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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 회


53. 우리 닭과 비둘기들도 싸웠다


비록 오랜 동안은 아니나 곳곳에서 벌어진 싸움이 더욱더 격렬해갈 때 문득 칠성문쪽에서 요란한 쇠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울리는 쇠소리를 따라 바라보는 평양성내에는 화광이 충천했다. 차차 더 요란스럽게 울리는 징소리는 일본군이 지금 이 벌판에 흩어져있는 자기네 군사를 거두기 위한 신호였다.

지금 성내에서 일어난 불은 아까 잡약산마루에서 서산대사가 올린 봉화가 옮아간것이라고도 할것이였다. 잡약산에서 오른 불은 금수산으로 옮아가고 금수산에서 오른 불은 동대원 넓은 벌판 한가운데로 옮아갔다.

이때까지 닭과 비둘기들을 가지고 어둡기를 기다려서 장경문과 함구문 근처로 가서 성벽밑에 잠복해있던 우리 사람들은 동대원벌판을 바라보고있었다. 밤은 깊어갔다.

장경문밖에서는 서너길 되는 낭떠러지밑을 스쳐흐르는 대동강에서 떠오르는 랭기가 뼈속까지 스며드는듯 했다. 여기서도 어데선가 우는 닭의 소리가 때때로 아련히 들렸다. 그때마다 저희 소리에 사람보다 더 민감한 닭은 고개를 쳐들고 날개를 푸득거렸다. 그럴 념려가 있어서 암닭만을 가져왔으므로 소리쳐울지는 않았다.

꼴꼴거리는 닭들의 며가지를 어루만져주면서 《허허! 너희 동무들의 소리가 반가와? 정말 일이 무사해서 너희들을 다시 지구 돌아가게 됐으면 나두 좋갔다.》, 《그러다 혹시 또 일이 터져두 하는수 없지. 너희두 그땐 이 나라 땅에 났던 구실을 해야지.》, 《하! 이것들두 목숨이 있는 짐승이라구 제법 온기가 있어!》 이런 소리를 하는 황서방은 저편 선창에서 그 많은 함지들을 이 대동강에 다 띄워버리며 눈물을 흘렸던 생각이 났다. 지금 붙어앉아있는 낭떠러지에서 굽어보는 대동강은 그저 어두울뿐이였다. 또 그후에 달밝은 어느날 밤에 떡돌에서 술을 먹으며 서산대사와 그 이야기를 하던 생각도 났다. 이런 때였다. 옆에서 문득 《여보, 저 불! 종내 일이 터졌소.》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과연 강건너 빈 벌판에서 한자루의 홰불이 불쑥 들렸다. 그들은 곧 부시돌을 쳤다. 부시깃에 올라붙은 불씨를 닭과 비둘기들의 발목에 붙들어맨 화승줄끝에 옮겼다. 몇사람은 한쪽어깨를 성벽에 붙이고 모로 붙어서서 성돌과 성돌사이의 틈사구니로 발끝을 후벼넣듯이 한걸음한걸음 내짚으면서 성벽으로 올라갔다. 성가퀴우에 손이 닿을만치 올라선 사람들은 밑에서 올려주는 닭과 비둘기들을 성안으로 넘겨서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이때 성안의 적들은 거의다 보통벌쪽의 성가퀴로 몰려가고 그중의 일부분은 칠성문밖으로 쏟아져나간 때였다. 물론 성내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적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눈을 피하여 깊이 숨어있었으므로 이쪽 성안은 더욱 조용했다.

닭과 집비둘기들은 인가에서 살아온것이라 비록 낯선 곳이지만 별로 탓하지 않고 날아들어서 깃들여 잘 곳을 찾노라 이집저집의 지붕과 골목들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혹시 놀라더라도 단번에 멀리 날지 못하도록 비둘기들은 날개를 조금씩 잘랐다. 함구문과 장경문근처에서 날려보낸 수십마리의 닭과 비둘기들이 끌고 다니는 화승끝에서는 빨간 불씨가 타고 또 간간이 파란 불길이 일기도 했다. 화승 대목대목에 섞은 류황가루가 화염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놀란 닭과 비둘기들은 딴 지붕, 딴 골목으로 날고 옮겨갔다.

이 당시의 평양에는 초가가 많았다. 닭과 비둘기들이 거쳐가는데마다 여기저기서 불이 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적의 배후를 혼란시키는 우리의 계책은 그리 힘들지 않게 성공할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장면의 격투가 벌어졌고 우리 사람의 희생이 없지 않았다.

성벽중턱에 올라선 황서방이 닭을 몇마리째 날려보냈을 때였다. 바로 머리우에서 덮어누르듯이 시꺼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한놈이 성가퀴에 상반신을 걸치고 이쪽을 굽어보는것이다. 올려다보는 황서방과 거의 얼굴이 맞닿을만치 어둠속에서 번뜩이는 눈과 눈이 마주쳤다. 이 어간의 성가퀴에서 파수보던 일본군사가 분명했다. 순간 그놈의 손에 들린 창날이 번뜩이였다. 황서방은 허리띠에 찌른 짧은 철퇴가 있기는 하나 미처 손쓸 사이가 없다. 놈의 창끝을 피해서 내려설수는 있다. 그러나 놈을 그냥 두면 우리를 발견한 그놈이 소동을 일으킬것이고 따라서 적들이 쓸어나오고 그렇게 되면 불이 번지기 전에 꺼져버릴 념려가 없지도 않다. 한순간이였다. 단 한순간이지만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속에 떠오른 황서방은 한팔로 놈의 모가지를 잡고 끌어내렸다. 놈은 버둥거리는 다리로 허공을 걷어차며 거꾸로 쏟아졌다. 찬찬히 내려서면 성밑에는 발붙일 언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에서 쏟아져내려오는 짐에 휩쓸린 황서방은 간신히 붙어섰던 성벽에서 떨어졌다. 나뜬 허공에서 목을 거머쥔 적과 함께 몇번 몸을 뒤치며 떨어져내려갔다. 성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웨쳤다.

《내 걱정은 말구 어서 닭들을 마자 날리우.》 하는 그의 고함소리… 그리고는 캄캄한 저밑의 물소리였다.

남은 사람들은 그의 말대로 계속해 닭과 비둘기들을 날려보내는 한편 헤염과 자맥질에 능숙한 몇사람이 뒤따라 강속으로 뛰여들었다. 그러나 황서방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일어나는 불길을 따라 바람이 덧치고 덧치는 바람세따라 불은 더욱 번지였다. 때마침 《올빼미새벽》, 캄캄한 밤중의 화광은 놀랍게 충천했다.

이때까지 칠성문루에서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볼수도 알수도 없고 따라서 어떻게 하라고 지휘할수도 없이 그저 캄캄하기만 한 접전장에서 일어나는 함성과 바람소리와 간혹 가려들을수 있는 저희 군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만 있던 적장 소서행장은 《칙쇼-》 소리와 함께 발을 굴렀다. 자기 격앙, 자기 앙심만으로 전후를 가리지 못하고 성밖으로 내몰았던 분병을 이제는 거두어 성안의 화재를 꺼야 했다. 성안이 다 타버리면 고마인의 나라의 엄혹한 삼동을 어데서 날것인가? 그에게도 그만한 《심모원려》는 있었다. 황황히 말을 잡아탄 소서행장은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라는 명령을 남기고 저자신 먼저 말머리를 돌려 퇴진해야 했다.

패전한 적의 퇴각신호가 나자 보통벌은 한층 더 소란해졌다. 왜놈들은 숨어있던자들까지도 이제는 내놓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우리 편에서는 보통강을 건느는 적에게 또 한번 타격을 줄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앞을 다투어 추격했다. 추격을 재촉하여 둥둥 울리는 우리의 군고소리와 아울러 넓은 벌판을 휩쓸어 일어나는 우리의 함성으로써 려명을 앞둔 캄캄한 보통벌은 뒤흔들리듯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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