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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 회


48. 한하늘을 이고 같이 살수 없는자


바로 이때 서쪽 집모퉁이로부터 고충경이와 차돌이가 나타났다. 거리 한가운데 모여섰던 사람들의 눈은 곧 두사람에게로 쏠렸다. 일왈 갓에 갓모를 받쳐쓰고 좀 젖기는 했으나 역시 조촐한 흰 수목두루막을 입은 고충경의 활과 전통이 우선 눈에 뜨이는것이였다. 그리고 또 총각이 길바닥에 끌듯이 긴 모가지를 늘어잡고 오는 큰 기러기였다.

《여보소, 당신네는 이재 조총소리 못 들었소?》

《여기서는 그 소리에 혹시 왜놈들이 아닌가 놀랬던차이요.》

몇사람이 그들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재 그 소린 내가 이걸 잡느라구 쏜거웨다.》

기러기를 쳐들어보이며 차돌이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조총은 여기 있다는듯이 자루에 넣어 어깨에 걸친 조총을 한번 추석거린 그는 그러다보니 퍽 미안하게 됐다는 내색으로 고충경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고충경은 고개를 돌려서 옆집 문턱에 걸터있는자를 바라보고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낸 차돌이는 고충경의 소매를 건드리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 사람이요. 김감역의 아들이요. 갑손이를 대신 내보낸것이 저자요.》

고충경은 한번 고개를 끄덕였을뿐 역시 딴눈을 팔듯이 외면하고 앉아있는 그자를 바라보며 제 나비수염을 몇번 감빨았다.

이때 김감역의 아들 김순량이도 고충경을 알아보았다. 아니, 제편에서 먼저 알아본 김순량이는 우선 (망신살이 뻗치누라구 하필 이런 때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순간에는 그런 생각보다도 가슴이 선뜩했다.

(저 활과 전통은…)

김순량은 속으로 떨리기까지도 했다. 고충경이가 활을 잘 쏜다는것은 전부터 아는 일이다. 또 지난여름에는 대동강에서 보란듯이 제 활재주를 내놓고 일본군사의 조총과 한판 겨루었다는 소문까지도 들었다. 그뿐으로 그후에는 통 소식을 몰랐던 고충경이가 하필 이런 때에 활과 전통을 들고 나타났다. 그뿐아니라 같이 온 총각놈은 기러기를 쏘아잡았노라는 조총을 메고 왔다. 심상치 않은 패거리다. 착실한 장사치고 또 꼬장꼬장한 선비이기도 하던 고충경이가 홀연 심상치 않은 패당으로 나타난것이다.

지금의 총소리는 일본군사가 쏜것이 아니였던것이 판명되였다. 일본군사가 오는줄 알고 달려갔던 왜놈앞잡이 김삼근이는 그달음으로 내뺐거나 어데 가 숨은 모양이다. 동정을 살피러 갔던 사람들은 일본군사도 안 보이고 패랭이 쓴자도 없어졌다고 했다.

김순량이는 김삼근이와 같이 달아나지 않았던것을 후회했다.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행여나 하기도 하고 또 체면에 그럴수 없기도 했다. 서뿔리 달아나려는 기색을 뵈였다가 붙들리면 더 창피를 당할것 같기도 했다. 한편 또 설마한들 이 촌무지렁이들이 언감생심 사람을 다치기야 하랴, 고작 탐나는 소금이나 빼앗구말겠지 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때에 고충경이가 심상치 않은 패당으로 나타난것이다.

(이제라두 반가운척 하구 흔연히 인사를 할가?)

김순량이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는 심상치 않은 패당일수록 그 덕을 볼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무척 낯간지러운 일이지만 아니, 그 무슨 혼담과 관련한 일이 있다고도 할 고충경이였다. 이편에서 한때 고충경을 얕잡아서 그에게 체면이 깎일 혼담을 비쳐보았던 일이 있었다. 그만 일이 무슨 원쑤치부할 일이야 되는가? 이렇게 되살려 생각하는 김순량이는 어떻든 이전부터 피차 잘 아는 처지가 아닌가, 그래서 거래까지도 터서 이편의 장리변을 쓰기도 했던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망설이면서도 우선 고충경이앞에서 초췌한 태도를 뵈여서는 안되리라는 생각에 다시 문턱에 걸터앉아 책상다리를 하고있었다.

이때 고충경이로서는 김순량이가 외면하고있는것이 다행이였다. 제편에서 인사를 하면 모른척 할수도 없었다. 김순량이가 눈에 띄였을 때 한순간 무춤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처지로서는 그만한것쯤은 너무 한가한 생각이라 이미 잊어버린지도 오랬다. 그래서 옆에서 부추기듯 하는 차돌이의 말에 한번 《고얀놈같으니!》 했을뿐 그런 《고얀놈》김순량이보다도 지금은 무슨 긴한 말이라도 있는듯 앞을 막아선 사람들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

《당신네는 누구시오?》

《보매에 당신네가, 혹시나해서 묻는 말인데 누구시오?》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

차돌이는 물론 고충경이도 그렇게 묻는 말에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럴게 아니라 우리가 먼저 여기 일부터 말하는것이 좋을것 같군.》

채수염늙은이가 말했다.

《그 말이 옳쉐다.》

《여기서는 방금 이런 일이 생겼소.》

이렇게 시작한 말로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일을 대강 이야기했다. 그들의 말에 김순량을 다시한번 훑어본 고충경은 《우리는 서산대사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올시다.》 이런 대답을 했다.

《우리 소견에두 그 비슷이 짐작이 가서 물었드랬소.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하는것이 좋갔소?》

《정 마침 잘들 오셨소.》

《좌우간 맡아서 처결해주시우.》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자 불쑥 《고생원!》 하고 김순량이가 고충경이를 불렀다.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꺼내자부터 혹은 고충경이를 마주보기도 하고 혹은 왼고개를 틀기도 하던 김가는 문득 어데서 용기가 솟기라도 한듯이 고충경이를 찾고 《이 사람네 말이 다 그대루는 아니오마는 내 일이 좀 수통스럽게는 됐소.》 하며 일어서는 그 깔끔한 얼굴에는 어색하나마 빙그레한 웃음이 비끼기도 했다.

《…》

그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고충경은 여러 사람의 말을 또 기다리듯이 둘러볼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서루 아는 사람인 모양이로군.》

《한성안사람이면 그렇기두 쉽지.》

《그러구보니 일이 좀 공교로운데.》

김순량이가 문득 생기를 내서 고충경에게 수작을 붙이는것을 본 사람들중에는 뒤쪽에서 자기네끼리 수군거리기도 했다. 혹은 하회가 어떻게 될가 하는 눈으로 두사람을 번갈아 보는이도 있었다.

《고생원이, 소금은 댁이 맡아서 좋두룩 처분하시우. 그렇게 해주면 나는 손을 씻구말겠소.》

다시 말을 시작한 김순량이는 저도 토지방아래로 내려서려다가 마침 또 비가 온다는 핑게로 다시 문턱에 걸터앉았다. 정말 비가 또 부실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사람네는 날 보구 여북치 않게 말을 합디다만 난들 할수 없는 사정이 있어 그랬지 뭐이 안타까와서 이 소금을 꼭 성안으루 가져가야 할리가 있겠소.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여기서 고생원을 만난것이 나루서는 퍽 잘된 일이요. 소금일랑은 고생원이 맡으시우. 이 짐군들을 시켜서 소용되는데까지 가져가두 좋쉐다.》

《…》

고충경이는 이번에도 그자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새까만 나비수염끝이 약간 흔들리게 한쪽입귀에 엷은 미소를 띠운 낯으로 역시 그들의 의향을 묻듯이 앞의 사람들을 둘러볼뿐이였다. 그들 역시 고충경이를 마주볼뿐 별다른 의향이 없는듯 입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일이 그만그만하게 끝날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때 《아이구, 난 무섭쉐다. 이재 난 치가 떨렸소.》 하고 문득 이같이 터져나오는 말소리가 모여선 사람들의 등뒤에서 났다. 어린 손자를 업었던 아까의 그 할머니였다. 그 말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이재 저 사람의 눈 못 봤소? 저 눈! 저 얄궂은 눈 말이요.》

이렇게 웨치면서 아직도 문턱에 걸터앉아있는 김순량의 눈을 손가락질해보이는 할머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조총소리가 났을 때 말이요, 그 소리에 우리는 다 질겁을 했는데 저 사람만은 〈옳다구나!〉 하는지 반가운 낯색으루 눈웃음을 치지 않소! 나는 겁이 많은 핼미가 돼서 그런지 그 얄궂은 삵의 웃음을 보구는 오싹 소름이 끼쳤소.》

실로 떨리는 소리로 이렇게 말한 할머니는 숨을 돌려가지고 또 말을 이었다.

《왜놈 하면 우리 조선사람은 너나없이 다 치를 떠는데 저 사람만은 되려 그놈들이 온다는 소리에 반색을 하니 저런 놈하구야 어떻게 같은 하늘을 이구 살갔소. 아이구, 세상에… 안되갔쉐다. 난 그만 소름이 끼치구 오금이 재렸소.》

말을 마친 할머니는 다시금 몸서리가 치는듯 설레설레 채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 말씀 옳쉐다. 나두 그런 내색을 보구 저런 죽일놈 했드랬소.》

로파의 등뒤에서 상투큰 농군이 이렇게 말했다.

《듣구보니 정말 그랬소.》

《이자가 순순히 소금을 내놓는다구 그냥 놔보내선 안되갔소.》

《소금이 대사요? 저런자가 왜놈한테 소금만 날라갔겠소? 필경 왜놈앞으루 렴탐질두 했을거요.》

《하다뿐이요.》

《저놈을 어떡한다?》

《어떡하기는… 당장 끌어내려.》

다시 격앙한 사람들이 제각기 웨치는중에 몇사람이 성큼성큼 토지방으로 올라섰다. 그중에 차돌이가 재빠르게 먼저 올라갔다. 낯빛이 사색이 되게 파랗게 질려가지고도 《너희가 나를 어찔테냐.》 하는듯이 여전히 책상다리를 하고 걸터앉았던 김가가 사람들의 손이 제 몸에 닿게 되자 꼬꾸라지듯이 대돌아래로 뛰여내렸다.

《고생원 여보시우, 이 나를 욕을 좀 면하게 해주시우.》

《욕? 네놈 몹시 점잖다. 욕만 뵈구말줄 아니? 우린 막바우가 돼서 너같은 놈은 욕만 뵈구말지 않는다. 죽일놈같으니.》

김가의 말에 고충경이가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한 장정이 그자의 갓모를 덮쳐서 으스러진 모자속의 상투를 꺼들며 웨쳤다. 김가는 락수가 고인 진창에 펄썩 주저앉았다.

《고공, 고생원, 사람 하나 살리시우. 제발 이번 한번만 살려주시우.》

김가는 자기를 굽어보는 고충경의 정갱이를 끌어안고 쳐다보면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놈이 고생원한테 못할짓두 했소. 내가 그걸 모르지 않소. 백번 사죄하리다. 아니, 당신의 분이 풀릴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리다. 내 손으루 내 해내비 굴총이라두 하갔소. 고생원, 나를, 이놈을 한번만 용서하시우. 살려주시우. 이 사람네두 고생원말씀이면 들을것 아니요. 사람 하나 살리시우. 제발, 제발…》

김가를 굽어보던 고충경은 한손으로 만지작거리던 갓끈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가로흔들었다.

《댁이 지금 이런 마당에서 구태여 그런 사소한 지난 일을 말하잘건 뭐요. 그만 일이 설사 사혐이 된다기루서니 이 마당에서 그런 개인의 일이 하상 무슨 상관이겠소.》

고충경은 차근차근 타이르듯 하는 말투로 말을 시작했다.

《지금 이분들의 댁에 대한 론죄가 그런 무슨 사혐으로 하는 일인가. 여기 이분들은 아마 몰라두 댁하구는 아무런 상관두 없이 다 생소한분들일게요. 그랬더래두 지금 저 아주머니말씀 한가지만 하더래두 이분네만 아니라 아마 온 조선사람의 격분을 살만 한 일이 아니겠소.》

《고생원, 그것이 다 미련한탓이웨다. 그저 욕을 면할가 해서… 아니, 그저 살 욕심에 그랬던거요. 고생원말씀 한마디면 이분들두 날 용서할거 아니갔소. 이번 한번만…》

애걸하는 김가는 마침 비껴오는 비발에 얼굴에서는 물방울이 줄기져흐르면서도 입속은 타는 모양으로 혀도 잘 돌지 않는 어룰한 말이였다.

《댁의 죄상은 이번만이 아니요. 여기 론죄할 사람이 하나 또 있소.》

또 이렇게 말한 고충경은 차돌이를 돌아보았다. 차돌이는 지난 5월 열하루날 밤에 영명사앞에서 만났던 갑손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어데서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더듬거렸으나 차차 열기를 띠게 된 차돌이는 제 말에 저도 흥분했다.

《이렇게 갑손이의 억울했던 이야기를 들은것은 나만이 아니드랬소. 그 자리에는 임욱경별장님두 있었소. 임욱경별장님은 저런 고얀놈두 있나 했소. 또 서산대사님두 있었소. 서산대사가 지금 이놈을 보았으면 아마 그 로장두 용서할라구 안할거요.》

차돌이는 글썽해진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을 이었다.

《이놈이 이런 놈이요. 이따위 놈이요. 제가 살기 위해서는 별의별 못할짓 없이 다할 놈이요.》

《그러다보니 왜놈하구 한몽치루 때려죽일 놈이댔구나.》

사람들은 다시 김가에게로 달려들었다.

《우리 자식새끼들이랑 동생들은 다 군총으루 나갔다. 왜적과 싸우다 많이 죽기두 했다.》

《그런데 네놈은 죽을고에다 어린 사람을 밀어넣구 빠져나와서 왜놈앞에서 장살 하구 렴탐질을 해? 이 죽일놈같으니.》

《일어서라, 이놈아!》

달려든 사람들은 김가의 상투를 꺼들어 일으켜세웠다.

《아까 먼저 달아났다는 놈은 어떤잔가?》

고충경이가 물었다. 반얼혼이 나간 김가는 미처 대답을 못했다. 고충경이가 다시 물어서야 김가는 입이 언 소리로 대답했다.

《그놈은 왜군이 대마도에서부터 통사루 데려온 김삼근이라는 왜놈앞잡이올시다. 그놈은 제 에미두, 제 처권두 다 왜녀라구 합디다.》

《이놈아, 너는? 넌 어느 틈으루 나온 놈이가?》

《너두 그 왜놈앞잡이나 다름없는 놈인데 네 에미, 네 계집두 왜녀가 아니드냐?》

사람들은 군침을 뱉듯이 말했다.

《제 실정을 말씀하자면 저는 못난것이 그의 심부름을 한셈밖에 안됩니다. 그놈은 남도사투리나마 우리 말은 통 모르다싶이 서툰 놈인데 여기 사람과는 한두마디만 해두 왜놈의 개라는것이 탄로될거라구 저를 굳이 끌길래… 저는 또 저지른 작죄두 있구 해서… 실정을 말씀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저 총각의 말대루 제가 그렇게 군역을 피해가지구두 또 뒤이어 나오는 군총초모사를 피해다니느라구 맘을 못 놓구 지나던차에 왜군이 자주 출몰한다는 대동강근처가 나을것 같애서 그쪽으루 피해가있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던것이올시다.》

반 제정신이 없다싶이 묻지도 않는 말까지 늘어놓기 시작한 김가의 말에는 잔소리가 자꾸 묻어올랐고 그러다가는 또 새 사실이 나오고 해서 종당은 그자의 늙은 부모와 처자식들까지도 지금은 평양성내에서 산다는것이 판명되였다. 말하자면 김삼근이가 물어들인 김순량이를 저희 앞잡이로 리용하려는 일본군은 우선 김순량이를 붙들어맬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자의 살붙이들을 인질로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소서행장은 김순량이를 재물로 달래기도 하고 협박도 해서 마침내 그자의 권속들을 배로 실어다가 평양성내에 억류해두었던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흔들었다. 더 두고보잘 여지가 없다는 뜻이였다.

《그래 지금 평양성내에는 당신네 권속들외에 또 다른 사람은 없소?》

고충경이가 물었다.

《있습니다. 많지는 않아두 더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소? 좀 압시다.》

《아시는지? 저 계월향이네 모녀가 있습니다.》

《계월향이… 기생 말이요? 그 기생은 본시 평양을 떠나지 않았던가?》

《떠나기는 떠났는데 세간재물을 놓구 가기가 아까와서 바재다가 맨 나종에 늦게 떠났는데 북촌으루 가노라고 가던 길에 선연동(지금의 고노골)근처에서 왜군한테 붙들려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구는 또 어떤 사람들이 있소?》

또 이렇게 묻는 고충경은 한끝 안되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같이 주고받는 말이 길어질수록 평시에 만나서 인사수작을 하던 말투가 나오게 되는데 그럴수록 고충경은 자기가 사뜻한 위인이 되는것 같아서 스스로 염증이 나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수작을 하는 동안에 김순량의 얼굴에는 확실히 저퍼하는 기색이 덜리고 그 말소리도 차차 순편해졌다.

《그밖에는 더러는 김삼근이놈이 꾀여가기두 하구 또 더러는 왜군들이 물아래루 배를 타구 다니면서 남촌 등지에서 붙들어오기두 한 농군들이 수십명 됩니다. 또 간혹 영명사에 남아있는 늙은 중들이 드나듭니다.》

김순량은 순순히 이런 대답을 하면서 흉하게 으스러진 갓을 벗어버리고 망건우에 수건을 쓰기도 했다.

《왜적들이 그렇게 우리 사람들을 붙들어들이는 까닭은 어데 있는것 같습디까.》

고충경은 이런것을 또 물었다. 이때는 다시 오기 시작한 비발이 꽤 굵어졌다. 그러나 고충경은 활과 전통을 토지방에 올려놓았을뿐 저자신이 비를 피하려고는 안했다.

《자세한것은 몰라두 이런 모양같습디다.》

김순량의 말을 들으면 일본군은 우리 사람들을 걸리는대로 붙들어들이기 위주였다. 그 까닭은 주로 보통벌의 곡식을 노리는데 있는것 같다고 김순량이는 말했다.

평양성내의 왜군 역시 보통벌의 추수기가 오기를 기다리고있다는것이다. 평양성내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군량이 남아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놈들이 언제까지나 평양성에 머물러있을 작정인지 혹은 더 많은 증원군이 쓸어올 예정인지 그런것까지는 모르나 어쨌든 더 많은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바로 성밖인 보통벌의 곡식을 거둬들일 준비를 하고있었다. 왜놈들은 나무를 작벌해서 숯을 굽고 대장간을 차렸다. 본시는 병장기를 만들고 수리하기 위해서 저희 나라에서 이운해온 기구와 대장쟁이들이였다.

그러나 지금 하는 일은 병장기보다도 주로 낫을 만든다는것이다. 그런것으로 보아서 우리 사람들을 많이 붙들어들이려는것 역시 보통벌추수때에 쓰려는것 같다고 했다.

이러한 김순량의 말에 고충경은 놀랐다. 고충경이뿐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저런?》 하는 눈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그러나 한편 또 고충경이는 내심으로 웃기도 했다. 지금의 왜놈들이 그 얼마나 궁지에 처해있는가 하는것을 가히 짐작할수 있는 일이기때문이였다. 본시는 이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삼키고 그 온 백성을 저희 무릎앞에 꿇리고 호령해볼 야심으로써 저희 나라를 통 기울이다싶이 떨쳐나온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의 그들은 고작 한 성시를 차지하고있는 저희 군사의 군량을 판비하는데도 호령으로 모아들이거나 누구를 시킬수도 없는것이다. 그만치 그들의 위령이라는것은 이 땅에서는 설수가 없는것이다.

《지금 왜군진중에는 당신과 저 김삼근인가 하는 왜놈의 개외에 또 누가 왜적앞으로 나서서 민간으로 다니는자가 있소?》

고충경이가 또 이런 말을 묻자 《없습니다.》 하고 대답한 김가는 그 말에 대한 대답보다도 제 변명이 더 긴한 모양이였다.

《지금 고생원의 말씀은 제한테는 좀 과하신 말씀이요. 이 나를 그 개자식과 같이 왜놈앞으루 나섰다니…》

《이 마당에서는 그런 말은 소용이 없고… 저 어떻소, 지금 댁을 놔보내면 그 왜놈앞잡이를 붙들어올수 있겠소?》

고충경이는 또 이렇게 물었다. 사람들은 《이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그중에도 김가가 더욱 뜻밖인듯 한 낯색이였다.

《저를 놔주시겠소?》

《가서 그 왜놈렴탐군을 붙들어오시우.》

《그놈을요? 예, 그래보지요. 붙들어오리다. 제가 무사한것을 보면 그놈두 아마 따라올거외다.》

김순량은 출입할 때 의관을 바로하던 솜씨로 머리수건을 매만지면서 고충경의 기색을 살피기도 했다.

《그럼 어서 따라가보오. 이 사람을 보냅시다.》

고충경은 아직도 김가의 앞을 막아선 사람들에게도 말했다. 그들중에는 《대체 어떻게 하는 일이요?》 하고 따지려는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고충경은 역시 《보내라.》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동쪽길로 나선 김가는 허전허전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면서 대여섯걸음에 한번씩 이쪽을 돌아보군 했다. 때마침 쏟아지는 비발을 격해서도 알아볼수 있을만치 그 눈에는 의심과 겁으로 음험하게 번뜩이는 빛이 뵈였다. 그때마다 이쪽 사람들도 자연히 긴장해지는 모양으로 멀어가는 그자의 뒤모양을 지켜보고있었다.

몇번짼가 돌아본 김가는 또 한번 힐끗 돌아보고는 장달음을 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런 놈! 저놈을?》 하는 눈으로 고충경이를 돌아보았다. 고충경은 어느새 활을 잡고 또 어느새 살을 먹였는지 만궁으로 밟았던 활시위에서 깍지손을 뗐다. 핑- 퉁겨지는 활시위소리가 나자 물안개 자욱히 서린 비발속에서 외마디비명이 들리며 두팔을 벌려 허공을 끌어당길듯이 허우적거리던 김가가 길섶 도랑창으로 굴러떨어지는것이 뵈였다.

순간 사람들은 아연했다.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그런중에 혼자 혀를 차는 고충경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를 다시금 쳐다보는 사람들은 그가 과연 자기네를 대신해서 어려운 일을 치러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고했다.》거나 《덕분에 일이 간편하게 처치됐다.》거나 하는 인사는 도리여 인사가 아닐것이므로 금방 있은 일이지만 그것은 없었던듯 다치지 않는것이 더 엄숙한 대접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말없이 고충경이를 따라 토지방으로 올라갔다. 방안에 들어앉은 고충경이 활과 전통을 벗어놓을 때 부엌으로 난 새문이 열리며 《랭술 좀 받아주시우.》 하는 소리가 났다. 아까의 그 할머니였다. 아닌게 아니라 고충경은 그 랭수를 달게 마셨다.

이때 문득 밖에서 웃음소리와 환성과 《우야-》 소리가 났다. 맞은켠집에 매두었던 보라매 두마리가 쏟아지는 비발을 거슬러 한꺼번에 솟아날았다.

《세월이 평정해진 때 또 보자.》

매를 놓아주면서 한 로인이 하는 말에 역시 한 로인도 《그래라! 죄 없는 너희들은 갈데루 가라.》 하면서 자기네가 놓아준 매의 날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우야-》 소리를 지르며 웃고 떠들었다. 이 역시 극히 소박하면서도 격조높은 멋을 아는이들의 랑만이라고도 할수 있었고 또 고충경이에 대한 감사와 그윽한 대접이기도 했다.

그들을 따라나가서 훨훨 날아가는 한쌍의 매를 바라보는 고충경은 어덴가 짚였던 마음이 풀리는듯 쾌하게 웃었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보매에 형편이 이제 왜놈들 하구 보통벌곡식을 다투게 될 모양인데 어떻소?》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 때 매를 놓아준 한 로인이 고충경에게 물었다.

《위험한걸 무릅쓰구 그 농사를 다 지었으니 거둘 용량까지두 어련히 하셨겠소마는 지금 서산대사가 거느린 사람들만으루 족한가 말씀이웨다. 아니, 내 말은 일군이 다다익선으루 많두새 좋지 않을가 해서 묻는 말이요.》

《그만 용량은 있다고도 할수 있습니다. 하나 지금 말씀대로 다다익선이라구 하면 족하다구는 할수 없지요. 더우기 이제 할 추수가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도 더 어렵구 힘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고충경의 말에 《우리두 그걸 모르구 하는 말은 아니웨다.》 하고 이번에는 상투큰 농군이 말을 맡아 나앉았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마침 이렇게 여러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의논 좀 해봅세다. 내 말인즉은 이분네가 하는 가을걷이에 우리두 품 한자루씩 보태두룩 하자는 말이웨다. 우리는 이분네 같이 그런 포재가 없어서 병쟁기가지구 왜적과 싸우지는 못할망정 해온 일이 농산데 추수야 한몫 못해드리갔소.》

《옳은 말씀이요. 그리구 또 우리가 여기서 의논이 맞아서 각기 동네루 가서 발론을 하게 되면 따라나설 사람들이 많을거웨다. 그래서 몇백명이구 한꺼베 나서게 되면 일을 한몫 좋이 치를수 있을거웨다.》

채수염로인의 말이였다.

《자, 그럼 우선 이분네한테 지금 잡약산에서는 어드런 료량들을 하구있는지 그 이야기부터 좀 들어봅세다.》

이런 말로써 사람들의 공론은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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