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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회


44. 앞으로 백성들은 이전 백성이 아닐게다


이튿날이였다.

조용한 틈을 타서 찾아간 사명당에게 주복이가 말한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미 다 아는 일이지만 처음 듣는 사명대사로서는 무척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법근이가 오욕칠정(다섯가지의 욕심과 일곱가지의 감정) 번뇌에 사로잡혀있다는것이다. 사명당은 우선 놀랐다. 그리고 크게 노엽기도 했다.

사명대사가 묻는데 기일수가 없어 말을 꺼내기는 하고도 주복이는 보패의 이름까지를 꺼들기는 정말 거북하고 난처했다. 싫기보다도 죄스럽고 두렵기조차도 했다. 제 말재간이 좀 날렵하기나 해도 또 좀 나으련만 제 퉁명스러운 말솜씨로써 한동네서 몇달 같이 지내보는바 그렇게도 단아하고 얌전하고 례절바른 처녀를, 그 이름을 꺼들어넣기가 주복이로서는 실로 진땀이 날만치 송구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끝 안심할수 있는것은 법근이가 그렇게 못 잊어는 하면서도 언제 한번 그 처녀가 홀로 있는 틈을 타서 찾아갔다거나 말을 붙여보았다든가 한적은 꿈에도 없다는것을 제가 잘 알기때문이였다. 감히 그럴 생의도 못 내느니만치 법근이의 그 번뇌는 더욱더 깊어갔던것이다. 제앞을 지나가는 보패를 감히 눈으로 따라보지도 못하는 법근이였다. 제 마음을 악귀로 지어먹고 어데서든 한번 조용히 만나서 제속을 털어보이려면 할수 없는것도 아니건만 그것도 감히 못하는 법근이는 그저 속으로만 곪았다. 독자들중에는 《무슨 놈의 련애가 그따윌가?》 할는지도 모르나 사실이 그런것을 어떻게 하는가.

옆에서 보기에 하도 딱했던 주복이는 어제 밤에 법근이와 단 둘이서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저 아는대로 자세한 이야기를 했던것이다. 우선 허두를 이렇게 냈다.

《법근아, 너 정말 그러지 말아.》

《그러지 말라니 뭘 말이냐?》

《너 우리 지난번 씨름판에 갔다오다가 석장군바위앞에서 한 말 안 잊니?》

사실 그후에는 법근이가 주복이한테까지도 보패의 이야기를 한적은 없었다. 그만치 얼마나 더 속으로 곪고있는가 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보패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혹시 주복이가 그 퉁명스럽고 시룽거리는 말투로 받아넘기기나 한다면 필경 자기는 큰 모욕이나 당한것 같이 싸움이라도 하고야말게 될것이 두렵기도 했던것이다.

그래서 하 오래간만에 불쑥 꺼내는 주복의 말에 법근이는 생으로 잡아떼듯 했다.

《그렇구말구, 여부가 있니? 내가 언제 뭐라던?》

《뭐라지는 않아두 네 신상 돼가는 꼴을 보면 몰라? 내 눈치코치없이 미욱은 해두 네속쯤은 꿰뚫구보는듯 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주복의 말에 잠자코 앉았던 법근이는 금시 속이 답답해지는 모양으로 바라지짝을 탁 열어젖혔다. 쏘아드는 랭랭한 외기에 가물거리던 등잔불이 파르르 떨리다가 깜빡 꺼지고 그대신 푸른 달빛이 좁은 초막안에 가득 흘러들었다. 한동안 고개를 돌려 묵묵히 달빛만 내다보고 앉았던 법근이는 문턱앞으로 나앉아 내민 손에 잡히는대로 나무잎 하나를 뜯어서(뒤산 나무숲속에 지은 초막이였다.) 풀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늘 하던 솜씨라 처음에는 그저 손가는대로 하나 따서 입술에 붙이고 소리를 내다보니 자연 처량한 제 심정을 따라 구슬픈 가락으로 넘어가게 되는 모양이다.

마을안에서는 쿵쿵거리다 멎은 절구공이소리대신에 싸르락거리는 키질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는 술보시기를 든채 멍청해진듯이 앉아있었다. 법근이의 심정을 잘 알고 듣는 주복이는 그 풀피리소리에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법근이는 제 대신 나무잎을 울리고있는것이다.

《너 이제 그건 웬 소리가?》

나무잎을 뱉아버리고 도로 술상앞에 마주앉으며 법근이가 물었다.

《글쎄, 말을 꺼내긴 해서두 잘은 모르갔는데 좌우간…》

주복이는 보시기를 기울이고나서 독한 소주냄새가 풍기는 입에다 토장을 찍은 마늘 한쪽을 들여뜨리고 말했다.

《보패가 언제든 네 사람은 못될 사람같아서 하는 말이다.》

《…》

《난 그렇게 안다.》

《내가 환속을 해두?》

법근이는 무서운 대답이 나올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한가닥 가냘픈 희망에 매달리고싶은 심정에서 떨리는 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환속을 하가서? 너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니?》

주복이는 반색하듯 물었다.

《죽지 않구 이 란리를 치르게 되면 그래볼가 하는 생각두 해봤다.》

《거 잘 생각했다.》

주복이는 이 말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기뻐 웃으며 말했다.

《넌 백년 중질을 한대두 서산스님이나 사명당 같은 도승이 되긴 틀린 사람이구 또 도승이 돼선 뭘 하니. 그러니 중노릇 그만두고 우리 같이 농사하면서 살자.》

《나두 그러구싶어. 네 봐라, 이제 이 란리를 치르구나면 세상이 좀 달라두 질게다.》

법근이의 얼굴에도 화색이 도는 흥분이 있었다.

《달라지다니 어떻게?》

주복이가 물었다.

《이건 내 혼자 생각만두 아니다. 일전에 서산 큰 스님이 사명스님보구 하신 말씀인데 지금 이 지경이 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왜적과 싸우는것이 누군가 말이다. 우리 백성이 아니가! 량반이라구 잘난체 하구 뻐기던 놈들은 뭔가 말이다. 너랑 나랑 같이 다 지내본거 아니가. 그렇게두 우리 백성들이 안타깝게 〈평양성을 함께 지켜지이라.〉구 애걸두 하구 야단두 했는데 그래두 다 도망질하구 말았거던. 그런데 지금 이 앞으로 소용될 군량을 보탤라구 왜적과 싸워가면서 이 넓은 벌의 농사를 하구, 이제 또 왜적과 싸울래는것두 우리 백성들 아니가. 여기 백성들뿐인가. 조선8도에서 왜적과 싸우는건 다 우리 백성이거던. 그러게 우리 서산스님말씀이 〈이 국란을 백성들이 치르구나면 백성들은 이전 백성들이 아닐게라구.〉 알갔니? 무슨 말인고 하니 량반놈들이 전처럼 우리 백성을 함부로 천대, 수모를 못할거란 말이다.》

《흥, 어림없다.》 하는 주복이 역시 흥분했다. 그는 팔소매를 걷어올리며 말했다.

《천댈 해? 그 명주자루에 개똥같은 놈들이? 우리 백성들이 왜 무슨 짝에 그놈들의 천대, 수모를 그냥 받긴들 하는데? 어림없다.》

《…》

《…》

그리고는 문득 침묵이 왔다. 조그마한 개다리소반을 사이에 놓고 마주앉은 둘이는 언약이라도 한듯이 뭉청 말을 끊어버리듯 하고 보시기만 주고받았다. 괴로운 침묵이였다. 물론 이때까지의 이야기는 한창인 두사람에게는 신바람이 나는 말이였다. 앞이 환히 틔는 이야기였다. 그러니만치 제가 시작한 이야기의 끝을 이제 맺어야 할것이 더욱 큰 산같은 주복이는 진땀이 났다. 진땀이 나는 주복이는 제한테 보패의 반만이라도 한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이 실로 간절했다.

법근이는 또 저대로 거북했다. 아니, 주복이의 침묵에 절망했다. 속이 끓어번졌다.

《요고! 무슨 술붓기본때가. 좀 가득가득 붓지 못해!》

주복이가 따라주는 보시기가 약간 곯은것을 핑게삼아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라도 침묵이 깨지는데 주복이는 용기를 얻었다.

《보패는 차돌이 사람이 되는가부더라.》

《뭐, 차돌이?》

법근이는 들었던 술보시기를 상귀에 놓았다.

《그럴거 아니가. 한동네 앞뒤집에서 자란 처녀총각이 그렇기두 쉽지 않니?》

주복이는 큰 짐을 부린듯이 한숨을 쉬였다.

《…》

몇순간 멍청히 앉았다가 《너 그런줄은 어떻게…》 하던 법근이는 말을 끊어버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어련히 알구서 하는 말이갔게 그런것까지 캐묻자는 내가 정말 졸장부다. 알갔다, 속시원히 잘 알았다. …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이 돌중놈 법근이에게다 댈테냐. 더우기 그런 일에야. 허! 내가 렴치없었지. 그런줄만 알았으면야 내 벌써…》

더 말하잘것도 없다는듯 하던 말을 그만두고 놓았던 보시기를 들이키고 마늘쪽을 집으려던 법근이는 벌떡 일어나서 나가려다가 문턱에 채 가지 못하고 쓰러지며 울컥 피를 토했다. 전날 접전때 상했던 속의 상처가 다시 도진 모양이였다. 그러나 주복이가 껴들어줄 사이도 없이 또 벌떡 일어나 앉은 그는 《에이, 용졸한것!》 하면서 발길을 들어 멍석자리에 스며드는 피를 문질러버리고는 자작 술을 따라 양치질을 하고나서 한번 호탕히 웃었다. 둘이는 딴 이야기를 안주삼아서 또 잔을 돌리기 시작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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