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52 회


52. 한밤중의 보통벌전투


이쪽 칠성문밖의 논벌에서는 안 뵈였지만 홰불은 보통문근처의 성벽밑에서 먼저 올랐다. 잡약산의 봉화는 그 상봉에서 그것을 보고있던 서산대사가 올린것이였다. 그러자 보통문밖 나무다리밑에서도 불이 일고 강복산, 장산기슭에서는 북이 울렸다.

조그마한 질화로에 불씨를 담아가지고 떠났던 돈정신은 어둠을 타서 그 나무다리밑에 잠복해있었다. 돈비신이라는 별명이 있는만치 몸이 경첩한 그는 좌우쪽 기둥을 횡십자(×)로 련결한 나무와 나무사이로 몸을 날려갈수도 있었지만 혹시 실수해서 물소리를 낼 념려가 없지도 않으므로 물로 들어섰다. 헤염을 쳐야 할 정도로 물이 깊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로를 치켜들어야 할만치 등가슴까지 물에 잠겼다. 오늘만이 아니였다. 어제 그제도 그렇게 해왔었다. 다리 한가운데 있는 횡십자나무에 걸터앉은 그는 바로 눈앞이다싶이 우중충 솟아있는 보통문과 또 뒤에 멀리 있는 잡약산마루를 번갈아 살펴야 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가? 앞뒤를 살피며 기울이는 귀에 알고 들으면 분명히 그렇다고 들을수 있는 낫질소리가 한때 점점 가까와졌다가 끊어지고말았다. 후- 한숨이 나갔다. 눈알이 빠지게 아프도록 어둠을 뚫고 건너다보는 보통문루와 그 좌우 성가퀴에도 놈들의 인기척은 없었다. 한고비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 또 시간이 흘렀다. 젖었던 옷은 꺾어쥘수 없을만치 얼었다. 거센 바람이 안기는것은 아니나 곱사등같이 들린 머리우의 널판장틈으로 쏘아드는 바람이 칼끝같이 매웠다. 늘어뜨린 발끝을 스칠듯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이 기둥들을 둘러싸고 얼어붙는 소리가 바삭바삭 들리기도 했다.

《제길! 돈비신이라구 이 일을 맡겼어두 이렇게 통 적시기야!》

혼자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그는 중얼거렸다. 추운것도 추운것이려니와 그보다도 불씨가 더 걱정스러웠다. 물론 부시도 가지고 왔지만 다급한 때 부시를 치느니보다는 빠를것이므로 가져온 불씨였다. 재가 식으면 불씨마저 스러질 념려가 있으므로 젖지 않은 저고리앞섶으로 싸서 안고있는 화로의 재를 이따금 헤집어보기도 했다. 빨갛게 살아있다. 안심한 그는 머리우를 쳐다보며 여기저기 판장들을 더듬어 만져보기도 했다. 이틀밤이나 걸려서 그 창대와 널쪽틈사리마다 끼워둔 인화지물이 있었다. 그것은 주로 대자귀밥나무기저귀에다 류황과 송진을 끓여서 묻힌것들이다. 만져보는 판장들도 조강한 가을날씨에 말라서 습기가 별로 없었다.

불씨와 인화지물들을 채심해보는것은 단 몇순간, 그 다음에는 또 앞뒤를 살펴야 했다. 눈이 얼지나 않나? 눈섭이 깝작거리게 맞붙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앞이 몽롱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잠간 눈을 감았다뜬다는것이 어느새 깜박 졸기도 했다.

《이러다가 정말 얼어죽지 말아.》

그는 혼자 중얼거리는 말로써 자신을 타일렀다. 얼어죽지는 않더라도 오금이 붙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다리를 놀리고 어깨를 비비적거렸다.

《왜놈들아, 제발 오늘 밤만은 발동을 말구 썩어진 잠이나 자구있거라. 일이 얼마쯤이나 됐는지 좀 알구나 있어두 좋갔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앞뒤를 살펴보던 돈정신은 그야말로 갑자기 얼어붙은 사람같이 한순간 굳어졌다. 잡약산머리에서 벌깃 일어나는 불이 뵈였다. 다음순간 맞은쪽 성가퀴우에서는 떠드는 왜적들의 소리가 들린다. 검은 그림자들이 얼른거리기 시작한 성가퀴에서는 또 뭐라고 야단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일이 불거지고야말았다.

《개새끼들아, 좀만 더 참으려무나.》

돈정신은 금시 온몸이 확 달아오르는듯 했다.

품었던 화로를 무릎사이에 끼고 부저가락으로 집어낸 불씨를 류황묻힌 나무기저귀에 대고 불었다. 퍼런 불길이 펄떡 올라붙었다. 틈사리마다 끼워놓은 인화지물에다 불을 달았다. 불길은 판장과 창대를 따라가며 다리밑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욱 소동하는 놈들의 소리를 등뒤에 들으며 돈정신은 걸터앉았던 나무를 딛고 몸을 날려 다음 기둥에 가붙었다. 불길이 따라왔다. 다리 한가운데서는 불길이 벌써 판장사이로 너물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기둥 또 다음 기둥으로 몸을 날려서 강뚝에 내려서게 된 때 뒤에서 몰방으로 퍼붓는 조총소리가 났다.

벌판으로 달려가던 돈정신은 어둠속에서 《수고했소.》 하는 거쉰 말소리와 마주쳤다. 법근이였다. 돈정신이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법근이는 다리쪽으로 달려간다. 그동안에 보통문이 열리고 쓸어나오는 적들의 모양이 불빛에 보인다. 돈정신은 다시 돌아섰다. 법근이를 따라가는 5~6명의 승병들과 같이 달려갔다. 불붙는 다리 한가운데서는 벌써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격렬했다. 검을 빼들고 외통길인 다리 한가운데를 막아선 법근이는 저편에서 마주 오는 적을 혼자서도 막아낼수 있었다. 불길이 좌우기슭을 핥으며 염염히 타오르는 다리 한가운데 단신으로 버티고 서있는 법근이는 지나치게 대담해뵈였다. 바람새따라 이리저리 넘나드는 화염에 혹은 붉고 혹은 푸르게 번득이는 그의 칼날은 요기롭기도 했다.

《남무-》

《관세음-》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푸른 무지개로, 다음에는 붉은 번개불로 그의 검이 휘둘릴 때마다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적들은 한두놈씩 강속으로 처박혔다.

더 가까이 간대도 나서볼 여지없이 오히려 방해가 될것이므로 이편에서 바라만 보고있는 사람들에게는 법근이는 하나의 불사신같기도 했다. 마침내 다리중동이 무너졌다. 이편저편은 더 어우를수 없이 갈라서게 되였다. 다리우의 싸움은 끝났다.

련광정에서 기둥과 기둥사이를 방패로 둘러막고 그안에 겹겹이 방장을 드리우고 또 그안에 병풍을 둘러치고 또 그안에 백탄불화로들을 둘러놓고 그 한가운데다 드높이 포진해 깔은 자리속에서 취해자던 일본군 선봉장 소서행장이 창황히 말을 잡아타고 보통문으로 달려왔을 때는 다리는 이미 완전히 타버렸다. 오직 이쪽저쪽끝에 남아있는 판장들이 타는 불빛에 점점 더 불어가는 강물이 넘실거릴뿐이였다.

소서행장은 칠성문으로 군사를 몰았다.

드높은 문루에서 내려다보는 보통벌은 과연 변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허옇게 보이던 논벌의 나락은 불고 쓴듯이 사라지고 꺼먼 바닥이 드러났다.

《어서들 나가라.》

《나가서 닥치는대로 고마인들을 잡아들여라.》

《반항하거든 용서없이 죽여라.》

《아니, 고마인을 깡그리 죽여라. …이 여가 차지하고있는 성하(성밑)에서, 바로 여의 무릎밑에서 감히 이럴수 있단 말이냐? 고마인들이 언감생심 이럴수 있단 말이냐? 참을수 없는 일이다. 이 무슨 챙피냐? 실로 여는, 칙쇼…》

소서행장은 문득 제 혀가 씹히기라도 한듯이 말을 끊을밖에 없었다. 실은 이가 아팠던것이다.

충치(삭은이)나 풍치(삭아서 생기는 이앓이밖의 모든 이앓이)가 아니라 저도 모르게 으드득으드득 갈리던 이가 턱이 일그러질만치 시큰했던것이다.

《어째서 썩썩 나가지들 못하느냐. 썩 나가. 나가서 고마인을 깡그리 죽이란 말이다.》

소서행장은 또 입이 부풀게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성문이 열리고 일본군이 출동하기 시작했다. 병서에는 이런 용병을 분병이라고 한다. 승산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겨를도 없이 오직 대장된자의 분노와 충동과 앙심만으로 군사를 사지로 내모는것이다. 그러므로 분병필패라는것이다. 또 어두운 밤이였다.

《깡그리 죽이라.》는 고마인이 지금 어데 있는지도 알수 없다. 허허벌판에서 불어오는 매운 바람소리뿐. 《미견형이전수중필패》라는 말도 있다. 적의 정형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싸우면 제아무리 많은 군사라도 패하고야마는 법이다. 지금 싸우러 나가는 일본군사로서는 바로 발부리앞에서 고마인의 매복이 일어날는지도 모르고 혹은 넓은 벌판을 다 헤매도 고마인의 그림자도 볼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혹은 또 지금의 바람소리가 만산편야한 고마인들의 숨소리일는지도 모른다.

어둠속에서 더우기 장과 소금의 부족으로 얼굴들이 퉁퉁 부어 밤에도 잘 보지 못하므로 한걸음도 자신있게 떼여놓을수 없었다. 그같이 위태위태한 행군을 하는 군졸들은 앞뒤로 자기네의 대오를 살피기도 했다. 대오에는 빠진 동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멋모르고 뛰여나온것이 어리석었다는 후회…

보통강으로 나가는 큰길로 접어들어서 말을 달려가던 선두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문득 비명을 지르며 말과 사람이 덧개펴 쓰러졌다. 마름쇠를 밟은것이였다. 아무렇게 던져도 날카로운 한끝이 새발심지모양으로 우뚝 일어서기마련인 마름쇠가 큰길 한토막에 깔려있었다. 길이 막혔다. 길을 버리고 좌우쪽으로 흩어져 강을 건느라는 명령이 내렸다. 강가로 가까이 나가자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불이 일어났다. 거슬러오는 불길에 일본군은 금시 밝아진 화광속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나는 몇방의 조총소리와 함께 철환과 화살이 비발치듯 날아왔다. 맞은쪽 강가에는 갈숲을 따라가며 수십명의 우리 궁수들이 매복해있었다. 삽시간에 몇십명이 쓰러졌다. 그중에도 말을 몰아 군졸들을 지휘하던 대장들이 먼저 쓰러졌다. 그만치 무장지졸이 늘었다. 마름쇠에 쓰러졌던자들도 자기네가 크게 상한것은 아니지만 말들은 더 달릴수 없게 되였으므로 마상에서 칼을 휘둘러 부하들을 내몰수는 없었다. 그런 기회를 타서 어둠속으로 도망하는 군졸들도 많았다.

이쪽 강변의 갈숲속에 들어앉아서 활과 조총을 쏘던 우리 사수들은 뒤에서 부르는 사명대사의 지시를 따라 이제는 뒤로 물러서게 되였다. 아직도 불이 붙는 건너편 뚝에는 적이 없었다. 그대신 뒤의 벌판에서 어둠속에 흩어져 헤매며 서로 웨쳐부르는 모양인 적들의 아우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적들을 흐트러놓는데 성공했다.

현차돌이를 비롯하여 좀 뒤쪽에 자리잡고있던 5~6명의 조총수들이 먼저 사명대사를 따라 다음 매복처로 달려갔다. 이때 십여명의 궁수를 거느리고 바로 물가에 나앉았던 고충경 역시 떠나려고 일어서다가 귀를 기울이며 주춤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불빛이 못미치는 저편 옅은 목에서 적들이 또 강을 건너오는것이 분명했다. 고충경은 궁수들을 재촉해서 달려갔다. 얼마 안 가서 과연 강에 들어선 적들의 모양이 거뭇거뭇 뵈였다. 어둡지만 흰 수목필을 련폭해 펴놓은듯 한 물빛의 대조로 목표는 뚜렷했다. 활 한바탕안으로 달려간 궁수들의 화살이 련주전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래도리를 다 잠그고 강에 들어섰던 적들은 철썩철썩 물을 퉁기며 쓰러져 강속에 구겨박혔다. 누구의 화살엔가 강가에 말을 세우고 군졸들을 지휘하던 장수 몇놈도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아우성치며 다시 강뚝으로 기여오르는 놈들의 발소리가 소란했다. 이때였다. 놈들의 아우성이 신호였던 모양으로 이쪽 갈숲에 모닥불을 퍼붓듯 하는 철환이 날아오고 뢰성벽력같은 조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놈들의 목표가 된 갈숲을 이제는 속히 빠져나가야 했다. 고충경은 궁수들을 4~5명씩 갈라서 흩어보내기로 했다. 그중의 한패를 앞세우고 강뚝으로 막 올라가던 고충경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에 다리를 후려갈기운듯이 쓰러졌다. 신음소리를 씹어삼키듯이 이를 사려문 고충경은 피가 솟구치는 왼쪽허벅다리의 상처를 눌러잡고 무르팍을 한두번 움직여보았다. 분명히 뼈는 상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큰숨이 나갔다. 머리에 썼던 수건으로 상처를 동여매고 궁수들을 따라갔다.

《어데 상하셨소?》

앞서가던 궁수중의 한 젊은 중이 되돌아오며 물었다.

《다리를 좀 다쳤소. 하나 따라갈수 있으니 어서들 앞서가오.》

《부축하구 같이 갑시다.》

《아니, 내 걱정은 말구…》

또 몰방으로 터지는 놈들의 조총에 바로 옆에 서있는 큰 버드나무가지들이 분질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기가 급하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안 죽을테니 빨리들 가오.》

놈들의 조총질이 잠시 멎은 때 고충경은 이런 말로써 궁수들을 재촉해 보냈다. 비록 한다리는 상했으나 이 어두운 넓은 벌판에서는 어데서든 몸을 숨길수 있고 또 한몫할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이때 보통벌에서는 여러곳에서 작은 접전이 벌어졌다. 우리는 일본군이 보통강을 건느는데서부터 적들을 분산시키고 흩어져서 보통벌에 들어선 적들을 또 분산시키는 전술을 썼으므로 싸움은 여러곳에서 벌어졌다. 모두가 일합, 이합의 짤막짤막한 접전의 련속이였다. 대렬도 없이 또 피차의 련락도 없이 그저 어둠속을 헤매며 달려오는 적들과 맞부딪친 우리 사람들은 한두번 손질로 죽일수 있는 적을 죽이고는 돌아서 달아났다. 그저 달아나는것이 아니라 우리 매복이 있는데로 적을 유도해갔다. 따라가던 적들은 다음 논두렁이나 보뚝을 넘어서려고 할 때마다 바로 저희 발부리에서 일어나는 우리 사람들의 반격을 받게 되였다. 칼과 창과 철퇴 혹은 낫을 들고 논뚝 또는 보뚝에 붙어앉았다가 달려나오는 우리 사람들은 오래 싸우지는 않았다. 한두번의 칼, 낫, 창질로써 손가까이 있는 적을 찍고 찌른 후에는 적이 손쓸 틈을 주지 않고 뒤로 물러갔다. 그때마다 적의 수효는 줄고 또 분산되였다. 뒤로 도망가는 적들은 더욱 많았다. 그와 반대로 놈들이 달려가는 다음 또 그 다음 뚝에서 일어나는 우리 사람들은 점점 더 늘었다. 지형을 모르는 어두운 벌판에서 촉처에 반격을 받으며 헤매게 된 적들은 서로서로 고함을 질러 끼리를 웨쳐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희 군사가 호응해나서기보다 혹은 등뒤에서 혹은 좌우측에서 함성을 지르며 엄습하는 우리 사람들의 반격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만일 이때가 밝은 낮이였다면 (물론 낮이라면 우리가 이런 전술을 쓸수는 없었을것이지만) 곳곳에서 벌어진 격투중에서 우리는 가지가지의 장렬한 장면들과 용감한 사람들의 행동들을 볼수 있었을것이다.

온 벌판에서 일어나는 우리 사람들의 함성과 울부짖는 적들의 비명과 쫓아가고 쫓기고 그러다가 마주쳐 겯고 트는 발소리들과 더욱더 기승을 부리는듯 노호하는 바람소리와 그런중에서 불꽃을 튕기며 맞부딪치는 병장기소리까지 어울려 갈피를 잡을수 없는 접전마당이라 누가 귀를 기울여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데선가는 《김첨지, 이 늙은 두상 나두 왜놈을 한놈 잡았소.》 하고 웨치면서 낫의 피를 후리쳐뿌리며 한번 크게 웃는 늙은 농군도 있었다. 또 한곳에서는 낫으로 걸어 넘어뜨린 적을 타고앉아서 놈의 가슴을 가르며 《이놈아, 이 왜놈아, 내 아들이 너희놈들한테 죽었다. 동대원싸움에서 내 아들은 죽었다. …장손아, 장손아-(그는 아들의 이름을 웨쳐불렀다.) 네 애비가 이제야 네 원쑤를 갚는다.》 하다가 마침내는 후두두 어깨를 떨며 목놓아우는 농군도 있었다. 외처에서 온 농군들이였다. 그들이 가진것은 오직 낫 하나뿐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싸울 결심을 했다. 병장기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의 방해가 안되도록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용감한 행동을 다른 사람이 볼 기회는 없었다.

지형을 모르는 벌판에서 헤매는 적들은 서로서로 웨쳐부르며 논판을 벗어나 큰길을 찾아나서려고 애썼다. 그러나 찾아나선 큰길 역시 행동이 임의로울수 없었다. 곳곳에 마름쇠가 깔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좌우쪽의 밭들과 길을 막아 뭇쌓아놓은 곡초에서 불이 일었다.

고충경은 상한 다리를 끌고 큰 뚝으로 붙어가면서 기회있는대로 활질을 하며 뒤로 물러서던중이였다. 얼마 멀지 않은 앞에서 불이 일었다. 금시 뒤밝아진 큰길에는 적들의 검은 그림자가 드러났다. 고충경은 적의 배후를 엄습하려고 달려갔다. 앞이 막혀서 붐비는 적의 부하들을 호령하는 말탄 적장을 겨누고 막 활을 날리려는 순간이였다. 적장이 휘두르던 장검을 떨어뜨리고 말잔등에서 허궁 쳐들렸다. 어느 짬엔가 저편 어둠속에서 곁쐐기로 뛰여든 한 창끝이 그놈의 복통을 꿰서 번쩍 쳐든것이다. 활을 당겨쥔채 무춤한 고충경은 혹시 적의 군졸들이 하는짓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이놈들아! 봐라-》 하는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 늙은 봉군 오장이였다. 바라보던 고충경은 부지중 《아!》 소리를 지르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 늙은 오장이 공연한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찌른 적을 곧 버려야 할것이다. 그러나 그는 창끝에 꿰든 적장을 버쩍 치켜들고 적들 한가운데서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우리 조선 봉군이다. 이 불의불칙한 왜놈들아, 봐라!》

그는 그슬린 구레나룻속에 부릅뜬 눈을 번득이였다. 그 서슬에 처음 몇순간은 누구나 아연하지 않을수 없었다. 더욱 기세를 올리는 화광중에 울깃불깃하고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입은채 창끝에 꿰여서 사족을 버둥거리며 허궁 쳐들려 돌아가는 저희 대장을 쳐다보는 적들은 뒤걸음질을 할뿐이였다. 이때 저편 어둠속에서 사명대사의 고함소리가 났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달려나오는 우리 사람들의 함성과 발소리가 쏟아지는듯 했다. 그러나 우리 편의 손이 미칠 사이가 없었다. 이때 고충경이도 몇대 날린 살로써 찍어내듯이 몇놈을 쓰러뜨렸으나 늙은 오장은 달려든 적들에게 한순간 묻히다싶이 했다. 다음순간이였다. 우리 사람들이 불빛안으로 나타나자 적들이 흩어진 길바닥에는 두다리를 뻗고 부러진 창대를 두손으로 집고 앉아서 조는듯 한 늙은 봉군의 모양이 다시 나타났다.

《그렇지! 어서 족치라구. 전서방, 어서 왜놈들을 족치라구.》

놀랍게도 우리 늙은 봉군은 세워든 창대를 기대고 조는듯 하던 얼굴을 들어 앞을 바라보며 이렇게 웨치는것이였다. 잠시 말을 끊었던 그는 한층 기운이 준 소리로 웨쳤다.

《서산대사한테 내가 원풀이를 했다구 이르라구.》

이런 말을 하자 그는 덜썩 뒤로 쓰러져 누워버렸다.

《오장아주바니!》

화광이 못미치는 큰길 저편에서 주복이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 어둠속에서는 육중한 몽둥이로 무슨 부드러운 가루를 넣은 자루를 치기라도 하는듯이 둔탁하게 퍽퍽하기도 하고 툭탁거리기도 하는 소리와 함께 연해 울부짖고 아우성치는 적들의 비명이 들리였다. 보이지는 않으나 쫓겨가는 적들을 따라가며 후려치는 주복이의 묵중한 철퇴바람이 씽씽 느껴지기도 했다.

《오장아주반, 좀만 더 참으소.》

좀더 멀어진 주복이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러나 늙은 봉군 오장은 이미 깊은 잠속에 들어있었다. 단 몇순간동안의 일이였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