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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회


49. 군량이 문제


이해 임진년 겨울은 류달리 혹독히 춥기도 했으려니와 그 추위가 또 일찍부터 시작되였다. 문헌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일찌기 상강이 있었거나 한것은 아니지만 8월 하순부터 추위는 시작되였다. 예로부터 일본인들이 조선의 추위를 형용하는 말로서 《조선서는 겨울에 술을 사러 가는데 채괭이를 가지고 간다.》고 하는것은 임진년추위에 혼나보고 하는 말이다.

손자병서에는 《하불정남 동불정북》이라는 말이 있다. 《여름에는 남쪽으로 싸우러 가지 말것이고 겨울에는 북방으로 쳐들어가지 말라.》는것이다. 즉 군사를 일으켜 멀리 원정을 하는데는 가는 곳을 따라서 덥고 추운 시기를 가려야 한다는것이다. 일본군이 지난 4월에 부산에 상륙한것은 제 시기를 가려서 한 일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선봉부대인 소서행장군이 평양성을 점령한이래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하고 묵새기는 동안에 추위가 닥쳐온것이다. 일본기록들에 의하면 이때 풍신수길은 가등청정에게 편지로써 다음과 같이 문의한 일이 있다. 《조선의 추위는 대단한 모양인데 그런 동한을 막을 준비는 어떻게 할것인가?》 말하자면 자기네 군사가 추위에 약한것은 물론 그런데다 또 그들의 옷이 혹독한 추위를 막을만 한것이 못된다는것을 잘 알고 하는 걱정이였다. 이에 대한 가등청정의 회답은 래년 봄에 행동할 작전계획을 늘어놓고 그 작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군사가 필요하니 속히 증원군을 보내도록 하는것이 무엇보다도 긴급한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추위가 하도 혹독하므로 래년 봄에나 다시 행동하게 되리라는것을 은연중에 표시한것이다. 비단 가등청정뿐아니라 소서행장의 의사 역시 그랬다는것을 우리는 알수 있다.

이무렵 명나라에서 보낸 심유경이가 8월 하순경에 평양부근에 당도했다. 그는 자기 사람을 시켜서 소서행장에게 한번 만나보자는 편지를 냈다. 소서행장은 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말하기보다도 소서행장은 명나라사신 심유경을 반갑게 맞이했다는것이 더 정확할것이였다. 불시로 강복산밑에다 군막을 치고 기치창검을 라렬하고 의장병을 늘어세우는 등으로 우의를 갖춘 소서행장은 평의지, 현소 등 막료들을 대동하고 나가서 심유경을 사신에 대한 례로써 영접했다. 명나라에서 보낸 사람이기는 하나 일개 유격이라는 하급관료에 지나지 않는 심유경은 단 2~3명의 부하를 거느렸을뿐인 초초한 형색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서행장은 륭숭한 례로써 그를 영접했을뿐아니라 심유경이가 내놓은 조건을 두말않고 승낙했던것이다.

그 조건이라는것은 심유경자신이 명나라조정에 가서 강화조건을 가지고 다시 평양으로 올 때까지 50일간을 위한하여 그동안에는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서북쪽으로 십리밖을 더 나가지 말것이며 이와 동시에 조선군사도 그안으로 들어가지 않을것 등이였다.

소서행장이 이러한 조건을 두말없이 승낙한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없을리가 없는것이다. 바로 얼마전까지도 조선조정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이제 수륙병진하여 쳐들어갈터이니 《대왕은 장차 어데로 가려는가?》 하며 협박공갈을 해왔고 저희 장졸들에게는 오래지 않아서 《압록강물을 마시게 되리라.》고 호언장담을 해온 소서행장이였다. 그러나 그런 협박공갈과 호언장담이 결국은 빈소리가 되고말리라는것을 누구보다도 소서행장자신이 더 잘 알았다. 수륙병진할 조건이 못된다는것은 이미 루루이 말한바라 더 말할것 없고 벌써부터 닥쳐오는 추위에 반벌거숭이다싶이 한 군사를 가지고는 이상 더 북으로 진격할수는 없었다. 탕탕 큰소리는 해놓고… 그래서 말바로 진퇴량난이였던 처지에 뜻밖에 나타난 명나라사신이 그런 조건을 가져온것을 소서행장으로서는 무척 다행하고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소서행장에게는 그것이 일시적인 휴전조건이라기보다도 하마 땅에 떨어질번 한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건이였던것이다. 소서행장으로서는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던 그런 조건을 접수하는데 두말이 없었을밖에…

한편 의주 행재소의 왕과 조정대신들의 초조감은 다가오는 추위를 앞두고 더욱더 절박했다. 이미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언젠가 왕과 윤두수와의 대화중에서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이 어째서 더 진출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 왜적이 아마 겁이 나서 더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라는 윤두수의 말에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왜적들은 필시 어떤 간특한 계책이 있어서 가을선기가 나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닐가?》 하는 왕의 의구를 풀거나 반박할만 한 근거나 조건이 없었다.

《왜적이 겁이 나서…》를 운운한 윤두수의 말부터가 어떤 정보에 근거한것이 아니라 그저 한낱 주먹구구적인 억측에 불과한것이였다.

이같이 적의 정세를 모르고있는 처지에서는 암중모색이랄것도 없이 그저 《적이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전전긍긍한 불안만이 앞서게 된다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더우기 초조한것은 벌써부터 해오는 명나라에 대한 청병교섭이 지지부진한것이였다.

여기서 일일이 다 밝힐수는 없고 그 경위를 대강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정에서는 벌써부터 일본이 장차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기미가 보인다는것을 명나라조정에 알린적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그것을 믿지 않을뿐아니라 도리여 조선을 의심했다. 그 일례로서 임진년 전해인 신묘년에 조선조정에서는 김응남으로 하여금 그런 사태를 알리기 위하여 명나라로 보낸 일이 있었다. 일행이 산해관에 들어서자 명나라사람들은 길가에서 구경하던 아녀자들까지도 《일본과 내통한 조선사람이 무엇하러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가.》고 힐난하며 야단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풍신수길은 조선과 명나라가 서로 돕고 협력하지 못하도록 리간책을 썼던것이다. 풍신수길은 명나라상인들을 리용했다. 명나라에서 류꾸를 거쳐 일본으로 래왕하는 약재상 허의준이라는자를 비롯해서 여러 상인들에게 일본이 장차 조선의 길을 빌어서 명나라로 쳐들어가는데는 조선이 길잡이로 나선다는것을 명나라민간에 퍼뜨리는 한편 명나라조정에까지도 알리도록 하고 뢰물도 주었던것이다. 풍신수길의 간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진란이 시작되자부터 말바로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드는 조선사신들의 청병교섭에 용이히 응하려고 안했다. 물론 이외에도 명나라에서는 또 다른 중대한 사정이 있기도 했었다. 바로 얼마전에 자국내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였다. 봉건왕조를 뒤흔들만치 거창한 농민반란에 직면했던 명나라조정에서는 그것을 진압하기에 전력을 기울이다싶이 해온만치 금시 또 국외로 군사를 동원한다는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사세가 그런만치 여러차례 조선사신이 들어간 때마다 명나라조정에서는 갑론을박으로 물의가 분분할뿐이였다. 마침내 조선사태의 실정을 알아볼겸 첫 착수로 소부대의 원군을 파견했던것이 조승훈의 3 500여명의 군사였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조승훈은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조승훈은 자기의 패전을 변명하는 구실로서 이때까지 떠돌던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보고를 했다. 즉 조선이 일본군과 내응하는것이 사실이라는듯 한 인상을 주었다. 명나라조야의 여론은 더욱 조선에 불리해졌다. 조선조정에서는 다시 리덕형을 보냈다. 리덕형은 우리 나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들어 그 여론이 부당함을 명나라조정에 밝히였다. 명나라에서는 다시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황응양이라는 사신을 의주로 보냈다. 조선조정에서는 명나라사신을 대신들이 압록강중류에까지 나가서 맞았다. 이때 리항복이가 작년에 일본통신사가 가져온 풍신수길의 소위 《국서》라는것을 내놓았다. 그 《국서》에는 례의 《직욕초입대명국》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명나라사신 황응양은 《이런 문건을 왜 이제야 내놓는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말하자면 이때까지의 의심이 저으기 풀린것이다. 이와 아울러 조선에 원군을 보낼데 대한 명나라조야의 여론을 움직이는데는 명나라대신 설번의 주장이 큰 힘이 되였던것이다.

그는 자기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이번 사변을 당하여 깊이 근심할자는 조선이기보다 오히려 우리 명나라이리라.》고 썼다. 즉 2백년래로 복건성과 절강성 등지에는 수시로 왜구의 침해를 받았으나 명나라 서울의 직통로인 료양지방과 천진이 이때까지 무사해온것은 오로지 조선이 있기때문이였다, 이제 만일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건느게 된다면 료양이 위태로울것이며 료양이 위태로우면 명나라 서울을 안보하기 어려울것이다, 이럼으로써 조선과 중국은 입술과 이와의 관계라고 할것이니 만약 입술이 없어진다면 이가 찰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에 대한 왜적의 침략을 명나라로서는 수수방관할수 없다는것이 설번의 주장이였다.

마침내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청병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곡절을 거쳐 조선조정에서는 오래동안 애써온 청병교섭의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이에 따르는 또 한가지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군량문제였다.

조선조정의 청병교섭에 응한 명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출하였다.

즉 조선에 나가는 명나라군사의 군량을 압록강이북까지는 명나라에서 담당할것이나 압록강을 건너서부터는 조선에서 책임질것, 그러기 위해서는 수만명 군사가 석달동안 먹을 군량을 갖추어놓으라는것이였다.

조선조정에서는 물론 그 조건을 승낙했다. 그러나 그만한 군량이 없었다. 후원군이 하루속히 나오기를 초조히 기다리기는 하면서 정작 나오면 그들에게 줄 군량의 준비가 없었다.

군량때문에 그들은 또 얼마나 초조했던가.

이 역시 8월달, 명나라의 동가성쓰는 총병과 후원군출병절차에 대해서 의논할 때 조선조정을 대표한 공조판서 한응인이 《대체 군사의 수효는 얼마나 되며 또 어떤 장수들이 나오는가?》 하고 물었을 때 동총병은 《아마 십만쯤은 되리라.》고 대답했다. 한응인은 입을 딱 벌렸다.

《지금 평안도일대가 탕패하고 량식이 고갈했으므로 겨우 그러모을수 있는것이 불과 오륙천명 군사의 반달량식이 되나마나할 모양인즉 그 이상의 군사가 온다면 지탱하기 힘들다.》고 한응인은 말했다.

그 말에 동총병은 《군사를 일으키는데는 먼저 성세를 올려야 하는 법이라 그래서 십만대군이라고 하지만 실지 수효는 그때 봐서 더 많을수도 있고 적을수도 있지 않느냐.》 하며 웃었다.

《지금 우리 조정에서 나를 보낸것은…》 하고 한응인이 또 말했다.

《당신네 나라에는 전부터 왜구들과 싸워온 경험이 많은 남방(복건, 절강성을 말함.)군사들이 있는만치 그 군사를 6백명쯤만 먼저 보내서 당장 위급한것을 막도록 청하기 위한것이라 되도록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처음에는 청병교섭이 안돼서 걱정, 다음에는 보낸다는 후원군이 너무 엄청난 대군이여서 걱정, 의주 행재소에서 이런 걱정들을 하고있는중에 세월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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