)

자기들의 오누이정은 변함없이 영원하리라고, 영원히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 꿈이 하루사이에 어리석은 꿈으로 되여버리다니. 그 천한 계집들의 입부리에 올라 멸시당하고 시궁창에 던져진 진정… 마치도 끝없는 지평선우에 아득하게 비낀 칠색령롱한 무지개를 향해 황홀한 심정으로 줄창 달리다가 별안간 천길낭떠러지를 헛짚고 허궁 떨어져내린듯… 천만뜻밖에 경태의 거짓에 찬 리면을 제 눈으로 보게 된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그의 마음속에 자기에 대한 사랑도, 진정도 티끌만치도 없이 지금껏 빈소리로 자기를 낚아왔음을 절통하게 눈물겹게 깨달았다.

녹쓴 쇠붙이에 도금칠을 한듯 겉모양만이 번들번들한 인간, 유치한 계집의 롱락물로 전락된 가련한 신경태! 그처럼 온통 거짓과 허세로 빚어진 치졸한 인간에게 넋을 잃고 우상처럼 따랐던 자기자신을 찢어발기고싶도록 원통했다.

설향의 뇌리에는 피뜩 철림의 생일날 시뜻하게 뇌까리던 경태의 혐오스러운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때 철림은 다정다감하게 이런 말을 했었다.

《설향씨는 그야말로 흠할데 없이 훌륭한 녀성이야. 그의 기특하고 갸륵한 심정, 다심한 지성이 이 방의 어느 구석에나 다 깃들어있구만!》

그 말에 대한 경태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여, 이 아녀자같은 세세한 감정가야, 그깐 한가한 녀자들의 한낱 잔손치레를 보구 뭘 그다지나.》하고 코웃음을 치지 않았던가. 그때에 나는 그 말마디에 비낀 그 인간의 전모에 왜 눈길을 돌리지 못했던가! 지금 새겨보면 그날 철림의 마음을 하찮게 대하듯 그에게는 진정이란 꼬물만큼도 없었다. 그한테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이 설향이도 필요했고 오누이정도 필요한것이였다. 오로지 저 하나의 안락밖에 모르는 극단한 리기적인 삶을 바라는 인간, 인정도 순결도 티끌만큼도 없는 불모지같은 인간

한순간 그의 머리속에 (왜 경태와 림복자가 갑작부부가 되였을가? 그들이 뜨게부부생활을 하도록 사촉한것은 과연 누구일가?) 하는 생각이 번개쳤다. 문득 림복자가 갱핏한 녀자한테 자기들의 내막을 망탕 말하다가는 무사치 못하리라고 하던 암시가 등골이 선득하게 상기되였다.

(혹시 경태의 코를 꿴 호연놈과 련관된 일이 아닐가? 그놈이 밀정으로 명백히 드러난 조건에서 혹시 고등계의 조작극이 아닐가?!)

설향의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였다. 그는 자리에서 화닥닥 일어났다.

마음을 미궁에 몰아넣던 어지러운 상념들이 순식간에 가셔졌다. 잇달아 은해와 철림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그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가? 호연놈과 짝자꿍이를 하던 경태로 하여 그들이 무슨 화를 당할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튿날 오후 설향은 남고보에 찾아갔다.

늦도록 롱구훈련을 하고 느릿느릿 운동장을 걸어나오던 경태는 학교정문에 버티고서있는 설향에게 눈이 미치자 흠칫하고 놀라더니 돌연 활기를 내여 다가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설향이가 어떻게? 그새 내가 몹시 그립구 보고싶었던게지. 하늘에서 선녀처럼 내린걸 보니.》

설향이도 시치미를 떼고 인사를 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나야 뭐 스포츠맨인데 응당… 그런데 설향인 핼쑥해졌구만. 또 앓은거지.》 경태는 넌지시 설향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며 풀기가 없는 어조로 건성 물었다.

《정말 오래간만인데 오늘두 늘 만나군 하던 대천강가로 좀 걷지 않겠나요?》

설향은 오빠라는 말이 입밖에 나가지를 않았다. 마음에서 사라진 말을 낯간지럽게 입에 올리기가 싫었던것이다.

…어제밤 폭우가 쏟아진 다음부터 갑자기 바람은 몹시도 기승을 부리였다. 하늘높이 뜬 등근달은 성난듯 구름장들을 헤치고 황급히 날아가는것 같았다. 구름그림자들은 대천강의 흐름을 거슬러 기여서 달리고 소란한 여울물소리는 바람에 실리여 《쏴-아.》큰소리를 지르다가는 기척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대천강너머 야산의 숲은 흐느끼듯 비명을 지르며 사나운 풍세에 태질을 하였다.

유난히도 소란스럽고 을스산한 밤이였다.

이따금 싱거운 말로 침묵을 건드리던 경태가 잠시 입을 다물자 또다시 서름서름한 침묵이 흘렀다. 경태는 일부러 느릿느릿 걸으면서 설향이가 오늘 별스레 자기를 차겁게 대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를 머리속으로 짐작해보았다.

그때 설향이 걸음을 뚝 멈추고 담담한 어조로 거침없이 말을 꺼내였다.

《내 하나 묻자요. 림복자란 누구예요?》

난데없는 벼락질문에 경태는 불에 덴듯 화뜰 놀라며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는 설향을 기가 질려 바라보았다.

《왜 대답 못해요? 그게 누구나요?》

경태는 가슴이 얼어들었으나 놀라던 사람같지 않게 내키지 않는 웃음을 비죽이 띄우며 모르쇠를 부리였다.

《림복자라니? 어디서 그런 이름을 주어듣구… 오늘은 좀 별스럽게 구누만. 》

《시치미를 떼지 마세요! 왜 대답을 피하나요? 그럼 그 림복자가 사촌누이동생인가요?》

그의 비수같은 날카로운 물음에 경태는 다시금 와뜰 놀랐다.

(하숙집녀인한테 둘러댄 말이 귀에 들어간거구나. 그러나 그 녀인도 림복자라는 이름은 알수 없지 않는가. 머리가 팽팽 돌기로 소문난 설향이가 무슨 근거를 단단히 쥐였기에 별안간 급소를 강타하는것이 아닌가.)

《대답을 못하는걸 보니 속이 찔리는거지요? 세상엔 비밀이란 없어요. 단지 시간문제일따름이예요.》

막다른 궁지에 몰린 경태는 얼렁수로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오늘은 이자리를 모면하는것이 상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설향의 서리찬 말이 또다시 경태의 명치를 찔렀다.

《림가가 어떻게 사촌간이 될수 있어요? 외사촌인가요?》하고 설향은 얼굴을 쳐들고 경태를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설향이, 됐어. 남자가 필요에 따라 다른 녀성과두 좀 교제를 할수있는거지 뭐 그까짓걸루 지내 신경을 쓸게 있어? 어느 쓸개빠진것들이 설향의 귀에 그런 헛나발을 불어넣었는지 모르겠는데 이 심장은 어제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설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불타…》

그 찰나! 설향의 손이 번개같이 경태의 귀쌈을 철썩! 후려갈겼다.

순간 눈에 불찌가 확 일며 뗑해진 경태는 말뚝처럼 서있었다.

《아! 사람이 어쩌면… 어쩌면… 그렇게두 뻔뻔스러울수 있어요? 인간의 허울을 쓴 너절한 위선자! 아…》

설향은 그 자리에 풀썩 물앉으며 얼굴을 싸쥐고 어깨를 떨었다.

이 순간 그리도 소란스럽던 주위가 물속처럼 고요해졌다.

(아, 심장속에 참다운 사랑이 한방울도 없는 허접쓰레기같은 인간. 과연 그런 인간을 우상처럼 믿고 마음을 통채로 맡기고 리상적인 행복을 황홀하게 꿈꾸어오다니! 아, 미련하기 그지없는 설향아! 겉모양에 넋을 빼앗겼던 눈뜬 소경! 너절한 속은 모르면서 그 눈길, 그 목소리에 녹아 리성을 잃고 따랐던 이 분별없는 가련한 설향아! 이 설향을 그렇게도 애중해하며 그지없는 애정을 기울여 키워주신 아버지, 어머니가 이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되시면 아, 얼마나 통분해하시랴! 아, 아버지, 어머니! 그는 내 생명의 은인도 아닌 짐승이예요. 그는 사람의 허울을 쓴 악마예요. 더는 믿지 마세요. 그가 그런 인간인줄 정말 몰랐어요. 아, 인간아닌 인간을 믿어오다니. 어머니, 절통해요! 자신이 막 저주로와요!)

그는 그 자리에서 까무라쳤다.

다음날 설향은 등교하지 않았다.

설향의 자리가 텅 비자 교실은 별안간 썰렁해진듯싶었다. 그의 빈자리에 자주 눈이 미치는 은해의 머리속에 갖가지 불길한 의혹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었다.

(무슨 일일가? 언제인가 곡예구경을 한 때처럼 또 몸살이 와서일가? 아니야. 그렇다면 설향의 어머니가 당장 우리 집에 달려와 알렸을게 아닌가.)

요즘 설향은 새로운 생활의 첫걸음을 떼면서부터 활기도 되찾고 《꽃바람》으로서의 본래모습으로 되돌아가 동무들의 인기를 독점하고있었다. 단지 흐린 구석이 있다면 간혹 만나게 되는 경태가 실소리인지 빈소리인지 분간이 안 가는 너스레로 자기의 움직임에 연막을 치는 그 애매한 거동을 미심쩍어하는것이였다.

(그렇다면 그와의 관계에서 무슨 상서롭지 않는 일이라도 생긴것일가?)

이러한 불안에 사로잡혀 종일 자신을 걷잡지 못하고있던 은해는 공부가 끝나기 바쁘게 뒤숭숭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는 저녁설겆이를 서둘러 끝낸 후 설향의 집에 가보려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집을 막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출입문에 《똑똑.》가벼운 손기척을 내는것이였다.

《녜-》하고 얼른 문을 열던 은해는 그만 흠칫 놀랐다. 문밖에 맥이 탁 풀려 서있는 설향을 본것이였다. 하루사이에 얼굴이 해쑥해지고 눈이 퀭해진 설향은 은해의 손길에 이끌려 방에 들어왔다.

설향의 침통한 기색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은해는 그를 방바닥에 급히 끌어앉히며 성급하게 다우쳐물었다.

《설향아, 너 어찌된 일이야? 네 얼굴이 왜 이렇게 축갔니? 너한테 무슨 일 있은게구나!》

설향의 눈굽에는 눈물이 그득 고였다. 그는 갑자기 《은해!》하고 파리해진 얼굴을 은해의 가슴에 와락 묻었다. 잠시후 그는 마음을 인츰 수습하고 자세를 바로하며 앉았다.

은해는 속이 바질바질 끓어 더 참지 못하고 또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집에 무슨 큰일이라두 생겼니?》

설향은 말없이 머리를 가로흔들었다.

《아니야. 은해, 그 더러운 경태라는 인간때문이야.》

《뭐, 경태?! 그한테 무슨 일 생겼게?》

은해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그는 거짓투성이, 량심이란 티끌만큼도 없는 인간추물이야!》

설향은 저으기 침착하고 조리있게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들은 사실과 경태와 단호히 결별한 전말을 분격하여 이야기하였다.

은해는 그만 기가 딱 막히였다.

《종시 그렇게 됐구나. 쥴리앙이나 메치크 같은 놈! 인간쓰레기!》

은해는 통분한 심정을 금치 못해했다.

《은해, 난 그따위것한테서 배반당한 수치감보다 그 서푼짜리 허접쓰레기를 우상처럼 따르며 믿어온 저주스러운 나자신을 막 발기발기 찢어버리고싶은 생각뿐이야. 아, 인간이 어쩌면 그렇게 철면피하고 치사할수 있을가!》

은해는 그가 그 비루한것한테 여태껏 기만당하고 우롱당해온 고뇌가 얼마나 심각하고 극한점에 이르고있겠는가를 가슴저리도록 절감했다.

은해는 불쑥 그에 대한 련민의 정이 북받쳐올랐다. 설향을 진정으로 돕고 진심으로 그에게 힘을 주고싶었다. 은해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진중한 어조로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설향아, 이제부터 너는 자기자신을 존중할줄도 알아야 해. 경태의 그늘밑에서 살던 자신과는 영영 결별하구. 설향아, 이제와서 너한테 내 무얼 더 숨기겠니. 사실 우리한테 왔던 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언니는 너의 가정사정두 세세하게 알구 너의 소행두 다 알구서 너를 훌륭한 동무라고 했어.》

설향은 그 말에 갑자기 두눈이 휘둥그래지며 은해의 얼굴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그 언니는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모시고 싸우는 훌륭한 동지야. 떠나는 날 송수옥동지는 차마 못 떨어져하는 우리를 친동생들 같이 위로하면서 막상 떠나자니 제일 마음에 걸리는것은 설향이 바로 너라고 했단다. 》

가슴을 올리는 그 말에 그는 그만 격정에 북받쳐 은해의 두팔을 와락 나꾸챘다.

《뭐?!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싸우는 인민혁명군!》

설향은 감격의 눈물로 볼을 적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야- 나같은걸 정치공작원동지가 알게 되다니! 그런데 나는 그런것두 모르고서… 은해야, 너는 어쩌문 그리도 마음이 곱니. 진정 내마음을 알아주구 내 괴로우면 같이 괴로워하는건 오직 너 하나밖에 없어. 오늘은 그 정치공작원동지의 가까이에 나를 세워준 너야말로 나의 진짜 은인이다.》

은해는 눈물머금고 터치는 설향의 절절한 말을 들으면서 설향이 직접 보고들은 사실을 지체없이 조직에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우기 림복자가 저들의 내막을 망탕 입에 올리다간 무사치 못하다고 했다는 말은 필시 심상치 않은 조짐이였다.

은해는 설향을 데리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은해네 집에서 철림의 하숙집까지는 어지간히 멀었다.

달빛이 푸르스름한 거리에 나서자 《특설경비대》를 잔뜩 태운 자동차가 련이어 경적을 울리면서 길 좌우켠에 비켜서는 행인들에게 희뿌연 먼지를 들씌우며 어디론가 미친듯 달려갔다.

그동안 철림은 많은 시간을 삼룡리에 나가 살았다. 그의 헌신적인 역할에 의해 혜신반일회의 조직규모가 그중 확대된 곳이 바로 삼룡리였다. 이것은 그가 졸업을 미리 예견하고 앞으로 이곳을 기본기지로 삼으려는 계획이기도 했다.

그런데 《3.1월간》에 대한 요구가 나날이 높아지면서 회원들은 누구나가 이 잡지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철림은 현선생으로부터 사무용지를 한뭉테기 구해가지고와서 등사를 계속하였다. 그는 송수옥을 통하여 전국적판도에서 혁명의 불길을 확대할데 대한 장군님의 사상과 작전적방침을 전달받은 다음부터 공부만 끝나면 아지트에서 련일 새우다싶이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선로반과 기관구회원들속에서 《3. 1월간》을 꼭 보급하게 해달라던 전춘일의 간절한 청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먼저 등사한 6부를 가지고 저물녘에 성근의 집을 나섰다. 그는 하숙집에 들리여 미리 집에 와있던 춘일에게 잡지를 넘겨주어 기관구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나서 며칠동안 비워둔 자기 방을 한창 정돈하는데 하숙집녀인이 들어와 조용히 은해가 왔다고 알리는것이였다.

녀인은 은해를 웃방에 올려보내고 그냥 부엌간에 소심하게 서있는 설향에게 각근히 말을 건넸다.

《의원집아지미, 오랜만에 왔는데 그렇게 서있지 말구 아래방에 올라가게나.》

《어머니, 전 여기가 좋습니다.》

《그럼 가마목에라두 좀 앉수.》

그때 웃방에서 책상을 주먹으로 《탕!》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철림의 격노한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경태가?! 그놈이 변절했구나! 그래서 놈들이 직업적인 특무로 써먹으려구 계집까지 붙여주구. 비렬한 놈들!》

철림은 분격을 누르지 못하여 두주먹을 힘껏 부르쥐고 우들우들 떨었다.

은해는 사이문을 열고 조용히 설향을 찾았다.

방에 조심히 들어선 설향은 팽팽한 공기에 한층 더 기가 눌리웠다.

너무 억이 막혀 금시 터질듯 한 가슴을 가까스로 짓누르며 창문을 마주하고 서있던 철림은 숨을 죽이고있는 은해와 설향과 엄숙히 마주앉았다.

한참후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향동무, 이렇게 제때에 알려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설향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수줍음을 타며 겸양하게 말하였다.

《아닙니다. 제가 그저 본 사실을 알렸을뿐인데요.》

철림은 그의 말을 단마디로 부정하며 결연히 말했다.

《아니요. 설향동무는 우리 조직을 크게 도와주었습니다. 다행히도 조직앞에 들이닥친 위기를 미리 막을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꺼지게 한숨을 길게 내쉬고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신경태의 변절이 그리 놀라운건 아닙니다. 겉멋이 들어 익살로 인기를 끌며 분별없이 쾌남아행세를 일삼더니 끝내… 사람의 마음속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량심두 신의두 헌신짝처럼 손쉽게 버리게 되는 법이요. 여직껏 호강스럽게 살았고 의지가 나약한 경태로서는 달리될수 없었던거요. 결국 마땅히 걷게 된 길을 걸은셈이지. 이번 일에서 내가 찾는 피의 교훈은 값눅은 우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눈으로 한번두 그를 들여다 못 본거구, 설향동무로서는 그가 생명의은인이였다는 단순한 리유로 마음이 무뎌지구 그의 허울에 속아 본심을 헤쳐보지 못한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도 교훈을 찾고 더 알아보겠지만 이제부터 경태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살펴야 하겠소. 그리구 설향동무는 앞으로 은해동무와 손을 굳게 잡고 동지적으로 협력해주기를 바라오.》

《알겠습니다.》

설향은 선선히 대꾸했다. 그는 은해와 한자리에서 철림의 공식적인 말을 듣게 된것도 자못 놀라왔지만 철림이가 사태의 본질을 정통으로 찔러 평이한 말로 간명하게 표현하는것이 더더욱 놀라왔다. 무엇이든 그럴듯한 말재간으로 둘러맞추며 한갖 씨알머리없는 너스레로 마음을 구슬리던 경태의 속물적인것에 비하면 철림은 아득히 높은 세계에 살고있는 그지없이 견실한인간으로 안겨왔다.

그들을 돌려보낸 후 철림은 마음을 도저히 걷잡을수 없었다. 설향의 말이 확실하다면 위기가 경각에 다달은것이다.

철림은 자정이 가까을무렵에야 아지트에 이르렀으나 그때까지도 성근은 거물거물한 방등밑에서 무슨 책을 뒤적이며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철림이 이따금 자리를 뜨는 날이면 늘 이렇게 늦도록 기다려주군했다. 그는 철림을 쳐다보더니 제꺽 책을 덮고 옆에 놓인 밥상에서 상보부터 벗겼다.

철림은 급히 말리며 천연스럽게 하숙집에서 저녁을 들고왔노라고 했다.

《모를 소리요. 전번처럼 또 끼니를 건느자는게 아니요?》

《아, 아닙니다. 정말 먹구 왔습니다.》

사실상 철림은 아직도 저녁전이였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밥을 먹고픈 생각이 없었다.

한참이나 묵묵해있던 철림은 성근의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설향이한테 들은 사실을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성근은 와뜰 놀라며 《뭐? 그놈이?!》 이렇게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뒤로 풀썩 물앉았다. 생벼락같은 사태를 두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에게 철림은 누긋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성근동지, 일이 정말 재미없게 되였습니다.》

성근은 너무나 돌발적인 사태여서 의문이 풀리지 않는듯 바싹 캐고 들었다.

《한데 그놈이 그래 언제 붙잡혀가구 도대체 언제 변절을 했다는거요?》

《저두 오늘 저녁에야 이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성근은 분통이 터져올라 큰주먹을 부르쥐고 우들우들 떨었다.

《그 기생오래비같은 놈의 자식이 종시… 그놈이 사람답게 죽기를 겁내서 왜놈들의 개가 되였군! 그런데 그걸 누가 어떻게 알아냈다우?》

성근은 술진 눈섭을 곤두세우며 물었다.

《우리 진설향동무가 경태의 뒤를 밟아서 알아냈습니다.》

《아니? 진설향이라면 진두경의원네 귀동녀가 아니요?》

《예, 설향동무를 아십니까?》

《암, 알구말구요. 재작년에 우리 안사람이 방아채에 아래턱을 맞구서 턱뼈가 물러나구 혀가 왼통 갈라져 밥 한술 입에 대지두 못했지요. 그래서 왕진을 청했더니 진의원이 며칠 다니며 구해주었수다. 사람이 용모두 준수하거니와 참 지성스럽더군. 그때 설향이두 반공일이나 공일이면 아버지의 치료를 시중드느라구 몇번 다녀갔댔소.》

《아, 그랬댔군요. 》

《그런데 설향이가 그놈하구는 어찌된 사이기에?》

《설향동무가 경태를 제 생명의 은인으로 삼구 친오빠처럼 무척 따르는 사이였지요.》

《아-하, 그랬댔군. 》

《물론 설향동무 말이 틀림없겠지만 정식 동지들에게 통지하자면 그 사실여부를 나두 다른 선으로 확인해보자구 합니다.》

성근은 손을 홱 내저으며 딱 잘랐다.

《이젠 경태가 개가 됐으니 선참 책임자부터 과녁으루 노리겠는데 일체 바깥출입은 엄금해야겠수다. 놈들의 꿍꿍이속이야 허순사만큼 알 사람 더 있겠소. 내 그 선을 타보겠수다.》

《그래두 일없을가요?》

《그건 념려마우. 허순산 오래 지내보니 악한짓은 별반 안하구 또 왜놈순사들과 형사들의 업심을 당하구 눌려살면서 속에 불만이 꼴딱 찬 사람이지요. 게다가 한고향출신인 고등계 윤형사와두 딱친구간이여서 아무때나 경찰서내막은 손금보듯 꿰들구있수다.》

그 순간 철림은 피뜩 송수옥이 떠나면서 허순사는 거의 우리 사람이 된거나 같다고 하던 말이 새삼스럽게 상기되였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그중 정확하고 빠르게 확인할수 있는것은 허순사선이였다.

철림은 요즘 침식마저 감감히 잊고 이미 착수한 《3.1월간》등사에 달라붙었다. 한시가 위태위태한 때 우선 삼룡리에 보낼 30부만이라도 마저 찍으려고 등사기옆에 지써 붙어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낮쯤에 마당에서 방아공이를 다듬던 성근이 손기척을 내여 위험을 알리였다.

철림은 벼락같이 등사기와 용지 등을 감추었다.

잠시후 밖에서 서로의 인사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리였다. 철림은 그가 허순사임을 제꺽 알아차렸다.

낟알 찧으러오는 사람들외에 여기 출입이 잦은것은 단골손님인 허순사밖에는 거의 없었던것이다.

철림은 때마침 나타난 그가 혹시 경태의 소문을 들고오지 않았을가 하는 조급한 짐작부터 앞섰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오늘은 그가 인차 성근이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는것 같았다.

한참 지나서 성근은 매우 심중한 표정으로 등사간에 훌 들어섰다. 철림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한발 다가섰다.

《방금 허순사가 왔댔는데 전같으면 술상머리에 늘어지게 붙어있을 그가 오늘은 긴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한두잔 들고는 인츰 자리를 뜨더군.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고보롱구주장이 류치장에 며칠 갇혀있었는데 고문 한번 받지 않구두 죄다 불었다는거네. 그리구 그한테 일본료리집 림복자라는 기생까지 붙여주었다는거요. 이젠 다 명백해졌수다. 참…》

철림은 한동안 못박힌듯 서있었다.

(개자식, 변절이 확실하구나!)

물론 경태의 변절은 이미 예상했던것만큼 더 놀랄건 없었다. 단지 림복자가 일본료리집 기생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쨌든 경태의 변절이 막상 객관적으로 명백히 확인되자 철림은 다시금 속이 허둥거렸다.

(이런 비상사태일수록 덤비지 말고 침착하고 또 침착하자!)

그는 우선 벌려놓은 일부터 깨끗이 마무리하려고 삼룡리조직에 보낼 《3. 1월간》 30여부를 다시 꺼내여 낡은 신문지에 싸서 노끈으로 꼼꼼히 묶은 다음 다시 베보자기에 말아 구럭망태에 넣었다. 그리고 그 구럭망태를 장작더미뒤 움벽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런 후 앉은책상앞에 마주앉았으나 활랑거리는 가슴을 도무지 가라앉힐수가 없었다. 그는 숨을 들이그었다가 크게 내쉬며 마음을 애써 다잡고 생각을 한곬으로 몰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지금까지의 사실로 미루어보면 경태의 변절후 일정한 시일이 흘렀으나 놈들이 즘즉한걸 보면 그 비루한것한테도 량심찌끼가 좀 남아있어 낱낱이 고발하지 못한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당분간일것이다. 또 경태가 설향이한테 꼬리를 밟힌 후에도 놈들이 더 설치지 않는것도 그놈이 자기의 실수로 범한 죄책이 두렵고 그로 인하여 저한테 가해질 고등계의 무시무시한 제재에 겁이 질려 감히 히라오까에게 실토하지 못하는것때문일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당분간일것이다. 아니면 경태를 극비로 묻어두고 우리를 일망타진하려는 놈들의 잔꾀일가? 아무튼 놈들은 그한테서 비밀의 깡치까지 긁어낼것이며 놈들의 살에 붙은 그는 스스로 남은 비밀을 말끔히 토하게 될것이다. 그러면 즉각 검거선풍을 일으킬것이다. 과연 이렇듯 촉급한 정황에서 송수옥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가? 문득 기회가 생길 때마다 간곡하게 강조하던 송수옥의 말이 머리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리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것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 동지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우리 혁명이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는거예요. 그러기에 한명의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 사선을 뚫고 피와 목숨을 바친 사실은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 혜신반일회도 진정으로 동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지 못하고서는 투쟁을 옳바르게 이끌어나갈수 없어요. 꼭 명심하길 바래요.》

만일 송수옥이라면 즉시에 그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조직을 구원하고 단 한명의 동지라도 놈들의 손에 걸려들지 않도록 피신시켰을것이다.

(조직을 구원하자. 회원들, 동지들을 구원하자!)

그 순간 그의 눈앞에는 반일회 회원들의 모습이 확 안겨왔다. 동시에 그 기간에 몇배로 늘어난 새로운 회원들의 얼굴도 눈에 삼삼히 밟혀왔다.

철림은 당면하여 먼저 피신시킬 대상들을 속으로 꼽아가며 그들이 피신할수 있는 적당한 곳까지도 일일이 따져보았다. 그것이 정해지자 아직 드러나지 않은 회원들에게는 대렬안에 나타난 변절자에 대하여 긴급히 통지하고 경각성을 극력 높일데 대한 대책안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이 세밀하게 타산되자 그는 곧 문성근이와 무릎을 마주하였다.

한자리에 시급히 모일수 있는 회원들은 그들 두사람밖에 없었다.

성근은 평소에 그리도 참하고 소탈하기 이를데없던 철림이가 오늘은 별로 판판 딴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황급하게 서두는 철림의 근엄한 모습에서 일종의 위압감을 느끼며 담배쌈지를 방바닥에 꺼내놓고도 감히 담배를 피을념을 못하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철림은 조용히 먼저 입을 열었다.

《문성근동지, 이 자리엔 우리 조직을 대표할 사람은 우리 두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토론한 문제를 조직의 결정으로 삼고 리행하면 될것 같습니다.》

《암, 응당 그래야지요.》

철림은 그의 뜻밖의 공식적인 어조에 빙그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의 결심을 먼저 말하려구 합니다. 우선 경태가 얼굴을 잘아는 한은해동무와 전춘일동무부터 선차로 피신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을 어디루?》

《은해동무는 태평령밑 이모한테 보내고 춘일동무는 남석면에 친척이 여럿이 되니 그중 알맞춤한 곳에 보내면 될것 같습니다. 그리구 김길수동지의 안해두 피신시켜야 할것 같습니다.》

《뭐, 김길수동무의 내인까지두?!》

《예. 김길수동지야 우리 조직의 부책임자이구 또 등사기두 내놓은 당자가 아닙니까. 지금은 인민혁명군에서 싸우고있구요. 그런데…》 그는 한숨을 지으며 방점을 찍어 말했다. 《그런데 지난 여름 경태놈이 제 노래를 취입한 레코드판을 들고 축음기 들으러 그 집에 간적이 있단 말입니다.》

《아뿔싸!》

성근은 손바닥으로 무르팍을 탁 쳤다.

《그러니 놈들이 가족들한테두 박해를 가할거구. 모름지기 길수동지의 행처와 련루자들을 찾아내려고 그의 안해와 어린 딸에게 갖은 악행을 감행할수도 있지 않습니까.》

《듣구보니 실은 그렇군. 그런데 이 살벌한 판국에 그 내인네야 어디루 급히 보낸단 말이요?》

《그 아주머니의 본가가 시흥군 고사리골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나들이식으로 슬쩍 보냈으면 합니다.》

그제야 성근은 담배쌈지끈을 끄르며 걸걸하게 말하였다.

《하여튼 철림동문 정말 놀랍소. 어쩌면 남들의 집안사정에 그렇게두 밝구 자심하우. 래력〈박사〉라는 나같은건 찜쪄먹구두 남겠수다.》하고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조직책임자가 아닙니까.》

그들은 마음의 끈을 풀어놓고 시름없이 웃었다. 철림은 웃음을 거두며 《그리구 문동지두 부인과 함께 고향인 남석으로 곧 피신해야 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성근은 불에 덴듯 펄쩍 뛰였다.

《책임자동무, 아니 그것두 말이라구 하우? 다시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두 마우. 내가 이 집을 뜨다니 원.》

《물론 이 아지트는 여직껏 극비에 붙이고있지만 경태가 문동지의 얼굴을 알고있지 않습니까.》

《그 경태놈?》 성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한두번 피뜩 보긴 했어두 그 기름독에 빠진것 같은 놈의 눈깔에 이 허줄한 촌뜨기가 들어있기나 할것 같소? 아마 눈깔이 꼭뒤에 붙은 그놈은 나같은건 언제한번 똑바루 새겨보지두 않았을거우다.》

철림은 그 말을 들으며 본시 부접이 좋으면서도 제딴의 기호에 맞지 않거나 기준에 들지 않는 사람은 애당초 거들떠보지 않는 경태의 고약한 기질이 도리여 이런 판국에는 방패막이로 된다는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 그건 그거구 이 집이야 우리 경숙이가 장군님을 모시고 잘 싸운다는 기별을 안고 온 정치공작원동지가 지내던 곳이구 또한 책임자동무두 제집처럼 정을 붙이구 일하던덴데… 이를테면 우리 조직의 보금자리나 같은 이 집을 내가 어찌 뜬단 말이요. 제 하나의 목숨이나 건지려구 여길 버린다면 그게 무슨 사람다운 인생이겠소. 내 걱정은 하등 말아주.》

철림은 그의 마음을 알게 되자 피신하라는 말을 더이상 입밖에 낼수 없었다.

《지금은 내 걱정이 아니라 책임자동무부터 속히 피신해야겠소. 우리조직을 위해서 다른 누구보다도 철림동무가 건재해야 할것 아니겠소.》 그 말에 철림은 자기의 립장을 단호히 표명했다.

《문동지, 나는 조직책임자입니다. 조직과 동지들을 끝까지 보호하는데서도 응당 책임자가 되여야 한다구 봅니다.》

다른 말을 더 비쳐볼수 없게 딱 자르는듯 한 그의 말에 성근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송수옥을 닮아서인지 그 아무리 위급한 정황에도 눈섭 하나 까딱안하고 침착하고 여유작작하게 처신하였으며 조직사업이 주도세밀하고 무슨 일에나 선참으로 뛰여들어 실행하는것이였다.

성근은 그가 나이로치면 썩 아래이고 아직은 학생의 몸이였으나 내심으로 늘 그를 선망의 감정을 품고 대해왔다. 송수옥이 떠난 다음에도 그만 곁에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고 두려운것이 없었다.

철림은 날이 저물기를 안타까이 기다리다가 초저녁쯤 되자 번잡한 거리에 나섰다.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머리속에 방금전 여러곳에 새로 망라한 회원들과의 련계를 지을 방도를 의논할 때 성근이 선뜻 삼룡리는 제가 맡겠노라며 장담하던 말이 되새겨졌다.

《삼룡리는 애당초 념려마우. 내가 좀 무슨 뾰족한 수를 써보겠수다. 어제 낟알찧으러 온 풋낯이나 있는 속새골사람의 말에 의하면 삼룡리에두 벌써 놈들의 손이 뻗친 모양같소만 평생 산판이란 산판은 메주밟듯 한 내가 아무렴 그깟놈들의 께적지근한 눈이야 못 속이겠수.》

삼룡리는 원래 철림의 담당지구이고 낯이 퍽 익은 고장이였다. 그래서 우정 자기의 신변을 우려하여 자진해나서는 성근의 웅심깊은 진정에 코마루가 찡해졌다.

철림은 어둑시근한 골목골목의 료리집들에서 흘러나오는 역겨운 왜노래와 잡놈들이 질탕거리며 떠들어대는 소음속에 녀인들의 출입이 잦은 야시장을 에돌아 뒤골목길로 발걸음을 급히 옮기였다. 그가 북일사진관에 이르렀을 때 뒤뜰안에서 뽐프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철림이 널바자곁에 다가가 넘겨다보니 열린 뒤문으로 전등빛이 조명등처럼 내비치는 뽐프장에서 은해가 두리함지물에 빨래감을 행구고있었다. 은해는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널바자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은해는 어둑어둑한 속에서도 히뭇이 웃으며 서있는 철림을 인츰 알아보고 《아니-》하고 벌떡 허리를 일으켰다가 다시 굽히고 헹구던 빨래를 솜씨싸게 비틀어짜서 빨래줄에 펴널었다. 그리고나서 저고리소매를 내리우며 잰걸음으로 마주 다가왔다.

《철림동지,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는 쪽문을 열고 철림을 안내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은해는 밝은 웃음을 짓고 철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은해동무!》

촉기빠른 은해는 뜻밖의 그의 진중한 목소리와 긴장한 표정에서 무슨 긴박한 사태를 감촉한듯 말없이 철림의 얼굴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은해동무! 신경태의 변절이 명백해졌소!》

《네?!》

은해는 새된 소리를 나지막하게 질렀다.

《사태는 매우 위급해졌소. 놈들의 검거선풍이 어느 순간에 일지 모르오. 그러니 은해동무는 될수록 빨리 피신해야겠소.》

은해는 꺼지게 한숨을 지으며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시간이 급하오. 내 말을 한마디도 흘리지 말고 명심해 듣소. 오늘 밤으로 길떠날 차비를 해가지고 당분간 태평령 이모한테 가서 피신하는게 좋겠소. 가면서 담당한 춘산리에 몰래 들려 이 사실을 알리고 경각성을 바싹 높이도록 못을 박은 다음 곧바로 떠나오. 또 가던 길에 우리 집(남석면 학천동 15반, 어머니는 김유영이요.)에 들려 아니, 거기두 놈들의 마수가 뻗쳤을수 있으니 사립학교에 가 미옥을 만나오. 어른 못지않소. 그래서 송수옥동지가 꾸린 조직성원들도 이 사태를 다 알게 해야 하오. 피신기간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 어머니와 련계를 맺고 처리하오. 부모님들을 충분히 납득시킨 다음 곧 떠나오. 하루라도 지체해선 절대 안되오! 자, 그럼…》

한순간 은해는 철림의 앞에 다가서며 《그러면 철림동지는 어떡해요? 어디로 피신해요? 어데 가 있겠어요?》하고 다급하게 따져물었다.

철림은 가슴이 얼얼해지고 목이 꽉 메였으나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누긋한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켰다.

《은해동무, 내 걱정은 절대 마우. 나도 다 생각이 있소. 다시한번 강조할것은 동지 한명이라도 절대로 놈들 손에 걸려들게 해선 안된다는거요. 어디서든지 놈들의 눈에 걸리지 않게 특별히 주의하기 바라오.》

철림은 맥없이 드리운 은해의 손을 꼭 그러잡았다. 순간 은해의 눈에 눈물이 핑 고였다. 은해는 큰길까지 따라나와 급하게 걸어가는 철림의 모습이 소란한 길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안타까운 눈길로 바래였다.

철림은 부리나케 걸어 단숨에 하숙집에 이르렀다. 그는 자기 방의 불만 꺼져있는 하숙집이 어쩐지 안심찮은 생각이 들어 잠시 방안에서 새나오는 모자간의 두런두런한 말소리를 정겹게 듣다가 향숙이네집으로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자기를 지켜보는 눈이 있지 않나하여 주위를 휘 둘러보고는 창고모서리를 꺾어돌아 뒤뜰에 들어섰다.

그는 뒤문을 조용히 두드리며 《향숙아.》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향숙은 마치도 기다리기나 한듯 인츰 《네-》하고 문을 삐써 열고 빠금히 내다보더니 어린것도 눈치있게 낮은 목소리로 《오빠! 》하며 총알같이 튕겨나와 철림에게 매달렸다. 철림은 그를 냉큼 안아올렸다. 뒤미처 내다보던 향숙의 어머니가 문을 활짝 열어제끼며 철림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철림은 향숙을 안은채로 방에 들어가 제집처럼 방 한가운데 올방자를 틀고앉았다. 향숙은 오래간만에 만난 철림의 곁에 꼭 붙어앉아 왜 자꾸 못 오는가, 왜 내가 보고싶지 않던가, 나를 영영 잊은게 아닌가 하고 지꿎게 애틋한 성화만 먹이였다.

《내가 향숙을 잊다니? 향숙이야 이 마음속 한가운데 오똑 서있지.》

《피-거짓말.》

향숙은 조그만 입을 삐쭉 내밀어보였다. 그러는 모양이 하도 귀여워 머리만 쓰다듬어주던 철림은 향숙의 귀에 대고 《향숙아, 옆집 춘일오빠를 좀 오래라.》하고 속삭이였다.

향숙은 《네-》하고 냉큼 일어나 뽀르르 문열고 나갔다.

잠시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전춘일은 눈이 휘둥그래서 철림의 손부터 와락 그러잡았다.

《형님! 갑자기 어떻게?》

춘일은 그의 전례없는 거동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놀라운 표정으로 그냥 버티고 서있었다.

철림은 그의 손목을 잡아끌어 앉히며 심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춘일에게 신경태의 변절에 대해 알려준 다음 그 사실을 기관구와 선로반 조직원들에게 속히 알리고 비밀엄수를 철저히 할데 대한 상세한 임무를 주었다. 춘일은 이를 갈며 통분하여 부르짖었다.

《개놈의 새끼, 조직을 배반하다니…》

《…춘일동무! 이밤으로 당장 떠나든가, 시급히 자리를 피해야 하겠소. 기관구에는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대구 빨리 고향으로 빠져야 하겠소. 남석에 친척이 여러집 되지만 내 생각엔 사문동골안의 맏삼촌네집이 그중 안전할것 같소. 당분간 거기에 은신해있소. 만약 놈들의 수색이 더 극심해지면 송수옥동지가 미리 다 조직해놓은대로 x x x비밀근거지에 들어가오!》

《알겠습니다! 조직의 지시대로 철저히 행동하겠습니다.》

춘일은 이렇게 다짐하고 일어서려다가 《그런데 형님은 어디에?》하고 걱정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나두 다 대책이 있지. 자, 그럼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나자구.》

그들은 으스러지게 서로 두손을 움켜잡았다.

춘일이 돌아간 후 철림은 향숙의 어머니와 마주앉아 갑자기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녀인은 향숙을 꼭 품에 그러안은채 철림의 말을 잠자코 새겨들었다.

그는 철림이가 자기의 남편을 형님으로 존대하고 남편은 철림을 귀인으로 여기는것을 이미 잘 알고있었다. 게다가 남편을 통해 철림의 현재 위치와 그의 남다른 기품에 대해서도 너무나 구체적으로 알고있어 철림의 의견을 심중히 받아들이였다.

녀인은 그제서야 긴장했던 마음을 늦춰놓고 집안사정을 허심히 이야기하였다.

《사실은 한 보름전에 친정어머니가 화전뙈기에서 굴러내리는 바위돌에 다리를 심하게 상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두 못한다는 기별을 받구두 집을 비우는것때문에 오늘껏 이렇게…》

철림은 시원스럽게 그의 생각을 긍정해주었다.

《아주머니, 리유가 그렇게 당당하니 남들의 의심살것두 하나 없지 않습니까. 시흥군 고사리골이 좀 멀기는 하지만 그대신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집은 우리 하숙집어머니가 봐주게 하겠습니다. 념려말구 래일안으로 한시바삐 떠나야 합니다.》

이때 하숙집녀인이 뒤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섰다. 철림은 반겨맞으며 인사하였다.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녀인은 철림을 보고 눈이 뒤집힐듯 놀라며 지청구부터 했다.

《아니, 미옥의 오래비, 무슨 큰 코 다치려구 이렇게 나다니우?》

《어머님두, 제가 뭐 못 올데루 왔습니까.》

철림은 이렇게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게 아니래두. 형사놈들이 요전번에 미옥이 오래비 피뜩 왔다간 냄새라두 맡았는지 요샌 곱으루 설친다우. 민충이처럼 울안두 기신거리며 슬금슬금 한바퀴 돌기두 하구 길모퉁이에들 장승같이 뻗치고 서서 도끼눈질을 하는 꼴이 딱 미옥의 오래비한테 눈독을 들이는것 같다니까. 이젠 제발 어데 꾹 배겨서 나다니지 말아주우.》

(놈들이 벌써 손을 뻗치기 시작했구나!)

철림은 조바심을 치는 마음을 누르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정말 미옥의 오빤 제 몸걱정은 하나 안하면서 우리가 걱정돼서 글쎄 이 아짜아짜한 때에…》

향숙의 어머니도 진심으로 걱정했다.

철림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저으기 감동되였다.

그는 향숙이네가 시급히 떠나게 된 사정을 하숙집어머니에게 대충 알려주고 집을 부탁했다. 하숙집어머니도 집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놓고 떠나라고 시원시원 말했다.

철림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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