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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 회


35. 왜적이야!


산마루에서 혹은 골짜기에서 일하던 장정들이 먼저 봉수대로 달려갔다.

《어데요?》

《어느쪽이요?》

모여든 사람은 저마다 웨쳐물었다.

《보통문이요? 칠성문이요?》

《보통문! 보통문이야. 저기 보이지 않아!》

늙은 봉군은 숨가쁜 소리로 웨치면서 보통문을 가리켰다.

《보통문?》

《어데 뭐 보이우?》

《보통문을 보지 말구 이제는 그 바깥의 수수밭골을 보라구. 저 먼지를 보라구. 수수밭골루 몽당이 자욱히 일어나지 않아?》

과연 그렇다. 지금 보통문어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 성문밖에서 좀 떨어져있는 넓은 수수밭사이로 떠오르는 먼지만이 보일뿐이였다. 먼지는 바람결에 일어나는 먼지와는 달랐다. 오불꼬불한 수수밭사이의 길을 따라서 외줄기로 일어나는 먼지였다. 바람이 없기도 했다.

《몇놈이나 됩디까?》

《저렇게 먼지가 이는걸 보면 많이 쓸어나오는게 분명하지 않아.》

사람들은 또 이같이 늙은 봉군에게 묻기도 하고 혹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제 짐작대로 지껄이기도 했다.

이때 서산이 고충경이와 법근이랑을 데리고 마을에서 올라왔다. 지금 그는 가벼운 나무지팽이대신에 주석손잡이끝에 주석고리들이 달린 선장(일명 륙환장)을 짚었다. (그 선장은 지금도 묘향산 보현사에 보관되여있다.)

봉수대 축석에 올라서서 바라보던 서산이 물었다.

《저놈들중에 말탄 놈이 있지 않았습니까?》

《혹시 모르지요.》

늙은 봉군의 대답은 모호했다.

《말탄 놈이 앞에나 있었는지… 내 눈에 띄였을 때는 문통으루 그저 보발루 달려나오는 놈들만이던데-》

《필시 말탄 놈두 있는 모양이올시다.》

옆에 서있던 고충경이가 서산의 말을 받았다.

《적이 많지 않더라도 그중에는 말을 달리는 놈이 있길래 저렇게 먼지가 일것이올시다.》

과연 수수밭머리로 말탄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자 그뒤에는 장달음을 치는 보졸들이 다음다음으로 나타났다. 적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각각 큰 나무와 바위뒤에 붙어서거나 숲속에 들어앉아서 놈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중에는 《한놈.》, 《두놈.》 세는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상거가 멀어서 그저 까뭇까뭇한 거미새끼같이만 보이는 적의 수효를 똑똑히 셀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적이 소부대로 출동했다면 필시 주변의 촌락들을 략탈하려는것인데 어데로 방향을 잡는가? 보통강을 건너서면 갈래길이 많았다. 그리고 창광산, 대타령 같은 가까운 부락들이 있다. 이 잡약산마을도 그중의 하나였다. 시급한 대책이 있어야 했다. 우선 적들과 직접 싸울수 없는 아낙네와 늙은이들은 산골짜기로 피신할것이였다. 장정들은 적의 형세를 보아서 능히 당해낼만 하면 접전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면 뒤산으로 종적을 감추거나 혹은 더 뒤로 물러서야 할것인데, 그런 경우에는 먼저 피신한 로약자들을 앞세우고 떠나야 할것이였다. 이런 조치는 적이 십리를 다가오면 그동안에 우리도 십리를 물러설수 있다는 타산으로써 작성한것이다.

또 수수밭사이로 들어섰다가 다시 논벌 한가운데로 나타난 적들은 이 방향으로 난 큰길로 들어서는 모양이였다. 이제는 놈들의 수효를 짐작할수 있다. 좀더 가까와지기도 했으려니와 곧은길에 들어선 적들의 선두와 꼬리가 완전히 드러났다. 마치 길가에 내려앉은 까마귀떼가 서로 쫓고 쫓기며 몰려다니듯이 대오를 흐트려 장달음치는 놈들이라 일일이 셀수는 없지만 어쨌든 삼십명이 되나마나한 수효다.

어떻게 할것인가? 현재 여기는 60~70명의 장정들이 있다. 지금 출동한 놈들의 배는 된다. 그러나 병쟁기를 쓸줄 아는 사람은 몇이 안된다.

사수로 나설수 있는 사람이 고충경이와 동금강암에서 나온 젊은 중 한사람외에 돌질을 좀 할줄 아는 애숭이 석전군 현차돌이까지 쳐서 단 세사람뿐이고, 살수라고 할수 있는 사람은 승검술 법근이외에 역시 칼을 쓸줄 안다는 동금강암의 중 한사람뿐이였다. 창을 가진 두 봉군이 있기는 하나 그들은 창질을 할줄 알아서보다도 봉군도 군총명색이라 그저 창을 맡아가지고있달뿐이였다. 이렇게 따지고보면 병쟁기를 가지고 싸울수 있는 사람은 돌팔매까지 쳐서 겨우 다섯사람뿐이다.

그러나 이같이 따지는것은 단지 한낱 소심한 천착(억지로 끌어다가 리치에 맞도록 말을 하는것)일따름이였다. 적의 형세를 짐작하게 되자 《더 볼거 없지 않소? 이제는 내려들 갑시다.》, 《그래, 어서들 내려갑시다.》 하고 나무숲속에 모여섰던 장정들이 이렇게 웨쳤다.

그러자 벌써 숲속을 꿰서 마을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낫 혹은 도끼들이 들려있었다. 이때 봉수대 축석밑에서 《가만, 좀들 기다리소.》 하는 소리가 났다. 봉수대를 쳐다보던 사람이 서산대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것 같아서 한 말이였다. 산마루의 드높은 축대우라 지나가는 바람결에 붉은 가사를 나붓기며 마을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합장하고 섰던 서산이 얼굴을 들었다.

《별말씀이 없습니다. 소승의 생각도 여러분과 같으올시다.》

잠긴듯 한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던 로승은 목을 가다듬어 한층 소리를 높였다.

《여러분같이 의로운 백성이 있고서는 나라가 망하는 법이 없고 여러분같이 용감한 사람들앞에서는 굴하지 않을 적이 없을것이올시다. 비록 낫과 도끼만을 가지고도 적을 맞아 싸우시려는 여러분이야말로 이 강산, 이 나라의 주인이올시다.

지금 저기 요두전목(머리를 흔들고 눈을 굴린다는것)하며 내달아오는 왜적아수라의 무리는 이 나라 주인들의 손에 이제 이 땅에 한줌 흙을 보탤뿐 무주고혼이 될것이올시다. 여러분의 말씀이 옳습니다. 내려가십시다, 내려가십시다.》

《내려들 갑세다.》

《옳소, 어서들 갑세다.》

서산의 말이 끝나자 숲속에서는 웨치는 장정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낫과 도끼들이 쳐들렸다. 사람들은 흥분했다. 쏟아지듯 발걸음소리를 내며 언덕으로 내달렸다. 그런중에도 잘 자란 풀판을 만나는대로 풀을 베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마을주변으로 돌아가며 매복할 때 소용이였다.

마을앞 넓은 마당으로 모인 장정들은 싸울 차비를 하기에 저마다 바빴다.

《아니, 왜 상게 이러구들 있소?》

《참말 어서 바삐들 떠나가라구. 저놈들 눈에 띄지 않게…》

여기저기서 이런 말소리들이 났다. 아닌게 아니라 산너머로 피란했어야 할 아낙네와 로인들 몇이가 아직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리고있었다. 그들도 이미 뒤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로약자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에 남았던 세간과 이부자리들을 꾸려들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선뜻 발길이 돌아서지 않는 모양이였다.

이때 봉수대에서 내려온 젊은이가 놈들이 지금 막 서장대앞으로 달려오는중이라고 했다. 서장대앞에서도 갈래길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 잡약산길이 그중 바른길이다. 이제는 불과 3리, 6월 염천 뙤약볕에 장달음을 쳐온 적들의 걸음발이 다소 느려진다치더라도 접전은 곧 시작될것이다. 그래도 그 아낙네들과 로인 몇이는 떠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눈치를 본 서산은 고충경이를 비롯한 몇몇 장정들과 의논을 하다말고 녀인들을 돌아보며 《여기 계실것이 아니라 부엌에 남겨둔 솥들에 다 간장을 조금씩 칠해놓으시구는 곧 떠나시는것이 좋겠소이다.》 이런 말로써 속히 피신하도록 일렀다. 녀인들은 그 까닭은 모르면서도 로승이 하라는대로 솥에다 간장칠을 했다. 그러나 역시 떠나지 않고 다시 모여왔다.

지금 떡돌앞에서 돌을 모아놓고 손맛을 보아가며 고르다가 마구 생긴 돌의 뿌다구니를 다스리기도 하는 차돌이의 어머니도 그중의 하나였다. 벌써 그런 눈치를 챈 주복이는 저의 처에게 한번 꽥 소리를 질러서 어머니를 재촉해가도록 쫓아버렸다. 보패도 좀 주춤거렸다.

그러나 벌써부터 칼을 빼들고 섰던 법근대사가 자기를 한번 보자 화살뒤초리의 깃을 손질하고있는 오라버니한테로 가서 뭐라고 말하는것을 보고는 고충경이가 돌아볼 사이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나고말았다. 편석대사 역시 한참이나 서산의 등뒤에서 합장하고 서있었다.

《어서, 아이 데리구 올라가라구.》

《괜히 남한테까지 앨 멕일라구 이러나?》

이렇게 타이르는 장정들의 소리가 나는 마당 한가운데서 륙환장을 짚고 서있는 서산대사의 이마에서는 전에없이 방울방울 맺힌 땀이 흘렀다.

륙환장은 그 손잡이끝에 달린 여섯개 주석고리들이 금시 소리를 낼듯이 흔들리기도 했다. 손이 떨리는 모양이였다. 이때 저편 맨끝의 버드나무아래서 큰소리가 났다.

《왜 이래, 제발 답답스레 굴지 말라구.》

《내가 답답하우? 아니, 그래 다 늙은것 하나 빠진다구 접전을 못한답디까.》

이 동네 로농 김첨지내외간에 오손도손하던 말다툼이 마침내 커진 모양이였다.

《글쎄 같이 가자구요. 안 가면 나두 여기 있갔예요.》

마누라의 새진 소리가 더욱 날카롭게 들렸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그리로 쏠렸다. 앞뒤집에서 김첨지를 잘 아는 이 동네사람들은 더우기 《어떻게 되나?》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천하 의젓하고 입이 무거운 김첨지는 그와는 반대로 좀 기승스럽고 수다스럽기도 한 마누라와 내외쌈을 한적도 별로 없거니와 혹시 가다 다투게 되는 때라도 제 주견을 끝내 세워본적이 없이 손을 내젓고 물러서는 성미인것을 잘 알기때문이였다.

《하! 이런 소견머리 봤나. 기어이 날 망신을 시키지 못해서 이러나!》

《글쎄 같이 가자구요.》

또 한번 새진 소리를 지른 그 작달막한 마누라는 김첨지의 소매를 끌었다.

《갑세. 그래, 같이 갑세. 할수 있나. 같이 갈테니… 내 집에 잠간 들렸다올테니 이건 놓으라구.》

마누라의 손을 떼친 김첨지는 허둥지둥 저희 집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걱정스러운중에도 《집에는 뭐 하러 가나?》 하는 호기심이 없지도 않았다. 다시 집에서 나오는 김첨지 손에는 굵다란 장바 한컬레가 들려있었다. 사렸던 장바를 풀어서 낫으로 한토막을 썩 잘라쥔 그는 《나는 우리 마누랄 뒤산 나무에다 붙들어매두고 오갔소. 이편네두 소용되거들랑 갖다 쓰우.》 하며 남은 장바를 마당 한가운데 내던졌다. 한순간 마당안은 더욱 조용해졌다. 웅성거리던 말소리도, 근심스러운 표정들까지도 쓸어버린듯 엄숙해졌다.

《자, 보라구, 그래두 썩썩 못 갈텐가.》

마침내 어느 한 장정이 또 이같이 자기 안해를 타이르는 말이 들렸다.

《정말 이러면 우리 도리두 안되갔소.》

이런 말과 함께 어린 손자의 손목을 잡고 섰던 한 로인이 먼저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나섰다.

《이젠 님자두 그만했으면 저분네 따라가라구.》

김첨지의 부드러운 말이였다. 무명실꾸리같이 자그마한 그의 마누라도 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때 또 연대에서 젊은이가 달려왔다. 놈들이 바로 이리로 달려온다는것이였다. 말탄 놈이 하나, 조총을 멘 놈이 다섯, 그밖에는 칼과 창을 가진 놈이 스물하난가 둘- 합해서 27~28명쯤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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