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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1 회


51. 한밤중의 보통벌추수


보통문과 칠성문, 그 두 성문앞에만은 낫을 대볼것이 별로 없었다. 지난 7월 보름날과 8월 초하루날에 있은 싸움에 성문앞의 곡식은 짓밟히고말았다. 그래서 두 성문앞에까지는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여름에 김맬 때도 그랬거니와 지금 우리가 추수하는것을 안다면 적들은 역시 또 그 성문으로 쓸어나올것이였다.

지형으로 보면 보통문은 평지에 서있고 칠성문은 그리 높지는 않으나 을밀대에서 뻗어온 산줄기우에 서있다. 그 산줄기 역시 을밀대와 련달린 송림에 덮였으므로 한성안이지만 칠성문안은 수목이 울창한 무인지경이였다. 이와는 반대로 평지에 있는 보통문안에는 인가들이 많고 따라서 출입이 빈번한데니만치 일본군의 경계도 칠성문보다 더 심한편이였다. 바로 그 문밖에 가로걸쳐있는 보통강에는 옛날 산수화에서 흔히 볼수 있는 중가운데가 곱사등으로 까부라진 큰 나무다리가 있었다.

이때에 우리가 추수하는것을 안다면 적들은 우선 그 나무다리를 건너서 쓸어나올것이다. 할수만 있으면 두 성문을 봉쇄해야 할것이다. 완전히 봉쇄까지는 못하더라도 쓸어나오는 적에게 장애와 타격을 주어야 할것이였다. 우선 보통문밖의 다리를 끊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는 가을철에 들어서부터 가물었기때문에 옅어진 강물을 불도록 할것이였다. 다리를 끊기 위해서는 돈정신이가 자그마한 질화로를 들고나갔고 강물을 깊게 하기 위해서는 보통벌의 논도랑과 보물고를 한밤중에도 제 손금같이 꿰뚫고있는 김첨지와 주복이 아버지를 비롯하여 이곳 농군들이 종가래를 하나씩 들고나갔다. 문제는 칠성문이였다. 그앞에도 강이 있기는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전에 조차장뒤로부터 잡약산뒤를 거쳐 팔동교가 놓인 강과 련결해서 운하를 파고 강물줄기를 돌렸으므로 지금은 흔적도 없어지고말았지만 칠성문밖의 《모래터》라고 하는것이 바로 그 강의 하상이였던데다.) 그러나 칠성문에서 좀 멀리 떨어져있는 그 강은 상류니만치 더욱 물이 옅어서 지금은 다리가 없어도 아무데서나 건늘수 있었다. 그래서 오직 할수 있는것은 강으로 나오는 큰길에 마름쇠를 펴고 적이 강을 건늘 때에는 그앞에다 불을 지르기로 했다. 또 적의 동정을 보아가며 신호를 하기 위해서 홰자루들을 가진 사람들을 성벽밑으로 돌아가며 잠복시켰다.

초생달이 채 지기 전에 사람들은 서재골골짜기에서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구역을 가르고 매 구역마다 논마지기수와 벼단을 이운할 거리를 따라서 작정한 수효대로 벨 사람, 묶을 사람, 나를 사람들이 패거리를 지어서 보통벌로 퍼져나갔다. 낫만을 가진 외촌농군들은 베고 묶는 일을 하더라도 될수록 성문에서 먼 구역으로 가게 하고 혹시 앞으로 나가더라도 적은 수효로 나누어서 병장기를 가진 사람들사이에 끼여가도록 했다.

일찌기 떴다 일찌기 지는 초생달이 그 실낱같은 금쪼각을 누가 가무린듯이 사라졌다. 성밑에 여기저기 잠복해있던 복로군들로부터 이제는 일을 시작해도 좋으리라는 기별이 왔다. 각기 맡은 구역을 따라 높은 논두렁과 보뚝들을 의지하고 숨어앉아서 짚신감발의 신들메를 다시금 죄여매며 기다리고있던 수천명의 벼갈군들은 낫을 들고 일어났다. 우선 논배미들로 퍼져나가고 논배미들에서 또 이랑들을 잡아 퍼진 그들은 보통벌을 두쪼각으로 가르듯이 한가운데서부터 성벽쪽을 향해가며 베기 시작했다. 그것은 적들이 밖에 나다니는 일이 더 적을 한밤중을 타서 성벽가까이로 다가들어서 벨수 있도록 료량한것이였다. 초경쯤 해서부터 일이 시작되였다.

거세게 노호하는 바람은 아니나 예로부터 이름이 있어온 마가을 보통벌의 늦하늬가 맵짜하니 쏠쏠 갈리였다. 달마저 넘어가서 오직 한빛 깊은 물속같이 랭랭하게 푸른 하늘에는 그 역시 차겁게 보이는 별마저 드물어서 한논판에서 베여나가는 사람끼리도 두세사람만 건너가면 그 다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싹싹 싸륵! 하는 잘 드는 낫소리들만이 끝없이 먼데까지 퍼져나가는듯 했다.

《힘들게 허리를 굽히구 바투 비잘건 없지 않아?》

《아, 그거야 재간만 있으면 짐 안되게 이삭만 자르면 더 좋지.》

어둠속에서 낫소리와 함께 이런 말이 들리기도 했다.

《허리를 펴구 비여보라구. 안해본노릇이 돼서 더 힘들지 않나.》

《허- 벼갈을 첨 해보는 사람같은 소리들을 하는군.》

《아닌게 아니라 이런 벼갈이야 처음 아니요.》

《왜, 밤이 돼서?》

《밤이 돼서 안 보이면 몰라두 이편이 그만치 부지런해진셈 치구 하면 될거 아닌가.》

나직나직한 이런 말끝에는 웃음소리가 따르기도 했다. 그들뒤에는 묶는 사람들이 따랐다. 베는 사람 두셋에 하나폭으로 따라가는 그들은 갈지자로 왔다갔다하며 모숨모숨이 베여놓은것을 걷어서 묶어나갔다. 또 그들뒤에는 묶어놓은 벼단을 저편 큰 뚝까지 날라내는 사람들이 따랐다. 논판에서 철버덕하거나 우쩍하는 큰소리를 내는것은 흔히 그 사람들이다. 등짐으로 지거나 아름으로 안아내던 길에 우멍우멍한 논판에서 채 뽑히지 않은 물창이나 살얼음을 짚어서 빠지기가 일쑤였다.

《천천히, 너무 덤비지들 말라구.》

《벼단 져낼래 미에기 잡을래 그러다가는 초아진에 뽕빠지리다.》

《정말 밤새와 할 일인데 기운들을 애낍시다.》

이런 투로 서로 아끼고 격려했다. 그러는 동안에 이따금씩 돌아보는 논판은 번쩍번쩍 달라졌다. 시야는 물론 좁았다. 그러나 맡은 이랑들을 다 베고 다음 논배미로 올라갈 때마다 뚝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방금까지도 눈앞에서 그리고 손끝에서 설렁거리고 희게 보이던 벼포기들은 부신듯 가신듯 사라지고 꺼먼 논바닥만이 드러났다. 그만치 일을 치운것이다.

또 베여나가던 논판이 끝나서 오래간만에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 드문 별빛아래 어둑컴컴한 숲같이 솟아보이는 수수밭이 설렁거리기도 한다. 논벌가운데 오다가다 끼여있는 수수밭들은 이때까지도 그냥 있었다. 아퀴가 히질긴 곡식이라 잎들은 고삭을대로 고삭았으나 이삭들은 아직 단단했다. 누가 낸 계교인지 베는 법수가 그럴듯했다. 꼴망태 하나씩을 메고 낫을 든 사람들이 수수이랑을 한이랑씩 타고 나가면서 이삭의 대목들을 잘랐다. 한걸음한걸음 내짚는 그들의 다리사품에 끼운 수수대들은 손에 모갱이가 잡히기 알맞게 허리를 굽힌다. 그리고 이삭이 잘리운 빈 대들은 그들의 꽁무니에서 빠져서 다시 일어섰다.

《곰이 강냉이 쯔는 투로군.》

《산골절에서 부대밭의 강냉이를 도적맞아버릇해서 그 곰동지들의 본을 따는 모양이지.》

《여보, 나는 중 아니요.》

《아니요? 아니라두 수수갈하는 그 방법만은 중들한테 배왔을테지.》

《지금 여기서 하는 일에 우리 중한테 안 배운것이 있소?》

《뻐기는걸 보니 아마 저 대사가 중인게지?》

《그래, 나 중이요. 가사장삼 다 벗어놓구 머리에 수건은 동였어두 난 중놈이요.》

《하! 저 대사가 왜 해넣기두 전에 시쁘둥하니 왜진 짠지국같은 소릴 하네.》

《우리 서산 큰 스님두 중이구 사명스님두 중이요.》

한이랑 수수이삭을 다 자르고 밭머리로 나서는 그 젊은 중은 내뱉는 투로 말했다.

《하, 그 대사가 무슨 나무럼인고? 일 참수에 입 쓰지 말라구 하는 롱말인데 롱담을 그런데루 끌구갈거야 있나.》

한 늙은 농군의 말이였다.

《그럼 중놈타령은 그만할가요?》

젊은 중은 좀 부량스럽게 번뜩이던 눈을 금시 가늘게 뜨며 《그저 〈중〉이래두 〈놈〉자가 달리는것 같애서요.》 하고 허허 웃으면서 또 새 이랑을 잡아들었다.

이때 또 젊은 중 몇이가 어둠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섬거적에 넣어서 지고 온 관솔가지들을 바람세 보아서 수수밭 서북쪽 밭머리로 돌아가며 쏟아놓았다.

《제철바람이라 하늬가 변하지는 않겠지.》

한 중은 이렇게 말하고 한 중은 《사명스님말씀이 먼저 큰길쪽으루 따라가면서 비랍디다. 여차직하면 아깝지 않게 불을 지를수 있도록 하라구요.》 하고 수수갈하는 사람들에게 이르고는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말로써 분위기는 금시 또 벅차도록 긴장해졌다.

베고 묶는 사람들은 걸음마다 빈 논판을 뒤에 남기며 앞으로 나가게 될수록 더욱 긴장하고 긴장할수록 이야기들이 적어졌다. 그대신 싸륵, 싹싹하는 낫질소리가 온 벌판에 가득찬듯 하고 그중에도 또 제각기 손끝에서 버스럭거리는 벼모숨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서리발이 엉킨듯 랭랭하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저 어렴풋하기만 하던 성벽과 성문루각들의 형태가 이제는 한결 뚜렷해졌다. 그만치 가까와졌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빈몸으로 걸어도 한참길이다.

《쉬- 놀라지들 마소.》

《거 누구가?》

베고 묶는 사람들의 등뒤에서 문득 이런 말소리가 났다. 낫을 든 십여명의 장정들이 어둠속에서 나타나 논판으로 우뚝우뚝 들어섰다.

《웬 사람들이요?》

《무슨 일이 났소?》

베고 묶던 손을 잠시 멈추고 묻는 말이다.

《뜻밖의 일손이 또 늘었소.》

《우리 군사들이 왔소.》

새로 논판에 들어선 사람들의 대답이였다.

《우리 군사들이라니?》

《석장군 고개넘은쪽에 둔치구있던 군사가 천명이나 왔소.》

《저런!》

《김응서조방장이 여기 일을 도와주라구 보내서 왔답니다.》

《그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데들 있소?》

《저쪽 강복산이랑 장산앞에서 벼단들을 고개너머루 넘기는 일을 맡았소. 그래서 거기 일군이 남아서 이리루 나오게 되구 또 이제부터는 비는족족 씽씽 산뒤루 넘어가게 됐소.》

《그렇다면 비는 사람이 못해두 3백~4백명은 더 늘었으니 소불하 륙칠백석은 더 비게 됐네.》

《그렇지요. 자, 그런데 새루 온 우리는 묶으라우, 비라우?》

《세사람의 둘은 비구 하나는 묶으소.》

《그럼 조금씩들 죄서 섭시다.》

이때 논판들에서는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 벌어졌다. 논판뿐아니라 벼뭇을 나르는 패거리들에도 새 일군들이 늘었다. 베여낸 곡식은 우선 보통벌뒤산을 넘겨놓고볼 일이였다. 그래야 완전히 우리것이 될것이다. 칠성문밖근처에서는 북쪽 장산고개와 서쪽 강복산고개가 가까왔다. 보통문밖에서는 순안길로 해서 역시 강복산고개를 넘는 큰길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욱 편한것은 서장대앞까지만 이운해가면 장마철에 쓰던 나루배로써 보통강줄기를 거슬러 잡약산뒤에까지 올라갈수 있었다. 물은 많지 않았으나 나루배에 벌이줄을 매서 좌우쪽에서 끌고 삿대질을 하면 넉넉히 올라갈수 있었다. 또 미리 준비했던 떼목들을 띄우고 끌었다. 작은 떼목이라도 소바리짐보다는 많이 실을수 있었다. 그래서 소는 칠성문밖근처로 많이 돌렸다. 소바리는 대개 늙은이들이 몰았다. 짐을 실어주기만 하면 한사람이 두세필씩은 건사했다. 그들 역시 빈몸으로 다니지 않고 몇단씩이라도 지고 떠났다.

새 일군들이 보충됨에 따라 논판의 일손들이 좀 바뀌게 되였다. 낫질을 하던 사람들중의 손이 굼뜬 사람은 묶는 일을 하고 묶던 사람들중에서 굼뜬 사람은 나르는 패로 되였다. 앞으로 베여나갈수록 차차 멀어지므로 뒤로 이운하는 품이 더 많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추려내세운 일군들이라 지금 베고 묶는 사람들의 일솜씨는 번개불같이 빨랐다. 저마다 늦바람을 주지 않고 들어붙은 일이라 앞서고 뒤떨어지는 사람이 별로 없이 베고 묶어나가는 논판의 벼는 날기멍석을 말아치우듯이 번쩍번쩍 바닥이 드러났다. 그 판에서 묶는 일을 하던 늙은 봉군 오장 역시 굼뜬 축으로 몰려서 이제는 벼단을 나르게 되였다. 논판에서 벼단을 져내는 일군들에게는 지게가 차례에 오지 않았다. 저마다 아름으로 안고 나가서 저편 소바리가 다니는 큰길까지 져내는 지게군들에게 지워주는것이 일이였다. 벌써 몇번짼가 한팔로는 세네단을 그러안고 한손으로는 두어단을 겹쳐들고 저쪽 논배미의 큰 뚝까지 날라간 늙은 봉군 오장은 문득 《거 오장아주바니 아니요?》 하는 아낙네의 말소리에 놀랐다.

《이게 누구요? 이것이라니! 칠성이 어미가 언제 왔소?》

《이제야 왔쉐다. 좀 일찍 와볼라구 부수대긴 해서두 그만 늦었쉐다.》

그 역시 저편 논에서 벼단들을 안고 들고나오면서 말했다.

《그 먼데서 안 오신들 메라리, 그래 젖먹이는 어떻게 하구 왔소?》

《그러기에 말이웨다. 그걸 떼놓구 오느라구 이렇게 더 늦질 않았소.》

《정성이 무던하시외다. 하기야 칠성이 어미 하나쯤 안 오시기루…》

《칠성이 엄마가 왜 어드래서요. 지금 오장아주바니 하는 일이나 우리 나인들 하는 일이나 한몫이기는 같은것 같소고래.》

희미한 어둠속에서 이같이 곁다리로 핀잔을 주듯 하며 나선것은 김첨지 마누라였다. 그 역시 저편 논배미에서 벼단들을 끌고 나왔다.

《그러다보니 일이 좀더 새없이 됐는걸.》

《새없긴 또 뭐이 새없나요. 왜, 우리 나인들을 만나서요?》

《아주마니, 왜놈들 듣갔소.》

늙은 봉군 오장은 허허허 웃고나서 말했다.

《그러지 않아두 단을 묶다가 손이 뜨다구 따돌려서 이 일을 하기는 하면서두 내가 귀구멍이 너무 넓었던 한을 다하던중이웨다. 지난 7월 보름날만 하더라두 그랬구 또 8월 초하루날 싸움때두 그랬구, 이 나는 군총으루 늙어온 사람이니 아무래두 싸움에 나가야 하겠다구 하는데두 서산대사랑, 사명당이랑이 굳이 말리는통에 못 나갔다가 이러구있질 않소.》

《아주반 같은이가 싸움에 나가서는 더 맥을 못 추갔으니 그러지 않갔소.》

《에이 여보, 아무리 늙었기루 내 한몫은 하구 죽지야 못하오.》

《우리보구 새없다더니 그 말씀이 정말 새없쉐다.》

김첨지 마누라가 이런 말을 할 때 《누굴 앨 멕일라구 나인들이 예까지 따라왔소.》 하는 퉁명스러운 소리가 논판에서 들려왔다.

《거 누구가?》

김첨지 마누라는 수다를 떨고있던것이 좀 무안한 모양으로 봉군 오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전서방 아니요? 뒤잔등에서 저렇게 동시루 김오르듯 하는거 안 보입네까?》

이때 또 《나인들은 어서 들어들 가라구요.》 하는 주복이의 말이 들렸다. 이편에서는 다시 논판으로 흩어져갔다.

바람결따라 어덴가 먼데서 기연가미연가하게 닭우는 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밤이 꽤 깊은 모양이다. 북쪽 장산뒤에 감추었던 북두칠성의 꼬리가 이제는 완전히 드러나서 동쪽으로 뻗쳐있다. 밤이 깊어갈수록 쓸쓸 내갈기듯 하는 북풍은 더욱 매워지고 벼포기들에는 밑둥에서 이삭까지 바늘끝같은 서리발이 내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서리가 앉았다. 얼굴에 칼(면도)을 대는 풍습이 없던 때라 수염과 눈섭들은 말할것도 없고 더부룩한 솜털끝마다도 성에가 불린 얼굴에서는 물방울이 줄줄이 흘렀다. 신발은 젖고 바지가랭이는 얼어서 버석버석 쓸리는 소리가 나도록 과다졌다.

《야- 그 바람 맵다. 정말 강서리가 오누나.》

《좀 춥긴 해두 매운 바람이 왜놈들을 잘 재와주어서 고마운 일이네.》

《말신신듯 발바닥에만 총없는 신짝을 붙인 맨발때기놈들이 이런 밤엔 더 깡지근해질게라.》

《좌우간 네놈들이 오늘 밤만은 해돋이까지 콜 골아라.》

이제는 퍽 가까와진 성벽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때 주복이는 잠시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앞을 내다보며 《요다음 배미부터는 우리 논이다.》 했다. 반가와서 하는 말이였다.

《몇마지기나 되우?》

옆에서 베던 젊은 중이 물었다.

《일곱마지기는 좀 남구 여덟마지기는 좀 골싹하구 그렇지.》

《그것이 다 전서방네 논이요?》

《내가 부치문 내 논이지.》

《아니, 전서방네 땅인가 말이요?》

《땅이야 우리 조선땅이지.》

《제길, 되겐 어그적씨네.》

《말이야 전서방말이 옳았지. 그래두 일전 농사해서 타작할 때는 팔짱 찌르구 와서 지키다가 절반 실어가는 놈이 있었갔지. 그렇지, 전서방?》

《금년엔 정말 그놈의 꼴 안 보게 돼서 씨원한데.》

주복이는 또 베여나가면서 말을 이었다.

《어느 세월이나 그놈의 꼴을 안 보구 살수 있을래는지.》

《그놈의 꼴이라니 전주놈의 꼴 말이요?》

《그래.》

《안 보기는커녕 이 갈에두 와서 타작을 내래면 어떻걸텐가.》

《어림없는 소리 말라구. 그놈들이 여길 와? 무서워서 이런델 삐치기나 하는데. 정말 와서 또 그따위 수작을 하문 이번엔 다 들어붙어서 농사한 몇천명의 품삯을 내랄테야.》

《그러다보니 전서방이 꽤 의젓한 사람이로군.》

《왜?》

《품삯만 내라구 하구말갔다니 말이야.》

《그래 그것만으루는 씨원치 않단 말인가? 그럼 내 이편네 시원할대루 하지. 이젠 내 의젓 다 팽개쳤네.》

《의젓을 다 팽개쳤다?》

누가 또 이런 말을 해서 다들 웃을 때 《정말이야.》 하는 어둠속에서도 정색한 얼굴이 보이는듯 한 주복이의 음성이였다.

간간이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베여나가는 동안에 한배미가 또 끝났다.

주복이는 다음 논판으로 들어서기 전에 지금 벤 논배미 저편 뚝에 세워두었던 긴 철퇴를 가져다가 이편 뚝에 세워놓고야 또 베기 시작했다. 늙은 봉군도 자기 창대를 가져다가 뚝에 꽂아세웠다.

《오장아주바니가 어떻게 오늘은 군복을 다 벗었소?》

그가 창을 가져다 세우는것을 보고 베기 시작하던 사람중의 누가 이렇게 물었다.

《일하는데 거칫으니 벗었지.》

지금까지 한번도 벗은적이 없었던 벙거지를 벗고 수건만을 쓴 늙은 봉군은 역시 그 색동달이군복도 안 입고 순색무명바지저고리만인 제 모양을 굽어보며 말했다.

《군복은 벗었어두 나야 군총으루 늙어온 사람 아닌가.》

《그러게 누가 아니래나요. 아주바니가 열여섯살부터 입어온 군복이라구 영 안 벗다가 오늘만은 벗을래기 생가죽이라두 벗기는것처럼 아팠을것 같애서 하는 말 아니요.》

《에끼 이 사람, 이제 두구보게.》

《뭐요?》

《뭐요라니, 내 아무리 늙었어두 군총으루 살아온 값을 하구야말테니.》

오장이 이런 말을 할 때 《김첨지네 아주마닌 상게두 여기 있습디까?》하고 주복이가 물었다.

《글쎄? 아까 보구는 못 봤는데. 왜 그러나?》

《왜라니요, 누굴 걱정시킬라구. 이제 만나시거든 여기서 어서 썩 피하라구들 이르시우.》

이때 《모르긴 해두 필시 김첨지령감이 여기 어느 보뚝옆에서 일하는거 아닐가? 그래서 또 맘이 안 뇌여서…》, 《그 말이 맞았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들 웃었다.

베던 논판이 거의다 끝나서 본즉 맞은 뚝에는 긴 환도를 든 사명대사가 서있었다. 그 이상은 더 베지 말라고 했다. 보통강뚝까지는 아직도 논이 여러 배미 있었다. 보통강을 건너서도 성밑까지는 한마장쯤이나 상거가 있다. 그 어간에는 성밑으로 돌아가며 락락장송들이 늘어섰고 송림아래서부터는 보통강기슭까지 조와 피밭들이 련달아 있었다. 그 밭곡식들은 일본군이 평양성을 점령하자부터 돌보는이가 없어서 지금은 고삭을대로 고삭아 이삭이 다 내려지고만 곡초만이 잡초가운데 묻혀있을뿐이였다.

《좀더 비여두 됨즉한데요.》

사명당이 서있는 뚝까지 베여나간 때 누가 물었다. 그러자 저편 논두렁에서 발자국소리가 나며 희미하게 트인 시야안으로 나타난 고충경이가 《저쪽에서두 그만두구 일손을 뗐습니다.》 한다.

《여기 남은것은 만일의 경우에는 불을 질러야 할게요.》

사명당은 일군들이 돌아서기를 재촉했다. 이때는 좌우옆의 논판들에서도 낫소리가 그치고 우뚝우뚝 일어서 돌아서는 사람들의 모양이 희끄무레하게 바라뵈였다. 또 이때 맞은편에서 한 젊은 중이 나타났다. 사명대사앞으로 가까이 온 그는 바지가랭이를 무릎우에까지 걷어올린 맨발과 정갱이에 감탕이 묻어있었다. 보통강을 건너온것이다.

《아직두 별일은 없는것 같습니다. 칠성문은 그냥 닫혀있구요.》

그는 또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온 일이 끝난셈이다. 절반 일이 무사히 끝난것이다. 돌아선 일군들은 논밭에 남은 벼단을 몇단씩 들고 남아있는 일터로 향해갔다.

이제부터는 바람을 안고 나가는것이 한가지 더 힘드는 조건이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쪽으로 다가가며 조심조심히 해온 일에 비하면 맘대로 일손을 다그칠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히려 일이 헐할것이였다. 저마다 뒤꽁무니에 여벌로 찔렀던 드는 낫을 갈아쥔 손에 침을 뱉아든 일군들은 《자, 다그치자.》 하며 기세좋게 숫논판으로 들어섰다. 한배미가 끝나면 다음 배미로 베여나갈수록 나르는 품이 덜려서 베고 묶는 사람을 늘일수 있었으므로 일은 더욱 빨랐다.

벌써 몇회째 우는 닭의 소리가 또 들린다. 한걸음씩이라도 가까와지는 장리 강복산 넘은쪽에서 나는 모양인 닭의 소리는 바람세따라 더욱 분명히 들렸다.

《닭소리는 연방 들리는데두 몇홰째 우는 닭인지는 모르갔군.》

《정말 그런데. 집에서 잘 때는 잔깐이 있어서 짐작이 가는데 뜬눈으로 새우자니 더 짐작을 모르갔는데.》

《아마 넉넉히 4경(새벽 2시부터 4시까지)은 지났을게요.》

《4경이 뭐야. 4경은 초저녁으루 지났갔네.》

《여러말할것없이 저 〈모재기〉를 보게나.》

《아이꼬, 정말 4경은 지난지 오랬갔는데.》

사람들은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별수효가 늘었다. 그중의 동북쪽에서 나타나 서남쪽으로 옮아가는 모재기별이 무슨 빛나는 씨앗을 넣은 자그마한 구럭같은 모양으로 하늘 한가운데서 반짝이고있었다.

《그러다보니 얼마 안 있으면 밝을거 아닌가?》

《밝기야 긴긴밤이 어느새 밝을라구.》

《그새 얼마씩들이나 비였을가?》

《밤일이 돼서 어떨가 했어두 정작 하구보니 낮 하루일은 든든히들 했을것 같소.》

《좌우간 초경부터 시작해서 참수없이 한 일 아닌가.》

이때는 베고 묶는 사람의 수가 나르는 사람보다 더 많았다.

《다 비나 못 비나 날만 밝으면 못할 일인데 이왕이면 다 비구 끝내게 어서 다과칩시다.》

《날은 채 안 밝더라두 밝을 림박해서는 깜깜해서 더 힘들게요. 정말 이제 다그쳐야지.》

《더 깜깜해서라니? 올빼미새벽이 되면 말이요?》

《올빼미새벽은 또 뭔가?》

《밤눈 잘 보는 올빼미가 더 잘 보게 깜깜해진 때 말이야. 밝아올무렵에 더 어둡잖아?》

《올빼미새벽 아니라 아무 새벽이라두 일없네. 밤새와 일하는 동안에 이젠 우리가 올빼미 다됐는데 걱정이 뭔가?》

이런 이야기중에 더욱더 신바람이 나서 후려나가는 낫소리가 사처에서 들렸다.

칠성문밖 앞벌에서는 장산이, 보통문밖 앞벌에서는 강복산과 서장대가, 그 형태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그 산들은 한걸음한걸음 마주 오는것 같았다. 이제는 남은 일거리가 확실히 줌안에 들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입밖에 내지는 않으면서 속으로는 《야아!》 소리가 나갈만치 벅찬 일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벌써 벅찬 한고비를 지나고도 남았다. 앞이 빤히 내다보이는 일거리가 남았을뿐이다. 일군들의 기세는 더욱 높았다. 어떨가 했던 밤일이지만 해갈수록 일은 눈에 익고 손에 올랐다. 한발자국씩 내짚으며 낫으로 걸어당기는 벼포기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한줌내기고 왼손으로 받아쥔 그 벼포기를 낫은 또 어느새 상큼 들어내듯이 베였다. 그때마다 꺼멓게 드러나는 논바닥과의 대조로 흰 벼그루들은 다음 발자국을 비쳐주듯이 빛나뵈였다. 논판은 언뜻언뜻 들장이 났다. 베는족족 묶고 묶는대로 날라가서 이때까지 보통벌논판을 덮었던 벼포기가 지금은 꼬리를 물고 뒤산고개들을 넘어가는듯 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한배미가 끝나서 다음 배미로 넘어설 때는 서로 마주보고 웃기도 했다. 얼굴들은 모두 서벅서벅한 살얼음에 덮인듯이 성에가 불렸다. 수염이 있는 사람들은 입언저리와 턱밑에서 고드름들을 뜯어냈다. 몸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올랐다. 훗훗이 풍기는 피차의 몸김이 어느때보다도 더 정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네!》, 《우리 겨레!》, 《다 한집안!》 이런 느껴움으로 마음이 더 후더워졌다.

안고나가는 북풍은 차차 더 매워졌다. 밤이 깊어갈수록 추위는 뼈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밤이 좀더 길어주었으면 했다. 다 벨 때까지 새벽이 참아주었으면 했다. 일손들을 더욱 빨리 놀렸다. 자연 이야기도 적어졌다.

넓은 논벌에서는 오직 드는 낫소리만이 나는듯 할 때 어데선가 둥둥둥 울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렸다. 주춤 일손을 멈춘 사람들은 귀를 재였다. 역시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분명했다. 어둠속에서도 번쩍이게 빛이 나는 눈들은 잡약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머리에는 이미 봉화가 올라있었다.

《종내 일이 터지구야마는구나!》

일손을 놓고 허리를 펴고 일어선 사람들중에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일이 터지고야말았다. 보통문쪽에서 몰방으로 터지는 조총소리가 벌판을 울렸다. 여기저기서 급하게 달려가고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소란해졌다.

《덤비지들 마소.》

《왜적들이 쓸어나온대두 여기까지는 아직 멀었소.》

《그런데 낫만 가진 사람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들 가우.》

어둠속을 달려가는 사람들의 웨치는 소리였다. 이제는 북소리가 멎었다. 잡약산의 봉화도 꺼졌다. 그리고는 또 어느 순간에 깨질지 모를 침묵이 왔다. 긴장한 사람들의 귀에는 갑자기 기세를 올린듯 한 바람소리만이 들린다. 그리고 물소리였다. 크고작은 보도랑에서 발을 제껴짚고 기다렸던듯 한 물줄기들이 일시에 터져 흘러가기 시작한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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