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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9 회


59. 《오늘일은 틀리는가!》


련광정으로 달려간 계월향은 필담으로써 처녀의 손을 치료할 동안만이라도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간청해서 보패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영명사에서 김응서를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한 끝에 고충경이가 보낸 장도를 내놓았다. 그리고 희망이 있다고 했다. 장도를 본 보패는 오라버니를 만난듯 반가왔다. 이때까지 악에 받쳐서 열기가 올랐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도를 품속에 간수했다. 앞으로는 어떤 변이 닥쳐오더라도 겁날것이 없었다. 죽더라도 깨끗이 죽을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진정되였다.

보패는 계월향이가 묻는대로 오늘 당한 일을 대강 이야기했다. 보패의 이야기를 듣고 앉았던 계월향은 갑자기 제 얼굴이 까맣게 질리는것을 느꼈다. 몸이 떨리기도 했다. 그때 만일 자기네 모녀가 집에 있었더라면 역시 함께 끌려나갔을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것은 아니다. 자기도 필시 죽이지 않는 사람축으로 물러서게 되였을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그대로 물러나서 이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떨릴만치 무섭게 생각되는것은 바로 그것이였다. 눈앞에 마주앉은 처녀가 자기로서는 올라갈념도 못하게 한없이 높은데 있는 사람같이도 보인다. 따라서 이 처녀의 출현은 자기로 하여금 용납될수 없는 죄인을 만드는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 제 몸이 징그러울만치 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일을 꾸미고 일을 치르는데는 이 내가 어른이다.》 하는 긍지가 없지도 않았다. 온갖 때가 낄만치 세상에 부대낀 경난으로 생긴 자기의 능란한 수단을 자랑하고싶기도 했다.

계월향이는 지켜앉다싶이 하고 보패에게 저녁을 권했다. 보패도 기운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에 많이 먹으려고 했다.

자기 방으로 건너온 계월향은 의롱을 열고 몇가지 물건을 꺼냈다. 하나는 은입사(은줄 또는 은실을 공예품이나 기물에 끼워넣어 장식하는것)한 쇠장도이고 하나는 금실마구리를 한 빨간 술(꾸밈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오리)이 달린 향낭이였다. 금붙이, 은붙이, 노리개보다도 더 아껴온 향낭이다. 은실같이 흰 말총으로 완자무늬를 놓아가며 살핏하게 결은 작은 집속에 무지개빛으로 아롱진 자개로 약사보살을 새겨서 박은 빨간 향이 들어있다. 극히 맑으면서도 취할듯 한 향기! 이미 차고있던것 대신에 그 맑은 향을 차는 계월향은 오늘만은 누구를 위한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것이라고 생각했다.


밤이 깊었다. 련광정에서 취한 왜장수놈이 돌아왔다. 계월향은 속이 철렁 내려앉는듯 했다. 십상팔구 일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행여나 오늘도 련광정에서 술로 밤을 새지나 않을가, 그래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했던중이다.

소서행장이하 장수들은 술자리를 안 벌리는 때가 거의 없다싶이 했다. 그중에서도 소서행장이 누구보다도 더 술에 묻혀있는편이였다. 그리스도교신자인 그는 본국에서 서양선교사들과 상종하는 동안에 독한 양주맛을 알았다. 여기 와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조선소주맛에 취했다. 평양에 주저앉아있는 동안에 소서행장이 밤낮 술타령만 하고있었다는것은 허다한 일본기록들에서 볼수 있는 사실이다. 그 일례로서 일본의 력사가 도꾸도미 소호 같은 사람은 자기 저서에서 소서행장의 그러한 행장을 들어 극히 분개한 어조로써 필주(죄나 과오를 글로 죽 내려쓰는것)했다.

이때도 련광정에서 돌아온 왜장수놈은 어지간히 취했건만 계월향이가 권하는 잔을 또 기울이기 시작했다. 놈은 자기의 꽃다운 녀인의 시중으로 마시는 술을 더욱 즐기였다. 더우기 오늘은 또 웬 일인가싶게 단장한 계월향이 눈부실만치 아름다왔다.

밤은 깊었다. 잠시 밖에 나올 짬을 얻은 계월향은 좁은 안뜰을 지나 대문앞으로 가서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깊지 않은 골목어구에는 지금도 역시 서성거리고있는 시꺼먼 사람의 형체가 뵈였다. 한둘씩 번갈아 가며 이 집을 지키는 놈의 졸개였다. 그보다 더 눈여겨본것은 대문밖의 골목이 끝나자 좁은 행길 하나를 건너 마주보이는 집의 행랑방문밖에 둘러친 차면바자였다. 그 바자길에 흰 빨래가 걸려있다. 초저녁에는 한가지만이던것이 지금은 두가지가 걸려있다. 바로되였다고 고개를 끄덕인 계월향은 아까 왜장수놈을 맞아들일 때 제손으로 잠갔던 대문빗장을 소리 안 나게 벗겨놓았다. 그리고는 옆의 측간문을 한번 여닫는 소리를 내고 돌아서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반도 차지 않았던 초생달은 이미 없어졌다. 매운 바람이 불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계월향은 놈이 취해 쓰러지기를 바라서 연해 술을 권했다. 그러나 이만저만해서는 술에 휘지 않는 놈인지라 여전히 잔을 기울일뿐이였다. 그는 소서행장막하의 많은 장수들중에도 소서행장이 가장 크게 믿는 장수였다. 원체 기골이 장대한데다 또 지금이 한창이라고 할만치 날래고 용감했다. (《임진록》에는 그자의 몸에는 칼날도 들지 않게 비늘이 덮여있다고 묘사했다.) 언젠가 소서행장도 《그 무지꿍한 놈》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용모부터 험상궂었다. 소위 호걸풍으로 기른 거칠고 숱많은 시꺼먼 수염이 반이나 덮여있는 큰 얼굴에는 표한하게 빛나는 두눈이 번득이였다. 노한 때는 물론이고 소위 호걸풍으로 선웃음을 칠 때에도 그 거치른 수염은 역시 거슬러섰다.

지금 그앞에서 술시중을 하고있는 계월향은 약약할만치 초조했다. 밤은 덧없이 깊어가는듯 했다. 오늘일은 틀리고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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