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43 회


43. 달밤의 풀피리소리


아무리 늦된 벼라도 그전에 이삭이 패기만 하면 먹는다는 백로가 지난지도 벌써 며칠째다. 보통벌은 그 며칠전부터 빛이 달라졌다. 이삭팬 벼꽃으로 푸른 물결우에 새로운 한 색갈을 더했다. 또 다행히도 이때부터 궂은 장마가 걷기 시작했다. 구름은 희여지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가위 가까운 중추 긴긴밤이 얼마나 깊었을가. 잠들었던 서산은 자리에 닿은 한쪽몸이 배겨서 일어나 앉았다. 잘 때는 끄리라고 했던 등잔불이 아직도 감실거리는 나무화대뒤의 창에는 알아볼수 있게 달빛이 푸르렀다.

옆방에서는 사명이 그린듯이 누워자는 모양으로 부시럭소리도 안 난다. 사명당은 그동안 승병들이 나뉘여있는 근처의 절과 암자로 다니면서 그들이 무예를 익히는것을 동독하다가 오늘 낮에 돌아왔다. 뼈가 굵고 살이 두터워야 잠도 깊이 드는 법이다. 이러한 생각에 서산은 제자 사명의 정정한 건강이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감실거리는 불빛에 머리맡에서 번들거리는것이 있었다. 무쇠로 부어 만든 투구였다. 그것은 지금 여러 패의 대장간을 차려놓고 병쟁기를 만드는중인 동금강암에서 사명이 손수 도본을 내서 만들게 한것이다. 도본은 어떤것이였던지 모르나 정작 된 물건은 투구라기보다 한낱 투박한 무쇠바가지였다. (이것은 지금도 묘향산 보현사에 보존되여있다.)

서산은 한달쯤 전에 보통벌 한가운데서 만수대 성가퀴우로 말을 달려가는 왜장을 바라보았던 생각이 났다. 서산은 그것이 소서행장이였다는것은 모른다. 단지 그 금빛 찬란한 투구로써 지위가 하낮지 않은 적장이라 짐작했을뿐이다. 번쩍이는 그것이 한갖 장식이라면 저 투박한것이 오히려 접전장에서 소용되는 투구라고 할것이였다.

사명당은 그것을 쓰고 한아름 되는 수염속에서 웃으며 혹시 서산스님도 소용된다면 하나 더 만들겠다고 하면서 두고 간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 그가 자고있는 그의 방에는 큰 검과 동달이군복이 길게 걸려있을것이다. 그 군복과 검과 저 무쇠투구만으로도 서산은 사명이 더욱 미쁘게 생각되였다. 50이 다된 제자 사명이 귀엽게도 생각되였다. 이 늙은 스님은 저렇듯 무거운 쇠투구를 쓸수는 없을것이고- 그러나 사명이 있지 않는가! 하는 서산은 앞으로는 접전 또 접전- 이제 얼마 있어 추수부터도 싸움이 없이는 안될것으로 생각해온 근심도 저으기 덜리는듯 했다.

창에 비친 달빛이 더욱 밝아진것을 본 서산은 장삼을 입고 가사를 수하고 지팽이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바자문밖의 맑은 이슬방울이 맺힌 풀숲에서 들리는 벌레소리 역시 그 령롱한 이슬방울같이 맑고 야무진 소리다. 우러러보는 달로 밤은 그리 깊지 않은 모양이다. 초협한 길을 지나 넓은 마당 한기슭의 버드나무아래로 들어섰다. 은빛일색인 달빛에 천지간의 모든것은 싱그럽게 정화된듯 아름답다. 정신도 쇄락했다.

서산은 지팽이를 버드나무에 기대놓고 고요히 눈을 감고 남쪽을 향하여 합장했다. 그는 지금 리순신장군을 념하는것이였다. 즉 리순신장군의 진충보국하는 그 애국지성에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천우신조가 있기를 념원하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서산은 나왔던것이다.

전번 의주 행재소에 갔을 때 류성룡에게서 리순신장군의 혁혁한 공훈을 들은 서산은 지금같이 청정한 때마다 합장하고 념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때 서산은 몰랐지만 저편 동구앞 길섶에서도 역시 남쪽을 향해서 합장하는 사람이 두셋 있었다. 서산은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게 하도록 일러왔다. 이밤에 마을주변을 기찰하던 그들은 지금 서산이 합장하는것을 보고 따라하는것이였다.

서산은 리순신장군을 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속으로 《장할시고!》하는 그의 눈앞에는 성실하고 슬기롭고 용감한 리순신의 풍모가 보이는듯도 했다. 이런 때의 서산은 자기가 왕명을 받은 8도 승병장이라는것을 잊어버린다. 오직 조선사람의 순후한 심정일뿐이였다.

다시 지팽이를 들고 동구가까운 버드나무밑으로 갔을 때 쿵쿵하던 절구질소리가 멎고 녀인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세확째나 쓸었는데두 쓰레미가 잘 안 나니 웬일일가?》

《아마 잘 마르질 않았던가부웨다.》

칠성이네 집 바자안에서 나는 그 말소리는 하나는 김첨지 마누라이고 하나는 차돌이 어머니였다. 지금 서산은 이곳에 남아있는 아낙네들의 음성까지도 가려들을수 있었다.

《한확씩이나 더 쓸구는 그만두자구.》

김첨지 마누라의 음성, 그러자 키질소리가 잠시 멎으며 《왜요?》 하는것은 보패였다.

《안타깨 남같이 살아볼래다가 못살구 죽은건 불쌍해두 다 이러는걸 보면 넋이라두 한이 없갔소.》

또 김첨지 마누라의 음성, 그 동닿지 않게 하는 말소리는 금시 처량했다.

《아니, 원! 별말씀을… 절구질이나 좀 하는걸 가지구. …》

차돌이 어머니가 말을 받았다.

《여름내- 가으내- 또 이번엔 밤도와 비기까지 하실래게 댁의 아주바니가 수굴 하십디다.》

《우리야 앞뒤집에서 한우물물 먹구살지 않았소. 형님이랑 이 애기랑이야 언제 알기나 했다구. 그런데두 그 제사쌀을 이렇게 정성을 들이니! 이제 칠성이 엄마가 와서 〈자, 제사쌀 다 해놨쉐다.〉 하구 내놓으면 옥백미에 아마 눈이 번쩍 띌거웨다.》

칠성이 어머니는 남은 네 아이들을 데리고 동금강암으로 이사해간지 오래다. 그동안 그 집의 오려논은 김첨지가 도맡다싶이 김매고 돌피추고 물고를 보아오다가 오는 추석에 칠성이 어머니가 와서 제사를 지낼수 있도록 밤새 베여서 나락을 털기까지 했던것이다.

한동안은 싸르락싸르락 까불고 일고 하는 키질소리뿐. 흰 달빛에 명암이 분명하게 고요히 드리운 버드나무그림자속에 서있는 서산은 맑은 밤기운에 풍기는 구수하고도 청신한 햇쌀겨의 냄새를 느낄수도 있었다.

《애기, 그럼 몇확 더 쓸가?》

아까 《왜요?》 했던 보패의 말에 이제야 대답하듯이 김첨지 마누라가 묻는다. 그러자 또 키질소리가 멎으며 《그러문요, 좀더 쓸어야지요.》 하는 보패의 대답이다. 이때 문득 피리소리가 나는듯 했다. 뒤산 숲속에서였다. 피리가 아니라 풀피리소리다. 잠시 불다말고 뻣뻣이 쇤 풀잎인가 나무잎을 청을 내는 모양인지 찰싹찰싹 치는 손바닥소리가 몇번 난 후에 또 불기 시작한다. 피리소리 못지 않게 맑고 독특한 풀피리소리는 퍽 애절한 가락이였다.

《누군고?》

귀를 기울인 서산은 허심히 감탄했다. 가락은 차차 애절한 도를 지나쳐 구슬퍼갔다.

《아이구마니나! 그 소리 정말 구성지네.》

바자안의 김첨지 마누라도 감탄한다.

《거 누굴가?》

《글쎄요. 우리 아이는 낮에 고생원님(고충경)따라서 룡악산 절엘 갔는데요.》

웬 까닭인지 차돌이 어머니의 이런 대답은 변명같기도 했다.

《옳아! 그럼 승검술 대산가부웨다.》

《법근이 대사말이요?》

《그래, 그 대사두 최금(풀피리)을 잘 분다구 하던데.》

《…》

《달은 다잡구 밝구… 풍기가 좀 있는 대사라더니 정말 싱숭생숭한게로군. 뉘 집 애길 바람낼라구 저러노.》

또 이런 말을 하는 김첨지 마누라가 좀 잼잼이 없이 입이 싼편이기도 하지만 아닌게 아니라 그 풀피리소리도 소리였다. 남의 속을 후비듯이, 잡아뜯듯이 애끊게 격절한 몇굽이를 넘어 이제는 허희자탄으로 흐느껴우는듯도 했다.

《법근이놈이?》

지팽이끝에 두손을 얹고 은실같은 눈섭으로 눈을 내려덮고 귀를 기울이고 섰던 서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심해 듣는 귀에 거슬리도록 이쪽의 키질소리는 더욱 자주 싸르락거린다. 남이야 귀기울여 듣든말든 저만은 아랑곳않는다는듯 한 키질같기도 했다. 혹여 잼잼이 없는 김첨지 마누라의 말에 수줍고 노염이 나기도 한 처녀의 일솜씨일가? 일고 까불고 또 일고… 풀피리소리를 지워버리려는것 같기도 했다. 풀피리소리는 더욱 구슬펐다.

서산은 부지중 한숨을 지었다.

(달빛이 하도 맑으니 저도 한번 맑은 음률을 내본다는것만은 아니드냐? 그렇다면 저것이 얼마나 맘고생을 하는고. …)

이런 생각에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든 로승은 자기 처소로 지팽이를 옮겼다.

가물거리는 등잔불앞에서 가부좌를 겯듯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한쪽 무릎을 깍지낀 두손으로 끌어안고 고요히 눈을 감고있던 서산은 문득 어데선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분명 법근이의 음성이였다. 혹시 주정을 하는것이나 아닌가? 이집저집에서 문이 여닫기며 소리나는쪽으로 가는 모양인 사람들의 발소리도 들린다.

《뭐야, 이 모주리 모가질 돌려앉힐 놈들… 량반? 선비? 네놈들만이 부몰 알구 나라생각을 한다구? 천만에, 되지 못한 수작 좀 작작하란 말이다, 이놈들아-》

뒤산중턱에서 장삼앞섶을 풀어헤치고 한손에 긴 검을 짚고 큰돌우에 버티고 걸터앉은 법근이는 고래고래 웨치는 소리로 이런 말을 하고있었다. 나무가지사이로 비껴드는 푸른 달빛에 그의 눈은 불구슬같이 번쩍이였다.

《옳다! 너희놈들의 수작마따나 나는 부모를 모르는 중놈이다. 어려서 부모를 다 여의였단 말이다. 그래서 어미애비없이 자라난 이 법근이는 세상의 따뜻한 맛을 모른단 말이다. 그래서 부모생각이 더 간절하단 말이다.》

또 이렇게 울부짖는 그의 말마디에는 랭랭한 밤기운에 한줄기 열탕을 쏟는듯 화끈한 입김과 독한 술냄새가 풍기였다.

《이 사람, 법근이-》

나무숲속에 모여섰던 사람들중에 돈정신이가 나서며 법근이를 달랬다.

《밤이 깊었는데 그렇게 떠들면 일왈 서산로장이 걱정하실거 아닌가. 이젠 그만하라구.》

그러나 법근이는 그런 말이 들리지도 않고 또 제앞에 누가 있는것 같지도 않은 모양이였다.

《그런데 량반, 선비, 너희놈들만이 부모가 중하구 나라가 중한줄 알아? 너희만이 대의명분을 가리구 례의렴치를 알아? 천만에, 천만에, 이 나는 말이다. …》

또 이렇게 웨치던 법근이는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다시 눈을 들어 나무가지사이로 비치는 달을 쳐다보며 제 감회를 저 혼자 중얼거리듯이 한층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이 나두… 너희가 대의를 모른다구 하는 이 중 법근이두 말이다. 부모를 그리워하구 나라를 위해서 싸우기두 한다. 뭐? 또 례의렴치 말이냐? 이 법근이는 죽는 한이 있어두 비례의짓은 안한다. 비례의짓이라면 그런 생각두 안할테다. 나 혼자 품었던 생각만이라두 렴치없는 일이라면 이 가슴을 찢구 이 골통을 깨버려서라두 안하두룩 할테다. 그만둘테야, 안할테야. 내 영 안할테야.》

이런 말을 한 법근이의 그 번쩍이는 눈에서는 불현듯 두줄기 눈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쓰러지듯이 옆의 나무에 이마를 기댄 제 머리를 제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놀랐다. 서로 그 까닭을 묻듯이 쳐다볼뿐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어떻게 한다기보다도 오히려 그의 앞에 서있는것이 안된듯도 했다. 지금까지 법근이가 웨치고 고함을 지른것은 누가 들으라는것도, 주정으로 그런것도 아니고 오직 남모르게 혼자 제속에 맺힌 무엇을 풀어버리려고 몸부림치는것으로 생각되기때문이였다.

《법근아, 너 좀 취했구나.》 하며 이때 주복이가 가까이 왔다.

《그러다보니 너두 졸장부댔구나. 자, 일어서라. 가자.》 하는 주복이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해진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후두두 어깨를 떨고있는 법근이의 겨드랑이밑으로 한손을 넣어 가분가분 껴안고 저희 초막으로 갔다. 흩어져가던 사람들은 소나무밑에 지팽이를 짚고 서있는 서산의 흰 눈섭을 보고는 마치 자기네가 무슨 실수나 한듯이 주춤주춤하다가 길을 에둘러 내려갔다. 서산뒤에는 수염을 한아름 안은듯 한 사명대사도 있었다.

《떠드는 바람에 못 쉬시구 이 추운델 나오셨구만요.》

김첨지는 이렇게 말하고 《거 뭐 젊은 사람이 술잔이나 하면 그렇기두 쉽습디. 메라오리.》 하고 주복이 아버지는 법근이를 두둔해주듯이 이렇게 말했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