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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1 회


61. 적아간의 정세개관


계월향의 집으로 교대하러 왔던 수직군졸의 소동으로써 한밤중에 잠들었던 소서행장의 진중은 삽시간에 발칵 뒤집혔다. 우선 그 대문밖의 머리가 으스러져 죽은 군졸 그리고 뜰안의 머리없는 시체, 머리는 없으나 그 장대한 체구만으로도 부하장수가 분명한 시체의 목에서는 굳은 땅에 몇가닥 구멍을 뚫으도록 내뿜던 피가 아직도 흐르고있었다. 붙들어왔던 고마인처녀는 없었다. 그대신 기생의 자결이 분명한 시체가 잠든듯 누워있었다. 주안상이 놓여있는 안방에는 초불이 아직도 휘황했다. 2만여명의 대군이 주둔해있는 평양성 한복판에서 일어난 괴변이였다. 일본군장수중에 가장 효용하다던 장수가 이렇다할만 한 저항도 해본 흔적이 없이 목없는 시체가 되여 쓰러져있다.

이때 멀리 칠성문쪽에서 뚜- 우는 나팔소리가 연해 울렸다. 뒤이어 조총소리도 몇방 났다. 거리에서 소동하던 놈들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칠성문과 을밀대어간의 깊은 송림속에서 순라돌던 저희 군졸들 몇이가 혹은 꺼지고 혹은 불이 그냥 켜있는 암등을 떨어뜨리고 죽어넘어진것을 발견했을뿐 침입자의 종적을 알수는 없었다.


× ×


임진란이후 《평양지》를 비롯하여 우리 사람들이 기록한 여러 종류의 《임진록》들과 기타의 허다한 구비전설들에는 김응서가 계월향의 내응을 얻어서 적장을 죽이기까지의 경위가 지금 이야기한것과는 좀 다른 점이 있다. 그 기록들에 의하면 왜장수놈에게 잡혀있던 계월향이 몸을 빼칠 계책을 궁리하던 끝에 하루는 놈의 허락을 얻어서 서문(그때의 서문은 보통문이였다.)밖에 사는 자기 친족을 찾아본다는 핑게로 보통문루에 올라서서 《오라버니》를 불렀다는것이다. 그 소리에 《오냐.》 하고 나선것이 김응서, 두사람은 남매간이라 속이고 일본군진중에 들어가있다가 왜놈장수를 죽인것으로 되여있다.

적진중에 사로잡혀있는 한 젊고 아름다운 녀인이 성문루에 올라서서 한대중으로 구원을 청하기 위해서 미상불 애절한 목소리로 《오라버니》를 연해 부르고 또 불렀다는것은 퍽 애달프고도 랑만적인 정경이기는 하다. 이것은 그 당시의 작가들의 아름답고 풍부한 상상력의 소산인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실정과는 좀 어그러진다. 왜냐하면 그때는 평양성내에는 물론이고 성밖에도 한 녀인이 웨쳐부르는 소리가 들릴만치 가까운데는 우리 사람들이 살고있지 않았다. 또 이 당시의 김응서는 룡강, 강서, 증산, 삼화 등지에서 초모한 근 만명의 군사를 거느린 조방장으로서 잡약산뒤에 진치고있었던만치 계월향이한테서 미리 내통이나 있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계월향이가 보통문에서 부르는 소리에 잡약산뒤에서 《오냐.》 하기는 좀 어려웠을것이다. 하여간 우리 평양이 낳은 의기 계월향의 내응으로써 김응서는 수만군 적진중에서 적군의 한 두목놈의 머리를 베였던것만은 사실이다. 수만이나 되는 저희 진중에서 한 장수의 머리를 잃은 일본군은 크게 놀라고 더욱 사기가 떨어지고 기세가 꺾이였다는것도 이상의 모든 기록의 일치한 결론이다.

이상의 구비전설적인 기록들 이외에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정형을 사실에 기해서 썼다고 인정할수 있는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기로 하자.《징비록》의 《록후잡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왜(일본놈)는 가장 간교, 간악한것들이다. 군사를 조종함에 있어 그 어느 한가지도 궤휼 아닌것이 없다. 그러나 임진년간의 일로 본다면 한성을 칠 때까지는 그 궤휼이 자못 교묘했으나 평양에 이르러서는 극히 치졸했다고 할수 있다.》

즉 불의의 군사를 일으킨 일본군이 한성을 강점할 때까지의 기세와 급기야 평양까지 이른 때의 그 무기력을 대비해 말하면서 류성룡은 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때까지 이겨온것만을 믿어 뒤의 일은 고려함이 없이 여러곳에 흩어져서 미쳐날뛰고 방자하기를 일삼았을뿐 군사란 흐트려놓으면 그 세력이 약해지는 법인데 일본군은 천여리에 널려있으면서 오래동안 헛되이 날을 보냈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땅에 깊이 들어온 일본군은 마치도 처음에는 바위라도 꿰뚫을듯 했던 화살이 마침내는 엷은 비단 한겹을 못 뚫으게 되는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하였다.

《일본군의 기세는 이미 찌부러졌고 또 사면에서 일어나서 요격하는 우리 백성들때문에 적들은 머리가 제 꼬리를 돌볼수 없고 꼬리가 제 머리를 감쌀수 없는 형편이라 마침내는 달아날밖에… 이것이 곧 평양에서 적들이 치졸했다고 하는바이다. 이같은 적의 실책이 우리에게는 리로운것이였으니 이에 우리는 뱀의 허리를 토막치듯이 천여리에 널려있는 적의 병참선을 끊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였다.》

류성룡은 평양성을 해방하기 직전의 일본군의 정형을 이같이 묘사했다.

이것은 물론 평양성내에 있던 일본군에만 한한 말은 아니다. 우리 조국강토에 기여들었던 일본침략군전체가 망해가는 정형을 말한것이다. 동시에 전후 7년간에 걸친 이 전란중에 우리 조선인민의 유격항전이 그 얼마나 치렬했던가를 말하는것이다.

여기서 다소 기록적인데로 치우치게 될는지는 모르나 그 당시의 의병장들을 렬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존경하는 그들의 기억을 한번 더 새롭게 하는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것이다.

경상도에는 이미 말한바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하여 심대숭, 김면, 정인홍, 김해, 류종개, 리대기, 장사진.

충청도에는 역시 앞서 말한바 조헌과 승병장 령규대사를 비롯하여 김홍민, 리산겸, 박춘무, 조덕태, 조웅, 리봉, 권응수.

전라도에는 김천일, 고경명, 최경회, 승병장 처영대사.

경기도에는 우성전, 정숙하, 최을, 리로, 남언경, 김탁, 유대진, 홍언수와 그의 아들 홍계남.

함경도에는 앞서 말한바 정문부와 또 리붕수와 고경민.

평안도에는 조호익, 림중량, 림기동, 박억, 양이직, 승병장 서산대사, 사명당과 고충경 등등…

대강만 꼽아도 이상과 같다. 많은 기록에 의하면 이외에도 우리는 수백수천의 의병장들의 이름을 들수 있다. 이들은 각각 자기네 고향에서 혹은 몇십명 혹은 몇백명, 많으면 몇천명의 농민들과 함께 보국안민, 소탕왜적의 기치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의병은 대다수가 농민이였던것은 물론이다. 책상머리에서 글을 읽던 선비들도 많았다. 또는 장사치라고 천시되던 상인들도 있었고 장인바치니, 백정이니 하여 인간이하로 천대받던 소위 천민이라던 사람들도 많았다. 평양의 계월향과 그후에 진주의 남강 촉석루에서 한 적장을 끌어안고 강에 빠져죽은 론개 같은 기생들도 있다.

평양성의 해방을 전후한 의병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각 도에서 일어난 의병이 무려 수십만명이나 되므로 그들이 한달에 소비하는 군량만 해도 수만석이였다. 그래서 이 전쟁기간중에 량식이 부족한 원인의 하나는 수십만 농군이 의병으로 나서서 싸우기때문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적었던탓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이때 우리 의병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의병장 김천일은 일찌기 자기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한성근처로 와서 일본군이 노리는 강화도를 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불과 한강하류의 강 하나를 사이에 둔 강화도에는 발을 못 들여놓게 했다.

의병장 곽재우는 정진을 고수함으로써 의녕일대에는 적이 감히 들어설념도 못하게 했다.

의병장 권응수는 영천에 있는 적의 대부대를 포위섬멸하고 그 고을을 해방시킴으로써 신녕, 의흥, 의성, 안동 등 여러 고을을 보전하여 그곳 인민들로 하여금 평시나 다름없이 농사를 계속하게 했다.

의병장 김면은 거창의 소등이고개의 적을 소탕함으로써 적의 병참선을 끊고 그 일경의 인민들을 적의 침해로부터 수호했다.

의병장 장사진은 도처에서 적을 많이 죽임으로써 일본군은 장장군이라는 그의 이름만을 듣고도 전률할 지경이였다.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령규대사는 협력하여 청주를 해방시키고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의병장 정문부는 회령과 그 일대까지 뻗어들어갔던 가등청정의 대군을 곳곳에서 격파하다가 평양성이 해방되자 마천령 남쪽으로 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우리 민병들의 활동과 아울러 이때는 우리 관군도 곳곳에서 반격을 시작했던것이다.

강원도의 조방장 원호는 려주일대에서 적을 크게 족치고 리천부사 변응성과 함께 남한강에서 적을 소탕함으로써 원주와 한성간의 적의 련락선을 끊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려주, 양근 등 여러 고을을 수호하는 한편 원주에 주둔한 일본군을 고립시킴으로써 적들은 이백리길을 돌아 충주를 거쳐서야 겨우 한성에 있는 저희 본부대와 련락할수 있는 형편이였다. 이것은 일본군의 중부전선의 마비상태를 말하는것이다.

우리 관군의 활동중에도 특기할만 한것은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 의한 경주해방이다. 경주는 적의 동부전선의 요충이며 중요한 병참기지였던만치 성내에는 대부대의 적이 집결해있었다. 그 일대의 우리 인민들은 우리 조정이 지금 어데 있는지조차 모르는 처지에 있었다. 이러한 때에 박진은 만여명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성의 일본군을 포위했다. 그리고 리장손이라는 우리 화포장이 창안해 만든 비격진천뢰라는 포탄으로써 경주성의 적을 공격했다. 그것이 임진 8월이였다. 대완구포로 발사해서 성안으로 넘겨보낸 비격진천뢰는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폭발한다. 사방으로 별불같이 날아나는 파편은 물론이고 그 맹렬한 폭음에도 적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떤 신명의 조화와도 같은 그 포탄에 겁을 먹은 왜놈들은 경주성을 내놓고 달아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비격진천뢰외에도 우리는 여러가지의 새로운 무기들을 창안했다. 변이중이라는 사람은 화차를 만들었다. 큰 화차에다 40개의 구멍을 낸 총통기를 설치하고 매 구멍에 승자총통을 걸어서 련발로 사격하면서 내닫게 마련된 화차는 무서운 공격력을 가졌던것이다.

또 비차라는것도 있었다. 정평구라는 사람이 만든것으로 일본군에게 포위된 어느 성으로 날아들어가서 우리 사람들을 태워가지고 성밖 30리 밖에까지 날아올수 있었다. 지금으로 이르면 활공기였다.

리순신장군이 거북선을 창제한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 관군과 의병들이 도처에서 적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여러 고을을 해방시키며 적을 섬멸하는 반격을 시작한 때 우리 수군절도사 리순신장군은 부산앞바다에서 또한 큰 전공을 세웠다. 임진란이 시작되자 5월초에 적선 40여척을 격침한것을 비롯하여 지난 7월까지 당포, 옥포, 한산도, 안골포에서 백여척의 적선을 격파함으로써 서해로 진출하려는 적의 작전을 파탄시켜온 리순신장군이 9월 초하루날에는 일본군의 상륙기지인 부산앞바다로 나가서 적의 함선 백여척을 또 격침한것이였다.

이같이 륙지와 바다에서 우리 관군과 의병 즉 전체 조선인민의 반격을 받게 된 일본군내부에서는 염전적인 경향이 날로 팽창했다. 일본군장졸들중에는 더 싸울 의욕도 용기도 없이 된자가 많았다. 싸우기보다도 창칼을 땅에 던지고 투항하는자가 날로 늘어갔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서 사야가라는자 하나만을 들어도 족할것이다. 사야가는 가등청정막하의 수다한 장수들중에도 제노라고 하던 장수였다. 일본기록들에 의하면 사야가는 군사 삼천여명을 거느린 문무겸전한 청년장수였다. 그는 자기 부하를 다 데리고 우리 관군앞에 투항했다. 자기 말에 의하면 그는 본시부터 조선의 찬란한 문물제도를 숭앙해온만치 할수없이 끌려나오기는 했으나 이 죄악적인 조선침략전쟁에서 싸울 의사는 없었다는것이다. 그러한 사야가를 일본기록들에서는 《일본에 둘도 없는 불충한》이라고 했다. 사야가는 마침내 총부리를 돌려서 일본군과 싸우기까지도 했다. 이러한 《일본무쌍의 불충한》은 사야가 한사람만이 아니였다. 곳곳에서 우리 관군 혹은 의병앞에 투항해온 허다한 일본군장졸들은 사야가와 마찬가지로 총부리를 돌렸고 또 우리 관군을 위해서 조총과 화약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는것이다.

이미 앞서도 말한바어니와 풍신수길이가 군사를 일으킬 때는 《시하이단수인지두호》라 하여 조선을 정복하기는 자는 사람의 머리를 베는것이나 다를바없이 《지일가성》으로 며칠이면 끝낼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것은 단지 만리원정의 사지로 몰아내는 저희 백성들을 충동하기 위한 말만이 아니라 풍신수길 저자신이 그렇게 타산했고 그렇게 믿었던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은 틀렸다. 이무렵의 일본기록들에 의하면 일본관백 풍신수길은 자기 측근자들에게 《조선이 아직도 료정(결판을 내여 끝을 짓는것)이 안 나니 웬 일이냐?》고 초조해한것이다. 이에 대하여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은 역시 큰 나라이므로 그 동쪽을 치면 서쪽을 지키고 그 왼편을 치면 바른편으로 모이니 십년을 위한한대도 끝이 안 날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대들은 이 내가 다 늙은줄 아는가?》

그 말에 이같이 역정을 낸 풍신수길은 《내 처음 생각 같아서는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고 했더니 이제는 참말 죽을 날이 멀지 않게 늙고말았는가?!》 하며 마침내는 이같이 자탄하였다.

《그러면 싸우기를 그만두고 조선과 화해를 의논함이 어떨가?》

그의 말에 부하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것이 좋으리라.》고 했다는것이다.

풍신수길이 불과 5~6개월동안에 그같이 갑자기 늙었다는것은 모를 말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자신이 조선에 나와서 싸우는바도 아닌 풍신수길 한사람이 늙었기때문에 《조선이 아직도 료정이 안 나》는것은 아니였다. 말하자면 풍신수길 한사람이 갑자기 늙었거나 말았거나 그런것이 이 조선전선에서는 하상 문제거리가 될리도 없는것이다.

문제는 갈수록 치렬해지는 조선인민의 반격에 있었다. 《이제는 죽을 날이 멀지 않게…》 운운한것은 단지 그가 《늙었다》는 한탄이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조선인민의 반격앞에서 신음하게 된 풍신수길의 비명이였고 《싸우기를 그만두고 조선과 화해를…》 운운한것은 풍신수길 한사람이 갑자기 늙었기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더 어쩔수없이 된 일본군전체가 사기가 저락되고 피페했기때문이였다.

과연 부산서부터 평양까지 또는 회령부근까지 연연 수천리에 걸쳐있는 일본군의 전선을 하나의 커다란 뱀에 비긴다면 그 중둥에는 호미와 낫으로 만든 조선인민의 창검에 찍혀서 여러 군데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한끝인 소서행장의 군대가 그 뱀의 대가리라면 지금의 그 대가리는 붉은 혀를 널름거리며 요두전목하기보다도 축 늘어지게 혀를 빼물고 허덕이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 신음소리는 소서행장이 평양성밖의 곳곳에 내붙이기 시작한 미친놈의 허튼수작같으면서도 실은 절실한 애원이 아닐수 없는 글발들로써 더욱 분명히 들리게 되였다.

《명나라사신 심유경이와의 회담으로써 이미 강화조건이 결정되였거늘 고마인들은 어째서 지금도 성밖으로 마초와 소금을 구하러 나가는 우리 일본군사를 죽이느냐. 이앞으로는 그러지 말라.》

이러한 말을 전제로 하고 심유경이와 의논했다는 소위 《강화조건》이라는것을 썼다.

1) 왜왕과 명나라 공주와의 결혼

2) 조선의 네 도를 베여 일본에 줄것

3) 이전과 같이 국교관계를 맺을것

4) 조선왕자 한사람을 일본으로 보내서 영주케 할것

5) 조선의 대신 몇사람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것

이상의 다섯가지 《강화조건》이라는것은 심유경과 소서행장간에 론의가 있었던것만은 사실이였다. 퍽 후에 판명된 사실이지만 하나의 간특하고 더러운 협잡군이였던 심유경은 저자신도 그러한 《강화조건》이 성립될수 없다는것을 알므로 그것을 내놓지는 않으면서도 하여튼 소서행장이 강화하려는 의사가 있다는것을 구실로 하여 명나라의 출병을 지연시킴으로써 소서행장에게 그만한 시간적여유를 제공하는 대가로 많은 뢰물을 받아먹었던것이다.

(그러한 협잡군 심유경은 종당 명나라조정에서 처단되고말았다.)

어쨌으나 소서행장은 보통벌기슭의 산과 큰길가의 나무와 돌에다 그런 글발을 내붙임으로써 행여나 평양성밖에서 마초와 소금을 구할수 있을 길을 틔여볼가 했던것이다. 또 이런것도 있었다.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해서 그 이남은 일본땅이 된만치 지금 평양성에 있는 일본군사는 오래지 않아 성을 내놓고 대동강건너쪽으로 물러갈터인즉 이제부터는 성밖으로 나가는 일본군사를 죽이지 말라.》

물론 미친놈의 허튼수작같은 말이였다. 그러나 여기서 소서행장의 애원을 들을수 있지 않는가? 문제는 소서행장이 그런 애원이나마도 진심으로 하지 않는것이다.

소서행장은 군사를 동원하여 평양성내에다 일본식의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장경문근처의 성벽에서부터 관제묘를 거쳐 만수대에 이르기까지는 엄페호로써 두르고 대동문근처에서 종로를 거쳐 장대재와 남산재일대에는 오불꼬불한 전호를 파고 높이 쌓은 흉장에는 벌의 집같이 총구멍을 냈다. 이것은 저희가 점령하고있는 평양성 한가운데서 자기의 제일가는 장수의 모가지를 잃은 다음부터의 일이였다.

그뿐아니라 평양성을 밥상받듯 내려다볼수 있는 고지인 모란봉에다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즉 모란봉의 중허리를 에둘러 전호를 파고 높이 쌓아올린 흉장에는 역시 벌둥지같이 총구멍들을 냈다.

소서행장의 이러한 조치들은 저희 일본군 선봉부대가 이제는 평양성이북으로는 한걸음도 더 나갈수 없이 되였다는것을 말하는것이다. 동시에 평양성만은 어데까지나 내놓지 않고 지켜보겠다는 심사를 보이는것이였다. 그러면서도 《이제 오래지 않아서 대동강건너쪽으로 물러갈터이니…》 라고 운운하는것은 누구를 속여보겠다는 옅은 수의 거짓말이였다. 높은 모란봉에서 새 진지를 만들고있는것을 우리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가리우고 할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빤히 구멍이 뚫어지는 거짓말과 함께 제발 성밖으로 나가는 《우리 일본군을 죽이지 말라.》고 한것은 아닌게 아니라 소서행장으로서는 안할수 없어서 하는 애원이기도 했던것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애원이라고도 할수 있는것이였다. 부산서 평양까지에 걸쳐 빈사상태로 축 늘어져 허덕이는 큰 뱀의 대가리에서 나오는 신음소리이기도 했던것이다.

기록에 의하여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적아간의 정세를 개관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볼수 있다.

평양성내의 일본군이 여러가지로 고갈한 물자중에도 더욱 절박했던것은 소금이였다. 《선조실록》 임진년 12월달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내의 일본군은 금전(단순히 돈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바로 황금이였다.)을 가지고도 소금을 살수 없었다.》는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때의 조선사람들은 일본군이 금을 준대도 소금을 내놓지 않았다.

이해 10월에는 영유고을에서 과거를 보여서 무장 오천여명을 뽑았다. 영유는 평양서 불과 백리 상거밖에 안되는 곳이다. 그런데서 오천명의 인재를 추려낼만치 몇천몇만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과거를 볼수 있었다는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때의 적아간의 정세를 짐작할수 있다. 그만치 우리 편의 기세가 앙양된것을 말하는것이다.

이때는 오히려 영유도 먼편이였다.

평양에서 불과 십리허인 보통벌주변의 산너머에는 우리 관군과 의병들이 결진하고있었다.

도원수 김명원과 평안도 순찰사 리원익은 새로 방어사가 된 김응서를 비롯한 리빈, 한응인 등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나누어 부산고개를 중심으로 평양 서북쪽에 결진하고있었다. 이와 진영을 련결해서 서남쪽으로는 삼화현령 조의룡, 룡강현령 신현, 강서현령 류희, 함흥현령 리수, 증산현령 조의, 영유현령 황숙, 순안현령 하홍계 등이 각각 자기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결진하고있었다. 또 역시 관군으로 수군별장 김억추는 병선 십여척을 령거하고 대동강을 막고있는지 오랬다.

이밖의 민병으로는 의병장 조호익이 거느린 천여명의 농민군이 삼등에서 대동강상류를 견제하고 의병장 림중량은 이천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중화방면에서 평양과 한성간의 적의 련락선을 차단하여 소서행장군의 후방을 위협하고있었다. 또 그들보다는 적은 부대였으나 의병장 김자택과 박억이는 각각 백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대동강건너 동촌에서 그 방면으로 나다니는 일본군을 수시로 요격하고있었다.

잡약산을 중심으로 서산대사의 승병부대가 있다는것은 여기서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이밖에 평양성 가까운 서북쪽에 다른 의병부대가 없었다는것은 그 까닭이 있었다. 즉 우리 관군이 바로 평양성 서북쪽에 육박해있었더니만치 이 방면에서 활동할수 있는 사람들은 따로 의병을 일으킬 필요가 없이 다 관군으로 들어갔던것이다. 만일 평양성이 함락되기 전부터 서산대사와 함께 활동하지 않았더라면 고충경이를 비롯하여 전주복, 돈정신 같은 사람들도 관군에 합류했거나 혹은 따로이 의병을 일으켰을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어떤 기록에는 고충경이를 한 의병장으로 하고 전주복이, 돈정신이, 현수백(차돌이)들도 다 의병이라고 한데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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