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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7 회


57. 보패와 계월향


여기서 잠시 이야기의 순서를 바꾸어 전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보통벌로 내몰았던 군사를 다시 거두게 된 왜군장수들은 성문에서 홰불을 잡고 들어오는 군사들을 점검했다. 어둠을 타서 고마인들이 끼여들어올 념려가 없지 않기때문이였다.

홰불에 한 고마인이 드러났다. 두세명 군졸들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공중 쳐들고 오는 한 녀자였다. 불빛에 우선 그 흰옷이 눈에 띄였고 그래서 홰불을 가까이 비쳐보던 장수들은 놀랬다. 그것은 무척 아름다운 처녀였다. 기절해서 움직임이 없는 그 얼굴은 그림같이 아름다왔다. 우두머리장수 한자가 칼로써 군졸들을 위협하고 처녀를 빼앗았다.

그자는 제 종졸을 시켜서 처녀를 자기 처소로 날라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불속에 들어있었다. 종졸들이 어떻게 할지 몰라 주저주저하고있을 때 벌써 어데서 소문을 들었는지 소서행장의 부하장수란 놈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 충천한 화광에 비친것은 과연 아름다운 처녀였다. 소서행장에게 바치면 생색이 나리라고 생각한 그는 처녀를 빼앗아가지고 계월향의 집으로 말을 몰았다.

보패는 혼수상태였다. 우악스러운 손이 입과 코를 막아서 가슴이 터지게 답답한 고통을 의식하며 몸을 뒤틀다가 간신히 벗어난듯 숨이 통해서 또 《오라버니-》를 웨쳐부르는 제 소리에 피뜩 정신이 들었다.

《오라버니- 어데 계셔요?》

지금도 제가 캄캄한 보통벌 한가운데를 달려가면서 웨치고 또 웨치는 모양이건만 역시 대답은 없다. 오라버니의 대답은커녕 웨치는 제 소리까지도 극히 먼데서 나는것 같이 아련할뿐이였다.

어두운데서 벼단을 나르며 베여나가는 논판을 따라나갔을뿐 거기가 어데쯤인지도 짐작이 없었다. 문득 큰 북소리가 둥둥 나길래 돌아본즉 잡약산마루에는 이미 봉화가 올랐다. 또 저편에서는 벼락을 치는듯 한 조총소리가 몰방으로 터졌다. 한밤중 보통벌은 금시 발칵 뒤집혔다. 곳곳에서 함성이 일었다. 달려오고 달려가는 발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엇갈려 내닫는 사람들의 희뜩희뜩한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서로 찾고 부르는 소연한 소리중에 이런 고함소리가 들렸다.

《고충경이는 어데 있소?》

《총에 상한 모양이요.》

《뭐? 상했으면 꺼들구 왔어야 할것 아닌가.》

칠성문쪽에서 달려오는 한패거리사람들의 말이였다. 보패는 그들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잡약산쪽으로 가던 보패는 발길을 돌렸다. 지금 그들이 달려온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번 《오라버니-》를 웨쳐불렀다. 문득 소리를 질러서는 안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상한 우리 오라버니를 그냥 두고 오다니!》 하는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드런분이기에…》, 《어드런 우리 오라버니기에…》 어떻게 해서든 상한 오라버니를 내가 찾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어데로 가야 하나?

또 몇번 《오라버니!》를 웨쳐부르지 않을수 없었다. 어데를 얼마나 달려왔을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꿰뚫어볼수 없는 어둠속 저편에서는 여전히 소란한 발걸음소리가 나면서도 여기는 아무도 없는것 같았다. 또 몇번 《오라버니-》를 불렀을 때였다. 바로 앞의 논뚝에서 불쑥 나타난 시꺼먼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우악스러운 팔뚝이 목에 감기고 우악스러운 손이 입과 코를 막았다. 보패는 죽기로 한사코 악을 썼다. 몸부림쳤다. 그러나 또 다른 억센 손이 제 팔다리를 거머쥐였다. 숨이 막혔다.

《아- 내가 왜적들의 손에… 이 더러운 오랑캐들… 불칙한 살인귀들…》

이러한 전률감중에 제 의식이 몽롱해지는것을 느끼는 보패는 문득 어데선가 쟁쟁 울리는 쇠북소리를 들었고 그러자 또 온 보통벌을 뒤흔드는듯 한 우리 사람들의 함성을 마지막으로 들으면서 완전히 의식을 잃고말았던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둘러본즉 자기는 지금 어느 조그마한 방안에 누워있는것이였다. 요가 깔리고 이불이 덮였다. 이불밑으로 더듬어보는 손에 온기가 있는 장판이 만져진다. 《어델가?》, 《내가 지금 어데 있나?》 머리맡 문창에는 황혼인듯 누런 해빛이 어리여있다. 그리고 그 문밖에서는 알지 못할 말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분명히 어둠속에서 자기를 붙든 왜적들이 지껄이던 말소리다. 《아! 내가 종시…》 다시 엄습하는 전률감에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보패는 또 까무라쳤다. 얼마나 지났을가? 베개머리에서 나는 인기척에 소스라쳐 깨난 보패는 벌떡 일어났다.

《놀래지 말아요. 그냥 누워있어요.》

우리 사람의 말, 분명히 젊은 녀인의 말소리다. 그와 함께 정신이 쇄락하게 자극적인 맑은 향기가 풍긴다.

《어서 누우세요. 일어나면 아직 머리가 휘둘릴거예요.》

랑랑한 말소리다. 시선을 가다듬어 마주보는 보패의 눈앞에는 한 녀인이 있었다. 젊은 녀인이… 더욱 정신을 차려서 본즉 계월향이였다.

독자들은 지난 5월 열이튿날, 동대원에서 싸움이 있은 그날 새벽에 서산대사와 같이 애련당 련못가를 지나가던 길에 보패가 계월향이를 보았던것을 기억하실것이다. 지금 보패도 그때 일을 회상했다.

《역시 기생이였구나.》 한것은 그 다음의 생각이였고 먼저 황홀할만치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았던 계월향이가 바로 제앞에 앉아있다. (내가 지금 어데 있는가.) 불안에 싸여있는만치 우리 사람, 같은 녀인을 만난것이 우선 반가왔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려염집처자의 몸으로는 자리를 같이할 사람이 아닌 기생과 마주앉은것이 괴롭고 난처하기도 했다.

《이제야 정신이 드시나부군요.》

계월향이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이였다.

《여기가 어데예요?》

보패가 물었다.

《애련당근처요. 저 언젠가 서산로장하구 같이 가시는걸 본 생각이 나는데요. 바로 그 근처요.》

그러면서 다시금 처녀를 바라보던 계월향이가 물었다.

《본시 댁은 어데시던데? 성안에 사셨나요?》

《함구문밖 외성 살았어요.》

《어르신네 성함이 뉘신가요?… 댁에선 뭘 하셨던가요?》

《농사요.》

자기 오라버니의 이름을 밝히고싶지 않은 보패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농사요?》

다시금 처녀를 훑어보며 부모가 누구냐고 또 물었던 계월향은 《말씀해두 모르실게요. 그저 촌에 묻혀사신걸요.》 하는 대답에 역시 (제 눈빛같이 몹시 깔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흐르는듯 깨끗하면서도 추수같이 하도 맑은 안청이라 그렇게 보자면 얼마든지 깔끔하고 매섭게도 볼수 있는 눈이였다.

처음 보았을 때도 무심히 볼수 없었던 처녀다. 일종의 적의를 가지고 보던 생각이 났다. 계월향이는 그때 제가 무안을 당한셈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 처녀가 너무 고왔던탓이라고 하는것이 더 옳을것이였다. 처음에는 아닌게 아니라 《어데 촌계집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훑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서산로장이 어떻게 저런 처녀와 동행이 되였을가 하기도 했던것이다.

이날 새벽에 다 죽으나 다름없이 진흙투성이가 된채 들려왔을 때도 그는 말바로 진토에 묻힌 옥으로 뵈였다. 계월향은 저도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처녀의 깨끗한 아름다움에 비할바 아니였었다. 다시금 쳐다보는 처녀의 운명을 생각할 때 금시 제 가슴이 미여지는듯도 했다.

이때 담밖에서 떠들어대는 왜놈의 말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바루 왜적들의 소굴중에도 그 한가운데요.》

껴안아주기라도 해야 할만치 또 소스라치게 놀래는 처녀를 본 계월향은 한숨을 지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실테지만 성안치구두 이 애련당골이 큰집들이 많은데니만치 지금 두두룩한 왜적들은 다 이 근처에 모였소. 저앞의 련광정에는 왜장 소서행장이 있구 이 집에는 그놈의 부하장수가 있소.》

잠시 말을 끊었던 기생은 보패를 마주보던 눈을 내리깔고 떨리는 음성으로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계월향은 세운 한쪽무릎을 깍지껴안았던 손을 내려서 장판의 티끌을 문지르기라도 하듯이 오무작거리던 손가락끝에 두세방울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보패는 몸서리쳤다. 지금 제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것이 똑똑히 밝혀졌다.

천야만야한 구렁텅이속으로 떨어져내려가는듯 아득했다. 그러나 《한가지 결심만 하면 그만이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써 마음을 다시 가눌수 있는 보패는 태연히 눈을 들어 기생을 보았다. 눈물에 젖어있는 기생의 얼굴을 보았다. 기생이라고만 보아온 계월향이 의외로 맑고 정숙한 녀인으로 보이기조차 했다. 눈물을 씻고있던 계월향이가 문득 얼굴을 들며 《가만!》 하고 귀를 기울인다. 담밖에서 웅성거리던 왜놈의 말소리가 뚝 그쳤다.

《누우세요. 어서 이불을 푹 쓰구 누워있어요. 무슨 일이 있든지 꼼짝하지 말구 가만히만 있어요.》

다급한 소리로 말한 계월향은 웃간문으로 나갔다. 종종걸음을 하는 신발소리… 다음에는 밀어붙이고 밀어닫는 맞은켠 방의 쌍창소리가 나고는 조용해졌다.

담밖의 행길에서 저벅거리는 신발소리가 가까와오더니 절싹 열어젖히는 대문소리와 함께 벽제소리같기도 하고 《듭신다.》고 먼저 알리는 소리를 놓는것 같기도 한 고함소리가 뜰안에서 났다. 계월향이가 쌍창을 닫고 들어앉은 안방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잠잠하다. (계월향이 역시 떨고있는가?) 이런 생각에 뒤쓴 이불속에서 한줌만해있던 보패는 더욱 와들와들 떨렸다. 쿵- 맞은켠 방퇴마루로 올라서는 모양인 발소리가 나고 뭐라고 지껄이는 걸걸한 음성이 들린다. 그 말끝마다 《헤.》, 《헤.》 하는것은 필시 졸개들의 대답인 모양이다.

마침내 철떡철떡 신짝을 끌며 나가는 졸개들의 발소리가 대문밖으로 사라지자 이번에는 조용하던 그 안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알지 못할 말로 지껄이면서 선웃음을 치는 사내의 음성과 또 분명히 난처해서 한마디씩 떠듬듯 하는 기생의 말소리다.

《아직두 정신이 없어요. 이걸 어떻거나…》

마침내 이러한 기생의 말이 뜰안에서 났다. 보패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한번 랑랑히 웃는 계월향의 웃음소리! 왜장을 달래보려는 웃음이 분명했다. 《어떻거나?》 보패는 또 기색(심한 정신적작용으로 숨이 일시 막히는것)할것 같았다.

문이 열린다. 벽을 향하여 돌아누운 등뒤에 끼쳐오는 찬바람과 함께 시꺼먼 그림자가 들어서는것이 보이는듯 했다. 이불이 홱 벗겨졌다. 그린듯이 눈을 감고있는 얼굴 한쪽뺨에 무슨 벌레가 기는듯 한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놀래는 계월향의 외마디소리와 함께 긴 뱀이 숲속을 기는듯 한 소리가 나고 다음에는 한덩어리 얼음을 올려놓는것 같이 뺨이 선뜩했다. 서리발같은 검날의 감촉이였다.

처녀의 뺨에 댔던 검날에 서리운 김을 보고 또 그것을 제 손바닥에 대서 온기를 만져보듯 하는 왜놈은 아무리 저를 속이려고 해도 속을줄 아느냐는듯이 너털웃음을 쳤다. 보패의 이불을 다시 덮어준 계월향은 그를 끌다싶이 해서 밖으로 나갔다.

조금후에 놈이 집을 나가자 계월향이가 들어왔다. 보패는 일어나 앉았다. 둘이는 마주볼뿐 말이 없었다. 무서운 파멸에 대해서 차마 말할수 없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맥맥히 앉았을 때 창문밖에서 《얘야, 게 있니?》 하는 나직하면서도 숨이 찬듯 떨리는 음성이 들린다.

《어머니예요?》

계월향이는 《이 또 무슨 일인가?》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 나다. 좀 보자.》

계월향이가 나갔다. 안뜰에서 소곤소곤하는 모녀의 말소리에 보패는 귀를 기울였으나 알아들을수는 없었다.

《그럼 나가계셔요.》

어머니를 보내고 다시 들어오는 계월향의 얼굴은 금시 해쓱이 여윈듯 했다. 극도의 흥분이 뵈였다.

《무슨 소식이 있을래나봐요.》

그의 말소리는 떨렸다.

《소식이라뇨?》

놀라는 보패앞에 계월향은 꾸겨쥐였던 조그마한 종이쪽지를 내놓았다.

《아버지의 대상 시식을 지낼 의논이 있으니 금명간으로 곧 영명사로 나올수 없겠느냐. 형.》

이런 뜻의 한문으로 적은 한줄의 글발,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것일가 하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보패에게 계월향이 말했다.

《이것을 김응서나으리가 보내더랍니다.》

지금 계월향의 어머니는 자기 딸과 같이 있지 못하고 골목 맞은편 집의 행랑채 한방을 얻어있는데 좀전에 웬 늙은 중 하나가 문앞에서 저빗거리길래 수상해서 나가본즉 전부터 잘 아는 영명사의 중이였다. 짚고있던 대지팽이손잡이끝에서 달달 말은 종이쪽지를 꺼내주면서 《김응서나으리가 보내는거요.》 하는 한마디를 이르고는 돌아갔다는것이다.

《그러구보니 그 나으리 필적이 틀리지 않아요. 이 〈대상 시식〉이란것은 아마 혹시 왜적들에게 들키기나 해두 말맥이가 되게 하자는것일거예요. 우리 아버지대상은 나두 모르는 옛날이니까요. 또 나는 무이밑같은 사람이 돼서 오라버니나 형이랄 사람두 없구요.》

여기서 잠시 말을 끊은 기생은 그동안에 흥분이 좀 덜리기도 했으려니와 또 그보다도 이제는 창피한 말까지도 하게 됐다는듯이 그 한쪽보조개만이 좀더 깊어지는 적적한 미소를 띠우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구 이전에 몇번 모신적이 있어서 잘 안다구는 하나 이런 때 그 나으리가 무슨 놀량으로 나 같은 계집을 만나자구 하실리두 없구요. 그렇잖아요? 그러구보면 이건 필시 애기씨때문이지 딴게 있겠어요?》

《…》

《아마 댁의 어르신네를 이 나으리가 잘 아시는게지요?》

계월향의 눈은 (일이 이쯤됐는데두 네 그냥 지처를 안 밝힐테냐.) 하는듯도 했다. 그의 말을 듣고보면 보패도 그렇게 생각되였다. 오라버니가 김첨사를 아는것을 자기도 안다. 이번 추수에 김응서가 군사 천여명을 보냈다는것도 논판에서 들은 말이다. 일루의 희망이 보이는듯도 했다. 자기를 구하려는 손이 움직이고있다는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계월향이 어떻게 하려는가? 와락 기생한테 매달리고싶기도 했다. 시각이 바쁘게 곧 영명사로 나가서 김첨사를 만나달라고 애원하고도싶었다. 아까의 그 몇방울 맑은 눈물! 그것으로써 비록 아릿다우나 한낱 천한 《기생!》 하고만 보아온 계월향이 맑고 정숙한 녀인으로까지 뵈였던것이다. 그러나 좀전에 랑랑한 웃음으로 왜장을 달래려고 하던 그 천한 기생의 태… 이제 내가 애원하고 그래서 계월향이 영명사로 나갈 결심을 한다 하자. 그렇더라도 제 맘대로 성밖출입을 못할것만은 정한 일, 계월향이는 그 허락을 얻기 위해서 왜장에게 또 그런 작태를 해야 할것이 아닌가?

《이 나때문에!》 보패는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게 해서 산다면 이 몸마저 깨끗하다고 할것인가?》 하는 보패는 계월향에게 그런 애원이나 부탁을 할 마음은 꼬물도 없었다.

《밖의 어른들의 일은 저는 모릅니다.》

보패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런 대답을 했을뿐이다. 오라버니 고충경의 이름을 대면 계월향이가 모르지 않을것이다. 오라버니가 기생방출입을 하는 활량패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평양성시가 크다 해도 남문거리 어느 상전방주인이라면 짐작이 가고 더우기 오라버니 장사는 한산 세모시, 함경도 바리포, 단천 은노리개 같은 사치로운것들이였으므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모를리가 없다. 게다가 또 지난여름에 대동강싸움에 나섰던 고충경의 이름을 평양사람치고 모르는이가 없다. 그러한 오라버니의 이름을 대지 않은것은 아까는 자기의 본색과 또 잡약산마을의 일을 숨기기 위해서였고 지금은 고충경의 이름을 대는것만으로도 계월향에게 어서 영명사로 나가달라는 부탁이 될는지도 모르기때문이였다. 계월향이로 하여금 그 수단을 쓰게 해서… 못할 일… 려염처자로서는 깨끗치 못한 일…

《이 기회에 나두 애기씨의 덕을 보게 될는지 모르겠소.》

역시 생각에 잠겨서 한동안 맥맥히 앉았던 계월향이 고개를 들며 이런 말을 했다. 어떤 결연한 생각에 굳어진듯 했던 얼굴에는 금시 따뜻한 미소가 비끼였다.

《하늘이 무너져두 솟아날 구멍은 있다구. 좌우간 밖에서 이렇게 손을 쓰려는 기맥이 보이는데 가만있겠어요.》

《영명사로 나갈수는 있을가요?》

《나가도록 해야지요. 수단껏 해봐야지요. 여기서 빠져나갈수만 있다면야 이 처지에 안 해볼 일이 있어요? 칼 물구 뛰염뛰기라두 해야지요.》

말을 끊고 한숨을 지은 계월향은 《래일중으로 김첨사를 한번 만나두룩은 할테니 안심해계세요.》 하고 자기 방으로 갔다.

이날 저녁에 소서행장의 부하장수의 명령으로 그의 졸개 몇이가 쌀과 상목을 지고 영명사로 나갔다. 중들에게 보내는 계월향이의 편지도 가지고 갔다. 래일 대상 시식에 쓸것을 보낸다는것과 혹시 촌에 사는 자기 오라버니가 올는지도 모르니 오면 제가 래일 아침에 영명사로 나간다는것을 알리라는 사연이였다. 계월향이는 그 편지를 왜장수앞에서 썼다. 그러나 그는 지금 계월향이가 하는 일이 영명사에서 먼저 어떤 연통이 있어서 하는 일이라는것은 몰랐다. 그래서 래일 영명사로 나갈 허락을 얻은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걱정은 어떻게 하면 래일까지만이라도 처녀를 그냥 집에 있도록 할가 하는것이였다. 그놈은 벌써부터 련광정으로 데려간다고 별렀다. 지금은 계월향에게 영명사로 나가는것을 허락한 교환조건이나 같이 서둘렀다. 련광정쪽을 가리키며 연방 《고니시 고젠》(소서행장각하라는 뜻)이 어쩌니 하고 지껄이던 놈은 벌떡 일어나서 의롱을 열고 옷을 다 쏟아놓고는 제 소견에 호화롭고 색스럽다고 생각되는것을 골라주면서 처녀에게 갈아입히라고 했다. 이때도 그의 손에는 긴칼이 들려있었다. 방안에서도 자리를 일기만 하면 반드시 칼을 쥐고야 일어서는것이 그들의 풍속이였다. 벌써 몇달째나 보아온 그자들의 버릇이라 새삼스럽게 놀랄것도 무서울것도 없지만 역시 불안했다. 서두르는품이 이만저만해서는 만류할것 같지 않았다.

계월향은 말조차 나가지 않았다. 막막한 그는 쏟아놓은 옷중에서 흰 저고리를 골라냈다. 다음에는 딴 의롱을 열고 베치마를 꺼내고 그리고 앉은책상밑에서 백지를 한장 꺼냈다. 흰 댕기를 접었다. 그리고는 병풍뒤로 들어가서 색스러운 회장저고리와 물색치마를 벗고 소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나와서는 조그마한 쇠거울을 받쳐놓은 경대앞에 앉아서 머리태를 내려 색댕기를 풀었다. 다시 얹은머리의 흰 댕기와 소복을 한 제 모양을 거울속으로 보던 계월향은 불현듯 눈물이 솟았다. 지금 입은 소복은 동무 기생집에 초상이 나거나 제사가 있을 때 입고 가던것이다. 그런 때의 소복은 동무에 대한 정과 인사성의 표시였다. 그리고 또 그런 기회에 딴 모양으로 단장해보는 하나의 변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잡도리로 꾸민 소복이지만 계월향은 그 어느때보다도 창연해지는것을 느꼈다. 앉은책상을 당겨놓은 계월향은 《저 처녀는 이 나 같은 창기가 아니다.》고 썼다. 그 글을 뜯어읽고나서 또 계월향이를 본 왜놈은 놀랐다. 기생의 눈에 뜻밖의 눈물이 빛났기때문이였다.

《나 같은 창기가 이래라저래라할수도 없고 설혹 그런다고 하더라도 한낱 창기의 말을 들을리가 없는 규수다.》고 계월향은 또 썼다. 픽 랭소한 그놈은 불쑥 내민 제 칼자루를 한두번 두들겨뵈였다. 이런 칼날앞에서도 제가 굴하지 않을가 하는 뜻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 억지로 끌어내도 소용이 없으니 좀더 두고보리라는셈인지 다시 주저앉으며 《처녀가 참말 앓는가?》 했다.

이튿날 이른아침에 계월향이는 어머니와 함께 영명사로 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에 보패를 보았다. 자기는 곧 다녀오리라는것, 그동안에 설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를 다시 만날 때까지는 진득이 참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보패는 제 이름을 알으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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