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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무용가의 운명

 

최 승 희(무용가)

 

•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출생.

• 1938년 국제무용심사원으로 추천.

• 1946년 10월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

•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969년 8월 8일 사망.

                                                           

 

 

무용은 률동의 예술이다.

붓대와 종이로 글을 쓰는 시인이나 건반과 악보로 노래를 울리는 음악가와는 달리 무용가는 자기 온몸의 률동으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젖히고 그 심장우에 열정의 시와 노래를 새겨주는 률동의 시인, 률동의 가수이다.

록화촬영이나 무용표기법 같은것이 없던 지난날 무용가가 무대를 떠나는것과 함께 사라져버리고마는것이 무용이였건만 세월의 락엽도 민족의 넋을 안고 나래쳤던 최승희의 무용을 덮어버릴수 없었다.

압제의 사슬에 육체도 넋도 꽁꽁 얽매였던 민족수난의 시기에 태여난 무용가 최승희가 눈물젖은 춤과 률동으로써 어둠속에 터뜨린 시와 노래는 무엇이였으며 따사로운 새 조국의 품에 안겨 한없이 은혜로운 태양의 해살을 받아 엮어낸 시와 노래는 무엇이였던가.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최승희는 1911년 11월 서울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으로서 조선봉건왕조시기 참봉이라는 말석벼슬을 지낸바도 있는 학식이 높고 견문이 넓은 사람이였다.

최참봉은 서당훈장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므로 이웃들은 최승희의 아버지를 《참봉님》으로 존경하여 불렀다.

참봉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여러 관청들에서 실무를 맡은 봉건관료직제의 가장 낮은 자리에 해당하는 종9품 벼슬에 불과했으나 최승희의 집안은 궁색함을 모르고 지낼수 있었다.

그가 자서전에도 쓴것처럼 《따뜻한 비단이불과 요우에서 세상에 괴롭고 아픈 불행이라는것이 있다는것을 도무지 모르고 어린 병아리와 같이 어머님과 아버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아가면서》 자라났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순간의 짧은 꿈처럼 사라져버리였다.

일제의 침략의 마수라고 할수 있는 동양척식회사는 온 나라의 밭들과 함께 최승희네 토지도 집어삼켜버리였다.

그의 집은 졸지에 빈농의 나락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가게 되였다.

가난과 주림은 최승희네 집안에 설음과 눈물을 가져다주었다.

이에 대하여 최승희는 자기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쓰라린 운명의 검은손은 세월의 풍랑속에서 괴로움과 아픔을 모르면서 귀엽게 자라던 내 몸에 닥쳐오고말았다. 언제까지든지 웃음과 사랑으로써만 나를 어루만져줄줄 알았던 나의 운명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거칠고 풍파사나운 길에 떨어지고말았다.

우리 집에서는 승일오빠가 애써서 쓴 얼마 안되는 원고료를 제외하고는 아무 수입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두끼의 밥도 끓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

하지만 이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운명도 결코 최승희를 실망시키지는 못하였다.

최승희가 눈물 잘 흘리는 연약한 계집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그의 작은 가슴속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힘으로 무너져가는 가정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부모님의 여생을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결심이 꿈틀거리군 하였다.

최승희의 성장에서 오빠 최승일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는 오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오빠는 진보적문학자로 활동하면서 소설을 쓰고있었는데 나에 대한 오빠의 애정과 지도가 얼마나 나를 격려하였는지 모른다.

오빠는 나에게 사물현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리해의 길을 열어주며 가르쳐주었다.

나는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시와 소설을 읽었다.》

일찌기 문학에 뜻을 두고 대학을 나온 오빠는 당대 사회를 비판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내용으로 한 단편소설 《파산》을 비롯하여 여러편의 소설들과 희곡작품들을 창작한 재능있는 작가였다.

문학에서뿐아니라 음악과 무용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는 왜색왜풍이 짙어가는 탁류속에서 민족문학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굳건한 사람이였다.

그가 보건대 녀동생 최승희는 천성적인 예술적감각과 재능으로 보나 육체적인 조건으로 보나 민족무용을 살리는데 한몫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동생에게 우리 나라 민족무용의 한심한 실태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민족무용형식을 정립하여 살려내야 한다는데 대하여 열정을 담아 이야기하군 하였다.

숙명녀자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이던 최승희는 오빠가 들려주는 이 말이 애국적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을 자기의 운명적인 과제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나이상 먼거리에 있었다.

사실상 민족무용을 살리기 위해 자기 한몸을 내대야 한다는 결심을 내리기에는 최승희네 집안을 덮은 생활이 너무도 궁핍하고 눈물겨운것이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최승희의 마음속에 가까운 예술은 무용보다도 음악이였다.

그는 자기가 무용가로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었다.

하기에 최승희는 자기의 수기에서 《… 내가 학교때부터 무용가가 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과성적은 우등, 창가도 제법 잘하였으니 학교의 무슨 모임에서든지 의례히 내가 독창을 하게 된 까닭에 장래에 음악가가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썼던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객관적인 환경은 최승희를 음악전공에로 떠밀었다.

자기의 앞길에 대해서 별로 방책이 없는 상태에서 숙명녀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였을 때 모교의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를 도꾜에 있는 사범학교나 음악학교에 보낼것을 계획하고있었다.

하여 그는 열여섯살 되는 다음해 봄을 기다리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최승희는 그 1년이 10년처럼 길게 생각되였고 거기에 가정적인 설음과 슬픔까지 겹쳐 가슴이 터지는듯 아파났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음악을 하고싶어도 하루하루 연명하기조차 어려운 가난한 집 딸이라는것을 뼈아프게 절감하면서 제일 품들이지 않아도 될 사범학교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사범학교시험에서 800명의 수험생중 7등으로 합격은 하였지만 나이가 어린탓에 그곳에마저 갈수 없게 되였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는 자기 운명의 앞길을 절감하면서 그는 몸부림쳤다.

하지만 오빠는 누이동생의 앞길을 두고 조금도 실망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으며 늘 이야기하던 민족무용의 길을 새롭게 개척하는데로 그를 떠밀어주고 고무해주었다.

오빠는 녀동생에게 한탄만 하지 말고 보다 유익하고 광활한 미래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그 길이 다름아닌 민족무용을 정립하는 길이라고 일깨워주었다.

오빠에게는 우리 인민이 고유한 자기의것으로 세상앞에 내세울 똑바른 무용이 없는것이 늘 가슴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던것이다.

한편 동생의 성격이나 몸매, 얼굴생김새, 정서를 보아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가운데서 무용이 꼭 알맞으며 동생이 결심만 하면 무용에서 크게 성공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있었다.

그래서 최승일은 녀동생이 음악학교나 사범학교 가는 날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전문무용단에 들어가 무용을 배울것을 요구하였고 우리 나라 무용예술을 잘 알고 발전시키자면 다른 나라 무용도 깊이 알아야 하며 대비적인 관찰속에서 민족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무용을 창조할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고 간곡하게 일깨워주었다.

오빠의 이런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최승희는 점차 오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마을사람들이 추는 민간적인 춤에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살피였으며 제나름으로 춤동작을 해보거나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음악인가, 생계유지를 위한 사범학교인가? 아니면 무용인가?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망설이던 최승희는 드디여 무용을 자기 운명의 배로 삼고 거기에 돛을 달았다.

이 운명의 선택이 옳았는가 틀렸는가는 운수나 세월이 증명해주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노력과 열정이 증명해줄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최승희는 완강하게 반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복해내고 이웃들에게도 자기의 생각을 설명해준 다음 1926년 3월 고향인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어느 한 무용단에 들어가게 되였다.

일부 친척들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최승희의 이 행동을 두고 격분하여 소리쳤다.

《춤을 추다니, 기생이 된단 말이야?》

《굶으니까 딸을 기생으로 판다나. 량반집도 그러나?》

《하여간 춤추는 사람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최씨네와는 섭섭하나 결별해야 해!》

귀아프고 가슴저린 비난이 비발치듯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최승희가 이 비난의 소나기에 겁을 먹거나 주저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강하게 벋디디고 일어나 오빠와 합심하여 자기의 목적달성에로 매진한것이였다.

나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딸을 리해하여주었고 옹호하여주었다.

온갖 민족적멸시와 천대속에 종일토록 잡일을 하면서 망국민의 설음을 체험할대로 체험한 최승희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 하나 조선민족무용의 우수성을 온 세상에 떨치고야 말겠다는 민족적자존심과 야심을 굳히며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는 무용기초련습으로부터 각 나라의 무용특성에 이르기까지 파고들었고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조선민족이 창조한 무용이라면 아무리 세습적이고 작은것이라고 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다른 나라의것과 대비해보면서 우리것을 더 잘 살려낼 방도를 모색하였다.

어머니는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딸에게 따뜻하고 고무적인 편지를 보내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 집이 구차해서 딸을 기생으로 팔았다고들 수군거린다. 너는 기어이 훌륭한 사람이 되여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부럽게 해라.》

최승희는 어머니의 이 편지를 가슴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반드시 훌륭한 무용가가 되리라고 굳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흘러간 3년간에 최승희는 무용가로 자라나 민족무용에 대한 지향을 확고히 세웠다.

그는 오직 조선의 고유한 춤가락을 찾고 습득하는데 목적을 두고 피타는 노력을 아낌없이 바치였다. 그 바탕에는 민족의 넋을 지키고 억세게 살려나갈 의지가 깔려있었고 식민지노예의 운명에서 인간이하의 고생살이를 하는 자기 민족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깔려있었다.

최승희는 민족무용에 대한 자기의 꿈과 지향을 실현하기 위하여 1929년 10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 나라의 여러곳에서 활동하고있는 무용가들속에서는 전통적인 민족무용(민속무용이 많았음.)을 예술화, 무대화하려는 기운이 높아가고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두가지 측면을 띠고있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민족무용형식을 가공함이 없이 그대로 추어야 한다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민족적인 성격을 살리면서도 그 형식은 현대인의 미감에 맞게 현대화하여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것이였다.

최승희는 무용을 배우고 우리의 민족무용과 다른 나라 무용을 대비해본데 기초하여 단호하게 민족적인 성격을 살리되 당시 사람들의 미학정서적요구에 맞게 새로운 무용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자립으로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자기의 의도대로 교육도 하고 창작출연도 하였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3년동안에 최승희는 9회에 걸쳐 신작무용을 발표하였고 연구생들을 새로운 민족무용창작과 연구에로 분발시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그가 새롭게 창작한 무용작품들중에는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방랑인의 설음》과 같은것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밑에서 신음하고있는 망국노의 슬픔과 고통, 비참한 생활현실을 반영하고있었다.

최승희는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편답하면서 전통적인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다듬어갔고 현대적미감에 맞게 세련시켜 무대에 올리였다.

그는 무당들도 만나보고 승무를 보기 위해 험한 벼랑길도 톺았으며 궁중무용체험자들도 만났다.

그리고 지방마다 다르게 변색되여 이어지는 민간무용들인 농악무, 탈춤, 기생춤, 포수들의 사냥춤, 바가지장단으로 흥취를 돋구는 두레놀이의 춤 등 여러 부류를 분석하고 특징들을 찾아 새로운 민족무용창작에 구현하였다.

그리하여 최승희는 민족적색채가 짙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고르고 다듬어 완성하는데서 커다란 전진을 이룩하였다.

최승희의 첫 무용공연은 1930년 1월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의 후원하에 서울 경성공회당에서 막을 올리였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몸매,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무대에 나선 최승희가 다양하고 새로운 춤동작으로 넓은 무대를 황홀하게 휩쓰는것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민족성이 짙고 우아한 그의 첫 공연에 완전히 매혹되였고 우리의 민족무용의 훌륭함과 아름다운 미래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출판보도물들은 그의 공연에 대하여 련일 대서특필하였다.

공연은 그해 10월에도 그 다음해 정월에도 계속되였는데 그에 대한 절찬이 고조를 이루었으나 최승희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았고 보다 더 큰 목표를 걸고 이악하게 우리 무용을 다듬고 세련시켜나갔다.

그의 포부는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조선민족무용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며 그것을 통하여 조선사람의 우월함과 그 넋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경탄시키고 머리숙이게 하자는 야심과 함께 그 과정에 수난당한 민족의 울분과 원한을 온 세계앞에 터쳐놓고 호소하려는 강렬한 지향이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나라들을 밟아가며 우리의 무용으로 우리 민족의 바람을 일으키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일본, 미국, 프랑스, 벨지끄, 중국 등지로 다니며 《에헤라 놀아라》, 《마을의 풍작》, 《승무》, 《초립동》, 《감옥에 갇힌 춘향》, 《아리랑》, 《고구려의 전쟁무》 등 조선의 멋과 맛이 풍만한 춤들로 자기의 무대를 황홀하게 장식하여 매개 나라 극장들에서 파문을 일으키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1935년에 제나름대로 최승희의 민족무용을 소개하는 《반도의 무희》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신문지상에서는 《그녀의 머리, 그녀의 가슴, 그녀의 혈관과 춤속에 어느때나 충만된 민족애야말로 가장 찬양해야 할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다만 눈으로 보기만 하는 무용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접촉을 의미하는 무용이다.》라고 떠들었다.

1937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세계 각국 순회공연때 미국으로 간 최승희는 쌘프런씨스코에서 나라잃은 민족의 눈물겨운 감정을 안고 울며 춤을 추었는데 그것은 이곳에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이 공연을 관람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들도 울고 최승희도 울었다.

나라잃은 설음, 떠나온 고국에 대한 그리움, 망국민의 절통한 심정이 최승희와 그들의 감정을 하나로 련결시켜 놓았던것이다.

빠리에서는 최승희가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이채로운 조선옷차림에 시민들이 반하였는데 그가 무용 《초립동》을 공연한지 한주일만에 그 초립동모자가 전체 빠리시에 쫙 퍼지였다.

1938년 벨지끄의 브류쎌에서 열린 제2차 국제무용콩클에서는 최승희를 국제무용심사원으로 추천하였다.

이렇듯 최승희의 황홀한 률동과 매력적인 용모는 관중의 대인기를 끌었다.

신문과 방송들이 그에 대해 아낌없이 떠들어대였고 최승희에 대한 소문은 신비화되여 퍼져갔다.

간악한 일제놈들은 최승희를 빌어 제놈들의 위상을 돋구기 위하여 《샤이쇼끼무용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공연하라고 강박하여나섰다.

하지만 최승희는 단호히 그 강요를 물리치고 《최승희무용단》으로 세계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였고 자기들이 조선의 무용가라는것을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웨치였다.

그러나 일제에게 짓밟혀 세계지도에서 자기 이름마저 잃어버린 조선을 알려고 하는 나라도 없었고 더구나 식민지나라의 무용배우를 《조선의 배우》로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세계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환영을 받기는 했으나 최승희는 무대우에서 자기를 비치는 일장기의 후광에서 벗어날수 없음을 가슴찢기는 아픔속에서 절감하였다.

그는 세계올림픽경기대회 마라손경기에서 1등한 손기정이 어째서 일본인이기를 거부하고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리준이 어째서 조선독립을 부르며 할복자살하였는가를 통절히 깨닫게 되였다. 조선무용으로 조선민족의 넋을 떨치려 애썼건만 조국이 없었기에 그의 노력은 식민지민족의 한 성원의 몸부림으로서 일제의 리용물에 불과했다는 쓰라린 체험만을 가져다주었다.

자기 조국이 없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여난 정열가도 노예나 다를바가 없다는것이 최승희가 깨달은 교훈적인 진리였다.

소박하나마 자기의 작은 가슴에 품은 민족문화의 얼을 찾고저 무용이라는 운명의 배에 돛을 달았던 최승희의 반생항로는 식민지인의 쓰라린 좌절과 깨달음으로 눈물에 젖어있었다.

그자신이 말했듯이 자기가 무대우에서 아무리 화려한 률동을 펼치며 매혹적인 웃음을 짓고있었어도 그것은 망국의 설음이 빚어내는 가슴아픈 몸부림일따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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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1) 해님을 목메여 부른 소녀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2) 태양의 품을 찾아 수천리 운명의 선택 3^bb 1. 한생을 태양의 가수로 3) 《하늘처럼 믿고 삽니다》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1) 항쟁의 거리에서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2) 그가 안긴 품 운명의 선택 3^bb 2. 금별메달에 비낀 한생 3) 서울에 안고 간 김정일화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1) 운명의 배에 돛을 달고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2) 깃들인 인생의 보금자리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3) 우리 장단, 우리 춤가락으로 운명의 선택 3^bb 3. 한 무용가의 운명 4) 최승희의 무용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1) 설음의 시, 눈물의 동요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2) 한생을 꽃봉오리로 살고싶어 운명의 선택 3^bb 4. 《동요할아버지》가 부른 노래 3) 그의 삶은 영원하다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1)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2) 인생의 가치 운명의 선택 3^bb 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3)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1) 《해변》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2) 《5월의 농촌》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3)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운명의 선택 3^bb 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4)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1) 족쇄를 찬 희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2) 환생 운명의 선택 3^bb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3) 웃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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