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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최승희는 감격적인 조국해방의 날을 무용연구소를 운영하고있던 중국 베이징에서 맞이하였다.

그는 하루빨리 그리운 조국,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으로 가고싶었다.

왜놈이 없는 그곳에 가서 마음껏 민족의 향기를 춤으로 뿜고싶었던것이다.

하지만 발목을 붙잡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하여 이듬해에야 그는 귀국의 배길에 오르게 되였다.

서울에 도착한 최승희는 그곳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감정이 무겁게 그늘져있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가 온다는 기별을 받고 마중나온 친척들과 친우들이 반겨맞아주기는 했으나 왜서인지 얼굴들이 밝지 못했다.

날이 지나감에 따라 그 의문이 점차 풀리게 되였다.

해방이란 말뿐이였지 조선사람의 심장을 짓누르며 피를 토하게 하던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미군정통치로 바뀌여 민족의 운명은 여전히 외세에 의하여 롱락당하고있었다.

미군에 복종을 강요하는 미군정청의 포고문, 거리를 누비는 미군병정들의 어지러운 군화소리, 어딜 가나 눈에 뜨이는 미국식양풍의 범람…

비극의 력사가 다시금 되풀이되고있는 가슴아픈 현실앞에서 최승희는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는 서울로 오라고 한 오빠가 해방바람에 들떠 《해방자》라는 미군의 본질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비운에 대하여 미처 모르고 속아넘어갔음을 깨닫게 되였다.

도처에서 소란스레 들려오는 《반공》나발, 미국식《자유》를 설교하는 김빠진 사대광신자들의 란무장을 보며 최승희는 속으로 울었다.

더구나 그를 격분하게 만든것은 자기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소문이 나도는것이였다.

그는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것은 리승만패거리들의 작간이였다.

그가 해방전 미국에서 공연을 할 때 리승만이 불쑥 나타나서 《한국독립당강령》이라는것을 내대며 그것을 공연전에 관중앞에서 랑독하여줄것을 요구하였었다.

최승희는 그의 면전에서 단마디로 거절해버리였다.

미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그자체가 어처구니없는것이기도 하거니와 리승만이 미제의 철저한 하수인이 되여 서양녀자를 끼고 《독립자금헌납》명목으로 동포들의 돈을 뜯어먹으면서 부화방탕하게 사는 송충이같이 너절한 흉물이라는것을 오빠한테서 들어 잘 알고있었던 최승희로서는 그에게 침을 뱉고싶었다.

만약 그의 요구대로 그따위 《강령》을 읽게 되면 공연자체가 그들의 롱락물로 되는것은 물론이거니와 최승희자신은 민족의 배신자로 되여버리고마는것이였다.

최승희는 죽음을 각오하고 리승만과 맞서 싸웠었다.

바로 최승희를 꺾지 못한 그때의 앙갚음을 하려고 리승만은 앞잡이들을 내세워 그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던것이다.

최승희는 코웃음을 쳤지만 가슴이 찢기는듯 아팠다.

더구나 그를 더 괴롭힌것은 미군정청의 요구였다.

최승희에게 《자유세계》인 미국에 건너가 서양춤을 추라는것이였다.

모진 가난과 운명의 풍파속에서도 조선민족무용을 고수하고 발전시켜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과시하려고 애를 써온 그 애국의 마음을 짓밟다 못해 최승희자체를 미국화하려고 달려드는 이런 놈들과 어떻게 상대할수 있단 말인가.

그는 서울로 온것을 후회하였다. 오지 말아야 할 땅에 발을 디딘것이였다.

그는 출로를 찾아 모대기였다.

량심적인 유지들을 여러명 만나보았는데 누구나 다 남쪽땅에서 빚어지고있는 비극적현실을 개탄하면서 통분해할뿐 그가 기대하는 출로를 안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암중모색하던 최승희는 조선인민당 당수로 명망이 높아 미군정청에서도 감히 어쩌지 못한다는 려운형을 찾아가 만났다.

려운형은 해방전부터 최승희의 무용활동과 그에게 잠재해있는 민족적자각과 애국심을 귀중히 여겨주고 적극 도와주기도 한 고마운 인사였다.

그는 최승희가 국내공연과 외국공연에서 성과를 거두었을 때에는 집에 초청하여 소박한 음식상을 차려주고 고무해주기도 하였다.

재정난에 부닥쳐 안타까워할 때면 식량과 돈으로 최승희를 후원해주군 하였었다.

려운형에 대한 최승희의 인상에서 제일 잊을수 없는것은 1936년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여름철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경기에서 1등을 한 손기정과 같은 해 에스빠냐의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무용콩클에서 단연 1등을 한 최승희를 조선민족의 명성을 떨친 장한 아들딸로 내세워주면서 그들을 한자리에 앉히고 사진을 찍어준 사실이였다.

최승희는 그때 겨레의 기대를 잊지 말고 계속 민족의 아들딸답게 투쟁하기를 바라는 려운형의 말없는 당부를 가슴에 새겨안았었다.

그렇게 알게 된 려운형이였으나 지금은 한개 당의 권위있는 당수라는 관념으로 하여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찾아가 만났는데 그는 매우 반가워하며 최승희의 고민을 기꺼이 들어주고 주저없이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 공화국북반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뜨겁게 말해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해방이 되였으나 미제에 의해 강요된 민족분렬의 비극에 대하여, 각이한 경로와 방법으로 북으로 간 인사들과 재사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면서 자기가 어떻게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어떤 가르침을 받아안았는가를 사심없는 그리움과 흠모의 정을 담아 말해주는것이였다.

사실 최승희도 해방전 민족의 태양으로 칭송받고계시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많이 들었고 또 그이께서 이끄시는 항일무장투쟁내용을 무용작품에 담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었다.

《태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폭풍우를 뚫고》, 《녀성이여, 강하다》, 《미래는 청년의것이다》 등과 같은 무용들이 다 그러한 취지에서 창작된 작품들이였다.

최승희는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서울을 떠나자니 오빠를 비롯한 가족, 친척과 친우들이 속에 걸렸고 그냥 있자니 식민지화된 살벌하고 파쑈적인 폭정이 증오스러웠다.

북으로 끌리는 마음은 강렬했으나 그곳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생면부지의 고장이여서 선뜻 걸음을 뗄수도 없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최승희는 해방전 무엇을 할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처럼 어디에 삶의 좌표를 정해야 할지 심각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모대기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때인 1946년 7월의 무더운 어느날 낯모를 사람이 최승희를 찾아왔다.

그는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승희에게 보내시는 편지를 가져왔다는것이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에게 편지를?)

쉽사리 믿을수 없는 놀라운 사실앞에서 최승희의 몸은 흥분으로 떨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편지에 최승희가 지난날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넋과 절개를 지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고 세계앞에 시위한데 대해 잘 알고있다고, 하루빨리 북반부로 들어와 민주주의민족문화건설에 참가하여 지난날 그처럼 소망하던 민족무용을 우리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나가는데 적극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쓰시였다.

최승희는 뜨거운 사랑과 신임이 어린 편지를 가슴에 그러안고 뜨거움에 젖은 목소리로 웨쳤다.

《고맙습니다. 김일성장군님! 기어이 장군님품으로 가겠습니다.》

최승희는 서둘러 출발준비를 끝내고 일행과 함께 마포를 거쳐 인천에서 배에 올랐다.

바다의 밤이 지새고 낮이 기울어지기 시작할무렵 남포앞바다에 이른 최승희의 가슴은 이름 못할 흥분으로 파도처럼 뒤설레이였다.

항구에 와닿은 최승희는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와있었기에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밀선으로 들어온 자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맞아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것이다.

한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말씀이 계시여 마중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최승희는 감격에 목이 꽉 메였고 지난날의 눈물겨운 생활의 자욱자욱이 어려와 눈물을 감출수 없었다. 동시에 자기가 선택한 길이 인생의 보람과 행복이 약속된 길이라는 확신에 가슴은 터질듯 들먹이였다.

최승희가 더더욱 감격의 눈물을 머금은것은 그가 평양에 들어와 《최승희무용연구소》라고 쓴 현판을 정면에 내건 어느 한 건물에 이르렀을 때였다.

건국사업으로 어디서나 건물이 긴절히 요구되였던 때였지만 이 큰 건물을 최승희무용연구소로 리용하도록 배려하여주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에 접하고 그는 끝내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최승희로서는 감히 상상할수도 없었던 사랑과 믿음의 세계가 꿈아닌 현실로 펼쳐진것이였다.

학생들이 기숙할 방들이 아래층에 아담히 갖추어져있고 2층에는 사무실, 응접실, 3층에 꾸려진 넓은 훈련장…

거기에 가구와 부엌세간까지 일식으로 갖추어져있고 독마다 흰쌀이 가득가득한 아담한 살림집까지 받아안았을 때 최승희의 감격은 최절정에 이르렀다.

과연 지난날 자기를 그 누가 이렇듯 진정한 사랑, 친부모를 초월하는 따뜻한 품에 안아주었던가. 의지하고싶어 붙잡고보면 권력과 황금의 리용물로 속이려고만 들었고 정들이자고보면 위선과 야욕의 롱락물로 꺾으려고만 날치는 그런 세상이였다. 그속을 헤치며 이를 악물고 살아온 최승희는 진정 모든것을 맡기고 민족무용의 나래를 마음껏 펴볼수 있는 어버이의 품에 안겼다는 희열에 울고웃었다.

하기에 그는 펜을 들어 한자한자 정성담아 자기의 느낌을 적었는데 그 글이 1946년 8월 7일부 신문 《정로》에 그대로 실리였다.

《우리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밑에서 우렁차게 전진하는 북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건설의 위대한 성과를 볼 때 북조선에서 적은 힘이나마 예술활동에 참가하게 된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

최승희는 1946년 8월 4일 한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광의 시각을 맞이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그가 사업하고있는 무용연구소를 몸소 찾아주시였던것이다.

최승희는 꿈같은 현실앞에 솟구치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며 엎어질듯 달려가 그이께 허리굽혀 정중히 인사를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시고 건강에 대하여 물어주시면서 앓지 말아야 민주주의민족문화건설에 적극 이바지할수 있다고 말씀해주시였다.

방안에 들어와 앉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뜻깊은 미소를 지으시며 물으시였다.

《그래 이번에 평양에 구경하려 왔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왔습니까?》

이 물으심에 최승희는 진정을 담아 말씀올리였다.

《장군님의 손길아래 마음껏 민족무용을 하고싶어 왔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이렇게 다 왔습니다.》

그의 이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민족의 얼을 지닌 최승희선생다운 결단이라고 격려해주시면서 그가 악독한 일제의 통치하에서도 민족무용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못내 대견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까지 해오던 조선민족무용의 기초를 마련하는 사업을 계속하여 완성해나갈데 대해서와 무용가후비를 전망성있게 양성하는 사업을 잘할데 대하여 그 방도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최승희에 대한 믿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뜨겁게 격려하여주시였다.

우리의 무용예술을 믿음직하게 떠메고나갈 무용가후비를 양성하는 사업을 전망성있게 해나가야 합니다.

유능한 무용가들을 많이 키워 그들이 인민이 좋아하는 민족무용의 춤동작에 기초하여 우수한 무용작품들을 수많이 창작공연하게 되면 우리의 무용예술은 더욱 찬란히 발전하게 될것이며 민주주의민족문화도 그만큼 개화발전하게 될것입니다.

나는 선생이 반동파들의 온갖 회유와 책동을 대담하게 박차고 진정한 인민의 품에 안긴것만큼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을 잘하리라고 믿습니다.

최승희는 감격에 겨워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일하겠다고 굳게 결의를 다지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결심을 매우 귀중히 여겨주시면서 애로되는것들과 필요되는것들에 대해 차근차근 물어주시고 그가 요구하는 모든 자재와 조건을 다 보장해주시겠다고, 앞으로 무용연구소사업과 관련한 문제가 제기되면 아무때나 찾아와 함께 토론하고 대책을 세우자고, 힘을 합쳐 우리의 우수한 무용예술을 온 세상에 널리 시위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최승희는 어버이수령님의 그 고매한 덕망과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여 《장군님, 어버이장군님품에 안기니 만시름이 놓이고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할수 있습니다.》 하고 거듭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또 드리였다.

그후 최승희는 어버이수령님앞에 다진 결의를 실천하는 길에서 자기의 정력과 재능을 다 발휘하였다.

그는 무용연구소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종종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옵던 그날의 감격을 자주 이야기하여주면서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군 하였다.

그는 지난날 자기가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창작한 무용을 공연할 때 적지 않은 고위인물들을 만났었는데 그들은 누구나 다 자기를 특이한 춤을 추는 매력있는 무용수로 보았을뿐 침략자에게 짓밟힌 조국, 망국의 설음에 우는 우리 인민의 원한을 절절하게 호소하려고 나선 자기의 마음속지향을 리해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그들에게 있어서 무용은 예술이 아니라 한갖 구경거리에 불과한것이였다고 눈물에 젖어 이야기하여주군 하였다.

그의 이 고백은 진실한것이였고 민족무용의 앞날을 스스로 걸머진 의무감으로부터 오는 책임감의 발현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최승희는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받아안은 크나큰 신임과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였다.

민족의 넋을 무용에 담아보려고 세계를 편답하면서도 자기가 깃들 운명의 포구를 발견하지 못해 몸부림하던 최승희는 드디여 어버이수령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자기 한생을 깃들일 보금자리로 정하였다.

이것은 정녕 최승희가 민족의 추억속에 영원히 살수 있게 한 진리의 길이였으며 참선택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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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1)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2)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3)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1) 항쟁의 거리에서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2) 그가 안긴 품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3)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1)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2)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3)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4)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1)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2)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3) 그의 삶은 영원하다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1)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2) 인생의 가치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3)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1) 《해변》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2) 《5월의 농촌》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3)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4)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1) 족쇄를 찬 희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2) 환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3) 웃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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