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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 회


42. 서산대사와 사명당


서산대사는 드디여 왕의 명을 받아 8도 16종 도총섭이 되였다. 즉 조선8도에서 일어난 승병의 총대장이 된것이다.

얼마전에 령의정이 된 류성룡이가 지난 5월 열하루날 평양에서 우연히 서산대사를 보았노라는 말로써 왕으로 하여금 3년전에 대 한폭을 그려주었던 중을 회상케 했던것이다. 류성룡은 벌써 전에 고산진 첨사로 있다가 친상을 당하여 자기 고향에 돌아와있던 김응서를 다시 등용하도록 천거한 일도 있었다.

조방장이 된 김응서는 곧 순안으로 나와서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리원익 등을 보좌하여 우리 관군을 재건하기에 착수했다. 그의 고향이 룡강이라 삼화, 강서, 증산 등 서해변 여러 고을의 정형을 잘 아는만치 군사를 초모하는데서부터도 그의 공적은 컸던것이다.

이때 왕 선조는 곧 사람을 묘향산 보현사로 보냈다. 그 늙은 중이 아직도 평양성근처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묘향산에서 다시 잡약산으로. 그래서 왕의 부름을 받은 서산이 의주 행재소로 간것은 7월 하순이였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왕은 《네 어찌 나를 잊었던고?》 하며 서산이 먼저 자기를 찾지 않은것을 나무랐다고 했다. 또 《이같은 란세를 네 가히 건질수 있겠느냐?》 이렇게 물었던것이다. 왕이 한낱 중에게 그같이 물었다는것은 그만치 서산대사라는 중을 한 인물로 인정했던탓이라고 일언이페지하면 그만이기도 하나 그러나 그렇게만 볼수는 없을것이다. 만일 이때의 정형이 그같이 절박한 시기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왕의 그러한 언사에서 중에 대한 일종의 야유를 들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런것은 아니고 한마디로 말해서 이때의 왕이 그 얼마나 암담한 처지에 놓여있었던가로써 설명된다.

그 당시에 척토지민다 육식자무모라는 말이 마치 새롭게 발견된 진리나 같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였던 사실 즉 의로운 사람이 많았다는 《척토지민》은 척박한 땅을 자기네의 땀으로써 적시여온 그 역시 파리한 백성들의 이름이였고 무모했다는 《육식자》는 고량진미로써 배에 기름이 진 량반관료들을 가리킨 말이다.

평시에는 즉 그들이 례찬해온바 소위 《태평성대》시기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지도와 자기의 굽힘없는 절개와 충효로써 언제든 의를 위해서는 한목숨을 버릴수 있노라던 왕의 측근자인 량반관료들중에는 하루아침에 《태평성대》의 꿈이 깨지자 지금까지 해온 자기네의 장담을 잊어버리고 직책을 버리고 왕을 버리고 달아난자가 많았다. 왕이 한성을 떠날 때 체면이 사람 죽인다고 그 귀찮은 체면때문에 마지못해 평양까지 따라왔던 육식자들중에도 왕이 또 의주로 가게 되자 혹은 평양서 혹은 안주, 박천, 녕변에서 이 핑게, 저 핑게로 심지어는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꽁무니를 뺀자들이 많았다. (여기서 그자들의 이름과 그 추접스러운 행장들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6월 23일에 의주에 도착하고본즉 왕의 신변에는 측근자가 실로 몇이 남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왕이 있고 그 신변에 몇몇 대신관료들이 남아있으니 역시 조정은 조정이였다. 그렇게라도 조정을 차리고보니 지금까지 해온 당쟁이 또 없을수 없었다. 동인, 서인의 옥신각신은 곧 시작되였다. 건건사사에 한가지 사소한 일을 처결하는데도 그 많지 않은 조정신하들중의 공론이 일치하는 법은 없었다. 가령 어느 한사람의 인사문제를 의논할 때 동인중의 누가 그 사람을 두둔하는 기색이 보이면 서인측에서는 의무적으로 반대했다. 리유는 그 어느 사람이 문제인것이 아니라 동인측에서 내세우는 사람이니까 서인측에서는 의례히 반대해야 했던것이다. 그 반대인 경우에도 역시 그랬다.

심지어는 리순신장군에 대한 론공행상을 하는데도 그들은 말썽을 일으켰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옥포앞바다에서, 당항포에서 특히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일본함선 백여척을 격침하고 일본군 9천여명을 섬멸한 리순신장군에게 왕은 일품으로서 가자(품계를 올린다는 뜻)하자는 의향을 내놓았다. 7월 8일에 리순신에게 보낸 자기 유서에서 《뭇장수들은 수수방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갑옷을 버리고 병쟁기를 꺼꾸로 잡고 달아나는 이때에 경의 용감과 충성이 아니던들 뉘 있어 나라와 더불어 생사존망을 같이할것이랴!》라고 썼다.

왕은 이같이 감격했었다. 하특 왕뿐이였으랴. 온 조선백성이 다 그랬다. 그러나 육식자들중에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기어이 내리깎고야말았다. 리유는 그만한 전공에 일품을 준다면 후일에 더 큰 공을 세운 때는 무엇을 주랴, 그러니까 일품은 빈 죽여만 보이고 아껴둠으로써 리순신으로 하여금 더 분발케 하는것이 좋으리라는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론리를 우리는 최상급의 호위로써 해석하자. 그러므로 비록 조선땅 한끝까지 피란해와서도 아직도 방이 차다덥다하고 국이 달다싱겁다할수 있는 그들이 시석이 비발치듯 하는 전장에서 생사를 겨루어 싸우고있는 우리 장병들의 운명을 마치 자기네가 쥐고있는것이나 같이 생각했다거나 혹은 리순신이 자기네와 동급 혹은 더 높아지는것을 시기해서 그랬다고 해석할 필요는 구태여 없을것이다. 극히 선의로 해석해서 그들은 리순신장군의 인품을 그렇게밖에는 더 높이 평가할줄을 몰랐을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자신이 《일품》같은 눈앞에 매달려있는 미끼가 없이는 더 무엇을 해보잘 의욕도 용기도 없는 그들이니까. 이러한자들의 존재가 후일에 리순신장군을 잡아가둠으로써 일시나마 나라에 큰 손실을 끼친 복선이였다는것을 말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관료배들은 극히 엄숙한 일이라도 할퀴고 헐뜯어서 하찮은 일로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극히 하찮은 일을 엄중한 일로 빚어놓기도 했다. 그들의 이러한 재간으로써 언제나 옥석은 혼동되고 아낄만 한 인재도, 침 뱉을만 한 소인도 구별은 없어졌다. 이같은 관료들의 손에서 환롱되는 정사는 자연 조삼모사로 아침에는 이랬던것이 저녁에는 저럴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므로 《조정공사 사흘 못 간다.》는 말은 론박할수 없는 진리이기도 했던것이다.

《통곡관산월 상심압록풍 조신금일후 상가쟁동서》라고 한 왕의 한탄도 이때의것이다.

《국토의 한끝에서 우러러보는 달에 통곡하고 압록강바람에 마음 아프려든 조정신하들은 그래 아직도 동이니, 서이니 하고 다투는가?》 하는 뜻이다.

이때에 또 왕과 조정신하들로 하여금 바늘방석에 앉은양 더욱더 불안초조케 하는 사변들이 뒤이어 일어났다. 그 하나는 명나라에서 보냈던 군사의 패전이였고 다음은 우리 관군의 패전이였다.

앞에서도 잠간 말한바어니와 명나라 료동부총병 조승훈이 3 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7월 19일 밤에 평양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우리는 박천의 대정강(지금의 대령강)과 안주 청천강에 배다리를 놓아서 명나라군의 행군을 보장했다. 명군이 청천강을 건넜을 때 그들을 맞이한 류성룡과 김명원은 조승훈에게 너무 조급히 서둘것이 아니라고 권고했었다.

리유는 한달째나 계속 오는 비를 맞으며 천여리길을 달려온 그들의 인마가 모두 피로했고 장비도 많이 손질을 해야 할것이기때문이였다. 오래동안 누진 활은 거의 쓸수 없이 되였고 (그들은 조총이 없었다.) 또 그의 군사가 모두 기병인데 그 말들이 우선 제대로 달릴수도 없이 된 형편이였다. 료동 칠백리 벌판에서만 사습해온 말이라 편자가 없는데다 한달동안이나 비를 맞으며 산악지대를 달려온 말들은 발통이 다 처져나갔다. 그래서 아직도 계속되는 장마가 멎기를 기다리면서 좀 쉴 필요가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조승훈은 듣지 않았다. 그는 일본군이 아직도 평양성에 있느냐 묻고 하늘이 나에게 큰 전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것이라고 축배부터 들었다. 우리측에서는 더 만류할수 없었다. 또 그만치 그들의 위력을 믿기도 했던것이다.

평양성내의 지형을 모르는 그들을 이끌기 위해서 적지 않은 우리 군사들이 참가하였다.

이때 왜군은 밤에도 성문을 닫지 않고있었다. 그것이 왜군의 태만인지 혹은 속임수였던지는 알수 없다.

조승훈은 사유라는 유격을 선봉으로 하여 밤 3경에 환히 열려있는 칠성문으로 쳐들어갔다. 선봉군은 대동관근처까지 돌입했다. 그때까지도 잠잠하고있었던 왜군이 일제사격을 하면서 좌우골목에서 쏟아져나왔다. 달려나온 놈들은 모두 귀신의 상판과 사자대가리 같은 탈바가지들을 썼다. 마침 훤히 밝아오는 새벽이라 그런 요물, 흉물들이 쓸어나오는데 우선 명나라 군사의 말들이 놀랬다고 기록들에는 씌여있다. 미쳐날뛰는 말들을 어거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비좁았다. 삽시간에 혼란이 일어났다. 선봉장 사유이하 천총 장국충, 마세륭 등 장수들이 죽었다. 형세불리하다고 본 조승훈은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보통문밖은 농할대로 농한 무논판이라 대렬을 흐트려 퇴각하는 명나라 기마대의 행동은 더욱 부자유로왔다. 여기서 명군은 3분의 1의 병력을 잃으면서 계속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왜군은 승승장구의 기세로 20리 밖에까지 추격해나갔다. 그러나 놈들은 이때에 뜻하지 않았던 반격에 부딪쳤다. 우리 관군이 부산 앞고개에 결진하고있었던것이다. 여기서 날이 저물 때까지 격전이 벌어졌다. 조방장 김응서가 직접 지휘하는 우리 관군의 치렬한 반격을 받게 된 놈들은 많은 시체를 버리면서 다시 평양성으로 쫓겨갈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이때 김응서는 백마(그는 상제였으므로 흰말을 탔다.)를 몰아 바로 성밑에까지 추격하면서 많은 적들을 베였다.

조선군의 엄호에 의하여 일본군의 추격을 면한 조승훈은 그달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고 이러한 사태를 알게 된 왕과 조정신하들은 락담했다.

그후 십여일만인 8월 초하루날이였다. 앞서 말한 부산고개에 집결해있던 우리 관군이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리원익, 조방장 김응서 등의 지휘하에 평양성을 공격했던것이다.

이 전투 역시 비록 실패는 했으나 그 의의는 큰것이였다. 그 경위로 보아서 실패할수밖에 없었던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앞으로 락관할수 있는 새 정세를 찾아볼수 있었던것도 사실이였다.

실패할수밖에 없었던 리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것이다. 첫째로, 우리 력량에 맞지 않는 전법을 취했던것이다. 이때 우리 관군이 평양주변에 새로운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은 했으나 아직은 평양성내의 적을 포위하고 일대 공성전(성새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하는 싸움)을 전개할만 한 력량은 못되였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적의 약한 고리를 끊고 불의습격을 하여 성내로 돌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을 유도해서 우리 편에 유리한 지점에 몰아넣고 치는 등의 기습전을 했어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정공법을 취했던것이다. 즉 튼튼한 성벽을 의지하고있는 적의 대병력에 대하여 이편에서는 적은 병력을 가지고 그나마도 허허벌판인 보통벌에 들어서서 평양성의 4대문중에도 적이 가장 방비를 엄중히 하고있는 보통문을 백주에 정면으로 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무모한 전법이였다. 성내의 적은 기다리고있었다는듯이 자기의 총병력을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적의 조총탄은 우박같이 보통벌을 덮었다. 우리 군사들은 그같이 불리한 처지에서도 용전분투한 결과 성밖으로 반격해나온 적의 한 부대를 섬멸할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 대병력으로써 방비하는 보통문을 격파할수는 없었다. 전투는 늦도록 계속되였다. 마침내 대부대로 반돌격해오는 적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받으면서 우리 관군은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이때의 작전 그자체도 문제였거니와 그보다도 우리 관군은 좀더 인내성을 가지고 시간을 리용해야 할것이였다. 적이 진격해오지 못하는 한 시간은 어데까지나 우리 편이라는것을 알아야 했을것이다. 이때의 일본군은 이상 더 진격할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만치 시간은 우리의 력량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했을것이며 그 반대로 평양성내에 있는 일본군은 날이 갈수록 군률은 해이하고 사기는 저락되고 염병은 류행하고 군량은 소비될 정세에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종당은 그렇게 되였던것이다.

이같이 정세의 성숙을 기다리지 않고 서둔때문에 실패는 했으나 우리 관군, 장병들이 그렇게 서두를수 있었다는것만도 크게 긍정적인 의의가 있는것이다. 즉 일단 파멸되다싶이 했던 우리 관군진용(진을 친 모양새)의 재정비와 아울러 그 사기의 앙양을 볼수 있는것이다. 십여일전에 퇴각하는 조승훈의 군사를 엄호하고 일본군의 추격을 중도에서 격퇴할만치 자기 진용을 재정비한 우리 관군은 한걸음 더 나가서는 우리의 힘만으로도 능히 평양성을 탈환할수 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결과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 동기는 어데까지나 긍정적이였다.

또 한가지 거대한 의의는 이때로부터 우리 관군의 력량이 커진것을 알게 된 소서행장은 이상 더 북으로 진출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된것이였다.

이렇듯 앙양된 사기는 앞으로 7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말할수 없이 엄혹한 시련을 겪어가면서도 끝끝내 우리 힘으로써 침략자 일본사무라이의 군대를 우리 조국강토에서 소탕할수 있었던 우리 력량의 맹아중의 하나였던것이다.

그러나 압록강가에서 언제나 한발을 저겨디디고있던 왕과 그의 측근자들은 그 패보에 오직 전전긍긍했을뿐이였다. 그 결과만을 보고 떨었던것이다. 실록(《조선봉건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무렵에 의주 행재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군신간의 대화가 있었다.

윤두수: 《지금은 민심이 저으기 안정되여 영유 등지에서는 백성들이 다 집으로 돌아와서 호미와 보습으로 병쟁기를 만들고있습니다.》

왕: 《평양에 있는 왜적들이 더는 나오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가?》

윤두수: 《왜적이 겁을 내서 못 나오는 모양이올시다.》

왕: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적들은 필시 어떤 간특한 계책이 있어서 가을선기가 나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닐가?》

이러한것이다.

이때 민심이 저으기 안정되여 호미와 보습으로 칼과 창을 만드는것은 비단 영유 등지의 백성들만이 아니였던것은 물론이다. 앞서도 말한바어니와 이때만 해도 벌써부터 의병을 일으켜 싸우기 시작한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하여 조헌, 김천일, 홍언수, 홍계남, 조호익, 림중량, 정문부 같은 의병장들이 8도 각처에서 일어났었고 그 막하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실로 방방곡곡에서 호미와 보습으로 칼과 창을 만들어가지고 나선 농민들이 대부분이였다. 그러나 나라땅 한끝인 의주에서 이런 정형을 잘 모르고있는 왕과 그 측근자들은 언제 또 일본군이 진격해올는지 모른다는 위구로써 오직 불안했을뿐이였다. 그런중에도 여전히 동이니, 서이니 하는 당쟁을 일삼는 조신들 틈에 끼여있는 왕은 외롭기조차 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한 처지의 왕이 서산대사에게 《이같은 란세를 네 가히 건질수 있겠느냐?》 한것은 결코 야유가 아니였던것은 물론이다.

《네, 전국의 승도들로 하여금 그중의 늙은자들은 제 처소에서 불전에 향을 사르고 천우신조를 빌게 하고 그외의 건장한 중들은 다 전장에 나가서 충성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산은 이같이 대답했다. 이때 그의 등뒤에서 자기 스님의 대답을 듣던 사명당은 혼자 머리를 끄덕이고 또 내심으로는 싱긋이 웃기도 했다. 스님이 이때까지 자기가 해온 일은 말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이 없는 말을 하는데 탄복했던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탄복하기 전에 우선 《로회한 늙은이!》 했을는지도 모를것이다.

부처앞에 분향하고 축원하는것으로써 순순히 물러갈 왜적이 아니므로 서산은 건장한 중들에게는 병쟁기쓰는 법을 익히게 하고 그외의 늙은 중들은 민간으로 내보내서 쇠붙이를 걷어들이도록 해왔다. 모아들인 헌쇠는 동금강암에서 창과 칼과 철퇴와 살촉이 되였다. 그것이 지금까지 해온 일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것이였다. 그러면서도 서산이 그렇게 대답한데는 까닭이 있었다.

서산에게 물은 왕의 말에는 그때도 역시 많은 중들이 있는만치 서산대사가 그들을 불러모아서 승병을 일으킬수 없겠느냐 하는 뜻이였던것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또한 다른 뜻이 없지 않았던것이다. 다른 뜻이라는것은 도통한 불승으로 이름높은 서산대사가 불전에 기도를 올림으로써 천우신조를 빌어서 왜적을 물리치고 이 국난을 면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였다.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천우신조를 빌기 위해서 불전에 기도를 올리는 풍습은 고려 중엽으로부터 더욱 숭상해온 일이다. 이때의 왕 선조의 말에도 그런 의사가 없지 않아있었으므로 서산의 대답이 그랬던것이다. 그 대답이 사실과는 좀 다른만치 거짓말이라거나 또는 상대방을 좀 얕잡아 한 대답이라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앓는 아이의 배를 쓸어주면서 《내손은 약손이다.》 하는 어머니들의 말에 속임수나 궤휼(거짓스럽고 간사스러운것)이 있다고는 할수 없을것이다. 서산대사뿐아니라 선승이란 대개 저자신을 존대하거나 거만하지는 않으면서도 누구나 사람을 어린아이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세속적인 욕망을 버린데서 얻은 배짱이라고도 할수 있는것이였다.

왕은 서산의 그러한 대답에 만족했다. 그는 서산을 도총섭으로, 사명당을 부총섭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각 도 방백들에게는 승병을 홀시 말고 떳떳이 대우하라는 령을 내렸다. 이때의 왕은 사명당에게 환속하기를 권도하기도 했었다.

벌써부터 서산대사문하의 준총으로, 글 잘하고 덕행이 높은 선승으로 이름을 떨쳤던 사명당은 당시 48살의 장년으로서 팔척장신에 괴걸한 풍모를 가진 위장부였다. 우선 그 형형히 빛나는 눈과 준수한 코와 그리고 또 윤이 흐르는 길고 숱한 수염만으로도 헌헌대장부의 기백이 넘치는듯 했다. 그 수염은 그의 유명한 《살발도진세, 존수표장부》라는 말로써 설명되는 수염이였다. 즉 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머리깎고 중이 되기는 했으나 자기는 역시 한 대장부이므로 수염만은 길렀노라는것이다. 그러한 위장부 사명당이 언제나 읍하고 모시는 그의 스님 서산은 비교적 잔작한편으로 오직 깨끗이 세인 눈섭뿐 수염도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그의 풍채만으로 보아서는 사명당이 서산의 제자라고 하기 쉽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이런것이 있다. 이때로부터 15~16년전 사명당이 묘향산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서산문하의 제자가 되였을 때의 일이다. 둘이서 어덴가 먼길을 가게 되였다. 제자의 례로서 그때도 사명당은 스님의 뒤를 따라가고있었다. 그뿐아니라 서산의 몫까지 겸한 무거운 길량식짐을 져야 했다. 날씨는 무덥고 산길은 험했다. 진력이 난 사명은 《요만 늙은이가 스님이라고!》 속으로 투정을 했다. 자기와 비하면 졸소한편이기도 한 서산이 눈에 차지 않기도 했으려니와 《스님이라고》 짐을 나누어질 생각도 않는 모양인 서산이 미운 생각도 들었던것이다. 가다가 어느 령마루에서 쉬고난 때였다. 사명당이 다시 짐을 지려고 할 때 《너는 너 갈데로 가거라.》 하는 뜻밖의 서산의 말에 사명당은 놀랬다.

《왜 그러십니까?》

《네가 네 맘을 들여다보면 알 일이지 물을것이 있느냐.》

이러한 서산의 대답에 사명당은 다시는 그런 맘을 안 가질터이니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었다는것이다. 이 이야기는 서산이 남의 마음속까지도 꿰보는 《타심통》이라는 신통력을 가졌었다는 증거나 같이 전해오는 이야기다. 하특 그런 《타심통》이 아니라도 기걸(끼끗하고 호걸답다는 뜻)하게 큰 사명당이 속으로 투정을 할 때 저도 모르게 나온 방귀소리만으로도 그만 눈치는 누구나 다 했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사명당은 그만치 장대한편이였다. 시작한김이라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언젠가 어느 마을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였다. 닭알을 외벌줄로 쌓는 도승들이 왔다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닭알을 여러 꾸레미 가지고 모여왔다. 닭알을 우에서부터 내려고인다는 서산대사의 재간을 구경하고싶기는 하나 하도 점잖아보이는 로승이라 그런 청을 할수가 없어서 치가리는것이라도 구경하자고 그 제자에게 청했다. 사명당은 쾌히 《그러마.》 했다. 그리고는 닭알을 하나하나 빠개서 입에 털어넣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아차아차 하고 보는 동안에 몇꾸레미를 다 삼킨 사명당은 마침내 손을 들어 배에서 목까지 금을 그어보이며 《이속에다 가렸다.》고 했다. 사람들은 닭알 몇십알을 단무릎에 삼키는것만으로도 희한한 재간같이 구경했다는 이야기다.

사명당은 술을 말로 마실수도 있고 한마리 돼지를 먹을수도 있었다. 이런 점으로 사명당은 중같지 않은 중이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자기 스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삼가며 서산곁에 모시는양을 보면 그 팔척장신의 위장부가 마치도 어버이곁에 감겨도는 어린 자식같이 귀여운 태가 보이기도 했다. 그런 때의 서산에게서는 더욱더 어쩔수 없는 무게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체통만 한 바위도, 옹근 쇠덩이도 그렇게 무거울수는 없을것 같았다. 하나의 이끼돋친 달망진 바위 그러면서도 그는 젊은 제자 사명당보다도 더 표정이 풍부한편이였다. 눈물도 웃음도 있는 바위라고 할가? 사명당은 퍽 대범한편이였다. 서산은 다감한 서정시인이였고 장년 사명당은 산문가이며 정론가인편이였다. 당당하게 수천마디의 말로 조금도 꾸김없이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유세객일수도 있었다.

왕 선조는 그러한 사명당에게 《네가 머리를 기르고 세상에 나온다면 나라에 중히 쓰이리라.》고 하여 환속을 권했던것이다. 이때 사명당은 《중도 이 나라의 백성이므로 신은 역시 한 중으로서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이런 대답으로써 환속하기를 거절했다.

사실 그는 중그대로 7년간에 걸친 국란에 헌신적으로 싸우고 일했다. 이듬해인 계사년 4월에 한성을 회복한 후부터는 년로한 서산을 대신하여 도총섭이 되였고 마침내는 일국을 대표한 외교가로 활약하게 되였던것이다.

임진란후 풍신수길의 뒤를 이어 일본의 정권을 잡은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간청에 의해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된 때 조선대표로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명당이 그 얼마나 우리 나라의 위신을 선양했던가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잘못을 사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것을 약속하고 사명당의 요구대로 전쟁중에 붙들어갔던 우리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우리는 《임진록》에서 사명당이 일본 갔을 때의 이야기를 진진한 감흥으로써 읽을수 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도통한 중이였다고 일러왔던만치 《도술》이니, 《진술》이니 하는것에 가탁해서 그 작가가 좀 지나치게 상상력을 발동시켜 꾸민 이야기(물론 그렇기때문에 《임진록》이 《임진록》다운 맛이 나는것이지만)도 없지는 않으나 그러나 일국의 대표로서의 사명당이 그 얼마나 당당했던가를 우리로 하여금 가히 짐작케 하는것이다. 그중에 조선사신을 떠보기 위해서 일본사람이 길가에 쳐놓은 백간병풍의 글을 사명당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한번 읽어보고 다 외웠다는것 같은것은 실지 있을수 있는 이야기다. 그것은 물론 한문이였을것인데 그 당시의 일본에는 아직도 저희것으로써 백간병풍을 채울만 한 글이 없었다고 해도 별로 실수될것은 없을것이다. 그러니만치 그것은 필시 사명당이 이미 잘 아는 한문이였을것이다. 물론 그 글을 다 외울수도 있었겠지만 한간 접혀있는데는 일부러 빼고 외웠다는데 사명당의 기지를 생색나게 묘사한 작가의 필치의 묘미가 더 나타나는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때 사명당을 영접해들이는 정문에 시문(是門)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 말을 타고 그앞에까지 갔던 사명당은 그 현판을 떼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했다는것이다. 그 까닭은 《是》자를 파자하면 《日下人》이 된다. 이것을 일본의 뜻으로 보면 일국의 대표가 그런 문으로 드나드는것은 굴욕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是門》은 무의미한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깜찍한 생각으로 그 장난을 했던 일본사람들은 황겁히 그것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있을만 한 이야기다.

있을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

임진란 중기에 사명당은 울산근처에서 왜장 가등청정이와 몇번 만난적이 있었다. 이때의 일본군은 4월에 한성서 쫓겨난 후부터 이미 기세가 꺾이고 찌부러져서 남쪽 한모퉁이 울산 동래근처에 구겨박혀있던 때였다.

사명당은 가등청정이와의 교섭을 비롯하여 이때부터도 한 외교가로 활동하기는 했으나 그 목적이 결코 일본군과 강화를 하기 위한것은 아니였다. 그는 일본군이 우리 조국땅을 한치라도 깔고있는 한 적과의 강화는 있을수 없다고 주장했던것이다. 우리는 그의 란중일기인 《분충서난록》에서 가등청정이와 주고받은 필담중에서 다음과 같은 일절을 찾아볼수 있다.

《너희가 우리 나라를 침략하게 된것은 모두가 소서행장과 평의지때문이다. (이것은 가등청정이와 직접 하는 말이기때문에 이렇게 한 말일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비록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모두다 이를 갈며 그자들의 고기를 씹고저 하거늘 우리 나라가 비록 너희놈의 손에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일본과 강화라는것은 있을수 없다.》

그러므로 사명당이 가등청정이를 몇번 만나러 갔던것은 주로 적의 정형을 살피기 위한것이였다.

한번은 가등청정이가 물었다.

《당신네 나라에서 가장 보배로 치는것은 무엇인가?》

이에 사명당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 보배라고 할것은 그대의 머리다.》라고 대답했다.

눈이 휘둥그래진 가등청정이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그대의 머리에 수천금의 상금이 붙었으니 그 아니 보배라고 하겠는가?》

이러한 사명당의 대답에 가등청정은 쓰겁게 웃었다는것이다.

이런 일화는 사명당의 그 호탕하고 뢰락한 인품을 방불케 하는 이야기다.

본줄거리로 돌아가자.

왕명을 받아 8도승병 총대장이 된 서산은 비로소 정식으로 전국 승려들에게 의병을 일으키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1 000여명의 승병들을 거느리고 금강산에서 찾아온 사명당과 순안에서 부대를 합치였으며 그를 부총섭으로 삼고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여기에는 각지의 많은 중들이 호응하여 의병투쟁에 참가하였다. 서산이 왕명을 받기 전에는 또 왕이 각 도 방백들에게 승병들을 떳떳이 대우하라는 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승병은 합법적이 아니였다. 어간의 사정을 알수 있는 문건들이 있다. 이미 말한바 서산의 사신을 받고 충청도에서 일어났던 승병의 통문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우리들이 일어난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 그런것은 아니다. 만일 죽음을 저퍼하는 마음이 있는자는 우리 군사에 들어오지 말라.》(실록-임진 8월 26일)

즉 합법적이 아니였던것이다.

또 다음 같은 례도 있다. 강원도 도순찰사의 종사관 겸 초모대장인 홍린상이가 관군을 모집하는 통고문가운데는 《…애비도 없다, 임금도 없다 하는 중들까지도 분기하여 무리를 모아가지고 왜적을 치고있거늘 황차 우리는 선비며 또 례악(례의도덕)의 가르침을 멕감듯 하여 군부(임금)에 대한 대의를 조금은 안다고 하는 우리들일가보냐.》 이런 문구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산대사가 8도 16종 도총섭으로서 발표한 격문은 큰 영향력이 있었다. 이때까지 세상사를 모른다 하고 산속에 들어앉아 례물을 일삼던 중들도, 목탁을 치며 동냥하던 중들도 모두가 장삼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륙환장을 창칼로 벼려들고 전민족적으로 일어난 진충보국의 성스러운 조국전선으로 달려나오게 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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